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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꿈이 있는 한 내 삶은 다시 굽이쳐 흐를 겁니다

독립생활 준비하는 척수장애우 김정훈 씨

본문

3년 전 초여름만 해도 김정훈 씨는 20대 후반의 평범한 젊은이였다. 그해 봄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해 그해 가을부터는 모교의 시간강사로 취직이 예정되어 주변의 부러움을 사는 전도유망한 장래가 눈앞에 펼쳐져 있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젊은이가 여름방학을 이용해 한달 동안 독일 카톨릭재단 IBG(Internationale Begegnungs-gemeinschaft)를 통해 독일로 건너갔다. 독일에 있는 장애우시설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세계 각국의 문화를 경험하기 위해서였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당 30시간 가량 일하게 되는 이 프로그램에는 고된 육체적 노동이 포함되어 있어 주최측은 ‘참을성있고 열린 마음과 헌신적인 젊은이들이 자원봉사자로 참여해줄 것’을 전제조건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좀처럼 외국에 나갈 기회를 갖기 어려웠던 정훈 씨는 비행기 삯만 본인이 부담하면 된다는 조건에 우선 독일로 떠나기로 한다. 그런데 독일에 도착한지 3일만에 사고로 하반신 마비라는 운명의 태풍을 맞이한다.


악몽에서 깨어보니 악몽보다 더 참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날벼락같은 사고였다. 독일에 온 흥분이 채 가시지도 않은, 가장 싼 비행기를 이용하느라 오사카 공항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며 어렵게 독일에 온 여독도 풀리지 않은 7월 8일 저녁,   정훈 씨는 척추골의 내부에 위치한 중추신경의 절단으로 손가락과 하반신마비라는 불운의 사고를 당한다.

그가 참가한 캠프의 숙소가 체육관이었는데 그날이 마침 프랑스 월드컵 준결승 날이었다고 한다. 축구 경기에서 프랑스의 결승진출이 확정되자 프랑스에서 온 친구들은 숙소로 사용하고 있는 실내체육관에서 체조선수용 트람폴린(Trampolin)을 펼쳐놓고 신나게 뛰면서 놀았다. 그러면서 정훈 씨에게도 사진을 찍어줄테니 한번 뛰어보라고 권유했고, 이것이 정훈 씨의 운명을 바꿔놓는 사건의 발단이 됐다. 한번도 트람폴린을 해 보지 않았던 정훈 씨가 몇 번 뛰다가 잘못 떨어지면서 혼수상태에서 병원에 운송되었다.

“젊은 시절 누구나 그렇듯이 저도 더 나이가 들기 전에 넓은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어요. 그냥 미지의 세계를 접한다는 생각에 마냥 행복했지요. 그런데 나에게 이런 불행이 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어요? 누구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불행이 내게만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좀처럼 어두운 기색을 보이지 않던 정훈 씨의 낯빛에 그림자가 생긴다. 장애를 입고 나면 수도 없이 자신의 다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하게 된다. 지적(知的)동물인 인간의 호기심으로 그렇게 된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묻는 사람은 한 번이지만 그런 질문을 만나는 사람마다 받아 온 장애를 입은 당사자는 곤혹스럽기 그지 없을테고 나중에는 사고 당시 순간을 떠올리기조차 싫어질 그런 심정을 아는지라 사고 당시를 묻는 것엔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정훈 씨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뒤 기억을 더듬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3년의 세월에 익숙해져일까. 그저 담담하게 사고 순간을 떠올렸다.

“헬기를 타고 병원으로 이송되고 의사가 저에게 다가왔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요. 그리고 나서 의식을 잃은 것 같아요. 악몽을 수없이 반복해서 꾸었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른 채 눈을 떴는데 깨어보니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고 온몸에 주사바늘이 꽂혀 있더라구요. 어머니 얘기로는 한달 만에 의식을 되찾은 거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의사로부터 하반신마비라는 제 상태에 대해서 들었어요. 처음에 의사들은 회생불능을 선고했다고 하더군요. 이송이 가능하게 되면 한국으로 옮겨갈 것을 영사관측에 알렸다고도 들었어요. 지금은 그래도 운전을 할 수 있을 만큼 어느 정도 팔도 자유롭지만, 그때 상태로는 목 아래로는 마비될 거라고 했어요. 모든 것은 다 끝나버린 것 같았습니다. 손발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 육체가 곧 감옥이라니…. 사고 나기 오래 전부터 성당에 다녔었는데 독일에서 처음으로 고백성사를 했어요. 다리를 쓰는 게 어렵다면 손이라도 자유롭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지요.”

그 때 그의 나이는 스물 여덟이었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이가 한 달의 악몽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기다리는 것은 악몽보다 더욱 참혹한 현실이었으니 어머니와 독일 한인회 임자희 회장이 아니었다면 그는 거기서 삶의 희망을 놓아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독일 한인회의 도움으로 삶의 희망 찾아


정훈 씨의 사고 소식은 서울에 있는 어머니에게는 하늘이 무너질 일이었다. 정훈 씨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이혼한 어머니 강영애 씨는 혼자서 파출부, 공장 직공, 막일 등을 전전하며 두 아들을 키웠다. 이런 어머니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들이기 위해 정훈 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신문배달 등을 하고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학생들 괴외지도를 통해 학비와 용돈을 벌어 어머니의 큰 힘과 희망이 되어 왔다.

주최측인 IBG가 가입한 보험회사에서는 약관에 따라 한달 정도의 병원비만 부담해 주었다. 국내 IMF사태의 여파로 다니던 공장마저 문을 닫아 실직자가 된 어머니는 아들의 사고소식을 듣고 당장 비행기 삯을 마련하느라 여러 곳에 손을 벌려야 했을 정도라고 한다.

“독일에 자원봉사활동을 간다고 했을 때 비행기 표도 자기가 다 알아서 마련해서 갔거든요. 그것도 값이 싼 비행기 타고 간다면서 일본에서 하룻밤 쉬어 가는 비행기를 탔어요. 고생스럽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정훈이가 스스로 인생에 공부가 된다면서 원하니까 말릴 수도 없었지요. 도착한 지 3일 만에 전화가 왔더라구요. 너무 좋다면서 잘 지내고 있다고.  그런데 그 전화 받고 나서 다시 이틀 후에 아이가 다쳤는데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연락이 왔어요. 처음엔 믿기지 않더라구요. 말이 통하질 않으니 당장 간다고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우선은 일주일을 기다리기로 했어요. 하루가 천년 같더라구요. 자고 일어나면 꿈이 아닐까 해서 볼을 꼬집어보기도 하고 눈물로 시간을 보냈지요. 사고난 후 2주일만에 큰아들하고 독일에 갔는데 의식도 없이 산소호흡기를 끼고 누워있는 거예요. 하루에 병원비가 천만원이 들어간다는데 그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아이가 의식만 돌아오기를 기도했어요. 이주동안 꼬박 중환자실에 앉아서 하염없이 아이에게 얘기를 했어요. 무슨 얘기를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살아만 다오. 너하고 다시 눈만 마주칠 수 있다면 엄마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했지요.”

의식이 깨어난 뒤 가장 막막한 것은 치료비 문제였다. 정훈 씨가 사고를 당할 당시 어머니는 실직으로 집 한 칸 없이 친구 집을 전전하며 지내고 있었다.

더군다나 당시 살고 있는 4층 옥상방은 휠체어를 타고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어 더 큰 걱정이었다. 이런 형편에 당장 한달에 5만 1천마르크(우리 나라 돈으로 2억 7천만원 정도)나 되는 병원비는 커다란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근심을 거두어 준 것은 프랑크푸르트 한인회 부녀회장 놀틴 씨(한국명 임자희)였다.

정훈 씨의 이런 딱한 사정을 알게된 임자희 씨는 정훈 씨를 돕기 위한 모금운동을 벌이기 위해 헤센방송국에 연락해 정훈 씨를 취재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렇게 이루어진 방송에서 병원 측은 방송국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정훈 씨가 퇴원하는 날까지 치료비에 관여하지 않고 치료해 줄 것을 약속했다.

이와 동시에 독일 한인회에서는  교포들에게 모금운동에 참여해 줄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독일에서 6개월 치료받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정훈 씨의 병실을 찾았던 임자희 씨는 한국의 청년이 독일 땅에 와서, 그것도 여행도 아닌 장애우시설에 자원봉사를 왔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 너무도 안타깝기도 했지만 마치 전생에 인연이 있었던 것처럼 마음이 그렇게 끌리더라면서 몸이 회복되지도 않은 채 한국으로 돌려보낼 수 없다고 했다.

그의 헌신적인 관심과 사랑 덕분에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어 한국으로 돌아올 때 임자희 씨는 여기저기에 연락해 정훈 씨가 한국에 돌아가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휠체어와 침대, 멜라틴 등을 마련해 다시 활기찬 청년의 모습으로 힘차게 살아주기를 당부했다.


대학원 복학 앞두고 운전배우며 독립생활 준비


더 이상의 치료효과를 얻을 수 없던 그는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당시 국내에는 척수장애에 대한 프로그램을 갖춘 병원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의 말마따나 국내 병원에서는 그냥 요양차 두달간 있었다고 한다.

정훈 씨 국립재활원과 연대 세브란스 재활병원에서 3개월 씩 재활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재활시스템은 독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실망스러웠다.

“의사들조차 현대의학으로 척수손상은 회복이 될 수 없으니까 다친 부분에 대한 치료가 끝나면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보다는 사회로 복귀해서 하루 빨리 적응하는 것이 좋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우리 사회 여건상 그런 것들이 너무 암담하더라구요. 재활시스템 자체도 독일에서와는 너무 많이 달랐어요. 독일에서의 재활치료가 개인의 특성과 상태에 맞추어진 개인 맞춤 서비스라면 한국에서의 재활치료는 후천적인 장애를 갖게된 사람들의 단기간 생활적응훈련정도였어요. 물론 한국과 독일의 재활치료시스템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한국은 너무 많은 환자를 소수의 의사가 맡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겠지요. 의사의 개인적인 능력이라기보다는 사회의 재활치료에 대한 인식부족과 객관적인 상황들이 독일과 같은 좋은 서비스를 가로막는 것 같아요. 재활시스템보다는 병원생활 이후에 사회적으로 재활과정에서 어떤 지원이 이루어지느냐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에 있을 때나 한국에 와서도 그는 하루도 쉬지 않고 재활훈련에 돌입하게 된다. 병원에 있을 때에는 병원에서 운영하는 재활프로그램에 충실하면서 상체훈련을 거듭했다. 목 아래로는 마비상태가 지속될 것이라는 당초의 의사들의 소견과는 달리 운전까지 가능하게 된 것은 이런 그의 노력 덕분이다.

지금도 그의 집 거실에는 여러 가지 운동기구들이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운동을 열심히 한 것은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이기도했지만 내가 전에 계획했던 것들을 이루기 위해서는 앞으로 독립생활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장애우로서 불편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지금 주어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 저에겐 운동밖에 없었거든요.”

사고 당할 당시의 암담했던 상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호전된 정훈 씨에게 그래도 여전히 가장 불편한 것은 하반신마비로 대장과 방광의 기능이 약화되어 대소변을 관장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그런 문제 때문에 외출 역시 자유롭지 못했다. 그렇게 진취적인 성격을 가진 그도 휠체어에 앉게 되면서 바깥 외출이라고는 차를 가지고 찾아오는 친구들과 함께 두어 번 바람 쐰 것이 전부라는 말이 씁쓸하기만 한 것은 이런 이야기가 정훈 씨에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정훈 씨는 내년 봄에 대학원 복학을 앞두고 독립생활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바쁘다. 어머니는 앞으로도 아들의 곁에서 손발이 되길 원하지만 정훈 씨는 이제 어머니의 곁을 떠나 사고로 인해 그동안 멈춰 있었던 자신의 꿈에 재시동을 걸어보려 한다. 그러나 그동안 자신의 인생 역정 앞에 당당한 도전으로 응수해 온 패기있는 정훈 씨에게도 독립생활을 준비하는 것은 생각처럼 녹록치 않은 모양이다.

“독립생활을 하려면 우선 가장 급한 게 집을 구하는 문제인데 휠체어가 자유롭게 이동하려면 아무래도 아파트가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학교 근처에 있는 아파트를 알아보고 있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네요. 전세 비용이 만만치 않은 것도 걱정이지만 아파트라 해도 웬만큼 넓은 평수가 아니면 화장실이나 방문이 좁아서 휠제어로 출입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그 것도 걱정이구요. 독일같은 경우에는 장애우들이 아파트를 얻으면 국가에서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턱을 없애 준다던지 하는 집안 내부를 개조해주는 것이 보통이에요. 그것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장애우들이 생활하기 편하도록 편의시설이 갖추어진 다양한 평수의 집을 지어서 분양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독립생활을 위해 준비하는 또 한가지는 운전이다. 이동권 확보가 어려운 우리 현실 속에서 운전은 장애우들의 삶의 질을 변화시키는 커다란 요인이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기자가 찾아간 날도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한 정훈 씨는 주행연습에 한참이었다. 아직 팔 움직임이 완전히 자유롭지 않아 핸들을 돌리는 것이 수월하지 않은데다가 땡볕이 내리쬐는 날 차안에서 한나절동안 운전을 해서인지 집에 들어올 때는 입었던 티셔츠가 흠뻑 젖어 있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꿈에 다가서기 위한 준비작업이라 생각하면 기운이 난다는 정훈 씨. 그를 기운나게 하는 꿈이란 건 무얼까.

정훈 씨는 오래 전부터 세상을 진정으로 바꿀 수 있는 건 기술도 아니고, 제도도 아니고 결국 사람이라 생각해 왔다. 사고 전에도 아이들을 가르쳐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지금같아선 어려운 학생들과 함께 하는 야학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바꾸는 건강한 힘이 되고 싶다고 한다. 또 한가지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문단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문인으로 성장하고픈 원대한 꿈도 가지고 있다. 결국 그는 세상을 건강하게 변화시키는 중심에 서고 싶은 것이리라.

그가 독일에서 떠나오면서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교포신문에 기고했던 글은 그런 생각들을 잘 담아내고 있다

“어쩌면 갇힌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있으니, 그것은 구 만리 장천을 날아다니는 꿈을 키울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시인도 말했지요. 다리 잘린 도마뱀은 날개를 달고 다시 태어난다고. 그렇습니다. 꿈이 있는 한 길은 끝나지 않는 법입니다… 길이 있고 꿈이 있는 한, 삶은 어디서건 다시 굽이쳐 흐를 것임을 믿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정훈 씨가 앞으로 펼쳐질 인생이라는 모험 앞에서도 당찬 도전으로 응수하리라 생각되는 건 그에게서는 자신의 삶을, 더 나아가서는 세상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할 만큼의 건강한 에너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글·사진 이나라 기자(n2906@hanmail.net)


 

작성자이나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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