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발견한 생명, 그리고 삶 > 세상, 한 걸음


새롭게 발견한 생명, 그리고 삶

여성노동자의 대모, 조화순 목사

본문

70년대 동일방직 여성노동자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이후 여성운동과 통일운동의 큰 줄기로 「고난의 현장에서 사랑의 불꽃으로」 살아 온 조화순 목사. 60년대 이후 큰 파도가 일었던 한국사회의 중심에서 정의를 온몸으로 나타낸 그가 은퇴 후 자리잡은 곳은 강원도 봉평 태기산. 태기산이 두 팔 벌려 안온하게 감싸안은 언덕에 둥지를 튼 조화순 목사의 집을 찾아 노동자와 함께 한 지난 시간과 95년 은퇴 후 농사를 지으며 발견한 운동의 또 다른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농촌목회에서 산업선교의 현장으로


― 전부터 성함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내년을 준비하는 좋은 말씀을 듣고 싶은 마음에서 찾아 뵙게 되었습니다. 살아오신 이야기도 듣구요. 도시산업선교회(이하 도산)와 동일방직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제가 일했던 곳이 동일방직이라고 당시에는 제일 좋은 회사였어요. 1300명 정도로 인원도 많았구요. 소규모 공장이나 다른 회사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좋은 조건이었는데도, 저와 같이 처음 경험하는 사람들은 이런 데서 어떻게 일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악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아무 것도 아니고 더 처참한 상황이 많더라구요. 그러면서 제 삶이 변하기 시작했지요. 중요한 것은 자기가 변하는 것이에요.”


― 변했다는 것은 그전에는 다른 입장을 가지고 계셨다는 말씀이신가요?

“저도 어떤 면에서 가진 자니까 그전에는 가진 자 입장, 지식인의 입장, 기득권을 가진 교회의 입장이었지요. 그런 시각을 알게 모르게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세상 풍토가 사람을 그렇게 길들여 놓아서 자기도 모르는 동안에 정치지도자들이 원하는 그런 잣대를 우리들도 다 가지고 있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러니까 그런 잣대로 보면서 평가하고 인생을 살았다가 현장에서 정말 새로운 것을 많이 만나게 되었지요. 저의 일생을 변화시킨 가장 중요한 것이 현장경험이에요. 그 경험이 참 중요했어요. 그런데 원래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은 ‘뭐 그런 게 감동이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긴 하더군요.”


― 그 때가 60년대인데, 신학교를 졸업하시고 일부러 들어가신 건가요?

“동일방직에 들어간 것이 서른 네 살 목사 연수 받고 나서인데 그 때 처음 노동 경험을 한 거에요. 산업선교를 시작하기 위해서 훈련코스로 누구나 의무적으로 현장경험을 해야 했어요. ‘도산에서 일하려면 공장에 가서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이 조건이었거든요. 신앙노선이 바뀌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그런 조건을 달았던 것 같아요. 기존의 신학적 바탕, 사람을 보는 눈, 사회를 보는 눈. 이런 모든 시각을 바꾸게 하기 위해서 이론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 들어가게 했어요. 오명걸 목사, 조지 오글이라고 75년도에 추방당한 그 양반이 우리를 훈련시켰는데, 감리교에서는 60년대에 처음 시작한 거지요. 노동현장에 여자들이 많아지니까 시작하면서 여자 목사가 꼭 필요하다 해서 저를 자기네들 마음대로 선택한 거지요.

나는 농촌에서 사는 게 제 평생 소원이었어요. 계몽운동을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했지요.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준교사 자격시험을 보고 국민학교 교사가 됐어요. 재미있게 열심히 했는데, 가서 보니까 노름을 많이 하더라구요. 그전까지 부잣집 딸로 안이하게 아무 것도 모르고 세상을 살았어요. 노름을 많이 하는 게 농촌의 문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이것을 바꾸어야 된다. 의식을 바꾸어야 한다. 정신적인 것이 바로 서야 된다. 그래서 목사가 되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국민학교 선생을 햇수로 3년 하다가 신학교를 갔어요.

물론 어렸을 때부터 신앙생활을 했고, 신앙생활 때문에 농촌계몽활동을 하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 됐고, 그래서 농촌에 가서 선생을 하다가 생각을 바꿔서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거지요.”


― 어디에서 목회를 하셨습니까?

“원래 인천 출신이에요. 처음에는 덕적도에 있다가 달월에 있었지요. 지금은 시흥시인데 많이 발전했지만 아직 농사짓고 그래요. 도산에 있던 기간을 제외하고 여기 오기 전까지 달월에 있었어요. 농촌에서 목회하고 있는데 저를 찾아 온 거에요. 여자목사가 별로 없었을 때였으니까, 신학교에 가서 그 해에 안수 받은 여자 목사 중에 가장 젊은 사람이 누군지 물어서 저를 찾아 왔지요.”


일하는 예수를 발견한 6개월의 현장생활


― 공장에서 일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시다면요? 노동자들이 그때 많이 맞기도 하고 졸지 않으려고 약도 먹고 했다는 것을 저희도 들어서 알고 있기는 합니다만.

“우리 다 알지요? 거기는 광목을 짜는 곳이었는데요. 솜에서 실을 빼내서 물레에서 돌려서 나중에 짜는 것까지 해요. 그 일에는 온도가 그렇게 중요하대요. 겨울이나 여름이나 같은 온도에요. 굉장히 더워요. 그리고 먼지가 많아서 눈을 뜰 수가 없어요. 눈을 뜨면 속눈썹에 하얀 솜먼지가 붙어서 눈 비비다가 일을 못 하겠더라구요. 공기가 항상 습하구요. 그리고 삼교대라서 식사가 아주 불규칙해요. 우리가 싸워서 고쳐놓고 나왔지만요. 그래서 위장병과 결핵이 많았어요. 제일 가슴이 아파서 같이 울었던 것이 사람들이 목욕탕에 못 가. 목욕탕에 가면 막 긁어서 헐어가지고 사람들이 문둥이냐면서 못 들어오게 한대. 그 이야기 듣고 같이 엉엉 울었어요. 좋은 회사였는데도 그랬어요.

공장에 가기 전에 오명걸 목사가 자기 훈련을 하라고 하면서 건방진 생각을 다 버리라고 해요. 그놈의 목사들 아주 꼴 보기도 싫다면서 목사라는 건방진 생각하지 말라는 거에요. 목사들은 마치 자기가 예수를 피켓 들고 들어간다고 착각을 한다면서, 당신들이 피켓 들고 가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그 안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고 함께 계신 거지. 다만 그 사람들이 모르는 건데, 당신들도 그것을 알고 현장의 예수를 찾아오라는 거에요.

그 당시 굉장히 보수적인 입장이라 전도를 하는 것이 나의 사명인데 전도할 생각을 하지 말고 어떻게 내가 노동자가 될까 이런 것들을 생각하라고 하니까 참 충격이었지요.”


노동현장에서 깨달은 성육신의 의미


동일방직에 들어간 첫 날부터 ‘야’. ‘이거 해’... 생전 들어보지 못한 말들을 듣잖아요 하루는 다른 부서에 가서 일을 하는데 무의식중에 전도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는 거에요. 전도를 해야 하니까 사람을 사귀어야 하잖아요. 일하면서 ‘몇 살이야? 몇 년 됐어? 집이 어디야?’ 무의식중에 또 물었어요. 그런데 반장이 막 호루라기를 불어요. 기겁을 해서 설마 나 때문에 그러겠냐 하는 생각은 못 하고 어떻게 나하고 눈이 딱 마주쳤어요. 그러더니 반장이 ‘저 여자!’소리를 지르더니 나 있는 데로 오는 거에요.

그 전에 이야기했다 망신당한 경험이 한번 있었어요. 이야기했다가 ‘왜 말이 많아? 근무시간에 근무태도가 틀려먹었어.’ 야단을 맞았지요. 그 다음부터는 말도 안 하고 열심히 일만 했거든요. 그런데 ‘저 여자!’하고 뛰어 온단 말이야. 깜짝 놀라서 ‘설마 나는 말도 안하고 일만 하는데 왜 그럴까, 뭘 가지고 야단을 치려고 그러나’했더니, 와서 내 어깨를 잡고 흔들면서 근무태도가 틀렸다는 거에요. 똑바로 서서 일을 해야 하는데 힘이 드니까 작업대에 몸을 기댔던 거지요.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있는 대로 당했어요. 속으로 얼마나 그 여자를 욕했는지 몰라요.

그러는 순간에 별안간에 무슨 생각이 드냐면 거창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음성이지요. ‘너가 목사냐? 저 사람은 반장이니까 근무태도가 틀리거나 일을 잘 하는지를 체크하는 것이 그 사람의 의무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은 했는데 너는 왜 그 사람을 비난하고 수도 없이 죽이느냐? 그러고도 너가 목사냐? 아직도 멀었다’ 하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일초 몇 초, 찰나에 일어났지요.

성육신의 의미를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어요. 목사가 노동자가 됐다고 하는 게 무엇이 대단한 것이라고. 반장이 야단친 것도 그 사람 입장에서는 당연히 할 일을 한 건데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 사람을 욕하고 비난하는 내 태도, 이러면서 하나님의 종이고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설교를 하는 내 모습과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갖은 천대를 받는 모습들이 겹쳐지면서 감당할 수가 없어 엉엉 울었어요. 그때 하나님 앞에 나도 모르게 ‘하나님, 용서하십시오. 제가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일생동안 이 자리를 떠나지 않겠습니다.’ 약속을 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민주화운동도 한 거고. 노동운동도 한 거고. 여성운동도 한 거지요. 그 때의 느낌, 그 사상, 그 철학을 가지고 지금까지 사는 거에요. ‘소외된 사람들과 일생을 같이 살아야 한다.’ 저는 이것이 예수의 삶이고 그것을 본받는 것이 목회자의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살았어요.”


내 몸이 어디 있는가에 따라 신학과 삶이 달라집니다


“눈이 바뀌어지고 제일 먼저 달라진 게 무엇이냐면 말이 달라지는 거에요. 아무래도 지식인의 말로 습관이 되어 있잖아요. 노동자들과 사귀려면 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안돼요. 오지 않거든요. 지금도 눈에 선해요. 한 사람이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당신은 목사여서 저기 하늘에 있고, 우리는 여기 밑바닥 가운데서 저 지옥같은 데서 사는 인생인데 당신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고 하더군요. 당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겠대요. 충격이었어요. 그때부터 말을 바꾸어야겠다. 언어가 달라져요. 지금도 지식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할 때 보면 화가 나. 간단히 할 수 있는 말을 왜 이렇게 어렵게 해야 하나. 무슨 이야기인 줄은 알아야 하지만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 다음에는 눈이 달라지더라구요. 잘 생겨야 하고 집도 근사해야 되고...눈에 보이는 크고 아름다운 모든 가치에 치중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것들이 바뀌는 거에요. 거꾸로 근사한 집만 보면 ‘저 죽일 놈들, 노동자들 등쳐서 저렇게 집을 지어?’그렇게만 보여요. 실제로 알고 보면 다 그런 거잖아요. 가난한 사람들을 기묘하게 이용해서 잘 사는 거지요.”


― 어떻게 보면 비판적으로만 보시게 된 거네요?

“비판적으로 많이 보게 되지요. 그러던 것이 상황이 바뀌어지니까 사람이 달라져요. 그래서 저의 신학을 ‘발의 신학’이라고 이야기해요. 모두 경험이지요. 내 몸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신학과 삶이 달라져요.

진리는 하난데, 표현하는 방법이나 삶의 내용이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거지요. 어떤 때는 정의를 외쳐야 할 때가 있고, 그렇다고 정의만 외치는 것은 아니잖아요. 사랑이 더 중요할 때가 있어요. 상황과 시대적인 요구에 따라서 어떤 것에 대한 비중이 조금 더 치우쳐야 할 때가 있어요. 그때 나는 독재는 타도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법이 바꾸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구조적인 악이 사람들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을 했구요. 실제로도 그렇고 노동운동을 하다 보면 기업주는 어디로 쑥 들어가고 경찰, 검찰들과 부딪치게 되요. 그러니까 이것은 정치적인 싸움이더라구. 이론이 아니잖아요. 정치적인 싸움을 하다 보니까 다들 빨갱이라고 그러는 거야. 통일의 문제가 걸려요. 나는 불의를 위해 싸웠는데 빨갱이라서 그렇대. 왜 이런 말이 나오나 하고 보니까 우리 나라가 분단되어 그래. 그러니까 통일운동도 겸해야 되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지요. 그런 삶의 과정 속에서 남녀차별을 운동권에서도 받고 사방에서 받아요. 아! 여성운동도 해야 하는구나. 이런 과정에서 정치의식도 생기고 사회의식도 생겼지요.”


자신을 돌아보는 성숙한 운동이어야


― 여성운동이 남녀평등을 넘어서는 운동이어야 하는데 거기에 매몰된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것을 어느 기사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남녀평등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심성도 변화해야 한다는 이야기지요. 저도 그런  부분에 대해 생각을 많이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우리들 특별히 지식인인 경우, 남성의 속성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태도는 비판해야지요. 비판하면서 나는 그런 권위적인 모습, 권위적인 사고를 갖고 있지 않은가? 남을 지배하려고 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함께 돌아보자는 것이지요.

비판을 해야지요. 그런 때가 있어야 하고 한 단계 나아가 ‘아하! 나도 똑같은 부류였구나’ 그러면서 자신을 보는 단계가 올 때 성숙한 운동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10년 넘게 했어요. 지금은 무엇을 할 수 있어야 하는가 하면 요사이 말로 ‘영성’이기도 한데, 그런 가부장적인 태도 때문에 내 자신이 피해를 당하는데 피해를 본 나도 남을, 같은 여성을 피해를 줘요. 그런 내 모습을 발견하는 거에요. 이제는 우리끼리는 가부장제 이런 이야기를 지겹게 많이 했으니까, 우리들의 모습은 좀 어떤가? 정말 하나님이 원하는 여성인가, 인간인가를 보자는 거지요.

보세요. 사람들이 운동권에 대해서 실망한 것이 너무 많잖아요. 운동권 남자들, 여성 입장에서 봤을 때 여전히 여성을 무시하고 자기들밖에 모르고 돈과 권력밖에 모르는 경우도 드물지 않잖아요? 인간에 대한 실망으로 운동권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 의외로 많더군요. 불의와 열심히 싸웠는데, 싸우는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배려가 없고 자기중심적이고 의논도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모습들을 경험하면서 운동에 대해 실망하게 되었지요. 운동을 하는 우리들이 정작 우리가 거부하려는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구나를 보게 되는 거지요.

그러면서 초점이 다시 인간에 맞추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치열하게 산 것에 대해 한번도 후회해 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그것만이 최고라는 생각은 극복해야지요. 그 모든 과정을 통해 내가 어떻게 성숙해지는지, 변화하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볼 수 있게 되면 그것이 최고의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훈련이 필요하지요. 끊임없는 연습으로 우리가 변화할 때, 정말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이제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의 평등을 이야기할 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으니 이제 나의 삶의 자리가 어디로 가야 되는가?를 생각하면서 다시 농촌을 떠올리게 됐지요. 운동적인 차원이겠지만 땅의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것이 생명운동이지요. 최종적으로 땅을 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제가 다시 농촌으로 오고 농사를 짓게 된 거지요.

여기 와서 신앙이 또 한번 변화를 하게 되지요. 여기는 자연이잖아요? 자연과 함께 있으니 별안간에 마음이 착해져요. 순해지구요. 바깥을 보다가 이제 나를 보기 시작하는 거지요. 그전에 했던 일들을 돌아보게 되요. ‘그때 나를 보는 마음을 겸했더라면 더 멋있게 했을걸.’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그 상황에서는 나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어요. 핑계를 댄다고 하면요. 그런데 지금은 여기에서 명상도 하고 흙을 만져요. 씨앗을 뿌리고 그것이 자라요. 이게 모두 생명이지요. 얼마나 신비스럽고 감동스럽다구요. 제가 이러면서 또 달라져요. 예전에는 가난한 사람과 가진 자의 평등, 남녀평등을 이야기했는데, 이제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의 평등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농사를 지으면서 생명을 가진 것들이 하나구나. 그래서 우주는 서로 돕고 협력하는 하나의 생명체라는 사실을 몸으로 느낌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 미리 흙으로 오신 거네요.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시다면요.

“법적으로는 65세까지 목회를 해요. 그런데 저는 62세까지 목회를 하고, 은퇴식을 65세 되는 날 했는데, 그날 제가 빨리 은퇴를 하면 어떻겠냐고 사람들에게 제안을 했어요. 제가 해 보니 생각지도 않은 소득인데 인생을 두 번 사는 셈이에요. 60세까지 하나님의 종으로 어떻게 후회 없이 살 것인가를 고민했다면, 지금은 그냥 본래의 조화순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요. 생각해 보니 그것이 춤이었어요. 어렸을 때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참 좋아했거든요. 춤을 추려고 보니 교회에서 죄라고 해서 지금까지 숨겨 놓았었는데, 이제는 춤을 추고 싶어요. 이렇게 하나님이 나에게 준 특별한 자질을 발견하며 사니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 목사님의 춤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늙었다고 생각한다면 새로운 것을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겠지요. 그것이 아니라 무엇을 할까, 어떻게 살까를 고민하면서 열려진 마음을 가지고 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닫지 말라는 거지요. 늙었다는 것은 닫는 것이고 닫혀지는 것이지요. 죽을 때까지 부활을 믿고 꿈꾸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뭐든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잖아요? 잘못된 것은 부인하고 거절하고, 새로운 것은 받아들이고요. 매일 세상이 달라지고 새로운 가치관이 오니까,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이러면서 열려진 마음을 가지고 살았으면 해요.”

인터뷰 내내 머리 속을 맴돈 것은 모든 생명은 고유의 향내가 있고 항상 변화한다는, 잊고 지내기 쉬운 자연의 섭리였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가을 끝자락, 잎을 떨군 나무가 지금은 죽음을 예감하듯 서 있지만 겨우내 생명의 기운을 모았다가 다음 해 봄, 잎과 꽃을 피우며 환희로 우리를 찾아오듯이 말이다.

고정된 것은 죽은 것이다. 조화순 목사가 지나 온 순간 순간에 충실한 삶의 여정을 만나면서 기자는 만나는 사람이며 일들을 나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규정하는 바람에 그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선물할 기회를 막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체면, 눈치 재고 따지느라 실천하지 않는 지식인과 달리, 눈·귀가 열려 알게 된 것들을 실천하는 노동자를 존경한다는 조화순 목사의 소원은 묘비에 ‘평생을 노동자와 함께 살다 가다’라고 새기는 것이라고 한다. 노동자들과 함께 한 삶을 든든한 자양분 삼아 이제는 추수가 다 끝난 들판에 넉넉한 웃음으로 서 있는 조화순 목사에게서 생명이 있는 모든 것과 만나 더욱 짙어진 향내를 맡았다.


대담 김정열 편집주간/ 정리, 사진 이수지 기자


 

작성자이수지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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