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전 그냥 제자리를 지킬 뿐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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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시 송내구 한라마을 내에 있는 한라종합사회복지관, 그 곳에서 약 오십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왕성교회 건물 사층에 들어서니 방방마다 웬 상자가 가득하다. 이십여명의 사람들이 부산한 손놀림으로 시스템다이어리를 만들고 있는 이곳이 바로 한라종합사회복지관 부설 장애우공동작업장이었다.
기자가 찾아간 날은 특히나 인근 아파트단지에서 일당을 받고 왔다는 주부들도 한데 어울려 세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왁자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 일감이 밀려 전날에도 열두시까지 일했고 오늘도 아마 그렇게 될 것 같다며 낯선 사람이 들어왔는데도 기척을 못 느끼고 분주하게 일하는 사람들을 보니 지금이 아이엠에프 맞나, 그것도 장애우공동작업장 맞나 하고 다시 간판을 돌아보게 된다. 그러면서 기자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퍼짐은 어쩔 수 없다. 경기불황 이후 물량을 얻지 못해 문을 닫는 자립작업장이 부지기수라는데 이런 곳이 있다니, 기분이 좋아진다.
어느 날 닥쳐온 이혼과 장애
실은 이 작업장이 이 만큼의 궤도에 오를 수 있기까지의 일등공신이라는 칭찬을 그야말로 ‘자자하게’ 듣고 있는 배정임 씨(41)를 만나러 온 길이었다. 구십칠년 십이월 삼십일일, 한 해의 마지막 날에 문을 열게 된 이 자립작업장의 전신은 구십육년부터 시작된 한라종합사회복지관 내 작업장이라고 했다. 구십오년 십일월에 문을 연 복지관이 위치하고 있는 일명 한라마을은 영구임대아파트단지로 구백여세대 가운데 육백오십세대가 법적 생활보호대상세대고 여기에 생활보호노인이 이백여명, 장애우도 이백사십여명 가까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이들에게 일자리를 주어야 한다는 사실은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과제였기에 복지관에서도 부랴부랴 주민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관내에 작업장을 마련했다. 그러나 복지관도 그리 넉넉한 공간이 아니었기에 작업장도 좁은 공간에 마련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정부와 자치단체 지원금과 후원금으로 근근이 운영되고 있는 복지관 입장에서 새로운 공간에 부지를 마련한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었다.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이 전해지고 복지관에서도 열심히 후원사업을 벌여낸 결과 구천만원이 넘는 전세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꿈이 얼마간은 실현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 복지관 직원이 작업장에 상근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작업장을 책임지고 맡아서 운영할만한 사람을 물색하던 중 일순위로 배정임 씨가 꼽혔던 것이다. 이전에 복지관 작업장에서도 유동이 많은 다른 장애우들과 달리 약속한 기한 내에 다해내지 못한 일이 있으면 두 딸을 데려와서라도 꼭 기일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책임감이 직원들 사이에서 이미 잘 알려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견이 없었다.
처음 물리치료를 받기 위해 한라복지관에 드나들게 된 배정임 씨에게 사실 물리치료 못지않게 시급한 것이 일자리를 찾는 일이었다. 당시 그는 결혼에 실패했기 때문에 자신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서른해가 훨씬 넘게 자유롭게 움직이던 한쪽 다리를 잃고 다른 한 다리도 자유스럽게 못한 몸이었다. 곱고 선하게 생긴 그이의 얼굴에서는 고생한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없겠지만 지난 시절 그이를 주저앉혔던 고난은 그렇게 미처 소화할 틈도 주지 않고 한꺼번에 겹쳐 왔다. 그이 나이 서른여섯이던 해였다.
이혼 후 세 딸과도 헤어져 혼자 살 집을 마련해 들어간 첫 날, 조카랑 같이 자그맣지만 이제 그의 유일한 안식처가 된 새 집에서 잠을 청한 지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굉장한 폭음과 함께 정신을 잃어버렸다. 가스사고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다른 여러 세대가 살고 있는 아파트 가운데 그이의 집만 제일 크게 터진 것이었다.
“지금도 이유를 모르겠어요. 한참 잠을 자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폭발한 거니까요. 암튼 조카도 많이 다쳤고 저도 깨어나 보니 한 쪽 다리가 벌써 잘려져 있고 다른 한 쪽도 살이 거의 남아나질 않았더군요. 무너져 내린 담이며 천장에 다리가 깔린 거였대요.”
그이가 병원에 있는 동안 진상을 조사하고 적절한 보상을 받아내기 위해 언니가 열심히 뛰어 다녀봤지만 무슨 농간인지 아파트 건설회사나 다른 어떤 곳에서도 책임지고 보상을 해주겠다는 곳이 없었다. 조카의 치료비도 그이보고 물으라는 얘기만 들려왔다. 간신히 부서진 아파트 구조물만 보수해준 정도였다.
그러나 병원에서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할 정도로 심한 장애를 갖게 된 몸으로 누워있던 그이로서는 그런 부당한 대우에 제대로 항거도 못하고 엄청난 치료비를 자신의 돈으로 다 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년여를 꼬박 병원에서 지내다 나오니 살 길은 더욱 막막했다. 생활보호대상자로 얼마간의 정부 지원금을 받게 된 것만도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데다 몸을 추스르기 위해 계속 물리치료 같은 것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저렴하게 치료받을 수 있는 곳을 찾다보니 한라복지관을 드나들게 된 것이다.
“눈 앞의 이익을 쫓아 움직이진 않아요”
배정임 씨가 이 공동작업장에서 맡고 있는 직책은 말하자면 작업반장이다. 사실 정부 지원을 받는 보호작업장 같은 곳에서는 그이와 같은 직책이 있는 사람의 최소한의 보수를 배려할 수 있도록 지원금을 지급하고 있다. 그렇지만 현재 자립작업장은 지원이 전혀 없어 여력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그이가 잘 알고 있다. 이 작업장도 구에서 운영지원비조로 지원하는 이십만원이 전부일 뿐이다.
이 작업장에서는 자나 칼과 같은 문구용품을 주로 만들고 있고 최근에는 다이어리 마무리제작이나 포장 같은 일도 들어오고 있다. 보수는 그야말로 개인이 얼마나 재게 손을 놀렸느냐에 따라 결정되는데 하루 동안 해낸 물량을 기록하고 계산해서 나중에 보수로 지급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이 작업장에서 하고 있는 문구 조립 제조일은 공정전체가 깔끔하고 위험하지 않아 좋긴 하지만 워낙 단순 반복되는 간단한 작업이라 개당 단가가 높지는 않다. 그래서 수익이 높은 작업을 했을 때 많게는 오십만원 정도까지 오르지만 평균적으로는 이십만원에서 삼십만원을 오르내리는 수준이다. 특히 정신지체장애우의 경우는 그보다 못할 때도 많다. 자원활동자들이 정신지체장애우들의 공정을 옆에서 도우는 틈틈이 해내는 몫을 합쳐 그나마의 보수도 받아갈 수 있는지 모른다. 더구나 이곳은 정신지체장애우가 여덟 명, 지체장애우가 두 명, 청각장애우 한명으로 구성된 상황이기 때문에 전체 매출이 그다지 높지 못하다.
이런 상황에서 점심은 복지관에서 식사를 가져와 제공해준다고 하더라도 월세 형식으로 내는 건물관리비 삼십만원 가운데 구 지원비 이십만원을 뺀 십만원이 외주 관리상 육칠만원씩 나오는 전화세나 삼사만원씩 드는 식수비 같은 이런 저런 부대비용은 고스란히 적자로 남게 된다.
이런 운영사의 어려움은 아랑곳없이 보수가 너무 적다며 금방 그만 두었다가 또 갈 곳이 없어 다시 나오다가 또 쉽게 결근하는 등 불성실하게 들락거리는 장애우들도 많아 정임 씨 입장에서는 속상하다. 물론 경증 장애우들에게는 이곳의 보수가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들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저런 사람들도 취업이 그렇게 안되나 싶어 그들을 여기까지 찾아오게 하는 장애우들의 고용현실이 새삼 의아스럽고 놀라울 뿐이다.
그런데 부천시에서는 신청한 모든 생활보호대상자들이 일년에 열흘에서 보름 정도는 번갈아 가면서 취로사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이전에는 작업장에서 일하고 있는 장애우들도 자신의 차례가 되면 일당이 더 높은 취로일에 몽땅 몰려 가버려 작업장이 썰렁하게 되곤 했다.
정임 씨도 돈만 생각한다면 다른 장애우들과 함께 취로사업에 몰려 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출결사항 관리를 하고 물량의 기한을 생각해 업무를 조절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불평만 늘어놓는 장애우들을 다독이는 일까지 해내야 하는 그 ‘반장’ 자리에 미련이 많은 것도 아니다.
월 삼만원의 직무수당에 만족하며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자신만이라도 그 자리를 지켜야 할 것 같아서다. 자신마저 이 작업장을 외면한다면 자신보다 더 형편이 어려운 장애우들은 이제 더 이상 돌아가 일할 곳이 없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리라.
그래도 일감이 끊기지 않고 계속 들어온다는 사실이 배 씨에게는 무엇보다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 작업장에 물량을 대주고 있는 정원산업의 윤배근 사장은 인근 규모가 더 큰 복지관에도 일감을 대주곤 했었는데 이제 그쪽보다도 이 작업장에 거의 매일 붙어 있다시피 하며 더 열심히 물량을 대준다고 한다.
윤 사장이 그렇게 이 작업장에 애정을 갖게 된 것도 사연이 있다.
아이엠에프 이후 많은 중소업체가 그러했던 것처럼 윤 사장도 최근 부도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작업장 입장에서도 유일한 거래처로부터 물량이 끊길지도 모르는 위기의 시기였다.
그 때 자신들과 같은 장애우들을 믿고 일거리를 주었던 윤 사장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의 표시로 작업장의 장애우들은 월급받는 것을 미루었다. 액수로는 합해봐야 얼마 안되는 금액일지도 모르지만 공장의 부도사태 먼저 원만히 해결하는데 전력을 다하라는 뜻에서였다.
이런 장애우들의 맘 속 깊은 응원을 가슴에 새기며 윤 사장은 흔들리던 사업체의 경영위기도 다잡아서 열심히 뛰고 있다. 덕분에 덩달아 작업장의 장애우들도 이렇게 봄 이후부터 계속 밀리는 일감 속에서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이 자립장에 적을 두고 있는 장애우는 열 한 명이지만 일감이 밀릴 때는 인근 저소득 가정에 많을 때는 삼사십 세대까지 외주를 주곤 한다.
공동작업장은 가정 같이 소중해요
이렇게 밖에서 정신없이 일하고 집에 돌아온 배정임 씨에게는 또 어머니의 몫의 일이 기다리고 있다. 작업장에 다니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자 다행히도 잠시 헤어져있던 두 딸과 다시 모여 살 수 있었다. 큰 딸은 고등학생이라 사정상 함께 살지 못하지만 조만간 모두 같이 살 수 있을 거라고 그이는 믿고 있다. 그런데 잠시 떨어져 살고 있는 동안 장애우가 되어버린, 그래서 예전처럼 쌩쌩하게 집안일을 할 수 없는 엄마를 사춘기 딸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우리 딸들 참 착해요. 제가 이전보다 어쩔 수 없이 심부름을 많이 시키게 되는데도 절 참 잘 이해해줘요.”
그래도 장애우가 되어 달라진 신체에 적응하는 일은 오롯이 그이 자신에게 남겨진 일이다.
“저를 쳐다보는 사람들 중에는 가끔 ‘중간에(중도에) 그러셨죠’라고 먼저 아는 척 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게 드러나나 보죠? 암튼 지금 바지를 입어서 그렇지 벗겨놓고 보면 (다리가) 형편없어요.”
서른 다섯해가 넘게 여자로서 아무렇지 않게 대하고 살아왔던 치마가 이제 그이에게 가까이 하기엔 버거운 그 무엇이 되어버린 것이다. 상처난 다리는 바지로 가려도 예전과 달리 목발에 기대 불편한 자세로 걸을 수밖에 없는 걸음걸이까지 가릴 수는 없다. 거리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길에는 ‘볼테면 봐라’하는 심정으로 담담해졌지만 초라하게 보이고 싶진 않아 거리로 나설 때면 입술연지라도 바르고 나가려고 한다며 쑥스러운 듯 웃는다.
배정임 씨와 같이 한 사람이 인생의 중간지점에서 달라져버린 삶을 대하게 됐을 때, 이제까지 늘 대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삶에서 확연히 달라졌을 때 그것을 마주 대하는 태도는 여러 형태일 것이다. 그 가운데 “부천지역에서 가장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얘기를 듣는 배정임 씨의 삶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눈에 담아 두는 것은 어떨지.
“제가 뭘요, 전 그냥 제 자리를 지키는 것뿐인데요”라는 그이는 손을 내젓지만 배정임 씨의 존재와 그이가 소중하게 지키려고 하는 것이 자립작업장의 존재는 현재 장애우복지 현실에서 무엇보다 소중하다. 아직도 대다수 장애우들에게 절실한 일자리와 일터를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어찌보면 험난한 사회 속에서 약간 떨어진 온실과 같은 공간이긴 하지만 이곳에 더욱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물과 주위의 따스한 햇볕이 아닐까 한다.
글/ 한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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