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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나 재활 다 됐어요”

전신마비장애우였다가 오뚝이처럼 일어선 이상은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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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십오년 사월 이십일 엠비씨 텔레비전에서 방영됐던 다큐멘타리. ‘인생을 오르는 사람들’의 한 등장인물이었던 이상은 씨(64)를 기억했으면 좋겠다.

 거의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휠체어를 타고 도봉산 산행을 시도했지만 휠체어장애우를 거부하는 기사들 때문에 열한 대의 버스를 그냥 보내게 되면서 약속시간에 늦어 결국 도봉산에 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 교보문고에 가려고 했으나 자신을 막아서는 광화문 사거리의 수많은 계단 앞에서 허탈해하던 그를 기억하기를 바란다. 자신 때문에 고생하는 자원활동자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거의 모든 계단을 들린채 올라가면서 끝내 ‘우리나라 복지 수준이...’라고 되뇌던 그를 말이다.

 그 이상은 씨가 한 쪽 보조기에 의지해서이긴 하지만 이제 자신의 힘으로 걷는다. 게다가 손수 운전도 한다. ‘이사’라는 직함과 함께 번듯한 직업도 갖고 있다.

 같은 지체장애우 중에서도 그와 같은 것들을 누리는 사람이 많기에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그의 현 상태를 대단한 듯이 소개하는 것이 호들갑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늘날 그의 모습은 보고 또 봐도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추손상 전신마비 장애우였던 사람이 이렇게 일어선 경우는 전 세계적으로 내가 유일한 사례라고 들었다.’는 이상은 씨 자신의 설명을 덧붙여 듣는다면 그 호들갑이 공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쯤 인정받게 될까.

 “장애를 갖기 전에는 길거리나 지하철에서 만나는 장애우에 대해서 솔직히 혐오하는 감정을 가졌었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그 때까지 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냥 ‘왜 저러고 사나’하며 고개를 돌려버리곤 했죠.” 자신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그날, 적어도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그 또한 평생 그런 시선으로만 장애우를 바라봤을지도 모를 일이다.

 팔십 칠년 이월 이십사일, 월말이 되면 늘 그렇듯 그날도 이상은 씨는 밤 아홉시 경 회사에서 잔업을 끝내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즈음엔 꽃샘추위가 유난히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집 근처 골목의 사십도 가량의 경사진 길 위에는 며칠 전 내린 눈이 그대로 얼고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에 닦여 빙판이 된 채 반질반질 윤을 내고 있었다. 부랴부랴 누군가가 연탄재를 깨서 덮어놓긴 했지만 어둑한 밤길에서 그가 방심한 채로 딛은 곳이 하필이면 연탄재가 덮이지 않은 부분이었다.

 그때 또 하필이면 넘어진 곳이 옆집 담과 골목길 사이에 난 움푹한 빗물통로였고, 고개가 바로 그곳에 걸려 목뼈가 부러진 채로 그는 하룻밤을 꼬박 인적 드문 추운 칼바람 속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그것은 그가 이제까지 쌓아온 모든 사회적 경력과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누리던 평범한 일상과 안녕을 고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새벽 남편을 발견한 부인 박혜진 씨는 남편의 부상이 보통의 낙상사고 보다 훨씬 심하긴 했어도 병원에 가서 며칠 치료만 받으면 두 발로 걸러 나올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목뼈가 부러지면서 경추가 골절된 그는 그대로 손가락 하나 자신의 힘으로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된 상태였다.

 “아무 것도 못하고 꼬박 누워있던 기간이 한 삼년 사 개월 정도 됩니다. 그 때는 누운 채로 텔레비전을 보는 게 유일한 소일거리였죠. 가끔 자식들이 신문지를 눈앞에 고정시켜주며 신문을 읽곤 했고요. 애들 입장에서도 그렇게 신문을 내 눈앞에 대주고 있는 일이 좀 귀찮긴 했을 거예요.”

 그렇게 시간을 죽이던 어느 날 갑자기 이씨는 바늘에 살갗이 찔리는 듯한 통증을 계속해서 느끼기 시작했다. “집사람이 이불을 꿰매다가 잊어버리고 바늘을 그냥 놓고 갔나 싶어서 애들 시켜서 바늘을 찾아보고 이불을 걷어내고 해도 계속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점점 심해져서, 정말 안 당해 본 사람은 모를 겁니다. 꼭 용강로 속에 던져진 것처럼 아니 빙하 속에 갇힌 것처럼 말할 수 없이 아픈 거예요. 제 담당의사는 ‘이 선생님 이제 됐습니다. 고통스럽겠지만 조금만 참고 기다리세요. 그건 약으로도 고칠 수 없습니다.’라고만 하는데 그 말은 들리지도 않고 무슨 수를 써서든 진통을 가라앉혀 주지 않는 게 원망스럽기까지 하더군요. 신이 만약 있다면 나와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평생을 꼬박 누워 지내야만 하는 장애에다 이렇게 죽을 듯한 고통을 주느냐고 소리소리 질러댔습니다”

 그렇게 죽을 듯한 고통이 계속된 것이 꼬박 사 개월간이다. 그리고 그것이 죽어있던 신경이 서서히 살아나고 있다는 기적 같은 징조라는 사실을 몸으로 새삼 느끼게 된 것은 그 고통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감각이 없던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게 됐고 다리에도 서서히 감각이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예전에 명절에 친척들이 와서 제 곁에 앉아 즐겁게 얘기를 나누는 걸 누워서 지켜봐야만 했을 때 ‘저 식구들과 제발 나도 앉아서 함께 얘기를 나눴으면’ 하고 바랐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종교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제발 일어나 앉게 해달라고, 그것 이상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기도했죠. 그런데 고통이 점점 사라지면서 이제 일어나 앉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한번 두 번 시도를 계속 해봤죠.”

 그렇지만 오래 누워있기만 했던 터라 뼈와 근육은 앉는 자세조차도 허용하지 못할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래서 이 씨는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앉는 자세에 필요한 지지대를 만들었다. 두 개의 합판조각을 사서 벽의 문처럼 자연스럽게 접힐 수 있도록 만든 후 다리, 무릎 등을 태권도 도복 띠로 고정시켰다. 가족들의 도움으로 일어나 앉는 자세로 만들기를 통증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반복해 연습하면서 굳은 관절과 근육을 풀어나갔다.

 그렇게 간신히 앉기 시작하자 당연한 것처럼 방안에 있던 의자에 시선이 갔다. 탄탄한 벨트를 나무에 묶은 후 그것을 잡고 몸을 잡아당겼다 풀었다 하는 씨름선수들의 연습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언젠가 봤던 게 생각나 탄성이 강한 자전거튜브를 가늘게 잘라 침대 옆 난간에 고정시킨 채 다리운동을 하며 그 동안 어렵게 어렵게 다리 근육을 키워왔던 터였다. 그래서 또 다시 다음 단계에 시도해 보고픈 욕심이 생겼다.

 “그런데 의자에 앉는 일이 얼마나 힘들던지요.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의자에 앉으려고 조금 일어서다가 넘어져 팔꿈치에 피가 날 정도로 심하게 다치기도 했죠. 그러면 또 며칠 동안 쉬다가 또 시도하고 그러다 또 넘어지고, 그러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어느 날 새벽 자신이 의자에 앉아 있는 꿈을 꿨다. 가슴 벅찬 희열도 잠시, 눈을 떠보니 그야말로 그냥 꿈이었다. 그렇지만 웬지 이번에는 그 꿈대로 될 것 같아 그대로 일어나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시도해 보았다.

 “아, 그날은 글쎄 성공한 거예요. 이게 또 꿈인가 싶어 진짜 얼굴을 꼬집어보기도 했지 뭡니까. 분명 현실이고, 그렇게 오랜 동안 시도했던 일이 성공해서 기쁘긴 한데 다시 내려가려고 하니 이번엔 도저히 엄두가 안나요. 그래서 자고 있던 집사람을 소리쳐 불렀죠. 집사람은 잠자던 내가 그것도 의자에 떡하니 앉아있으니 얼마나 놀랐겠어요.”

 그 때 일을 전하며 이상은 씨는 여유있는 너털웃음을 짓는다. 이제 그런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기에, 의자에 앉게 된 후 그에겐 할일이 더욱 많아졌다.

 우선, 아직 힘이 없는 다리근력을 기르기 위한 방법을 찿았다. 그러다 자전거페달을 구하고 거기다 다리근력 상태에 따라 조금 빡빡하게 혹은 조금 헐겁게 돌릴 수 있도록 손쉽게 조절하는 장치도 고안해냈다. 그것으로 또 한참을 연습했다. 다음은 일어설 차례.

 그가 일어서기까지 일조를 한 일등공신이 있으니 부인 박혜진 씨 외에 부름의 전화 김정희 대장이 그중 으뜸이다.

 “텔레비전에서 장애우의 외출을 도와준다는 ‘부름의 전화’라는 봉사단체를 알게 돼서 병원이나 책을 사러 갈 때 한두 번 이용했었어요. 그런데 봉사자분들한테 제 얘기를 들었다며 김정희 대장님이 직접 저희 집에 찾아 와서는 직접 보고 얘기를 듣더니 다음번에는 일어서게 한 쪽 벽에 철봉을 연결시켜서 끈을 매고 그걸 잡고 일어서는 연습을 하라면서 이십 만원을 주고 가셨어요. 그래서 그렇게 방에다 설치하고 또 연습을 시작했죠.”

 처음에는 일어섰을 때 힘이 없어 부들부들 떨리던 다리가 차츰 안정이 되자 철봉을 옆구리에 끼고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단계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미 돌을 지날 무렵에 끝냈던 일을 쉰 살이 훨씬 넘어서 힘겹게 다시 배워나갔을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다른 사람들이 감히 헤아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에게는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저 더 빨리 혼자 힘으로 걸어야겠다는 생각밖에는.

 철봉에 걸친 옆구리에 힘을 바짝 실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반복하다 보니 연약한 겨드랑이 살이 짓무르면서 심한 고통도 따랐다. 그래서 피브이씨파이프를 잘라 부드럽게 밀면서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연습을 한 결과 철봉에서 손을 떼고 삼발이와 같은 지팡이를 짚고 다른 사람 손에 기대어 걷다가 그리고 다시 다른 사람 손을 빌리지 않고 현재와 같이 간단한 지팡이만으로 걷게 된 것이다.

 이상은 씨라고 해서 처음부터 그야말로 강철 같은 재활의지로, 절망하지 않고 초지일관 재기만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다. 졸지에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된 사람이 손쉽게 유혹에 빠지게 되는 자살도 끈질기게 생각했다. 그러나 죽기 위해 약을 먹으려 해도 누가 입에 직접 독약을 넣고 물을 먹여 주지 않는 한 죽을 수조차 없는 나날이었다.

 얼굴부위의 근육과 신경만 살아 죽은 듯 누워 지내야만 했던 시절, 자포자기한 심정이 되어 매사가 곱지 않게 보이고 급기야 부인 박혜진 씨에게 죽을 터이니 약을 사오라는 가혹한 요구를 하면서 그것을 들어 주지 않는 부인을 향해 악다구니를 해대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장의 생활비를 비롯해서 약혼날짜를 잡아놓았던 큰 아들과 결혼을 앞두고 있는 다른 두 자식들의 결혼비용을 마련하는 경제적 부담을 짊어질 수밖에 없었던 부인 박 씨는 오십이 다 된 나이에 공장에 나가 일하는 틈틈이 남편의 뒷수발과 재활훈련을 도와야 했다.

 당시 그의 부인이 겪은 암담했던 삶의 사연은 구십 육년 한국지체장애인협회에서 주최한 중증장애인배우자 생활수기 공모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들 부부는 가톨릭에 귀의했다. 자신에게 찾아온 절망과 그에 대한 해답은 자신의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세상만물을 주관하는 조물주가 예정해놓은 어떤 은밀한 사업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나온 그 모든 과정과 하루하루를 이제 감사한 마음으로 돌아볼 수 있다.

 결국 이층에 위치한 자신의 집 앞 스물 네 개의 계단을 혼자 힘으로 천천히 걸어 나올 수 있게 됐을 때, 시계를 사고 전인 십년 전으로 다시 되돌리고도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누워만 있다가 걸어 다니게 됐어도 그는 누가 봐도 명백한 지체장애우였을 뿐이다.

 그래도 남들이 열심히 일할 시기에 누워만 있었던 그로서는 빨리 일을 해서 돈도 벌고 그때까지 공장에 나가고 있었던 부인을 집에서 이제 쉬게 하고 자신이 가장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싶었다. 그때 그의 나이 예순 두 살, 남들은 정년퇴직을 하고 비로소 휴식을 취할 시기도 이미 지났지만 그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에 마음이 분주했다.

 우선 지체장애인협회 강동지회에 나가 기획실장일을 맡아보며, 이전에 직장 다닐 때의 경험과 지식을 되살려 지회의 내부 살림살이를 다잡으면서 나름대로 분주한 생활을 보냈다.

 “그러다 뜻이 맞는 지장협 한 회원과 함께 사업을 함께 해보자는데 뜻을 모으게 됐어요. 그런데 가장 걸리는 문제가 이동문제더라고요. 대중교통은 아무래도 이용하기 힘들고 그렇다고 어디 갈 때마다 다른 사람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일 아니겠어요.”

 기자가 이상은 씨를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 등을 때 그는 성내역 앞에서 ‘흰색 아벨라’를 찾으라고 했다. 그는 운전면허에도 도전해 성공한 것이다. 그를 만나기 전날, 앞서 언급한 그가 나온 비디오테이프를 다시 찾아 봤던 기자로서는 그가 손수 운전하는 차 옆자리에 타고서도 그가 핸들을 돌리며 자유자재로 운전을 하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사실 운전면허는 팔 힘이 약해 백 프로 자신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시도는 했는데 운동능력을 측정할 때 핸들을 정해진 시간 안에 돌리는 부분에서 뜻대로 잘 되지 않는 거예요. 낙담해서 포기하려고 할 때 그곳의 김 경사가 ‘할아버지 한 번만 더 해 보세요’하면서 오히려 격려를 해 줍디다. 그래서 젖 먹던 힘까지 모아서 다시 한 번 시도했는데, 성공이었어요.” 그것이 구십 육년 유월의 일이다.

 그런데 사실 이상은 씨가 열심히 더 노력하면 지팡이도 짚지 않고 조금 불편한 양쪽 손의 감각도 완전히 살아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문이 사실 그의 얘기를 듣는 도중 생겨난 것이 사실이다.

 “산을 봐도 그렇고 바이오리듬 같은 주기의 경우에서도 최정상의 수치를 나타내는 부분이 있잖습니까. 저같이 목 이하의 신경이 죽어있었던 사람으로서는 현재의 상태가 운동을 통해 회복할 수 있는 거의 최상의 수준이라고 봐야겠죠. 아,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이제 더 이상의 욕심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 재활성공사례가 입에서 입으로 또 이전에 방송을 통해서 조금씩 알려지면서 어떻게 재활에 성공할 수 있었냐는 문의가 전국에서 많이 왔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사용한 운동방법이 다른 분들에게도 똑같이 들어맞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의 연령이나 장애 상태, 장애를 갖고 있는 신체부위가 다르니까요. 어쨌든 재활을 위한 최상의 연습방법이 운동인 것은 사실이고 각 사람의 상태마다 고지를 세워 그 고지까지 가기 위해 노력하는 게 중요한 거죠.”

 어쨌든 차까지 운전할 수 있어 더욱 활동이 자유롭게 된 이상은 씨는 동료 회원과 함께 그해 팔월, 의료기를 수입, 판매하는 의료기 상사를 세웠다. 그리고 사장인 그의 이름과 다른 동료의 이름을 따서 ‘상흥의료기상사’라고 명명했다.

 “지장협에 나가면 회원들끼리 자신들이 알고 있는 보장구에 관한 정보를 서로 나누곤 합니다. 그런데 그런 보장구들이 수입가격에 비해 너무 비싸요. 그래서 장애당사자인 저 같은 사람들이 단순히 돈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저렴한 가격에 좋은 물품을 보급하고 싶어서 그 사업을 해보려고 했던 거죠. 그런데 의료기사업이라는 것이, 일차적으로 병원에 납품이 돼야 명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전 조사를 좀 하긴 했었습니다만 실제 그 시장에 뛰어들어 보니까 기존 의료기업체들과 병원측과의 고리가 너무나 강하더라구요.”

 의료기업체측과 병원관계자간의 상습적인 뒷거래는 흡사 먹이사슬처럼 단단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상흥과 같은 신생 영세업체가 그 틈에 끼어들기는 역부족이었다. 사장으로서 영업을 담당했던 그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의사들을 설득해보기도 했지만 결국 일년여를 넘기지 못하고 빚만 진 채 그 사업에서 손을 털어야 했다.

 새삼 느껴지는 사회의 냉혹한 현실에 다시금 절망에 빠져 집에서 다시 소일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열성적인 삶의 자세를 알고 있는 현임배 사장이 먼저 제의를 해서 지난해 십이월부터는 휠체어리프트, 승강기 전문업체인 (주)한국장애인편의시설에서 일하고 있다.

 최근 하나둘씩 생기고 있는 편의시설 시공업체의 경우 올해 사월부터 ‘장애인 노인 임산부등의 편의증진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 관련 시장의 경기가 더욱 좋아질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건물주나 공공기관의 기관장의 의식이 바뀌지 않은 한 법 자체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그는 잘 알고 있다.

 “고용촉진법도 그렇잖아요. 아무리 법이 있어도 사업주들은 장애우 고용 보다 부담금 몇 푼 내고 말잖아요. 편의시설도 마찬가집니다. 건물주들은 일년에 장애우 몇 사람 올까 말까인데 왜 많은 돈을 들여서 멀쩡한 건물을 고치냐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십 년에 한 명이 오더라도 그 사람이 불편한 것이 뻔하다면 고쳐야 한다는 방향으로 인식을 바꿔야죠. 그리고 국가에서도 만약 편의시설을 설치하겠다는 의사를 가진 건물주가 금전적인 큰 부담없이 설치를 결심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지원을 해줘야 법이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편의증진법도 아쉬운 점이 좀 있습니다.”

 당장의 영업실적이 아니더라도 그는 정말 자신이 바빠지길 바란다. 그것은 어쨌든 편의시설을 설치하는 건물이 늘어난다는 것을 뜻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즈음 그는 주로 의무적으로 편의시설이 설치되어야 할 구청이나 각급 교육기관, 병원등의 관계자를 찾아가 만나서 편의시설 설치의 필요성과 각 구역에 적합한 편의시설 장치들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예산타령을 하며 그를 뜨악하게 대하는 공무원들을 계속 만나 기분이 우울해진다거나 해서 머리를 좀 식히고 싶을 때면 미사리까지 혼자 드라이브를 가서 차 한 잔을 마시는 여유를 갖곤 한다.

 그럴 때면 파란만장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지난날들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을 채운다. 십년의 세월이었다. 그가 일어서기까지 걸렸던 시간은. 따라서 처음 손가락이 움직이고 일어나 앉고, 서고, 걷기까지의 매단계마다 몇 개월에서 몇 년씩 걸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과정에서 포기할까 하다가 다시 의지를 다잡고 연습을 계속 했을 때 겨우 일주일 후 아니 바로 다음날 하나의 고지가 성큼 그의 발밑에 있었던 경이로운 일을 그는 여러 번 경험했다. “그때 포기했었더라면...”하는 생각을 하다 흠칫 놀라며 새삼 고개를 젓는 이유는 바로 일주일, 아니 그 하루 뒤에 자신에게 찾아왔던 기적을 생각해서다.

 잠시 흔들렸던 대로 자신을 내버려 뒀다면 한참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을 자신의 삶이 새삼 오묘하게만 느껴질 따름이다.

 

글/  한혜영 기자

작성자한혜영 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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