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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나를 새롭게 하는 힘

사람 사는 이야기 휠체어와 낙타를 타고 인도 여행을 다녀온 전윤선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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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일이다.
일상이 지루하고 답답할수록 여행은 더욱 유혹적이다. 왠지 여행을 떠나면 새로운 세상에서 무언가 즐거운 일이 생길 것만 같아 상상만으로도 갑갑했던 마음이 풀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여행을 떠나기는 쉽지 않다. 익숙한 일상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가는 일은 마음을 설레게도 하지만 동시에 불안감도 안겨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애를 고려하지 않은 채 비장애인에게만 맞춰 설계된 환경 탓에 어딜 가나 어려움을 겪어온 장애인들의 경우라면 낯선 곳에 대한 불안감은 다른 사람보다 더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국내도 아니고, 편의시설이 비교적 잘 갖춰진 유럽이나 미국도 아닌 인도를, 휠체어를 타고 여행한 사람이 있다. 안산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무국장 전윤선 씨, 그가 바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인도 북서부 타르사막을 가로질러 갠지스강이 흐르는 바라나시와 캘커타를 돌아오는 2달간의 대장정을 다녀온 전윤선 씨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 저녁이면 낙타몰이꾼들이 신기하게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바람이 피해가는 곳을 찾아 자리를 잡고 저녁을 하면서 그 지역 노래를 들려줬다. 쏟아질 듯 반짝이는 별 아래에서 같이 간 일행들은 저녁 내내 낙타몰이꾼의 노랫가락을 배경음악으로 옹기종기 둘러 앉아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고 이야기는 밤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이야기가 끊기면 사방이 조용해서 별빛 반짝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 별빛들은 얼마나 밝은지 텐트 안에서도 달의 자취뿐만 아니라 별빛까지 그대로 비쳤다. (사진제공: 전윤선)     인도를? 낙타와 휠체어를 타고??

그를 만난 건 지난해 7월, 헌책 카페 ‘캘커타’(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하는 여행을 기획하는 온라인카페 ‘캘커타코코넛’에서 연 헌책방 겸 카페. 2006년 8월호 p64 참고)를 취재하면서였다.

취재 후 카페 분위기에 마음을 뺏겨 친구와 함께 다시 캘커타에 들렀을 때, 전윤선 씨는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전 씨는 문 밖에 전동휠체어를 세워두고 의자에 옮겨 앉은 터라 사실 처음엔 그에게 근육장애가 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런데 어라? 인도 여행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가 휠체어를 타고 갔다 왔다는 거다. 인도를? 낙타와 휠체어를 타고? 그때부터 귀가 쫑긋 세워지면서 그의 여행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졌다. 그래서 인도 여행 이야기를 해달라고 여러번 졸랐는데, 이제야 듣게 됐다.

“여행을 결정할 때, 여행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별로 없었어요. 그보다는 2달이나 여행을 다녀오려면 다니던 직장을 관둬야 한다는 게 더 마음에 걸렸죠. 갔다 와서 백수로 지내게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웃음).”

사실 걱정과 달리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안산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무국장으로 취직한 그는 이미 국내에서는 안 다녀온 곳이 없다고 할 만큼 여행을 많이 다녔고 오지 여행 경험도 꽤 된다고 했다. 그래서 여행을 망설일 때 자신의 장애로 인한 걱정은 별로 안했다고.

35살까지 근디스트로피 몰라 고생

물론 그가 어릴 때부터 여행을 다녔던 건 아니었다. 여행에 대한 동경은 많았지만 정작 몸도 약했던 데다 결혼마저 이제 막 놀러 다닐 대학교 1학년 때 하는 바람에 오히려 제대로 된 여행은커녕 대학을 졸업하도록 친구들과 엠티조차 제대로 가 본 적이 없었다.

 “처음엔 괜히 일찍 결혼했다고 후회막급이었죠. 친구들은 다들 놀러 다니는데, 저만 학교 공부하랴 학교 끝나면 애 보랴 정신이 없었으니까.”

86학번. 한창 민주화 열기가 모든 대학을 휩쓸었을 때도 그는 학업과 엄마 노릇을 병행하느라 너무 바빠 학생운동에 관심을 둘 겨를조차 없었다. 그런 그가 본격적으로 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건 아이를 어느 정도 길러 놓고 직장을 나가면서부터다. 고건축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국문과를 졸업하고도 건축설계사자격증을 따 관련 업계에 취직했고 덕분에 출장은 물론 유적지 답사 여행도 자주 다니게 됐다. 그게 여행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 무렵 이미 그의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기 시작했다. 20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이유도 모르게 계단을 오르는 게 힘들어졌고, 걷는 것도 쉽지 않았다. 건축 일은 현장을 다녀야 하는데 몸이 그걸 따라주지 않자 그는 결국 일을 포기해야 했다.

그때만 해도 그저 몸이 약해서 그렇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쪽으로 자연스레 관심을 돌렸다. 그래서 선택한 건 그때 한참 뜨기 시작한 캐드(CAD, 컴퓨터로 설계나 도면을 그리는 프로그램)였다.

그 뒤로도 그는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여러 가지 자격증을 땄다. 그러면서 직장도 여러 차례 옮겼다. 그러나 정작 걷는 게 힘들어지는 원인은 그의 나이가 서른다섯이 되도록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직장에서 하는 건강검진에서 보통 20~30정도가 나오는 간수치가 무려 500~600으로 높게 나와서 괜스레 ‘간’ 검사만 계속 받았지, 그게 근디스트로피의 한 증상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장애라는 걸 몰랐기 때문에 그는 직장에도 걷는 게 불편하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불편하게 걷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회사에 출근하면 의자에 앉아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화장실을 안 간 건 물론이고 구내식당이 4층이라 올라갈 수 없어서 매일 점심을 굶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겐 점심을 굶는 이유에 대해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당당하게 요구하겠죠. 식당을 1층으로 옮기던가 아니면 밥 좀 가져다 달라고. 근데 그땐 그런 걸 몰랐어요. 그냥 제 건강이 안 좋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걸 차별로 읽을만한 시각이 그땐 없었어요.”

결국 출장도 못가고 직장에서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 때쯤 스스로 다니던 직장을 관뒀다.

        ▲ “생각해보면 장애가 있다, 없다는 의식 자체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편견인 것 같아요.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데 그걸 인정하지 못하고 평균을 내서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인식이 장애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해요. 장애가 있든 없든 사람은 그저 제각기 개성을 지닌 자연의 일부인 거죠.”(사진제공: 전윤선)     장애, 그러나 본질은 변한 게 없다

그가 근디스트로피라는 걸 알게 된 건 불과 5년 밖에 되지 않았다. 흔히 희귀난치성 질환으로 알려진 근디스트로피는 근육을 유지하는 단백질의 결핍으로 근력이 떨어져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병이다. 진행성이기 때문에 발병 초기에는 일반인과 다름이 없지만 오랜 기간에 걸쳐 병이 진행되면서 움직임이 느려져 계단을 오르는 것은 물론 걷는 것도 어려워진다.

“근디스트로피 진단을 받고 오히려 마음은 다행이다 싶었어요. 그때부터 딱 2주 동안 고민했어요. 처음엔 이제 내 인생이 이대로 끝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없었다. 다만, 혹시 자신이 가족의 짐이 되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에 잠시 자살을 생각했단다. 그리고 당시 중학생이던 아이에게 유전이 된 건 아닌지도 걱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모든 생각을 2주 만에 정리했다.

2주간의 고민 끝에 그는 근디스트로피 진단을 받기는 했지만 전윤선이라는 자신의 본질은 변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아들에게도 솔직하게 털어놨다. 근디스트로피가 유전가능성이 있다는 말과 함께 어떤 병인지 말이다.

“재미있는 건, 오히려 장애진단을 받고 전동휠체어를 타면서 몸이 더 건강해졌다는 거예요. 예전엔 조금만 피곤해도 코피를 자주 쏟았거든요. 고등학교 때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을 땐 하루 세 번도 쏟았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어졌어요.

결국 생각해보면 장애가 있다, 없다는 의식 자체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편견인 것 같아요.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데 그걸 인정하지 못하고 평균을 내서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인식이 장애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해요. 장애가 있든 없든 사람은 그저 제각기 개성을 지닌 자연의 일부인 거죠.”

그는 진단을 받기 전에 이미 다니던 직장을 관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여행은 틈나는 대로 다녔다. 몸이 조금씩 힘들어지는 동안에도 여행은 다녔기 때문에 오히려 여행에는 적응을 한 셈이었다.

일상의 끈을 풀고 인도로!

그래도 해외여행은 인도가 처음이었다.
근육장애 진단을 받으면서 한국근육장애인협회로 들어와 새로 일을 하고 있던 그는 직장을 관둬야 한다는 생각에 잠시 망설였으나, 고민하다보니 장애인권운동은 어디에 매여 하지 않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생각이 그쯤에 이르자 그는 일단 직장을 관두고 여행을 가기로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아직 비용의 문제가 남아있었다.

“배낭여행이라고는 하지만 2달간 여행을 하는데 못해도 2백만원은 들어요. 대부분은 교통비지만, 그 비용 마련이 쉽지 않았죠. 그런데 여행을 기획한 ‘캘커타코코넛’에서 고맙게도 제 여행비까지 마련해주기 위해 바자회를 열어줬어요. 덕분에 돈 문제도 해결이 됐죠.”

다 준비가 됐는데, 출발 전에 정작 속을 썩인 건 여행자보험이었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여행자보험 가입을 계속 거절당했던 것. 결국 그는 인터넷을 통해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가입을 해야 했다. 사고가 나면 제대로 보상받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그래도 가입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선택한 궁여지책이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그는 2005년 11월 14일 일행 6명과 함께 인도로 떠났다.

“인도 공항에 내리니까 허름한 게 무슨 시골 버스정류장 같았어요. 그래서 오히려 친숙했죠. 근데, 공항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타면서부터 충격 그 자체였어요.”

공항에서 나와서 탄 택시는 커다란 짐을 멘 6명의 일행을 모두 한 차에 태워 출발했단다. 그리곤 사람과 차, 릭샤(인력거의 일종)가 뒤엉켜 정신이 하나도 없는 거리를 총알처럼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 무너질 듯 허름한 건물을 배경으로 길가엔 노숙자로 보이는 시커먼 사람들이 줄지어 누워 있고, 거리 곳곳엔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건 물론이고 개떼와 소들까지 몰려다녔다.

게다가 오물로 인한 냄새와 인도 특유의 진한 향냄새가 뒤섞여 속이 다 울렁거릴 정도였다고. 그는 올드델리 주변이 마치 전쟁이 막 끝난 것 같은 모습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첫 이틀간은 ‘내가 여길 오다니 미쳤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그런 모습이 익숙해지면서 그런 생각은 조금씩 바뀌었다.

모래사막을 낙타 타고 횡단하다
특히 델리에서 자이살메르 성을 거쳐 타르사막으로 들어가면서 그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황토색 사암으로 이뤄진 타르사막의 관문 도시 자이살메르는 저녁이면 황금빛으로 물들어 오래된 성의 기품을 발산했다.

이곳에서 그는 낙타를 처음 봤다. 처음엔 겁이 났는데, 의외로 낙타 위 안장은 자동차라도 탄 것처럼 편안했다. 금세 낙타와 친해진 그는 휠체어 대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낙타를 타고 2주간 타르사막을 여행했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의 뙤약볕 아래에서 하루 종일 낙타를 타고 걷는 건 지루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예상과는 달랐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모래사막엔 의외로 다채로운 동물들이 살고 있었고, 아침이면 양치기들이 그곳으로 양과 염소 등을 몰고 풀을 먹이러 들어왔단다.

게다가 저녁이면 낙타몰이꾼들이 신기하게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바람이 피해가는 곳을 찾아 자리를 잡고 저녁을 하면서 그 지역 노래를 들려줬다. 쏟아질 듯 반짝이는 별 아래에서 같이 간 일행들은 저녁 내내 낙타몰이꾼의 노랫가락을 배경음악으로 옹기종기 둘러 앉아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고 이야기는 밤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이야기가 끊기면 사방이 조용해서 별빛 반짝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 별빛들은 얼마나 밝은지 텐트 안에서도 달의 자취뿐만 아니라 별빛까지 그대로 비쳤다.

사막의 밤은 한국의 겨울만큼 추웠다. 한겨울마냥 옷을 잔뜩 껴입고 오리털파카에 침낭을 두르고도 추워서 잠이 오지 않았다. 견디다 못해 아이디어를 낸 것이 온돌처럼 저녁을 할 때 썼던 숯을 모래 속에 묻고 그 위에서 자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하니까 텐트를 치지 않아도 견딜 만 했다.

전씨는 사막 여행 중 들렀던 몰이꾼 마을도 잊지 못했다.

“모래 위에 나뭇가지로 대강 만든 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어요. 우리는 한 몰이꾼 집에서 잤는데, 그가 그 마을에서는 꽤 잘 사는 편에 속했지만 집 사정은 비슷비슷했죠. 나무로 만들어서 밤에 누우면 별이 보이고, 침대도 무릎쯤 오는 나무 평상이 전부였어요.”

전씨 일행은 그곳에 미리 준비해 갔던 의약품과 학용품을 전달했다. 출발 전에 미리 준비한 의약품과 평소 오프라인 카페 캘커타에 놓아뒀던 저금통에 모인 돈으로 마련한 학용품이었다. 

그는 학용품을 받고 좋아하던 아이들의 얼굴을 잊지 못했다. 별것 아닌 병이나 사고조차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서 장애로 굳어진 사람, 작은 상처인데도 약이 없어 손이 퉁퉁 붓도록 치료를 받지 못했던 사람, 그리고 디지털 카메라에 찍힌 자신의 모습을 신기해하고 좋아하던 아이들의 모습과 그들 머리에 난 기계충 흔적, 뭔가를 먹으면 우르르 모여들어 쳐다보는 바람에 먹지 못하고 다 나눠줘야 했던 기억들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여행지의 풍광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을 통해 그곳을 느끼고 기억할 줄 아는 여행, 전윤선 씨는 바로 그런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 갠지스 강

갠지스강이 흐르는 바라나시에서도 그는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기억했다.

“타르사막을 거쳐 갠지스 강으로 갔는데, 갠지스 강은 아시다시피 죽은 이들을 화장해 강물에 떠내려 보내는 곳이잖아요. 그래서 강 주변에 화장터가 쭉 늘어서 있죠. 그 곳에서 보면 돈이 많은 사람들은 장작을 많이 사서 시체를 완전히 태워 강물에 떠내려 보내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없어서 장작을 충분히 사지 못하니까 시체가 타다 말고 떠내려가요.

그러다 강물 밖으로 미처 타지 않은 시체가 밀려나오면 개떼들이 그 시체를 뜯어 먹죠.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광경인데, 그곳 사람들은 그 바로 옆에서 목욕을 하고 양치를 하고 빨래를 해요. 그게 그들에겐 아무렇지 않은 거죠.
그렇게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 그게 바로 갠지스강이고 바라나시예요.”

부처가 깨달음을 얻고 최초로 설법을 했다는 싸르나트에서도 그는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여행을 다닌다는 대학생부터 휴가 중인 의사, 그곳에 있는 한국 절인 ‘녹야원’의 스님까지. 그리고 그곳 중국 절에서는 소아마비로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스님도 만났다. 인도는 워낙 장애인들이 많아 장애인이 노점을 하거나 구걸을 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지만 장애가 있는 스님을 만난 건 처음이었다.

중국 절 앞에서 시주를 받는 일을 하고 있는 그는 매일 다른 스님들의 도움을 받아 그곳에 나온다고 했다. 그 스님이 전 씨가 타고 간 휠체어에 많은 관심을 보이면서 무척이나 부러워해서 전씨는 여정이 남아있지 않았더라면 휠체어를 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 말엔 아직도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인도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캘커타에 있는 ‘마더 테레사의 집’이었다.

“꼭 우리나라 꽃동네처럼 마을이 전부 대규모 시설로 가득했어요. 처음 봤을 때, ‘아니, 자기네들은 시설을 다 없애면서 왜 남의 나라에 와서 대규모로 시설을 짓고 봉사한다고 그러지?’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대규모 시설이라도 필요로 하는 인도의 사정은 이해하지만 역시나 그곳에서도 시설의 문제들이 눈에 보이더란다. ‘마더 테레사의 집’은 대략 2백명쯤 되는 자원봉사자들이 새벽 미사를 드리고 한 곳에 모이면 각자 자신이 원하는 시설을 신청해 자원봉사를 하러 갈 수 있는데 그는 장애유아시설에 갔다가 그곳에서 급여를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때리는 모습을 여러 차례 목격했던 것. 돈을 벌기 위해 그곳에서 일하는 이들은 ‘마샤’라고 불렸는데, 그들은 수녀들이 있는 앞에서만 잘하고 수녀가 사라지면 아이들을 자주 때렸다. 게다가 마샤들은 봉사자의 시선이나 말은 안중에도 없었다.

결국 그 일을 한국인 수녀에게 말해서 다시 교육을 받게 하긴 했으나, 사람들은 그런 일이 자주 있으며 그 때문에 가끔 마샤가 쫓겨나는 일도 있지만 잘 고쳐지지 않고 계속 반복된다고 했다. 게다가 때가 크리스마스가 가까웠던지라 그곳에서도 인도 부유층들이 시설에 찾아와 물건을 기증하고 사진을 찍는 모습도 자주 보여 씁쓸했단다.

        ▲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전윤선 씨와 인터뷰를 마치고 떠오른 한자어다. 전윤선 씨의 삶을 돌아보니 그는 여행을 가든 안가든 언제나 자신의 위치에서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었다. 이것이 전윤선 씨만의 매력이 아닐까. 아시아대륙을 횡단하고 새로워져서 돌아오는 전윤선 씨 모습이 벌써부터 기대된다.(사진제공: 전윤선)     인도에 대한 그의 기억은 여기까지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요즘 한창 안산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을 하느라 바쁘다. 여전히 이 곳에서도 사람을 만나고 활동가를 키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어느새 전윤선 씨가 인도 여행을 다녀온 지도 벌써 1년. 전윤선 씨는 또다시 1~2년 안에 티벳과 몽골 등 아시아대륙을 횡단하겠다는 새로운 여행을 계획 중이다.

그에게 여행은 그저 그곳에 놓여있는 것들을 보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곳의 낯선 모습을 통해서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전윤선 씨는 새로운 자신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고 말이다. 아마도 새로운 나를 만나는 일은 여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값진 것이 아닐까.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전윤선 씨와 인터뷰를 마치고 떠오른 한자어다.
전윤선 씨의 삶을 돌아보니 그는 여행을 가든 안가든 언제나 자신의 위치에서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었다. 이것이 전윤선 씨만의 매력이 아닐까. 아시아대륙을 횡단하고 새로워져서 돌아오는 전윤선 씨 모습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작성자조은영 기자  blank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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