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이야기] “선희, 용현이 클 때까지만 살았으면 좋겠어요” > 세상, 한 걸음


[사람 사는 이야기] “선희, 용현이 클 때까지만 살았으면 좋겠어요”

관절염 장애우 이기숙 씨의 애틋한 모정

본문

  이기숙 씨는 악성 퇴행성 관절염으로 6년째 집밖을 나와 보지 못한 여성장애우다. 11년 전 관절염이 처음 나타난 이후로 병이 계속 악화돼 지금은 안방 문지방만 넘으면 있는 화장실까지도 벽을 잡고 간신히 기어서 가야 하는 형편이다.
  몸 군데군데가 곪아 움직이면 고름이 흐르고 통증이 심하기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나가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무릎은 살이 곪아 무릎뼈가 그대로 드러나 다리를 쭉 펴지도 못하고 상처 부위에 옷이 살짝 닿기라도 하면 그 쓰라림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여서 이기숙(40) 씨는 꽉 끼는 내복이나 무거운 겨울옷은 물론 밤은 잘 때도 이불을 덥지 못한다.
  그런데 더 딱한 것은 11년 전 남편마저 교통사고로 죽어서 이기숙 씨 혼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 둘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병원에서는 이기숙 씨 병이 악화될 대로 악화돼 더 이상 손을 쓸 수도 없다며 이제 남은 여생을 마감할 준비를 하라고 한다. 그래서 이기숙 씨는 요즘 너무나 속이 탄다. 이 어린 것들을 남겨두고 도대체 어떻게 눈을 감으란 말인가? 게다가 창고를 개조해 임시로 살고 있는 방을 집주인이 내년에 다시 공장으로 쓴다고 비워달라고 한다.


가난 때문에 첫 아이 유산

  지금으로부터 십오년 전, 스물 다섯 꽃다운 나이의 이기숙 씨는 친구의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얼굴도 잘 생기고 마음씨도 착해 보였다. 그래서 몇 번 더 만났고 만나면서 남자의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데다가 친형제도 없어서 외롭게 자랐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와는 반대로 부모님도 두 분 다 아직까지 정정하시고 형제 자매도 많은 이기숙 씨는 이 사실을 알고부터 왠지 이 남자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남자에게 더 잘해주게 됐고 이것이 사랑으로 이어져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할 당시 남편은 작은 회사에 다녔다. 그러나 월급이 적어 두 사람이 한 달을 살기엔 빠듯했다. 그래서 한동안 아이 갖는 것을 잠시 미루고 수입이 더 안정적이 되면 아이를 갖기로 했다. 얼마 후 남편은 친구 소개로 직장을 옮겨 거리 환경미화 일을 시작했다. 보기에 따라 좀 창피한 일일 수도 있지만 수입이 전보다 훨씬 나아 두 사람은 옮긴 직장에 대해 만족해 했다. 계획대로 아이도 가져서 곧 애 엄마 아빠가 될 기쁨에 들뜨기도 했다.

  그러나 첫 아이는 임신 1개월 만에 그만 유산되고 말았다. 아이를 갖고서 초기 3개월이 가장 위험하기 때문에 조심을 해야 하는데 이기숙 씨는 수돗물이 잘 나오지 않자 물을 길으러 위 아래층을 오르내리다 그만 몸에 무리가 간 것이다.

  “새벽에 남편을 출근시키고 나서 집안 청소를 하는데 갑자기 통증이 느껴졌어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유산할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구요. 전에 여성잡지에서 유산에 대해 읽은 적이 있거든요. 갈수록 통증이 심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데 이웃집 아주머니가 지나가다 제가 신음하는 소리를 들었는지 들어와서 보시고는 택시를 잡아줘서 병원으로 갔어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수술을 받고 이기숙 씨는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바로 퇴원을 했다. 병원에서는 수술할 때 하혈이 심했으니 좀 더 입원해 있으라고 했지만 첫 아이를 그렇게 유산한 것이 마음에 걸리고 남편한테도 미안해 병원에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걸을 때마다 배가 당겼다. 난생 처음 수술을 해 본 이기숙 씨가 하혈을 많이 해 수술을 급하게 끝내느라 수술이 잘못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기숙 씨는 남편이 힘들게 벌어온 돈을 자꾸 병원비로 써버리는 것이 부담스러워 다시 병원에 가서 조취를 취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이기숙 또 아이를 가졌다. 그런데 임신 8개월이 되자 이기숙씨 몸에 이상현상이 나타났다. 몸이 붓기 시작하는데 종잡을 수 없이 부어올라 당시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두 얼굴의 사나이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다니던 병원에서는 아무래도 임신중독 같으니 큰 병원으로 옮기는게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병원을 찾았더니 산모가 위급하니 아이를 구하든지 산모를 구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 그러나 이기숙 씨는 한 번 아이를 유산한 적이 있는 데다가 또 포기하면 영영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것 같아 그냥 아이를 낳겠다고 했다.  

  아이는 열 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구 개월 만에 태어났다. 그런데 아이는 태어날 때 울지도 않고 몸무게가 겨우 2.2kg밖에 나가지 않아 병원에서는 아이가 더 클 때까지는 당분간 인큐베이터에 있게 하자고 했다. 그러나 아이를 인큐베이터 안에 하루 있게 하는 데에만도 병원비가 엄청나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기숙 씨는 아이를 데리고 그냥 집으로 오고 말았다. 다행히 별 일은 없었지만 아이는 크면서 계속 잔병치레를 했고 한 번 감기에 걸리면 체온이 40도까지 올라가는 일이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이어졌다.

 
남편은 11년 전 교통사고로 사망

  이기숙 씨는 다음 해 또 아이를 가졌다. 첫 아이를 나을 때 임신중독증까지 걸린데다 아이를 낳고도 안정을 취하지 못하고 잘 먹지 못해 산모의 몸이 다 회복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또 다시 아이를 갖자 병원에서는 아이를 지울 것을 권했다.

  그러나 이번에 가진 아이가 남자 아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이기숙 씨는 이번에도 역시 의사의 말을 듣지 않고 아이를 낳기로 결정했다. 대신 수술을 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이번에는 수술 후 3시간이 지나도 마취가 풀리지 않아 산모가 죽은 게 아닌가 하고 의사와 식구들을 긴장시켰다가 뒤늦게 깨어났다.

  아들을 받아 안은 남편은 좋아서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이제 낳은 지 하루밖에 안됐지만 이 아이가 장차 커서 ‘아버지’하고 부를 것을 상상만 해봐도 든든했을 게다. 남편은 누워있는 이기숙 씨의 손을 잡고 수고했다며 이제부터는 두 아이 분유값을 벌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더 열심히 일하겠다고 말한 뒤 출근을 했다. 그러나 이것이 이기숙 씨가 남편을 본 마지막 순간이 되고 말았다.

  “그 날 저녁 남편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아들을 낳았다고 친구들이 한 턱 내라고 해서 좀 늦게 들어간다고 기다리지 말고 먼저 저녁 먹으라구요. 그런데 밤 12시가 넘어도 돌아오지 않아 걱정을 했는데 새벽에 병원에서 전화가 온 거예요. 친정아버지가 받았는데 그이가 조금 다쳐서 병원에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전화래요. 그런데 그이는 조금 다쳐서 병원에 갈 사람이 아니에요. 평소 아무리 아파도 병원비가 아까워 병원에 잘 가지 않는 성격이라 크게 다친 것이 틀림없다 싶어 입원 해 있다는 병원을 직접 찾아갔죠.”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이기숙 씨는 중환자실부터 찾았다. 그러나 간호사는 중환자실이 아닌 다른 쪽을 가리켰다. 이기숙 씨는 전에 이 병원에 와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병원 구조를 대충 알고 있는데 간호사가 가리킨 곳은 중환자실이 아닌 영안실이었다.

  영안실이라는 푯말이 꽃혀있는 방안으로 들어가자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글자가 새겨진 화환 두개와 어제 저녁 아침에 나간 남편의 얼굴이 액자에서 웃고 있다. 이기숙 씨는 순간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남편은 친구집에 놀러 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만 교통사고를 당한 거예요. 오토바이를 타고 나갔는데 앞에서 달려오던 자전거와 충돌해 공중으로 붕 떴다가 도로에 떨어졌대요. 그런데 뒤에서 달려오던 택시가 그만 그이를 못보고 덮친 거예요. 병원으로 남편을 옮겨졌지만 즉사하고 만 거죠. 곧 병원에서 친청집으로 이 사실을 알렸지만 제가 산모라는 것을 알고는 절대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를 했대요. 시신이 너무 끔찍해 산모가 안정을 되찾고 알리는게 좋겠다구요. 그런데 마음 약한 친정어머니가 그만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제가 알게 된 거죠.”

  역시 의사말대로 이기숙 씨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 그랬다. 아이를 낳은 지 하루 만에 일생일대 최악의 소식을 전해들은 이기숙 씨는 그 후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기 시작해 관절염 초기 증세가 나타났다.

  병원에서는 관절염 초기니까 수술을 받으면 곧 나을 수 있다고 말했지만 남편마저 교통사고로 죽은 상황에서 수술비 일천만원을 마련한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당장 두 아이의 분유값을 마련하기도 막막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끄나풀만 봐도 자살 시도를 했어요. 그나마 아버지 살아계실 때 죽으려고 그랬던 거죠. 이 사실을 알고 아버지가 많이 속상해 하셨어요.”

  그나마 가까운 곳에 친정식구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평생 남의 집 농사만 지으시던 친정아버지가 이기숙 씨가 이렇게 되자 연로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직접 딸을 돌보기 위해 공장으로 나가 일을 하셨다. 그리고 이기숙 씨가 또 나쁜 마음을 먹을까봐 종교를 갖도록 천주교 신자를 한 명 소개시켜 주기도 하셨다. 덕분에 한동안 살 의미를 잃고 멍하니 지내던 이기숙 씨도 어느 정도 마음을 추수리고 아이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악성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오래 살기 힘들어

  이기숙 씨의 마음의 버팀목이었던 친정아버지가 오년 전 뇌출혈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이제 남은 사람은 친정어머니 뿐이다. 그러나 친정어머니도 연로하신데다 중풍기마저 있어서 거동이 불편하시다. 간신히 이기숙 씨 집을 들여다 보러 와주실 정도다. 물론 다른 형제들이 있기는 하지만 다들 결혼을 해서 자기 살기 바쁘다. 잘 살면 도움을 청할 수도 있지만 몸만 건강할 뿐 형편은 이기숙 씨 못지 않게 곤란해 도와 달라는 말을 할 형편이 아니다.

  그나마 이기숙 씨는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이 돼서 석 달에 한번 얼마간의 돈이 나오는데 그 돈으로 아이 둘을 학교에 보내며 병원비며 약값 대는게 보통 빠듯한 것이 아니다. 다행히 친정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소개시켜준 천주교 신자분들이 이기숙 씨 사정을 알고 직접 집에 찾아와서 보고는 생활용품을 사주시고 매달 5만원씩 부쳐주셔서 근근이 살아오고 있는데 도움을 주시던 할머니마저 암으로 돌아가셔서 이젠 정말 도와줄 사람이 없게 됐다.

  그래서 형편이 더 어려워진 이기숙 씨는 최근 병세가 극도로 악화됐는데 여기에 영양실조까지 걸려서 몸이 쇠꼬챙이처럼 말라 통증을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한밤중에 119 응급차에 실려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하기도 했다. 의사 선생님은 입원해서 더 치료를 받아야 된다고 했지만 병원비도 부담되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학교 보내줄 사람이 없어 응급조치만 취하고 약만 지어서 그냥 돌아 온 것이다. 병원에서는 정 그러면 통원치료라도 하라고 하지만 한 번 병원에 갔다 올 때마다 택시비만 왕복 3만원이 나와 그것도 못하고 이모나 할머니가 약을 받아다 주는 형편이다. 다행이 천주교 신자분이 의사한테 말을 잘 해줘서 약은 무료로 받아먹고 있다.

  그러나 옆에 돌봐줄 사람이 없는데 통증이 심할 때는 시중 약국에서 파는 진통제만 먹기도 한다. 그것도 하도 많이 먹어 이제는 더 이상 효과도 없고 독한 약기운 때문에 치아도 썩어 부러지고 혈액순환이 안돼 얼굴에 빨간 반점마저 피었다. 손도 손톱이 다 빠져 손끝이 뭉텅해졌다. 관절염이 손까지 가면 이미 치료는 더 이상 불가능한 상태라고 하는데 이기숙 씨가 지금 바로 그런 상태다.

  그래서 더 이상의 치료는 하지 않고 그저 요즘처럼 날씨가 추워지면 통증이 더 심하기 때문에 방안을 따뜻하게 해 놓을 뿐이다.

  “관절염이라는 게 추우면 통증이 더 심한 병이에요. 그래서 기름값 비싼 줄 알면서도 보일러를 뜨끈뜨끈하게 때야 해요. 저는 그것도 모자라 방안에 전기스토브를 켜도 저녁이면 핫빽에다가 뜨거운 물을 담아 찜질까지 해요.” 그리고 상처가 곪아 피가 흘러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매일같이 하루 세 번씩 소독약을 바르고 거즈를 갈아 끼운다. 그런데 소독약과 거즈, 반창고는 할인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생활비에서 고스란히 나간다.


“저는 엄마 노릇도 못해요”

  이기숙 씨는 병원에 갔다 오고 나서부터 마음이 영 심한하다. 의사 선생님이 앞으로 한 번만 이렇게 많이 아프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통스럽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단 생각도 들지만 자신이 죽고 나면 올해 12살인 선희와 11살 용현이는 고아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이기숙 씨는 아이들 걱정으로 요즘 잠을 이루지 못한다.

  선희는 큰 딸이어서 그런지 엄마 걱정을 무척 한다. 학교에 가면 하루에 세 번씩 전화를 해서 엄마 건강을 확인할 정돈데 엄마 전화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신경질적이면 또 통증이 도진게 아닌가 싶어 그 날은 학원도 가지 않고 바로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엄마 곁에 꼭 붙어 앉아서 엄마 심부름을 한다.

  하루는 고통이 너무 심해 자가다 비명을 지른 적이 있는데 그 소리를 들었는지 선희가 일기장에 그 내용을 썼는데 커서 간호사가 되어 어려운 사람을 돌보겠다고 써 담임 선생님이 보시고 굉장히 많이 우셨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조카 아이가 학원에 가서 아이들한테 해서 선희가 봉변을 당한 적도 있다. 하루는 선희가 코가 깨지고 코피가 터져서 돌아왔다. 어디서 그랬냐고 아무리 물어도 대답을 안하고 그냥 울기만 해 걱정을 많이 했는데 나중에 할머니가 혼내시면서 물어보자 같은 학원에 다니는 아이가 아빠도 없고 엄마도 몸이 불편하다고 실내화를 뺏고 때리기도 해 일방적으로 맞았다는 것이다. 그 이후 학원을 옮기기는 했지만 또 그런 일이 벌어질까봐 이기숙 씨는 아이들 친구를 절대 집에 못 데려오게 하고 친구들한테는 아빠는 멀리 회사 나가셨다는 거짓말을 하게 본의 아니게 가르치고 있다.

  용현이는 공부를 잘 해 반장이다. 보통 반장 엄마들은 학교에도 찾아와 담임 선생님께 인사도 하고 그러는데 용현이 엄마가 한 번도 학교에 찾아오지 않자 용현이 담임 선생님이 한 번은 용현이에게 엄마를 학교에 모시고 오라고 한 적이 있다. 어린 용현이는 엄마가 아프다는 말을 차마 못하고 그렇다고 엄마 걱정할까봐 엄마한테도 말을 못하고 혼자 고민하다가 그만 울어버린 적이 있다. 엄마가 왜 그러냐고 하자 그제서야 선생님이 엄마를 보잔다고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한다. 그래서 이기숙 씨는 선생님께 전화를 드려 사실대로 말씀을 드렸다. 선생님은 몰랐다며 오히려 사과하고 그 이후 용현이에게 옷도 사주고 공책이랑 연필도 사주셨다.

  그러나 이기숙 씨가 병원에 갔다 온 이후 이기숙 씨 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엄마가 곧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두 아이 다 요즘 부쩍 엄마 곁에만 붙어 있으려고 한다.

  이기숙 씨가 입원했을 때는 앨범에서 엄마 사진 중 가장 잘 나온 것을 오려 목에 걸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혹 낯선 사람이라도 집에 찾아오면 저 사람들이 우리를 데리러 온 게 아닌가 깊어 남매가 말 없이 의심의 눈초리로 방 한쪽 구석에 앉아 쳐다보곤 한다. 보는 이기숙 씨가 민망할 정도다.

  “저는 엄마노릇도 못해요. 옷도 새 옷 한 번 사주지 못하고 남이 입던 거만 입히고 책도 남이 보다 만 것만 읽히고. 하루는 애들이 그래요. 이거 오래 된 책이라서 맞춤법이 틀리다고. 그래도 새 책 한 권 못 사주고 그냥 잘 보라고 말할 뿐이죠. 진작 다른 집에 보내면 애들이 호강이라도 했을텐데. 사는게 너무 힘들어요. 이럴 바에야 차라리 죽는게 나아요.”

  아이들을 지켜보는 이기숙 씨의 가슴은 요즘 더욱 쓰리기만 하다. 그러나 이기숙 씨는 곧 “아니에요. 아이들 클 때까지만 조금만 더 살았으면 좋겠어요.”라고 방금 한 말을 번복하고 만다. 자신의 건강까지 바쳤으면서도 이기숙 씨는 그이가 죽고 나서 선희와 용현이가 엄마 없다고 아이들한테 따돌림 당할까봐 이렇게 노심초사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모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임에 틀림없다.

작성자노윤미 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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