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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이야기] “죽음은 삶의 거울이랍니다”

반평생동안 이천여구의 죽음을 염습 봉사한 오병용씨

본문

 사람은 참으로 제각각인 모양새로 세상에 첫발을 딛는다. 머리가 땅을 향하게 거꾸로 선 것이 ‘제대로’인 일반적인 출생형태에서 굳이 똑바로 선 채 세상에 나오려고 해 어미에게 몇십 시간의 진통을 감당케 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자신이 살아갈 바깥 세상을 빨리 보려는 양 재빨리, 그야말로 쑤욱-허니 가뿐하게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대략적인 시한만 정해져 있을 뿐 세상에 나오는 정확한 시간이나 장소도 거의 예고없다. 초등학교 시절 풍년호 기차 안에서 태어났다해서 ‘풍년’이란 이름을 가지게 됐다는 동기생을 기억한다. 누구는 기차 안에서, 누구는 논두렁에서, 그렇게 사람들은 구구절절한 출생일화를 하나씩 갖고 있다.

  하긴 죽음이라고 다르랴. 예고 없이 세상에 나왔듯이 죽음도 그렇게 대부분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그리고 출생시의 모습만큼이나 각양각색인 죽음의 형태들은 다른 한편,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다시금 던져주기도 한다. 잠을 자듯 지극한 평온 속에, 그것도 교통사고 등으로 자신이 태어날 때의 사지형태를 온전히 갖고 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한 차이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직업적인 장의사가 아니면서 자신의 손으로 이천여구의 시신을 염하고 수백구의 시체를 땅에 묻은 사람이라면 나름대로 독특한 죽음에 대한 철학이 있을 법하다. 그 주인공인 무역회사 (주)삼립산업의 대표이사 오병용(73)씨는 다음과 간은 나름의 ‘죽음의 철학’을 들려준다.

  “죽은 이들의 시신은 지상에서 살다 간 삶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줍니다.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얼핏 봐선 알 수 없는, 고이 잠든 것처럼 누워 있는 시신을 대할 때면 그 삶의 무게에 압도돼서 한번쯤 더 옷깃이 여며지죠. 또 남달리 빨리 부패된 시신이나 고통스런 병마의 흔적이 남아 있는 시신은 삶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줍니다. 개중에는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까지 자신의 삶을 부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난 죄와 잘못을 거짓말처럼 씻은 듯이 뉘우치는 사람이 있는데, 보통 이런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에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더군요. 그렇게 사람들의 마지막을 결정하는 것은 생전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렇게 죽음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죠.”

  사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많은 시간을 번민하지만 그 질문을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로 돌린다면 그 해답은 오히려 쉽게 다가오기도 한다. 어떤 마음, 어떤 환경 속에서 죽음을 맞을 것인가는 오 사장의 말대로 그 사람의 살아온 모든 것을 드러내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 사장이 이렇게 드물게 많은 수의 죽음을 목도하게 된 것은 그가 다니고 있는 소망교회에서 경조부 일을 맡았었기 때문이다. 칠순이 넘으면서 장로직에서도 은퇴를 하고 동시에 경조부일도 그만두었지만 요즘도 그는 심심치 않게 초상집에 불려다닌다. ‘내가 죽으면 꼭 당신이 염을 해달라’고 유언처럼 부탁한 사람이 지금도 줄을 섰으니 앞으로도 꽤 많은 시신의 염습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오 사장이 이 일을 시작하게 된 데에는 자신이 받은 감사함을 돌려주고 싶다는 단순한 동기에서였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이십육년 전, 꽤 정정하신 편이던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자 하늘이 내려앉는 슬픔 속에서 장례도 어떻게 치를 지 몰라 하고 있었다. 그때 같은 교회에 다니고 있던 이웃들이 찾아와 편안한 임종을 축복해주면서 물을 함지에 끓여서 시신을 목욕시키고 매만진 후 수의를 입히고 단장해 장례까지 치러주었다.

  ‘세상엔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하는 생각에 그때 왔던 분에게 ‘나를 조수로 써서 후계자로 만들어달라’고 간청했고, 그때부터 오 사장은 생소하기만 한 ‘염습봉사’라는 것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에게 장례실무를 가르쳐 주시던 세월이 지난 후 역시 그의 손으로 입관해 드렸다.

  당연한 일이지만 염습일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유난히 피곤해 곤한 잠에 떨어졌을 때나 으슬으슬 몸살기고 있을 때도 예외없이 부고를 알리는 전화는 걸려왔다. 다른 사람 같으면 짜증도 날 법한데 다시는 영원히 볼 수 없는 곳으로 간 지인의 마지막을 모쪼록 단단히 챙겨줘야 겠다는 생각에 천명처럼 부고전화를 받으면 정신이 번쩍 든다고 한다. 그래서 재빨리 준비를 마친 후 자동차 트렁크에 항상 준비하고 다니는 칠성판(시신을 누이는 삼십센티미터쯤 되는 널빤지)과 염습에 필요한 솜이나 알콜 같은 도구들을 챙겨 상가로 향한다.

  연락을 받고 달려가서 염습을 시작할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일단 옷을 하나하나 벗겨낸 후 온몸을 알콜로 닦아내고 세마포로 만든 새 수의를 입힌 다음 칠성판에 곱게 뉘이는 것이다. 시신이 구부러지지 않도록 시신의 귀와 코, 눈과 항문을 솜으로 막는다. 하루 정도를 넘겨 물을 데워 시신을 씻기고 수의를 입힌 다음 치장을 하기도 한다.

  시신의 손발을 한데 묶어 칠성판에 누이려면 보통 두세 사람이 동시에 시신을 들어야 한다. 그의 일을 도와주는 같은 경조부 소속 신도가 있었지만 너무나 급박하게 연락이 와서 미처 그 사람을 부를 시간이 없을 때는 한밥중이라도 그는 부인과 함께 가서 그 일을 해야 했다.

  과연 생업을 가진 사람이 감당할 수 있겠나 싶기도 하지만 오 사장은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할 당시에도 별다른 무리없이 헤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하루에 두세 구씩 만지는 날이면 지독하기 그지없는 송장 냄새가 온몸에 배어 주위 사람들이 당혹스러워 하기도 했다. 한 번 염할 때마다 샤워할 정도로 많이 사용하게 되는 알콜 냄새가 자신의 몸에 역겹게 배어있지는 않은지 때때로 코를 킁킁거리며 신경을 써야 했다. 게다가 시신이 부패돼 장화를 신어야 할만큼 축우(시체에서 흘러나오는 액체)가 흐르는 경우도 있고, 이장을 할 때나 화재사고를 당했거나 분신자한 시신의 아직 썩거나 타지 않은 살 부분은 장갑낀 손으로 직접 뼈 사이사이를 훑어서 발라내기도 한다.

  순식간에 시신이 부패해버리는 한여름 때 보다 더욱 괴로울 때는 비가 퍼붓고 천둥, 번개가 내리치는 한밤에 염습일을 해야할 때였다고 한다. 귀신이니 뭐니 믿지는 않아도 그도 사람인지라 괜히 온몸이 서늘해지고 기분이 나빠지기 때문이다. 그가 들려주는 우습지만은 않은 일화 한 토막.

  “염습일을 물려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의 일인데, 한 번은 비가 오는 날 밤 염습일을 하고 관에 못을 땅땅 치고 돌아서는데 누가 스윽 하고 옷자락을 잡아요. 순간 머리끝이 쭈뼛 설 정도로 가슴이 철렁했는데 잠시 후 두려움을 참고 슬쩍 뒤를 봤더니 그냥 관에 제 옷이 낀 것이었어요. 암튼 얼마나 무서웠던지 그날 밤새 몇 번이나 가위에 눌려 자다 깨다 했다니까요.”

  이제는 시체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도 사라진 지 오래다. 다만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어떤 특별한 감정이 들긴 한다.

  “특히 땅에 관을 묻을 때 관이 땅 속에 잘 자리잡을 수 있도록 골라야 하니까 무덤 안으로 저도 들어갑니다. 어느 순간 ‘이렇게 관을 묻을 때 나도 죽는 것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이제까지의 기록을 좀 절이해보니 천구백이십일구의 시신을 제가 염습했던데 그러니까 저는 천구백스물한번 죽은 셈이죠.”

  정확히 말하면 오 사장이 죽었다 살아난 횟수는 하나를 더해야 한다. 그 사연인즉 이렇다.

  그가 서른 두 살 무렵, 한국전쟁 당시 몸이 약한 부인 때문에 미처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국군이나 인민군, 어느 쪽에서든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몰래 숨어 있는 와중이었다. 그러나 결국 정치보위부에 발각되었고, 전쟁터로 끌려나갈 처지에 놓이게 됐다. 요행히 비상소집장소였던 학교에서 몰래 뒤로 빠져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어느 교사의 도움으로 간신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전쟁터로 끌려간 사람들이 거의 다 죽음을 면치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때로 나이를 묻는 질문에 늘 ‘서른 둘’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 사건 이후의 삶은 덤이라고 생각한다.

  전쟁 후 그는 빈털터리로 월남한 집안을 다시 일으키는데 온 힘을 쏟았다. 상업고등학교 후배의 외삼촌이 보증을 서 줘 다니기 시작한 세무서에서 인정도 받으며 자리를 잡아갔다.

  육십년대에 접어 들면서는 경력이 쌓이다 보니 실무도 능숙해지고 그래서 사람들이 좋은 자리라 부르는, 기업을 상대로 한 부서에서만 상당 기간 근무하게 되었다. 별다른 죄책감 없이 주머니에 찔러 주는 촌지를 받고 재벌회사 중역들만을 주로 상대하다 보니 교만해졌었다고 그는 고백한다. 고급 술집, 고급 음식점을 끼고 살며 가정에도 불성실한 가장이 돼갔다는 것이다.

  그런 그를 붙잡아 준 것은 뜻밖에도 그의 둘째딸이었다. 둘째 딸 혜경 씨는 태어난 지 두 해만에 홍역을 앓다가 열병으로 소아마비장애를 갖게 됐다. “그 딸이 고열에 시달리고 있을 때 가정에 충실했더라면 제 엄마와 제대로 의논을 해서 잘 다스려 줬을텐데 바깥 세상의 유혹에만 몰두했기 때문에 그 죄가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라는 생각에 아직도 그는 딸에게 죄스런 마음 뿐이다. 그래도 어떡해서든 공부를 많이 시켜야겠다는 생각에 힘닿는 한 뒷바라지를 했다. 유난히 총명했던 딸은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땄고 현재 가톨릭대학교의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어 오히려 그의 자랑이 됐다.

  장애우와의 인연은 그것 뿐만이 아니다. 그가 다니는 소망교회에는 지체장애와 정신지체장애우로 구성된 소망부가 있다. 초창기 전체 신도숫자래야 열한명에 불과했던 소망교회는 이제 소망부만 칠십명을 헤아린다. 소망부는 고등부 학생들이 자원활동자가 되어 일대 일로 함께 예배를 보고 있다. 그런데 그는 이 소망부가 생기기까지의 눈물겨운 사연 하나를 들려 주었다.

  뇌성마비장애아를 둔 한 여성 신도는 한 번만이라도 아들이 교회에 나와 제대로 예배를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지극한 간청에 힘입어 신도들의 자녀 가운데 장애아이들을 전부 모아 창립예배를 보던 날, 감격이 복받친 그 어머니는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말아 주위의 눈물과 안타까움이 길게 이어졌다. 오 사장이 직접 짠 관에 그 어머니를 뉘어 땅에 묻고 오던 날, 바람은 왜 그렇게 매섭던지...

  어쨌든 그러한 눈물과 간절한 기도에 힘입어 소망부는 착실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지난해 가을에는 그 소망부 친구들과 오 사장이 속한 할아버지 신도들의 모임인 새마음선교회 회원들과 함께 결연을 맺고 파아란 가을 하늘 아래에서 운동회를 하며 함께 달리기도 했다.

  그 새마음선교회는 미혼모시설에 가서 청소년선도도 하고 탑골공원 같은 곳에 가서 돈을 내고 그곳 노인들에게 점심을 제공하는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 새마음선교회를 만들 때나 그가 참여하고 있는 여러 모임들의 이런 저런 행사를 개최하자며 먼저 말을 꺼내고 총대매기를 자처하는 건 이제까지 늘 그의 차지였다. 그리고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의 동대표를 이십년 넘게 하고 있는 그이다. 때로 그런 오 사장의 남다른 면 때문에 혹 딴 속셈이 있는 게 아니냐는 험담섞인 뒷말을 듣기도 했지만 ‘밑불이 되는 즐거움’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개의치 않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끝까지 밀어 부쳐왔다. “뭔가를 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나이를 앞세워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삶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사업을 하면서 지금까지 떼인 돈만 오십억원이 넘지 않을까 싶고 무턱대고 사람을 믿다 부도를 맞은 적도 있지만 다행스러운 건 남을 손해입히기 보다 차라리 내가 손해를 보겠다는 태도를 고집스럽게 지켜온 것이 결과적으로 나를 이롭게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은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 회사가 크게 휘청하게 됐다. 주위에서는 신문에 광고를 내 상대를 끝까지 잡으라고 했지만 그는 분노와 잃어버린 돈에 대한 집착을 접었다.

  그 대가로 원치 않았던 빈껍데기 상태의 우지 쇼트닝마가린 공장을 인수하게 됐는데 일년이 안돼 그 전의 손실을 만회하고도 남을 정도가 됐다.

  또 운수회사를 운영할 때는 평생 일군 재산을 다른 사람의 실수로 잃어버려 자살가지 생각하고 있는 친구를 돕겠다는 마음 하나로 갖고 있던 코로나 자동차 아홉 대를 판 돈 전부를 친구에게 주어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런데 일주일도 안돼 새 차 모델이 일본에서 들어와 그 차의 시세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 전에 차를 처분한 돈으로 사업을 시작한 친구가 임원으로 그를 영입해 그는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고 다시금 호시절을 갖게 됐다. “그때 내가 가진 것으로 친구를 도왔기 때문에 결국 친구도 살고 나도 살게 된 것”이라는 믿음을 그는 확고하게 갖고 있다.

  앞으로 자신에게 심 년 정도의 시간이 주어진대도 그는 자신의 친구같은 존재들인, 오갈데 없는 노인들을 위한 집을 지어함께 텃밭도 일구고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꿈을 간직하고 산다.

  이제 그의 나이 일흔셋, 겉보기에는 육십세를 갓 넘긴 것처럼 정정하지만 그도 하늘의 무름을 받기까지 많은 날이 남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죽은 뒤 어떻게 지신의 육신을 처리할 것인지를 담담하게 생각한다.

  “사람들은 기독교사 부활의 신앙이기 때문에 화장하는 것을 꺼리죠. 그렇지만 무덤 문이 열리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말에서 그 무덤의 의미는 사람이 운명한 후에 육신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걸 뜻하기 때문에 실상 화장이나 매장이나 다를 게 없어요. 오히려 화장이 여러면에서 더 깨끗합니다. 어차피 하늘나라로 가는 것은 영혼인데 세 치 육신을 누일 한뼘 땅에 그토록 집착할 이유가 없습니다. 소망교회는 몇 년 전 곤지암 근처에 위령탑을 마련해서 화장해 뼛가루를 뿌리게끔 해놓았는데 우리 교회처럼 하는 게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어서 곤란하다면 산에다 굴을 파거나 납골 건물을 하나 짓고 그 안에 방들을 만든 후 조그만 단지에 화장한 뼛가루를 보관해서 가족들이 참배하게 하는 것도 좋지요.”

  ‘이 세상에 올 때 빈 몸이었듯이 돌아갈 때의 모습 역시 작고 조촐할수록 아름답다.’는 지론을 갖고 있는 오 사장은 자신의 시신을 의학용으로 해부한 되 화장해 뼛가루는 산천에 뿌릴 것을 당부한 중국 전수상 주은래의 마지막을 누구보다 높이 평가한다. 그래서 자신도 주은래의 뒤를 따르리라 내심 원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자식들이 그런 그의 생각을 간곡하게 만류하고 있어서 결론을 짓지는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 저희 교회 내에서만 한 달에 백오십 건의 부고가 납니다. 그런데 제가 통계를 내보니까 한창 인생에서 안정된 노숙미를 음미할 사오십대 중장년들의 부고가 전체 오십육퍼센트예요. 그 원인은 암이 절대적이고요. 아무리 예전 보다 의학이 발달했다지만 너무 많은 욕심들이 부르는 각종 스트레스는 치료약이 없어요.”

  염습일이 무엇보다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은근히 자녀 중의 누가 자신의 뒤를 이어 염습봉사를 하기를 바랐다. 어느 지면에 실린 글에서 그 바람을 밝혔더니 큰 아들이 자청하고 나섰다. 염습봉사 뿐만 아니라 사업까지 물려받아 든든한 힘이 돼주던 큰 아들이 사월 초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조금 아쉽긴 하지만 언젠가 다시 돌아와 그의 뒤를 이을 것이라고 믿는다.

  아무도 원하지 않고 비천한 일이라고까지 하는 염습일을 다른 사람도 아닌 오병용 사장이 하게 된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보여준 이웃 사람들의, 누구도 함부로 흉내낼 수 없는 그 조건없는 사랑과 이정 때문이었다. 그 사랑을 그냥 자신 혼자 안고 음미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깊었다는 것이다. 자신처럼 누군가의 선행이 또 다른 이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마음은 수천 수만의 선행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 우리네 삶이라는 사실을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강조하고 싶어 했다.

  “마태복음 이십오장 십삼절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으십시오.’ 인생은 그런 것 같아요. 연습이 없는 진지한 시합이에요. 그것도 일회전으로 끝나는. 그러니 잘 죽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한 가지, 마지막까지 잘 사는 것, 지상에서의 삶을 선하게 살아가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글/ 한혜영기자    사진/ 조근철 객원기자

작성자한혜영 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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