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개의 만두가 가져올 지난 날의 행복 > 세상, 한 걸음


백만개의 만두가 가져올 지난 날의 행복

시각장애우 김정숙 씨

본문

  화제 속에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얼마 전 막을 내린 일일연속극 ‘보고 또 보고’에는 만두가 소재로 자주 등장했다. 만두를 즐겨, 자주 먹고 싶어 하는 시어머니와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라 내심 만들기를 귀찮고 힘들어하는 며느리 사이에서 벌어지는 은근한 신경전은 이들 두 사람의 갈등을 보다 설득력있게 설명해준 소재기도 했다.


  사실 며느리 입장에서 보면 그의 항변이 일견 이해되기도 한다. 밀가루를 너무 얇게도 아니고 두껍게도 아닌 적당한 두께가 나올 때까지 밀어 둥근 틀로 찍어내는 만두피 만다는 과정도 과정이지만 갖은 재료를 얇게 썰고 재료들 사이사이에 있는 일체의 물기를 짜낸 후 다시 먹음직하게 하나 하나 손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바로 만두다. 손이 많이 가서 한 사람이 작정하고 만들기는 너무 번거롭고, 명절 때나 온 가족이 둘러앉아 만들곤 하는 음식인 것이다.

 

 

만두 만들기가 취미라는 여인


  그런데 하루에 약 칠팔백개의 만두를 만들어 그 만두를 이웃 주민들과 나누는 것이 생활의 유일한 즐거움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다름 아닌 시각장애우라고 하면 쉽게 믿길 사람이 있을까.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의 한 농가에 ‘한마음애집’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오갈데 없는 노인들과 장애우 일곱명, 지체장애우인 남편과 정신지체인인 아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김정숙(58) 씨는 이야기는 일단 만두로 시작된다.
  “그냥 만두는 만드는게 취미에요”라는 김씨. 그러나 그의 시력은 희미하게 빛만 보일 정도일 뿐이다. 그를 만나 처음 눈망울만 흘낏 본다면 그 말도 믿어지지 않지만 잠시만 그와 대화를 하다 보면 흘낏 본다면 그 말도 믿어지지 않지만 잠시만 그와 대화를 하다 보면 그 눈망울이 초점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만두를 만드는 것을 본 어떤 사람은 “다 보이면서 거짓말 하는 것 아니냐”고 면박을 주더란다. 그런 사람도 밥상위의 반찬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장애사실을 미더라도.
  알고 보니 그에게 만두란 이를테면 젊은이들에게 있어서의 종이학이나 학알 같은 존재였다. 무언가를 기원하며 하나씩 만들어가면 바라는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그것을 접는 자신에게나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그 무엇, 그런데 행운을 가져다주는 숫자가 종이학의 경우 천개로 일컬어진다면 그는 ‘백만’이라는 숫자에 주술같은 기원을 한다.
  “지금까지는 한 이십만개 저도 만두를 빚었어요. 한달에 만오천개 정도 하니까, 올 연내에는 삼십만개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렇게 하나 하나 숫자가 더해져 백만개가 되면, 그 때는 동생들도 다시 다 만나서 예전과 같이 오순도순 살 수 있겠지, 이렇게 열심히 하면 다시 예전과 같이 살아갈 수 있는 자리가 만들지겠지, 하면서.

 


놀랍기만 한 그이의 과거


  나이를 조금 지긋하게 먹은 남자분들은 - 옷차림이 허름할수록 어쩌면 더 - 소주 몇 잔이 들어가면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라는 말로 시작되는 일장의 스토리가 풀어져 나올 때가 있다.
  그래, 사연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 김정숙 씨의 경우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지난 날의 사연과 그 내용이 듣는 기자로서도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제가요, 그래도 한 때는 남대문시장에서 ‘피닉스’하면 알아주는 본염공장, 거기 사장이었어요. 영화배우 우연정, 고은아, 김지미 이런 사람들이 시상식장에 제가 만든 옷 입고 나갈 정도로 제 단골이었구요. 우리 제품들 인기 많았어요.”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우이동 집은 1백60평이었고, 결혼후에도 남편과 함께 그렇게 활발하게 바깥 활동을 하느라 살림은 신경쓰지 못해 일하는 아줌마 두 사람을 두고 살았던 때도 있었다고 했다.
  그가 결혼 전부터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업에 뛰어들었던 것은 아버지가 사업실패 후 고전하다가 일찍 돌아가셨는데 오빠뿐만 아니라 다른 동생 넷도 모두 심성이 연약하기만 해서 어찌 할 바를 몰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녀라는 책임감이 그이를 일으켜 세웠다.
  일단 가족들 먹는 것부터 어렵지 않도록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손재주를 이용해서 옷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고, 맨처음엔 단 세 장을 만들자마자 남대문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그런데 다행히 그가 만든 옷은 가져갈 때마다 금방 금방 팔릴 정도로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고 조금씩 돈도 모였다. 주위상인들이 이백만원 정도만 있으면 전세로 가게를 하나 얻을 수 있다고 해 드디어 남대문시장에도 자리를 잡아 한계단 한계단 올라 나갔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1년 정도 지나니까 코스모스, 시라노, 코리아나 같은 백화점에도 물건이 들어갈만큼 히트치기 시작했다.
  그 동안 정숙 씨는 괜찮은 집안에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나온 잘 생긴 청년 양승렬 씨와 결혼을 했다. 사업은 계속 잘 돼 경기도 포천에 본염공장을 운영하기도 했는데,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을 때 퇴직금까지 당겨서 자신을 도와준 오빠에겐 고마움의 표시로 집도 한 채 사주고, 동생들은 패션포델을 시켜줄 정도가 됐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남편과 큰 아들과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로 실명을 한 것이다.
  “자가용을 타고 김포대교에서 달리다가 교통사고로 앞의 차를 받았죠, 그 때 유리창이 깨지면서 각막이 다 망가지고 수정체를 건드려서 겹겹이 꼬맸어요. 아들도 그때 조금 다쳤는데, 다행히 남편은 안다쳤어요. 제가 사고 당시에 딸애를 임신 중이었는데 그 애는 제 원래 얼굴을 모르죠. 나도 걔 얼굴을 한 번도 못봤고.”
  그 때가 칠십오년, 그의 나이 서른다섯살 때다.
  그런데 그가 장애우등록을 한 것은 구십일년도다. 그 이전까지는 자신이 장애우라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다는 것이다. 사고 후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예전처럼 똑같이 다시 일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 때 바로 제 한계를 느꼈어야 되는데 저는 계속 자신이 있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도 세상에 안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정신력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나는 언제든지 내 얼굴도 예전대로 다시 돌아올 줄 알고 살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의사가 눈이 예전처럼 될 가능성은 없다고 그러더군요.”
  그런데 그렇게 사업이 잘되는 것을 시장 사람들이 시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편과의 성격차이가 사업에까지 영향을 미칠때도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사업이 어려움에 봉착하더니 결국 사업이 완전히 실패했고, 그 와중에 시부모님도 그 저택을 날려 정말 오갈데 없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하루 아침에 거리로 밀려나고


  일이 그렇게 되자 더욱 놀랍고 무서운 것이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가장 가까이에 있던 친척들, 시댁 친척들도 친정 동생들도 정숙 씨 가족을 모른 체 했다. “고모, 저 o o이 엄만데요”하면서 전화를 해도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했다.
  그 때 시아버지는 치매에 걸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몸이었다. 그런 시부모님과 자식들을 데리고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구십사년 정착하게 된 곳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바로 지금의 연천군 전곡리였다.(거기까지의 사연은 사실 기자도 귀를 쫑긋 세우며 들었지만 연대별로 정리는 잘 안된다. “제가 사연이 너무 많아가지고요,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렇게 두서없이 장황하게 말을 하게 돼요”라며 폭포처럼 쏟아내는 그의 이야기를 제지시키며 일일이 연도나 일의 전후를 하나하나 따지며 물어볼 수는 없었다. 독자들의 이해를 바란다)
  지금 있는 이 건물은 이웃에서 땅을 빌리고 건물만 헐값에 샀다. 예전에 개축사였다고 하니 처음엔 몹시 냄새도 나고 지저분해 아이들이 적응하지 못해했다. 그러나 “거리에 있는 것보다 집에 있어 좋았다”는 그로서는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먹고 살 길을 찾다가 생각한 것이 좌판이었다. 다른 친척들에게 돈을 꿀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에 전재산 십팔만원중에 육만원으로 빈대떡 재료를 사고 이동막걸리도 한 짝 사서 의정부쪽에 나가 좌판을 벌였는데 첫날 칠만원이 남았다. 삼사일 동안 팔아 몇십만원을 벌기도 했다. 그 돈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과 함께 시아버지 좋아하시는 조기랑 북어를 사서 돌아왔다.
  “그리고 둘러앉아 저녁을 먹을 때, 그 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누구한테 구구한 하소연 안해도 되고.”
  그렇게 일 년 정도 지속되던 그 일도 시어머니가 입원을 하게되면서 집을 비워놓을 수 없게 되자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시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셨다. 매일 빨래거리를 산만큼 내놓으시던 시아버지가 돌아가시니 오히러 그는 할일이 없어져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과 인근 밭을 걷는데 남편이 “야, 여기 배추가 많네”하더란다.
끝도 없다고 했다.
  그 배추들을 얻어 그는 김치도 하고, 만두도 만들기 시작했다.
  사실 만두는 시어머니가 잘 만드셨다고 그는 회상한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김치맛도 모르고 자랐는데 시댁이 맛으로 유명한 개성분들이었고, 시어머니의 ‘보쌈김치’ 솜씨를 맛보고서 김치를 즐기기 시작했다. 남편 친구들은 특별한 일 없이도 단지 김치랑 만두를 먹기 위해서 그의 집에 놀러오곤 했을 정도라고.
  그렇게 음식 마드는 것이 취미인 사람은 주변에 그걸 맛있게 먹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우리 식구들은 이제 지겹다고 잘 안 먹어요. 그래서 주위 사람들도 막 나눠주고 그랬죠. 처음엔 동네 사람들이 노인네들하고 몸 불편한 사람들이 산다고 우리 가족들을 굉장히 불쌍해 했는데 제가 만두 들고 이집저집 다녀보니까 우리 보다 더 딱한 집들이 참 많더라구요.”
  그 만두를 들고 또 찾아간 곳이 바로 인근 군부대다. ‘짬밥’만 먹던 병사들에게 어머니 손맛인듯한 그 만두는 인기가 만점이었다. 매달 한 번씩 만두를 들고 위문을 가는 한마음애집 식두들에 대한 보답일 수도 있지만 그 군부대 장병들이 와서 하나씩 집을 고쳐줘 이제는 집도 많이 말끔해졌다. 그리고 그들이 도와준 덕에 지난 해에는 김장을 이천포기나 할 수 있었고, 그 김치는 또 다시 그 군부대에 그대로 혹은 만두로 만들어져 기증되기도 한다.
  “오사단 오포연대 신태복 대령님이나 정비대대 김준 소령님, 김재응 원사님, 공군포대 최윤덕 소령님 같은 분들은 정말 다시 없는 분들이세요. 장병들을 데리고 여기 와서 정말 자원활동도 많이 해주시고 다만 몇 백원 몇 천원씩이지만 함께 돈을 걷어 저희를 후원해주시기도 해요. 사실 군대에서 이런 일 하면서 더불어 사는 것도 익히고 그래야지 사회에 나가서 더 바르게 살수 있는 것 같아요. 사회에 나간 후에는 이런 기회를 갖기도 더 어렵잖아요.”

 

 

어머니를 찾아서


  지금 한마음애집에는 그의 가족을 뺀 일곱명의 노인과 장애우들이 함께 살고 있다. 가족들만 살다가 이들과 공동체를 꾸리게 된 데에는 그의 친정어머니와 관련된 가슴아픈 사연이 있었다.
  김정숙 씨가 차 사고로 눈을 다치고 그래서 병원에 있는 동안 그의 여동생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한없이 짜증스럽고 부담스러웠는지 신설동 상가 건너편에 그 어머니를 버려 버린 것이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보다도 더한 심정이었다.
  당장 앞도 안보이는 몸으로 어머니를 찾아나서기 지가했다. 어머니가 계실만한 곳을 찾아 일년 육개월이나 헤매 다니는 동안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 나라 복지시설들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그로서는 기도원이나 노인시설, 부녀보호소 같은 곳이 그렇게나 많은 사실을 알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곳들 중 한 곳에 어머니가 계실 것이라는 실날같은 기대 하나로 한 친구와 함께 그곳들을 하나씩 뒤져 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어머니는 찾지 못하고 돌아가신 후에야 소식을 접해 그에게 씻을 수 없는 통한을 남겨 주었지만 그러는 동안 그는 한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 나라에 버려지는 노인들이 그렇게나 많다는 사실을.
  “다니면서 너무 너무 불쌍한 노인덴들을 많이 봤어요. 버려진 사람들이 그렇게 많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같이 그분들 집을 찾아주기도 했는데. 그렇게 찾아주고 며칠 후에 가보면 또 버려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집에 일주일 정도 있다가 가시기도 하고 그랬는데 제가 능력이 없어서 더는 할 수가 없었죠. 그러다 여기 살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남는 방도 생겼고, 그 때 알게 된 사랑의 전화 같은 곳에서 시설에서도 안 받아주는 심한 치매노인 같은 분들을 맡아줄 수 없냐고 부탁도 해오고 해서 그분들과 같이 살기 시작했죠.”
  그 와중에 그의 아들 같은 연배의 청년이 오갈데가 없다고 오겠다고 해서 장애우들도 함께 살기 시작했는데 그게 구십칠년 시월경부터다. 그렇게 해서 한 동안 오줌빨래도 해 드리고 식혜도 만들어 드리고 했다. “우리 어머니가 해주시던 보리식혜만 맛있는 줄 알았는데”하며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하던 그 할아버지는 얼마 후 돌아가셨다. 생전에는 아버지를 만나기 거부했던, 세무서 계장으로 있다는 그 아들이 연락을 받고 아버지의 시신을 모셔간 후 매우 떠들썩한 장례식을 치렀다는 얘기를 그는 힘없이 전해준다.
  열 명이 살고 있는 한마음애집 살림은 군에서 나오는 생활지원금이 사십팔만원 밖에 안돼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다른 곳보다 한 명당 나오는 생계보조수당이 이해할 수 없게 절반 정도밖에 안된다며 그는 나중에 군청에 따질 거라고 한 마디 한다.
  그래도 든든한 군부대 장병들과 다른 곳에 독립해 살고 있는 큰 아들 내외가 보내주는 얼마간의 후원으로 집도 여러 차례 개보수를 했고, 전체적인 살림살이도 이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군청과 이웃 주민 몇몇은 이들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어느 날은 마을 사람중 누가 진정을 했는지 군청에서 몇 명이 우루루 나와서 이 집을 샅샅이 훑어보고 여기 있는 다른 식구들 면접을 한다고 부산을 떨면서 그에게 이 집을 폐소하고 여기 있는 사람들을 다른 시설로 보내라고도 했다. 그런데 다들 다른 시설에서는 거부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 여기가 좋다고 다른 시설에는 안 간다고 입을 모아 군청에서도 머쓱해서 돌아갔다.
  그렇게 “군청에서 나와서 뭐라 해도 집주인인 이웃 사람이 사사건건 와서 뭐라고 싫은 소리를 해도” 그는 어느덧 자신이 걷게 된 ‘사회복지’의 길을 묵묵히 가려고 한다. “예전에는 사실 장애우나 오인들 같은 사람들은 사람같이도 안 보이고 그랬는데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가까이 안하려고 그랬나 모르겠어요. 어머니만 생각하면 제가 너무나 회한이 많아요. 지금 이렇게 그분들하고 같이 살고 가까이 하면서 제 자신을 뒤돌아 보게 돼요. 그 사람들이 만두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 엔돌핀이 생기고 그래요.”
  그래서 오늘도 만두를 빚는다. 함께 사는 한 할머니와 같이 번갈아 밀가루를 밀고 속을 다지고 만들며서 어느새 그는 자신 내면에 담겼던 사람들에 대한 증오와 원망도 함께 그렇게 밀어버린다.
  “내가 가진 것이 없게 됐다고 친척들과 동생들이 하루 아침에 외면할 때 저도 사람인데 그 사람들 밉고 증오스럽고 그렇더라구요. 그런데 그러다 보니 내가 못 살겠어요. 이제는 원망안해요. 제가 아무 것도 없는데요. 뭐, 다시 만나는게 중요하지.”
  그가 돌아온 삶의 구비를 다시 생각한다. 보통 사람이 감내하기 어려운 고난과 깊고 깊은 상처를 넘어 이렇게 맘 속으로 정리를 하는데 분명 그 ‘만두의 힘’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글/한혜영   사진/김학리 기자

작성자한혜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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