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어요 > 세상, 한 걸음


자식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어요

지체장애우 서인숙씨

본문

농성장에서 만난 여장부 
서인순 씨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겨울 한 농성장에서였다.
  몇 해 전부터 한국지체장애인협회(이하 지장협) 중앙회 회장이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의혹이 계속 언론에 보도되면서 그녀를 포함한 대한성인장애인연합회(이하 성장협) 소속 회원들과 지장협 회원 이십여 명이 회장의 퇴진을 요구하기 위해 지장협 중앙회 사물에 항의 방문 온 것이다.
  그런데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지장협 회원 한 명이 회장의 퇴진을 요구하러 온 성장협과 지장협 회원들을 향해 가스총을 발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순간 가스총을 맞은 회원은 쓰러지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이 때 서인순 씨가 앞으로 나온 것이다.
  “누가 옳고 그른 것을 떠나서 같은 장애우한테 그것도 무방비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가스총을 쏘다니 이러고도 당신네들이 4백만 장애우를 대표하는 단체라고 할 수 있냐”며 그녀는 가해자쪽을 향해 무섭게 다그쳤다. ‘같은 장애우’라는 그녀의 말을 거기 모인 사람들, 특히 장애우들에게 꽤 호소력 있게 울려 퍼졌다. 온통 아수라장이었던 농성장이 순간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사태 진압을 위해 출동한 경찰이 현장에 도착하자 지장협과 성장협 회원들은 하나 둘 농성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구경하러 모인 사람들도 어느 새 모두 사라졌다. 그러나 그녀는 마지막까지 현장에 남아 가스총을 발사한 가해자를 가려내 가스총을 맞은 사람과 함께 정식으로 고소를 한 후 돌아갔다. 고소과정에서 그녀가 서장협 인천지부 회장 ‘서인순’ 씨라는 사실과 가스총을 쏜 사람이 지장협 포천지회 부회장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건의 발단이면서 그날 끝내 얼굴을 내밀지 않은 지장협 중앙회장과 위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서인순 씨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겨울 한 농성장에서였다.  몇 해 전부터 한국지체장애인협회(이하 지장협) 중앙회 회장이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의혹이 계속 언론에 보도되면서 그녀를 포함한 대한성인장애인연합회(이하 성장협) 소속 회원들과 지장협 회원 이십여 명이 회장의 퇴진을 요구하기 위해 지장협 중앙회 사물에 항의 방문 온 것이다.  그런데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지장협 회원 한 명이 회장의 퇴진을 요구하러 온 성장협과 지장협 회원들을 향해 가스총을 발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순간 가스총을 맞은 회원은 쓰러지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이 때 서인순 씨가 앞으로 나온 것이다.  “누가 옳고 그른 것을 떠나서 같은 장애우한테 그것도 무방비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가스총을 쏘다니 이러고도 당신네들이 4백만 장애우를 대표하는 단체라고 할 수 있냐”며 그녀는 가해자쪽을 향해 무섭게 다그쳤다. ‘같은 장애우’라는 그녀의 말을 거기 모인 사람들, 특히 장애우들에게 꽤 호소력 있게 울려 퍼졌다. 온통 아수라장이었던 농성장이 순간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사태 진압을 위해 출동한 경찰이 현장에 도착하자 지장협과 성장협 회원들은 하나 둘 농성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구경하러 모인 사람들도 어느 새 모두 사라졌다. 그러나 그녀는 마지막까지 현장에 남아 가스총을 발사한 가해자를 가려내 가스총을 맞은 사람과 함께 정식으로 고소를 한 후 돌아갔다. 고소과정에서 그녀가 서장협 인천지부 회장 ‘서인순’ 씨라는 사실과 가스총을 쏜 사람이 지장협 포천지회 부회장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건의 발단이면서 그날 끝내 얼굴을 내밀지 않은 지장협 중앙회장과 위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서인순(58 ∙ 지체장애 일급) 씨는 전주시 고산동에서 꽤 잘사는 집에서 막내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녀의 유년시절은 비참하기만 했다.
  “어려서 소아마비에 걸린 후 저는 걷지도 못하고 거의 기어다녔어요. 그런 제가 부끄러웠는지 부모님이 절 부끄러워하시니까 오빠들도 저랑 놀아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늘 혼자 놀아야 했어요.”
  그녀가 열두 살이 되던 해 그녀의 아버지는 당뇨로 어머니는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열아홉 살이었던 큰 오빠는 어린 동생들을 남겨두고 혼자 군에 입대해 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인순 씨는 외할아버지에 의해 전주역 어딘가에 버려졌다.
  열두살 소녀에게 벌어진 이 모든 일은 그저 참혹할 따름인데 다행히 세상마저 그녀를 버리지는 않았다. 길을 가던 한 아저씨가 그녀를 발견하고 경찰서에 신고를 해 그녀는 삼육병원으로 옮겨져 다리수술을 받기까지 했다.
  다리 수술하기까지 모든 게 너무 정신없이 지나가서 그녀는 가족이 자신을 버렸다는 것조차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수술이 끝나고 혼자 병원에 누워 있자니 어린 마음에도 서글픈 생각들이 밀려왔다. 특히 옆에 입원한 아이들은 부모가 맛있는 음식을 싸 가지고 문병을 와서 어리광도 부리는데 그녀는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이 매일 창 밖만 바라보았다. 부모님에 대한 따스한 정은 어려서부터 많이 느껴보지 못한 것이어서 오히려 참을 수 있었지만 맛있는 음식을 보면 먹고 싶은 자연스런 생리현상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선생님 몰래 십일조함에서 돈 이백 원을 훔쳐서 사탕을 사러 가다 들켜서 크게 혼이 난 적이 있는데 그 때 선생님이 어찌나 심하게 혼을 냈던지 그녀는 그 이후 다시는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삼육재활원에서의 생활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다리 수술 후, 목발을 짚고 걸을 수 있게 되었고 몸이 좋아지면서 부설 학교에서 공부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열여덟 살이 되면서 재활원을 나와야 했다. 열여덟 살이 되면 어느 정도 독립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에 더 이상 재활원에서 생활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달리 갈 곳이 없었던 서인순 씨는 동인천에 있는 다른 성인직업재활원을 찾아갔다. 그곳에서는 기술도 배울 수 있고 숙식도 가능하다는 소리를 다른 원생들을 통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기술을 배우면 다른 지원자를 위해 나가야 하기 때문에 서인순씨는 3개월 동안 속성으로 재봉 기술을 배우고 서울로 올라왔다.
  이제 더 이상 갈 데가 없으니 배운 기술로 취직을 해야 하는데 가는 곳마다 계속 퇴짜를 맞았다. 장애인의무고용촉진법이 있는 지금도 장애우들이 취업하는 게 쉽지 않은데 법이 만들어지기 훨씬 전이 칠십년대에는 장애우들의 취업이 더욱 어려웠다.
  그래도 어려서부터 혼자 생활을 해왔기에 당찬 면이 있는 그녀는 어느 날 ‘직원구함’이라는 벽보를 보고 영등포에 있는 한 양말공장을 찾아갔다. 이 곳 역시 그녀를 보자마자 거절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 곳 아니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각오로 사장님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일단 하루만 일으 시켜보세요. 일을 해보고 다른 사람만큼 일을 못하면 채용 안 하셔도 좋아요. 그렇지만 제가 다른 사람만큼 일을 하면 채용해 주세요.” 그렇게 해서 그녀는 가까스로 사장님을 설득시키고 하루동안 양말 짝을 맞추고 그 수를 세는 일을 했다. 아무리 단순한 일이어도 처음 하는 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만큼 하기는 어려웠지만 열심히 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에 남들 점심 먹을 때도 쉬지 않고 일을 해 그녀는 가까스로 취직을 했다.

 

 

아들을 키우기 위해 시작한 앵벌이일


  그러나 어렵게 취직한 회사는 곧 부도가 나서 문을 닫고 말았다. 다시 일자리를 찾아 서울시내를 돌아다니던 그녀는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 한 음식점에 들어갔다. 그녀는 거기서 운명의 남자를 만나게 된다.
  몹시 지켜 보이는 목발을 짚은 그녀에게 뭔가 사연이 있을 것같아 보였는지 이태호(가명) 씨는 그녀가 시킨 음식을 다 먹을 때가지 찬찬히 지켜보다가 말을 걸었다. 아무도 그녀에 대해 묻지 않았는데 웬 낯선 남자가 그녀에 대해 묻자 처음엔 경계하는 태세였지만 유난히 친절한 남자에게 그녀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 후 점심 때마다 그 식당을 찾게 됐고 어느 날인가부터 그를 ‘오빠’라고 부르게 됐다. 누군가로부터 제대로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인순 씨는 태호 씨의 친절함을 사랑이라고 여겼고 태호 씨도 어려운 환경에서 꿋꿋하게 자란 인순 씨가 마음에 들어 두 사람은 결혼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두 사림이 결혼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흔히 그렇듯 비장애우인 태호 씨 부모님의 반대가 대단했다. 그래도 태호 씨의 의지가 확고해서 두사람은 결혼을 강행했다. 곧 사내아이도 태어났다. 이름은 ‘재헌’이라고 지었다. 이 때가 인순 씨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지금 서인순 씨는 태호 씨와 함께 살지 않는다. 십여 년 전 성격차이로 헤어졌다고 한다. 그 부분에 대해 그녀는 더 이상 구체적인 얘기를 하지 않아 잘은 모르지만 분명한 건 두 사람 모두 재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태호 씨와 헤어지면서 인순 씨는 앵벌이를 시작했다. 당신 열한 살이었던 아들 재헌 씨가 ‘엄마랑 같이 살겠다’고 해서 인순씨가 재헌 씨를 맡기로 한 것이다. 그 때부터 인순 씨에게 재헌씨는 살아야 하는 단 한 가지 이유였다. 그리고 이 때부터 그녀는 앵벌이로 나서게 된다.
  “마흔을 넘긴 저를 받아 줄 곳이 어딨겠어요. 그렇다고 누구에게 돈을 꿀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고민 끝에 앵벌이를 하기로 결심했죠” 그녀는 인천 월미도에서 다리에 튜브를 차고 리어카를 끌면서 길바닥에 앉아서 노래를 불렀다. 처음에는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목소리가 자꾸 기어들어 갔지만 그 때마다 재헌 씨를 생각하면서 두 눈을 질끈 감고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해서 인순 씨는 하루에 이만 원에서 삼만 원을 벌었다. 그 중 만 원은 그녀를 월미도까지 태워다 준 운전기사에게 수고비로 주기 때문에 그녀의 하루 순수입은 이만 원 정도였다. 그러나 그 돈을 벌기까지 그녀는 온갖 수모를 다 겪어야만 했다.
  “음악 소리가 조금만 커도 주변 상인들이 음악소리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고 다른 곳으로 가라 하고, 복잡한 길을 막는다며 리어카를 발로 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침부터 재수 없게 장애우를 만났다며 제 앞에서 침을 뱉는 사람도 있었어요.” 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서인순 씨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부모님이 그녀를 버렸을 때도, 남편과 헤어졌을 때를 회상할 때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그녀가 그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만큼 앵벌이를 하면서 힘들고 달팠던 일이 많았던 것일게다.

 

 

뒤치닥 거리 도맡아 하는 엄마 같은 회장님


  성장협 인천지부에는 서인순 씨와 같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인천지부 회원 사십 명 중 다섯 명이 아직도 앵벌이를 하고 있고 나머지 회원들은 대부분 노점을 한다. 물론 그런 일마저도 못하는 경우도 있다.
  서인순 씨에 따르면 회원 중 예순이 훨씬 넘은 한 할아버지는 부인과 다 자란 아들이 둘이나 있지만 아들들이 모두 실업자이고 부인은 기도원에 들어가 할아버지는 점심을 먹으러 교회에 나간다고 한다. 할아버지 사정이 딱해 회원들이 음료수라도 사드시라고 돈을 쥐어 드리면 “그 돈으로 콩나물을 사서 반츤을 만들어 먹는다”고 도로 가져 가신단다.
  “정부에서는 장애우에게 뭐도 해준다 뭐도 해준다 하지만정책과 현실은 차이가 많아요.”
  아들이 둘이나 있다고 영세민에서도 제외됐지만 점심도 굶는 할아버지는 있는가 하면 장애우가 자영업을 할 수 있도록 저리로 융자를 해 준다고 하지만 보증인이 있어야 말이죠. 가진 거하나 없는 장애우에게 누가 보증을 서주겠어요. 정말 장애우를 위한다면 나라에서 먼저 장애우들을 믿고 보증을 서 줘야지요.“
  성장협은 회원들만 가난한 게 아니다. 인천지부 사무실도 실은 무허가 땅에 콘테이너 박스를 놓고 사용할 정도로 어렵다. 땅주인은 계속 나가라고 재촉을 하지만 당장 갈 곳이 없기 때문에 그냥 버티고 있는 것이다.
  다른 장애우단체들은 돈이 있으니까 사단법인으로 등록 신청을 해 최소한 사무실을 꾸릴 여유라도 있지만 성장협은 그마저도 안 된다. 회원들이 내는 회비는 겨우 전기세, 수도세를 내는 정도여서 법인신청을 하는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서인순 씨는 이 가난한 단체의 회장이다. 지난 해 회원들이 뽑아 주었다. 회장이라고 해서 월급이 있는 것도 아니고 노점을 하는데 좀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순전히 봉사직이다. 일을 했는데 돈을 받지 못하는 회원이 있으면 함께 찾아가서 해결해 주고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돈이 없어 집에 내려가지 못하는 회원이 있으면 돈을 꿔서라도 챙겨주는 마치 한 집안의 뒤치닥 거리를 다 하는 엄마같은 역할이다. 그래서인지 회원들은 틈만 나면 사무실에 들러 그날 있었던 일을 서인순 회장에게 얘기하고 위로받고 쉬다가 가곤 했다.
  그녀가 이렇게 인천지부의 회장이 되어 회원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들 재헌 씨의 역할이 컸다. 앵벌이를 하면서 너무 심하게 고생을 해서인지 오륙 년 전부터 서인순 씨는 뇌동맥경화증으로 조금만 신경을 쓰면 머리가 아프고 손에 쥐가 나서 손가락이 붙는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양쪽손이 모두 다 붙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도 있었다.
  당시 재헌 씨는 고등학생이었는데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신 걸 알고 그냥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고등학교 2학년 때 학업을 포기하고 주유소에 취직을 했다. 그러나 하루 종일 바깥에서 생활을 하다 보면 갑자기 마비가 오는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돌볼 수가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주유소 일을 그만 두고 지난 해부터 동암역 근처에 노점을 차려 도너츠와 노래 테이프를 판매하고 있다. 노점이란 게 언제 단속반이 나와 물건을 다 쓸어갈지 모르는, 늘 마음을 졸여야 하는 일인데도 재헌 씨는 어머니와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보다 안심이 된다고 말한다.
  재헌 씨는 여자 친구를 사귈 때도 어머니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는다. 여자 친구를 소개받으러 나간 자리에서 처음부터 어머니가 장애우라는 사실을 밝히고 앞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한다고 얘기했다. 그 쪽에서 그래도 좋다고 하면 그 다음에 어머니에게 소개시키고 사귀단다.
  재헌 씨는 현재 한 살 연상인 직업이 간호사인 아가씨와 사귀고 있다. 재헌 씨가 장사하느라 바빠 제대로 데이트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그녀는 퇴근 후에 재헌 씨가 일하는 곳에 들러 재헌 씨의 일을 돕는다. 또 서인순 씨가 다른 노점상인을 만나는걸 도와주기도 한다. 서인순 씨는 동암지역 노점상 상조회 부회장도 맡고 있다. 그러면 다른 노점상인들은 재헌씨 여자 친구를 딸로 알고는 ‘어쩌면 그렇게 상냥하고 착한 딸을 두었냐’냐 다들 한마디씩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서인순 씨는 이렇게 반듯하게 자라 준 아들이 고맙기만 하다. 그러나 재헌 씨는 “어려운 환경에도 남을 돕고 언제나 남 앞에 떳떳하게 사는 어머니를 존경한다”며 어머니 같은 여성과 결혼 하겠다고 말한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다.
  기자는 서인순 씨를 네 번 만났다. 농성장에서 처음 만난 이후 다른 장애관련 행사장에서 두 번 보고 이번에 취재를 하면서 다시 만났는데 처음 농성장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느꼈던 카리스마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우리 나라에 있는 많은 장애우단체 중에서 그 어느 단체장이 자식과 회원 모두에게 사랑과 존경을 동시에 받고 있는지 묻고 싶어진다.

 

글/노윤미    사진 /김학리 기자

작성자노윤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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