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이야기] “장애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예요” > 세상, 한 걸음


[사람 사는 이야기] “장애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예요”

올해의 장애극복상 수상한 김정민씨

본문

 오십평생을 앉아서만 살아온 김정인 씨가 세상에서 가장 잘 하는 일은 한복 만드는 일이다. 삼십년 전 삯바느질하는 어머니의 어깨너머로 배운 바느질 솜씨로 본인의 생계를 이어가는 것은 물론 기술없는 여성장애우들에게도 한복 만드는 법을 십년째 무료로 전수해 주고 있다. 바늘 한땀한땀 정성껏 만든 한복만큼이나 한걸음 한걸음 반듯하게 살아온 김정인 씨의 지난 오십년 동안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김정인 씨는 일천구백사십칠년 시월 이십오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학교수였던 아버지와 이화여대를 졸업한 어머니 슬하에 첫째 딸로 태어나 여느 아이들

다를 바 없이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건강하게 자라났다.

  그러다 네 살이 되던 해 가을, 정인 씨는 갑자기 심한 열병을 앓았다. 열은 곧 내렸지만 다음번엔 전신마비가 왔다. 부모님은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그이를 입원시키고 두 달간 치료를 했으나 별 진전이 없었다. 한국에서 가장 의술이 뛰어나다는 병원에서도 치유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이의 아버지는 한국에서는 더 이상 정인 씨의 장애를 고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조금만 기다려라. 아버지가 여름방학 때 널 일본에 데려 가서 병을 고쳐주마” 하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그 해 여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아버지는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이북으로 납치돼 지금까지 연락이 끊긴 상태다. 남은 가족들은 아버지의 고향인 충남 보령으로 피난을 떠났고, 그 이후 정인 씨는 더 이상 물리치료를 받지 못해 지금까지 않은 채로 생활을 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절 고치려고 마음만 먹었으면 제가 지금처럼은 안됐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땐 제 다리가 조금은 움직였으니까 보조기라도 착용하고 다니게 했으면 조금은 걸을 수 있었을 텐데. 그저 제가 불쌍하고 딱하다고 과잉보호만 하셨죠.”

  그렇다고 정인 씨가 어머니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전쟁 이후 그 어려운 시절을 남편도 없이 혼자 삯바느질을 해가며 정인 씨와 남동생을 키워온 것만으로도 어머니는 누구보다 장하고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걸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안타까울 때면 시대를 잘못 타고 난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곤 한다.

  정인 씨는 아홉 살 되던 해부터 교회에 나갔다. 신앙을 통해 그이의 닫힌 마음을 처음으로 열고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비록 몸은 불편하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착하게 살면 이 다음에 하늘 나라에 가서는 마음대로 걸어다닐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다 정인 씨에게도 사춘기가 찾아왔다.

  “크리스마스 이브 때였어요. 눈이 참 많이 오던 밤이었는데 남동생은 새벽송을 부르러 가고 어머니도 새벽송을 부르러 나간 성도들에게 떡국을 끓여준다고 교회에 가시고 저 혼자만 집에 남았죠. 우두커니 창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젊은 연인 한 쌍이 지나가는 거예요. 빨간 머플러에 청바지를 입은 아가씨가 너무 멋있어 보이고 부러워서 저도 모르게 나도 나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벌떡 일어서려고 했죠. 그 다음은 말 안해도 알겠지요. 방바닥에 그냥 고꾸라지고 말았어요. 순간 제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잊었던 거예요. 그리곤 펑펑 울었어요. 제 모습이 너무 초라해서...”

  그 때 정인 씨는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침 동사무소에서 준 쥐약도 생각이 나 어머니와 남동생 앞으로 유서 한 장을 쓰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이 저를 불러 주지 않으니까 제가 찾아갈게요. 하나님, 부디 제 영혼을 받아주세요.’

  그 순간 불을 꺼놓은 방안이 환해지면서 어디선가 못을 박는 듯한 소리가 ‘쾅쾅쾅’ 세 번 울렸다. 그리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인 씨가 울다말곤 “하느님 정말 절 사랑하세요?” 하고 묻자 “내가 너를 사랑한다” 는 말씀이 다시 한번 들렸다. 그때 그이는 처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너무나 감격스럽고 감정이 복받쳐 다시 한 번 울고 말았다. 이 일을 계기로 정인 씨는 새 인생을 살기도 다짐했다.

  그 즈음 정인 씨는 새로운 일을 하나 시작했다. 어머니가 바느질하는 것을 어깨 너머로 보고 배워 ‘장미한복’ 이란 한복집을 군산에 차린 것이다. 그런데 정인 씨가 워낙 눈썰미와 바느질 솜씨가 있어서 차린지 얼마 안돼 ‘군산 바닥의 돈을 장미한복이 다 쓸어간다’ 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러나 정작 한복을 만든 정인 씨는 본인이 만든 예쁜 한복을 입고 한 번도 외출을 하지 못했다. 

  그 당시엔 휠체어가 보급되지 않아 외출을 하려면 누군가의 등에 업혀서 나올 수밖에 없다보니 치마 입기가 불편했다. 그러던 중 정인 씨에게도 한복을 입고 외출할 기회가 생겼다. 평소 정인 씨와 가깝게 지내던 재활원 원장 부인이 휠체어를 하나 구해준 것이다.

  이 때부터 정인 씨는 휠체어를 타고,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다 갔다. 재활원이나 고아원 같은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사는 곳도 찾아갔다.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정인 씨 자신의 장애를 잊을 만큼 가슴 아픈 사연도 많았다.

그리고 고아원에 들를 때 아이들에게 줄 빵이라도 사 가지고 가기 위해 일도 더 열심히 하고 새벽기도도 더 열심히 나갔다.

  그런 선행이 알려져 1980년 정인 씨는 당시 보사부장관으로부터 모범장애우상을 받았다. 또 이것이 계기가 되어 ‘날개’라는 책자에 정인 씨가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싣게 됬는데 책이 발간되자 전국에서 수천 통의 편지가 정인 씨에게 날아 왔다. 주로 자기에게도 한복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때부터 정인 씨는 기술이 없는 여성장애우들에게 어떻게 하면 한복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편지를 띄우기 시작했다. ‘여성장애우들에게 무료로 한복 만드는 기술을 가르치려 하는데 마땅한 장소가 없으니 좀 도와달라’ 는 내용의 편지였다. 그리고 얼마후 많은 사람들의 후원으로 정인 씨는 군산에 방 세 개가 딸린 집을 하나 얻어 ‘샤론의 집’을 열게 되었다.

  그 때 정인 씨에게 후원금을 준 사람 중에는 성악가 엄정행 씨도 있었다. 엄정행 씨는 자선음악회를 열어서 그 수익금 일백만원을 모두 김씨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그 때 일이 고마워서 지금도 열린음악회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엄정행 씨가 나오면 아무리 바빠도 하던 일을 멈추고 노래가 다 끝날 때까지 듣게 되요.”
  샤론의 집에는 전국에서 많은 여성장애우들이 기술을 배우러 왔다. 그 중에는 남성장애우도 있었다. 그러나 정인 씨는 남성장애우들은 받지 않았다. 공동생활을 하는데 에도 문제가 있고 한복을 만들려면 신체 지수를 재어야 하는데 남성이 여성의 가슴등 신체 부위에 손을 대는 것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꼭 배워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에겐 대신 부인을 보내라고 하기도 했다.

  기술을 배우러 온 문하생들 중에 약 육십퍼센트는 학교 문턱도 밟아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개인의 학력 차에 따라 한복 기술을 배우는 기간도 조금씩 달랐는데 학력이 고졸이상인 사람은 삼개월, 중졸은 오개월, 초졸은 육칠개원, 무학인 사람은 꼬박 일년이 걸렸다. 그래서 정인 씨는 저녁시간을 이용해 무학력자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기로 마음먹었다. 교사로는 정인 씨가 다니던 교회 청년부 대학생들을 초빙했다.

  학생들 중에는 공부를 열심히 해 검정고시도 보고 방송통신대학에 입학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총각선생님을 짝사랑하다 가슴앓이 하는 사람도 있었다.

  “생전 남자라곤 아빠, 오빠만 봐왔던 아이들이 총각 선생님들한테 핑크빛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러나 청년들은 그 애들을 이성으로 좋아하기 보다 안쓰러워서 잘해주는 것이거든요. 쉽게 마음을 준 아이들만 상처를 받기 마련이죠.”

  그래서 정인 씨는 같은 여성장애우로서 학생들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여전히 선생님을 짝사랑하다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있어서 정인 씨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했다.

  이러저러한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일년이 지나고 샤론의 집 일기생들이 실력을 뽐낼 기회가 왔다. 팔십이년 전국장애우기능경기대회에 한복부문이 신설된 것이었다. 금상을 비롯한 은상, 동상, 장려상 등 모든 상을 휩쓰는 쾌거를 올렸다. 그 이후 샤론의 집에는 더 많은 여성장애우들이 찾아와 졸업한 여성장애우수가 백오십명을 넘어섰다.

  최근에는 장애우직업교육기관도 많이 생기고 정인 씨도 가정을 꾸리느라 잠시 가르치는 일을 쉬고 있지만 정인 씨는 제자들 소식이 궁금할 때면 딸 하나를 데리고 전국을 돌아본다. 다들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것을 확인하고 제자들이 해 준 밥까지 먹고 돌아올 때만큼 보람될 때도 없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의 장애를 숨기려하고 그 장애를 부끄러워하는 제자들을 볼 때면 정인 씨의 마음은 무거워 진다. “이번에 제가 장애극복상을 받으면서 케이비에스 「사랑의 가족」프로그램에 출연을 한 적이 있어요. 그 동안 제가 가르친 제자들과 제가 만나는 장면을 촬영한다고 해 몇몇 제자들에게 연락을 했더니 자신의 모습을 텔레비전에 내보이고 싶지 않다고 하더군요. 또 어떤 제자는 텔레비전에 출연하겠다고 신랑한테 말했더니 형님 얼굴에 똥칠을 하는 것이라고 부부싸움을 했대요. 그 제자 시아주버니가 국회의원이거든요.”
  그 말을 듣고 정인 씨는 처음에 너무 화가 나 “그럼 너나 나나 장애우는 모두 다 똥이니?”하고 전화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지만 전화를 끊고 생각해보니 신랑한테 그런 대접을 받고 사는 오죽 힘들까하는 생각이 들어 하루 종일 마음이 안 좋았다. 동시에 모 광고처럼 장애가 장애로 인정되지 않는 그런 사회는 언제쯤 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는 장애극복상도 없을 것이란 생각과 함께.

  샤론의 집에서는 무섭고도 자상한 선생님이지만 김정인 씨는 집에 오면 아내이자 엄마의 자리로 돌아온다.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니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정인 씨의 연애와 결혼얘기가 궁금해진다.

  ‘날개’에 원고를 쓰고서 받은 1천여 통의 편지 중에는 정인 씨의 운명을 바꿔놓을 편지가 한 통 있었다. 남편 박제완 씨의 편지였다. 사랑을 고백하는 핑크빛 내용이 아니라 우리 나라 재활정책에 대해 논하는 딱딱한 내용의 편지였지만 샤론의 집을 운영하는 정인 씨에게 그 당시엔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 해 가을 정인 씨 집안과 가깝게 지내던 김 박사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어떤 사람이 정인 씨를 중신해달라고 하는데 어때? 선 한번 보지.”

  “저 시집 안가요. 제가 독신주의인 거 박사님도 아시잖아요.”

  “그 사람 말이 없는 충북 남잔데 말 잘하는 정인 씨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래. 조만간 그 사람 데리고 한 번 찾아갈게.”

  정인 씨가 서른 넷이 되도록 결혼을 안한 것은 정인 씨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평소 정인 씨 어머니는 “누가 이 불쌍한 것을 데려가겠냐”며 “내가 데리고 살다 같이 죽어야지”하고 중얼거리시곤 했던 것이다.

  박제완 씨가 정인 씨의 집에 처음 온 날도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 아이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파요. 결혼해서 불행해지면 그 꼴을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정인이는 내가 데리고 살다가 같이 죽을 겁니다.”

  “왜 결혼해서 행복할거란 생각은 안하고 불행할 거란 생각부터 하십니까”라고 김 박사님이 말하자 “뭐 때문에 얘가 행복해지겠습니까? 얘는 밥도 못하고 빨래도 못하고 머리도 감겨줘야 하는 애예요. 할 수 있는 거라곤 바느질밖에 없는데 이런 앨 데리고 가서 뭣하겠다는 겁니까?”라고 어머니는 반대하셨다.

  이 때 박제완 씨가 나서면서 “정인 씨가 꼭 저하고 결혼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왜 정인 씨를 그렇게 가르치십니까?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난 후에도 혼자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셔야지요. 머리를 누가 감겨줘야 한다는 것이 무슨 자랑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라고 말했다. 이 말은 정인 씨가 평생을 두고 기억할 명언이 됐다.

  박제완 씨가 하는 말은 모두 맞는 말이었다. 정인 씨는 이 때 박제완 씨와 결혼할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다음 해 겨울 두 사람은 결혼했다. 결혼 후에도 박제완 씨는 정인 씨가 음식을 못하는 것에 대해 한 번도 타박을 하거나 불편해 하지 않았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박제완 씨가 알아서 요리를 해 먹었다. 객지에서 혼자 자취를 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음식솜씨가 좋았다. 두 사람은 서로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결혼생활 이십년째에 접어드는 지금까지도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다.

  정인 씨는 시어머니도 모시고 살았다. 밥도 할 줄 모르는 정인 씨가 어떻게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 수 있나 싶겠지만 시어머니랑 함께 산다고 해서 며느리가 모든 집안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며느리로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면 된다. 정인 씨는 비록 밥하고 반찬을 만드는 일을 할 수 없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시어머니를 모셨다.

  시어머니가 연로해져서 당뇨병과 합병증으로 한 쪽 눈을 실명한 후에는 매번 정인 씨가 시어머니 수저에 반찬을 놓아드렸다. “너한테 미안하구나. 그냥 비벼서 먹으마”하고 시어머니가 우실 때마다 정인 씨는 “제가 자식인데 뭐가 미안하세요. 그리고 어머니 제 앞에서 울지 마세요. 어머니는 희미하게라도 보실 수는 있잖아요. 저는 오십년 동안 이렇게 앉아서만 살았어요. 그렇다고 울지는 않아요.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운다고 벌떡 일어날 것 같으면 제가 통곡을 하며 울었겠네요. 그래도 안 고쳐지잖아요. 자꾸 울면 눈이 더 나빠지니까 어머니 울지 마세요”라고 시어머니를 달래드렸다.

  그리고 김 씨는 시어머니가 치매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시어머니에게 치매가 와 대소변을 못 가려도 정인 씨가 치워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정인 씨 기도 덕분인지 시어머니는 재작년 병석에 누우신 지 닷새만에 조용히 운명하셨다.

  그래서 이제는 정인 씨, 남편 박제완 씨, 딸 하나 이렇게 세 식구만 살고 있다.

  “여성장애우가 결혼할 때 제일 두려운 게 뭔지 아세요? 아기를 어떻게 키울까 하는 거예요. 그 아이가 자라서 사춘기가 오면 장애우부모를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거지요.”

  그런 걱정 때문에 정인 씨는 아들이든 딸이든 딱 한명만 낳기로 결심을 했고 결혼한 지 이년 만에 딸 ‘하나’를 낳았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고 이름도 ‘하나’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인 씨는 하나를 낳고도 혹시 엄마를 부끄러워하지는 않을까 해서 여러 해 동안 가슴을 졸였다. 그래서 하나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몇 해 동안은 학교행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하나가 초등학교 삼학년 때 담임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하나가 그림일기를 그렸는데 엄마가 휠체어에 앉아서 바느질하는 그림이더군요.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정인 씨가 사실을 말하자 담임 선생님은 몰랐다며 하나가 명랑하고 곱게 잘 자라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다음 날 하나는 학교에서 돌아와 낮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정인 씨에게 이야기했다. “엄마, 오늘 담임 선생님이 애들 앞에서 내 칭찬을 해주셨어요. ‘박하나는 엄마도 아빠도 몸이 불편하신데도 모난데 없이 밝고 명랑하고 착하게 생활하니까 우리 모두 박수 쳐주자’고 하시면서요.” 하나는 고등학생이 된 지금까지도 가끔씩 그 선생님 이야기를 하곤 한다.

  다음 해 운동회 때 정인 씨는 처음으로 도시락을 싸 가지고 시어머니와 시동생과 함께 학교에 갔다. 벌써 운동회는 시작됐는데 정인 씨가 정문을 들어서는 순간 멀리서 하나가 ‘엄마’하고 부르면서 달려와 정인 씨의 목을 꼭 껴안았다. “참 감격스럽대요. 엄마가 장애가 있어서 부끄러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 주위에 모여든 아이들한테 ‘이거 우리 엄마 자가용이야. 그러니까 만지면 안돼’하고는 제 무릎 위에 앉는 거예요. 그 동안 내가 괜한 걱정을 했다는 걸 깨달았죠.”

  사업가로서, 아내로서, 또 며느리로서도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인정하는 정인 씨였지만 어머니로선 가지지 못했던 콤플렉스를 말끔히 씻을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정인 씨는 자신이 갖고 있는 장애를 모두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 사월 이십일은 제 십팔회 장애우의 날이었다. 그리고 장애우의 날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행사가 잠실 올림픽경기장에서 열렸다. 올해 기념행사의 꽃은 단연코 김대중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가 직접 수여하는 ‘올해의 장애극복상’ 시상식이었다. 그리고 그 열명의 수상자 중에는 김정인 씨도 있었다.

  김정인 씨는 이제 다른 장애우들을 위해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아들 딸 다 출가시키고 혼자 남은 나이 많은 장애우들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 편하게 여생을 즐기다가 조용히 세상을 떠날 수 있는 그런 쉼터를 하나 만드는 것이다. 아직 시작에 불과한 꿈이지만 오십을 훌쩍 넘긴 정인 씨가 또 다시 새로운 꿈을 가지고 열심히 사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인다.

글/ 노윤미 기자

작성자노윤미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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