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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이야기] 가슴에 소망 하나씩 품고 사는 사람들

공주 소망의 집

본문

공주 소망의 집 정상용 원장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공주에 사는 장애우들의 교육수준은 중졸 이하라고 한다. 이래서는 교육의 도시 공주의 체면이 서지 않겠다 싶어 1988년부터 교육을 받지 못한 장애우들에게 늦게나마 교육의 기회도 제공하고 있다. 그런 공주 소망의 집을 직접 찾아가 보니 공동체 이름 앞에 공주라는 지명을 붙일만큼 교육에 있어서만은 그 동안 찾아간 어떤 공동체보다도 뛰어났다.


공주시내에서 외곽으로 15분가량 나가면 상왕동이라는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추수하고 남은 볏단을 여기저기 세워놓은 것을 봐서 주로 농사를 지어 먹고 사는 우리나라 전형적인 농촌 마을임을 알 수 있는데 특이한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치 병풍처럼 마을을 겹겹이 둘러싼 산과 그 앞을 흐르는 맑은 냇물이 그야말로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했고 다른 하나는 이 그림같은 마을 한복판에 장애우 공동체 ‘소망의 집’이 있다는 것이다.

흔히 도심에서 밀려난 장애우 시설은 시골, 그것도 주변에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골짜기로 깊숙이 들어가기 마련인데 ‘소망의 집’이 비록 도심은 아니지만 마을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지 않은 채 마을 한복판에 건물을 짓고 다른 집들과 마찬가지로 오손도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물 맑고 경치좋은 곳은 인심도 좋다는 옛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어디까지나 기자만의 생각이고 소망의 집 식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실은 기자의 상상과 좀 차이가 있었다.

처음부터 주민들의 반응이 좋았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정상용 원장이 소망의 집을 지으려고 할 때 이장이 농지전용은 안된다며 허가도장을 찍어주지 않아 정 원장이 이장댁 안방까지 찾아가 “장애는 전염병이 아니다. 우리 애들만큼 순진한 애들이 어딨냐”며 사정을 해 겨우 설득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이후에도 건물이 완공되기까지 마을 사람들이 간간이 트집을 잡아 방해를 해 공사가 많이 지연되기도 했단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은 마을 사람들이 그때처럼 집단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작년 7월 사회복지사업법이 개정되면서 사회복지시설들은 1인당 주거, 편의, 문화 시설들을 확대하고 자격있는 종사자들을 더 많이 두게 돼 소망의 집도 확장 공사에 들어간 것이다.

현재의 규모로는 26명의 가족 중에 13~16명밖에 생활할 수 없어서 서둘러 공사를 시작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번에는 전처럼 집단으로 몰려와 반대를 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또 작년 초 KBS 가요무대에서 상왕동 사람들을 초청한 적이 있었는데 통장이 소망의 집에 와서 같이 가자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 원장이 “웬일로 같이 가자고 하냐”며 슬쩍 떠 보았더니 통장이 말하기를 “소망의 집 식구들은 우리 동네 사람 아닌감?”이라고 말해 마을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좋아졌음을 느꼈다고 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마을 사람들의 마음도 자연히 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10년이 꼭 좋은 쪽으로 변하라는 법은 없다. 소망의 집 식구들이 하기에 따라 마을 사람들의 마음의 문이 더 닫혔을 수도 있었을텐데 지금부터 소망의 집 식구들을 만나 지난 10여년간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그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자.


“차라리 잘 다쳤어요”

먼저 소망의 집을 설립한 정상용 원장의 얘기부터 들어봐야 할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전 충북대 체육교육과에 다니던 정상용 씨는 선진국에서 레저스포츠로 한창 각광을 받던 행글라이더에 심취해 동아리를 창단, 후배들에게 비행기술을 가르치던 중 추락사고로 사지마비 장애를 갖게 되었다.

사고가 난 후 중환자실에서 1백일을 보내고 일반병실에서 다시 5개월을 보낸 후 정씨는 의사에게서 더 이상 치료할 것이 없으니 퇴원하라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이가 입원해 있는 동안 입원비와 치료비를 대느라 집안은 빚더미에 올라앉고 아버지는 이미 알콜 중독이 돼 완전히 파경직전이었다.

한편으로 자신 때문에 가정이 이 지경이 됐다 싶어 죽고도 싶고 또 한편으론 세상 사람들 모두가 원망스럽고 싫었다. 그저 죽고만 싶었다고 한다. “죽으려고 해도 죽을 수가 없었어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 때 조금만 움직일 수 있었어도 마루에 있는 농약을 마셨을텐데. 거기까지 기어갈 힘이 없어서... 정말 눈물이 나대요. 그래서 굶어죽으려고 굶기도 부지기수로 했지요. 그 덕에 지금 몸이 많이 쇠약해졌어요.”

이때부터 정 씨는 하루 종일 잠만 자고 눈뜨면 텔레비전만 보는 생활을 몇 개월째 지속했다고 한다. 그러다 이 생활도 지겨워서 도저히 못하겠다 싶을 즈음 친구 한 명이 찾아와 그이에게 복음을 전했다. 몇 개월 전만 해도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지만 그 때 당시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서 정 씨는 친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특히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성경 말씀이 마음에 와닿아 정 씨는 이때부터 매일같이 기도를 하며 뭐든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차츰 불안했던 마음도 안정되고 건강해져야겠다는 욕구가 생겼다. 우선 욕창에 걸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이는 푹신한 베개를 버리고 깡통을 베었다. 편안하면 나태해지기 쉽기 때문에 일부러 깡통베개를 베어 머리가 아파서라도 같은 자세로 오래 눕지 않도록 하고 잠도 점차 줄여나갔다.

대신 책을 많이 읽었다. 전에는 체육특기생으로서 신체의 건강만을 믿고 책을 멀리했는데 이제부터는 닥치는대로 책을 읽었다. 그 중 일본 작가가 쓴 ‘빙점’을 읽고 감동을 받아 직접 글을 써 볼 결심도 하게 됐다. 글을 쓰려면 글씨를 쓸 수 있어야 하는데 그이는 연필을 잡을 힘도 없어 수동타자를 구입해 입으로 막대를 물고 타자치는 연습을 했다. 차츰 속도가 붙었다. 얼마 안있어 전자타자기가 나오더니 곧 컴퓨터가 나와서 글쓰는 것은 훨씬 수월해졌다.

한 일 년여 기간동안 습작을 한 후 정 씨는 드디어 모 라디오 프로그램에 투고를 했다.

그 글이 채택이 돼 전국에 방송됐고 방송국으로부터 선물은 물론 청취자로부터 격려 편지도 수백통 받았다. 그 중 정 씨를 가장 기쁘게 한 선물을 아내 허숙자 씨의 편지였다. 국내 최대의 장애우시설인 거제도 애광원에서 보육사로 일하던 허숙자 씨는 친구에게 정 씨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듣고 편지를 쓰기 시작, 결혼까지 이른 것이다. 짧은 연애기간이었지만 그 동안 주고받은 편지만 4백통이 넘는데 허 씨는 이 편지들을 가장 소중한 가보로 간직하고 있다.

정 씨는 1백 80센티미터에 80킬로라는 건장한 신체를 잃었지만 사랑과 신뢰로 하나가 된 아내와 인생의 참 의미를 알게 된 지금이 더 좋다고 한다. “차라리 잘 다쳤어요. 안 다쳤으면 지금처럼 유익한 삶을 살지 못했을 거예요. 사고나기 전에는 ‘내 앞가림만 잘하고 남에게 피해 안주고 살면 되지’ 하고 생각했는데 참 안일한 생각이었죠.”


공주 장애우들이 평균 학력, 중졸도 안돼

정상용 씨는 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세상과 격리된 채 혼자서만 지냈던 것이 사람을 부정적이고 나약하게 만든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장애우들이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집에서만 생활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가족적인 분위기의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생활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내 허숙자 씨 역시 대형시설에 있어보니 아이들이 직접 할 수 있는 일도 시간이 지체되고 오히려 손이 더 많이 가기 때문에 보육사가 다 하는 형편인데 이것은 아이들 교육상 바람직하지 않다며 함께 이 일을 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소망의 집이 처음 생길 당시 공주에서 장애우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디에 어떤 장애우들이 있는지 그 통계나 등록이 전무한 상태에서 두 사람은 차를 빌려 타고 공주시내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수소문해 장애우들을 직접 찾아내야만 했다. 당연히 일이 더디게 진행될 수밖에 없는데 마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장애우단체를 대상으로 좋은 프로젝트를 모집해 채택되면 일천만원을 지원해주겠다는 광고를 냈다. 한창 컴퓨터 바람이 불고있던 때라 많은 단체들이 장애우에게도 컴퓨터교육을 시키자는 안을 올렸다.

그러나 1년 동안 정 씨가 장애우 찾기 조사사업을 하며 느낀 것은 공주시에 사는 장애우 중 학력이 중졸 이상인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즉 컴퓨터교육은 아직 이른 감이 있고 오히려 장애우에게 기초 교육을 시키는 것이 더 시급한데 학령기를 지나 취학할 수 없는 장애우, 중증 장애우는 학교에서 잘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함께 생활하며 교육도 받고 일도 하는 소규모 공동체를 운영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안을 올렸다. 이 중 기동력 확보를 위해 봉고차 한 대를 사는 것을 지원해달라고 요구했다. 정 씨의 제안이 설득력이 있었는지 한국기독교협의회에서는 직접 찾아와서 그이를 만나 얘기를 자세히 들어보고 최종적으로 정 씨의 안을 채택했다.

또 어떤 분은 소망의 집 건축을 위해 교통사고로 받은 보상금 1천만원을 소망의 집 부지를 사는데 쓰라고 선뜻 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십여명의 가족들이 살 집을 짓기에는 아직도 돈이 턱없이 모자랐다. 그래서 허숙자 씨는 공주시내에 있는 영아원에 나가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했다. 정 씨도 아내가 이렇게까지 고생을 하는데 혼자 집안에서 편히 누워 있는 것이 미안해 붓을 입에 물고 붓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하루 온종일 붓을 물고 쓴 글 중 잘 된 것을 내다 팔아 설립기금을 마련하는데 보탰다.

이 때 정 씨의 치아에 무리가 가 나중에 앞니를 전부 새로 해 넣어야만 했다고 한다. 또 건축 경비를 아끼기 위해 정 씨가 직접 설계도를 그리기도 했다.


소망보다 더 값진 게 어디 있나요

이런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설립된 소망의 집에는 현재 정 원장을 포함해 장애우 20명과 아내 허 씨를 포함해 간사 6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그런데 미인가시설인 소망의 집에 간사가 6명이나 되는 것도 특이하지만 그 중 5명이 대졸 이상의 고학력자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무임금으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공주대 일반사회교육과를 졸업하고 3년 전부터 사무 및 교육일을 맡고 있는 고진숙 간사, 한성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재활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허수영 간사, 공주대 특수교육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안면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중이지만 주말에는 소망의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권선희 씨, 소망의 집에 거주하며 공주대 특수교육과 4학년에 재학중인 한현희 씨, 공주대역사교육과를 졸업한 정명희 씨, 이 밖에도 공주대 장애우봉사동아리 ‘디딤돌’ 학생들이 소망의 집에서 운영하는 무형학교 ‘소망학교’의 교사로 자원활동을 하고 있다.

월급도 주지 않는 이곳에 이들은 도대체 무슨 매력이 있어서 일을 하는 것일까? 가장 고참인 고진숙 간사에게 질문을 던지자 고 씨는 밥 먹여주고 재워주면 됐지 뭘 더 바라냐고 오히려 기자에게 반문을 한다. 그러나 이 젊은이들이 소망의 집에 머무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장애우 관련 시설에서는 발견하지 못한 가능성이었다. 이론과 현실은 다르기 마련인데 소망의 집의 현재 운영방식과 앞으로의 계획은 학교에서 배운 이론 이상으로 건전하고 또 훌륭하기 때문이다.

“소망학교는 무형의 학교예요. 교육기회를 잃은 공주지역 1백여명의 학령기 장애우에게 기초 및 생활교육이라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시작했죠. 현재 장애학생 26명과 자원활동교사 30~40명이 순회교육을 하고 있어요. 현재는 소망의 집 2층에 약간의 교재가 있을 뿐이지만 2천년부터는 현재 훈련받고 있는 특수교육과 출신 교사들이 특수자율학교를 설립할 거예요.”

재활농장 역시 소망의 집 자립기반과 일거리가 필요한 장애우들에게 일터를 제공하여 자립하는 것을 목표로 2년 전 설립하여 현재 양축과 밭농사를 짓고 있다. 시작한지 이제 2년밖에 안됐지만 밭에는 호박, 고추, 콩, 파, 배추 등을 심어 반찬거리로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 모든 게 소망의 집 식구들이 간사들의 도움으로 직접 기르고 거둬들인 것이라니 더욱 의미가 깊다.

농장에서는 개와 소, 닭, 사슴을 기르는데 이 역시 소망의 집 식구들이 직접 키우고 있다. 농장을 운영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제 때에 좋은 사료를 주는 것일텐데 최근 아이엠에프로 사료값이 많이 올라 재활농장에서는 시중에서 사료를 사서 쓰지 않고 공주시내에 있는 제과점에 협조를 구해 굳어서 팔지 못하는 빵을 구해와 콩잎 등 곡물과 함께 준다. 이 때 굳은 빵을 고운 가루로 만들고 섞여있는 종이를 골라내는 일에 손이 많이 가는데 소망의 집 식구들 중 다리가 불편하거나 단순작업이 가능한 정신지체 장애우들이 이 일을 한다. 그러나 종이를 골라내는 일은 주의를 요하기 때문에 간사가 꼭 함께 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소망의 집의 자랑인 소식지 ‘참소망’은 작년 12월 정기간행물로 등록할 정도로 정성이 가득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두 달에 한 번 나오는 20쪽 소식지를 만들기 위해 소망의 집 식구 모두가 참여한다는 것이다. 사진은 허숙자 씨가, 편집은 정 원장이 기사는 식구와 간사가 돌아가면서 두 명씩 매달 두 꼭지씩 쓰고 디딤돌 회원의 글도 있다. 글을 쓰지 못한 식구들은 소식지를 발송하는 일에라도 꼭 참여를 한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발송처가 적힌 종이를 오리는 일, 종이를 봉투에 붙이는 일, 소식지를 접는 일 등을 열심히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소식지가 벌써 통권 10호 75호째 나왔다. 뿐만 아니라 소식지를 받아보는 공주 모방송국 프로듀서가 도움을 줘 소식지는 아마도 국내 공동체 중에서는 유일하게 녹음테이프로도 제작 발송되고 있다.


해도해도 안되면 이해해야죠

소망의 집에서 식구들을 받는 데는 나름대로 우선순위가 있다. 일순위는 무의탁 장애아로서 교육을 받지 못할 형편에 있는 사람이다. 그 다음이 결손가정에서 부모나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장애우, 그 다음은 가족이 있으나 집에서 있을 형편이 안되는 경우다. 그래서인지 가족들의 과거도 하나같이 어두웠다.

10년 전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아버지한테서도 버림받아 소망의 집에 들어온 안상진(16·정신지체·자폐)군은 처음엔 뭔가에 잔뜩 겁을 먹고 손을 계속 떨고 말도 전혀 못했는데 지금은 말도 잘하고 집중력이 강해 찬양곡을 두세 번만 들으면 금방 따라 부를 수 있다. 또 인사성도 밝아 마을 어른들을 보면 인사를 잘 하는데 한 번은 지나가는 차를 세워 인사를 한 적이 있어 한 동안 마을 사람들의 입에 심심치 않게 오르내리기도 했다. 같은 방을 쓰는 정윤자(27·뇌성마비) 씨와 유성희(26·류마티스 관절염) 씨. 윤자 씨는 결손가정에서 자라다 소망의 집에 들어오게 됐고 성희 씨는 집에서 ‘참소망’지를 받아보다가 좀 더 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 들어왔다. 두 사람 다 학구열이 높아 3년 전부터 검정고시를 준비, 올 여름 두 사람 다 합격을 했다. 합격하자마자 두 사람은 다시 중등과정 시험공부에 들어갔는데 밤 12시까지 환하게 불을 밝히고 공부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소망의 집의 마스코트, 주호(10·뇌성마비·언어장애)는 누나가 공주교대를 나온 교사인데도 운동을 전혀 하지 않고 누워만 있어 온 몸이 나무토막처럼 굳었는데 소망의 집에 와서 선생님들이 매일 주물러 주고 운동을 시켜 지금은 기어서 다닐 수 있다. 그러나 신변자립을 못해 학교에 나가지 못하고 일주일에 두 번 순회교사가 방문해 교육을 받고 있다.

주호의 단짝친구인 현명(10·정신지체)이는 인근에 있는 왕홍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고 있다. 특수학교에 입학했다면 제 나이대로 올해 3학년일텐데 정 원장이 현명이를 일반학교에 진학시키기 위해 1년 동안 교육청과 학교를 설득하느라 늦어진 것이다. 사실 현명이는 말도 잘하고 소망의 집에 있는 식구 중에서 아주 똘똘한 편이다. 그래서 나이로는 형이지만 정신지체 장애가 있는 상진 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대들기도 하는데 현명이가 특수학교에 진학하면 분명히 대장노릇을 하며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알고 으시댈거란 우려 때문에 정 원장은 굳이 현명이를 일반학교에 입학시킨 것이다. 1학년 때는 학교버스가 집 앞까지 와도 혼자서는 학교에 못가 소망의 집 선생님이 데려다주곤 했는데 이제는 혼자서도 잘 간다. 친구들도 제법 사귀었다고 한다.

오봉남(35·정신지체·지체장애) 씨는 팔십넘은 노모가 치매에 걸리고 형수마저 집을 나가자 돌봐줄 사람이 없어지자 이웃 사람들이 소망의 집에 데리고 왔다. 처음엔 영양실조로 몸이 퉁퉁 부어 있었는데 소망의 집에서 한약도 지어먹고 사랑이 담긴 음식을 제 때에 먹으면서 지금은 살이 보기 좋을만큼 올랐다. 또 다른 사람들이 웃으면 그 뜻은 잘 몰라도 함께 웃을 정도로 성격도 많이 밝아졌다.

시각장애가 있는 할아버지와 살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돌봐 줄 사람이 없어 소망의 집에 온 정순영(75·편마비) 할머니는 처음 이곳에 올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다고 한다. 워낙 연세가 많으셔서 오히려 방금 한 일도 자주 잊어버리시지만 주호만큼은 잘 챙기신다. 슬하에 자녀가 없기 때문에 특히 주호가 자식같기도 하고 손주같기도 하신가 보다.

그러나 식구들 모두가 다 정 원장의 의도대로 눈에 띄게 좋아지는 것만은 아니다. 박은희(26·정신지체) 씨는 남들이 분주하게 일할 때 혼자서 거울을 본다거나 식사할 때도 음식을 가리고 반찬투정도 한다. 또 누군가 옆에서 주의깊게 보지 않으면 아무거나 입에 넣기도 한다.

또 여드름이 많이 난 이철우(17·정신지체·언어장애) 군은 양말에 구멍을 뚫는 버릇이 있다. 아무리 가르쳐도 고쳐지지 않자 결국 허숙자 씨가 포기해 버렸는데 허 씨는 “아무리 해도 안되는 건 이해하는 수밖에 없죠”라며 철우 군의 구멍 난 양말을 보고 웃고 만다.

살다보면 해도 해도 안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땐 억지로 하기보다 이렇게 허 씨처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소망의 집 사람들이 마을 사람들의 반대나 경제적인 어려움 등 끊임없이 밀려오는 일들에 대해 상처받지 않고 지금까지도 때타지 않은 밝은 웃음을 간직할 수 있는 비결인 것 같다. 대신 철우 군은 딱딱한 빵을 가루로 만드는 일은 아주 잘했다.

1박 2일간의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려고 하는데 윤자 씨가 기자를 조용히 불렀다. 초코파이 두 개를 가방에 넣었으니 가는 길에 먹으라는 것이다. 초코파이는 윤자 씨가 아껴먹는 간식인데 그 중 두 개를 기자에게 준 것이다. 문득 초코파이는 ‘정’이라는 텔레비전 광고가 생각나면서 윤자 씨의 때묻지 않은 자상한 마음이 정말로 가슴에 와닿았다.

소망의 집 사람들은 단 하룻밤을 함께 지낸 사람에게도 이런 감동을 주는데 하물며 10년을 함께 한 상왕동 마을 사람들에게야 더 말할 것도 없을지 모른다.

저마다 꿈을 갖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마음, 노력해도 안되는 것이 있다면 솔직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마음, 작은 것이라도 나누려는 마음, 지나가는 차를 불러 세워서까지 인사하는 순박함,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씨가 상왕동 마을 사람들의 닫힌 마음을 활짝 열어놓았던 것이다.


글/ 노윤미 기자

작성자노윤미 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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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근수님의 댓글

김근수 작성일

글 감사합니다
저는 어제(6월8일)친구가 간다고 할길래 처음으로 따라가게 되엇읍니다
진 짜로 마음은 잇엇는데 실천을 못햇거든요 그런데 가보니 잘햇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친구한데 다음에 갈때 꼭간다고 햇지요
그런데 지금 말씀하신 곳은 옛날 이야기 에요
엄청나게 변화가 왓어요 난 시설을 보고 놀라왓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근무 하시는 분들 존경합니다
나가 글재주가 없서서 그렇지 글을 잘쓴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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