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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인형의 주인공이 아프면 저도 막 아파요”

종이인형에 민족의 아픔을 담는 안데레사 수녀

본문

  지난 팔월 십사일 뜻깊은 건국 오십주년 광복절에 하루 앞서 개관한 위안부 역사관. 정신대 할머니 몇 분이 함께 모여 살고 있는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 바로 옆 부지에 세워진 그 역사관에서 만날 수 있는 당시 위안소의 실물모형이나 일본 군인들에게 지급되던 콘돔, ‘결코 잊지 마라’고 강조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어린 육성은 오늘을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서늘함을 느끼게 한다. 그런 자료들을 직접 대면하기 바로 직전까지 그 분들의 아픔이 무덤과 같은 망각과 무관심의 관 속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밖에 없기에 더욱 그렇다.

  옷깃을 여미며 돌아보게 되는 그 역사관의 한 쪽 공간에는 뜻밖에도 미소 한 조각을 입에 물게 하는 전시품도 있다. 삼백 번이 훨씬 넘은 횟수를 기록하며 조용하고도 끈질기게 계속돼 온 위안부 할머니들과 혜진스님의 수요집회 모습과 평소 생활모습이 사실적이고도 조금은 익살스럽게 담겨 있는 두 개의 인형작품이 바로 그것이다. 비녀로 곱게 모아진 한올 한올의 머리카락하며 평소 농사일로 소일하는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친근한 벗인 개나 닭들도 도화지에 그린 양 종이만의 질감으로 예쁘게 표현돼 있는 것이 예사 솜씨가 아니다.

  그 옆에 수줍은 듯 다소곳이 적혀 있는 안데레사라는 작가 이름. 정확히는 안현숙 데레사 수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배우기도 전에 이미 인형을 만들었다는 사람

  그 이름의 주인공을 서울 중계마을복지회관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미리 일러준대로 회관을 찾아가는 길은 서울에 아직까지 이런 곳이 있었나 싶게 팔십년대 초기 생활모습을 연상시키는 낙후된 동네를 지나야했다. 거기에서도 한참 가파른 길을 올라가야 나타나는 ‘언덕위의 하얀 집’이 바로 중계마을복지회관이었다. 현재 한국순교복지수녀회가 구청에서 위탁받아 데레사 수녀님을 비롯한 다섯 분의 수녀님들이 이곳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삼층 독서실에 붙어 있는 옛 매점 자리의 자그마한 간이 공간이 그 인형 작품을 탄생시킨 모태였다.

  설립 이전에 구청측이 구상한 대로 노인정과 유치원, 독서실 등의 공간이 마련돼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긴 하지만 회관의 위치가 주민들이 쉽게 발길을 옮기기 어려울 정도로 가파른 언덕 위에 위치해 있는데다, 부모들이 모두 맞벌이로 어려운 생계를 꾸리느라 자녀인 청소년들의 탈선이 두드러져 이제 독서실을 찾는 학생들도 거의 없는 형편이라는 이런 저런 지역의 문제가 맨처음 화제로 올려졌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얘기를 역사관에 기증된 그 인형작품 쪽으로 돌렸더니 “그거 제가 한 게 아니에요”라고 한다. 어,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건 제가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라고 덧붙이는 그이의 말은 나중에야 이해가 됐다.

  안 데레사(45) 수녀님이 처음 종이인형을 접한 것은 구십오년 잠시 붐을 이뤘던 닥종이인형전시회를 본 것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때 작품들을 보자마자 벌써 ‘아, 저건 저런 기법이구나’하는 감이 왔다는 것이다. 아니, 어떻게 종이인형을 처음 본 사람이 보자마자 어떤 기법인지 알 수 있냐고 따지듯 묻자 “그러니까 제가 한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라며 간곡한 표정으로 설명을 계속한다.

  “그냥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는 일에 취미가 있었어요. 제가 수녀가 된 후 보육원에 있을 때 아이들 정서에 좋을 것 같아 한지로 벽을 꾸미기도 했죠. 그렇지만 인형까지 만들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그런데 결국 건강을 가져가시면서 대신 이런 능력을 주시네요. 사실 바깥 활동을 이것저것 하다 보면 이런 건 만들 여건이 잘 안되잖아요. 그러니까 저를 주저앉혀 놓고 능력을 주셨나봐요.”

  그이를 주저앉힌 것은 바로 관절염이라는 병마였다. 수녀가 되기 위한 수련을 마치고 기쁨으로 충만해 열심히 일하고 있었던 그이에게 어느 날부터인가 뼈 마디마디를 짓누르는 고통이 찾아온 것이었다.

  “예전에는 거동도 몹시 힘겨울 정도로 상태가 심해서 다른 수녀님들한테 계속 간병을 받으면서 생활을 해야 했어요. 지금도 계단은 쉽게 잘 오르내리질 못해요. 그렇지만 이렇게 또 작품을 할 정도의 건강은 주시잖아요. 이게 다 하느님의 뜻인 것 같아요.”

  그이가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보면 또 관절상태는 보통 사람들보다도 더 깨끗한 것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씩 병세에 차도가 보일 즈음 주위에 버려진 쓰레기들을 활용해서 실내를 꾸미는 일에 이렇게 해볼까 해서 손을 대보면 생각한 것보다 더 훌륭한 작품이 척척 만들어 나오는 신기를 경험하게 됐다. 그런 모습을 주위에서 직접 봐 왔던 수녀님들은 함께 전시회를 본 뒤 그이에게 종이인형공예를 배워볼 것을 적극 권하고 머뭇거리는 그이를 이끌어 인형공예작가인 김미숙 선생과 연결시켜 주었다.

  “그래서 처음 문화센터에 갔는데, 인형을 만들려면 처음 철사로 골절을 잡거든요. 그런데 그걸 보고 철사 구부리는 순간에 전체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지는 건지 다 마스터가 되더라구요. 원래 그 강좌가 세 달 코슨데 저는 시작하기도 전에 인형을 실제 만들기 시작해서 한  달 만에 모든 과정을 했어요.”

  그렇게 속성으로 배워 하나 둘 직접 종이인형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자신이 만든 작품을 보고 자신도 신기해서 한참을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저도 만들면서 감탄을 하니까요. 그래서 다 만들고 나서 제가 다른 사람들한테 자랑을 하기도 해요. 이거 참 예쁘지요 하면서. 저 혼자 능력으로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바보같이 그렇게 자랑도 막 하게 돼요.”


 70년대 공장노동자 안현숙 시절

  옛날 선조들에게 그러했듯 그이에게 부채는 또 다른 형식의 도화지가 된다. 널따란 공간이 주어지는 그 부채살 위에 그이는 흔히 보는 산수나 전통 풍속보다는 양심수 석방이나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는 데 더 열심이다. 위안부 할머니들로 대변되는 이 땅의 딸들의 아픔도.

  그래서 지난해 한 수녀원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을 때 작품의 주제들이 너무 무겁지 않느냐는 얘기를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부조리한 사회구조로 인해 겪어야 하는 이웃들의 아픔은 70년대 흔히 ‘공원’이라고 불리던 공장근로자 시절을 경험했던 그이의 가슴에서 도저히 쉽게 떨어낼 수 없는 그야말로 ‘화인’으로 남아 있다.

  “고등학교 졸업 직후 집안 사정상 취업을 해야 했어요. 그래서 전기요를 만드는 회사를 거쳐 제약회사에 다녔는데 보수나 근로여건이 너무 열악했어요. 이건 아니다 싶어 몇몇 동료들과 함께 앞장서서 회사측에 부당함을 알리고 시정을 요구했죠.”

  특히 그 당시 친하게 알고 지내던 어느 버스회사의 기사와 버스차장들의 현실은 그이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몇 푼 안되는 생활비를 이리 쪼개고 저리 쪼개 고향에 있는 가족들한테 보내고 또 저금도 하며 악착같이 살아가는 그들의 월급을 중간에 가로채는 회사 임원들은 그이의 눈에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작 그이가 보다 본격적으로 ‘의식화’가 된 것은 수녀가 되기 위해 교리신학원에 들어간 이후였다고 한다. 신학 뿐만 아니라 사회현실에 대한 문제도 날카롭게 지적하곤 하던 선생님들의 강의를 듣고 강의 외에 사물놀이, 봉산탈춤을 배우며 우리 가락에 신명나서 다니면서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그 아픔과 분노가 사회 전체를 감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이런 저런 사회과학 책들을 통해 머리로 이해했던 역사의 아픔은 이제 인형을 만드는 과정에서 생생하게 살아 나와 그이 자신이 직접 그대로 앓아내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 사회에 몸담고 있는 이상 이 땅의 사람들이 안고 있는 아픔들을 알아야 영적으로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죠.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생각과 말 뿐이었던 것 같아요. 위안부 할머니들의 사연을 부채에 옮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제가 마치 위안부 여성이 된 것처럼 자꾸 몰입이 돼요. 그러면 정말이지 몸살이 나면서 몸이 막 아파요. 그렇게 (하느님은) 그 분들의 속앓이같은 아픔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하시더라구요.”

  군화 발에 짓밟히고 있는 꽃다운 조선 처녀들, 그 위로 들이밀어진 날카로운 칼을 종이에 붙일 때 그 칼은 그대로 그이의 몸에도 들이 밀어진다. 해방이 되어 돌아왔으나 몸을 더럽힌 죄인이라는 생각에 고향에도 못가고 타향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참담한 하루하루를 이어가야 했던 할머니들을 부채 화폭에 하나하나 옮기는 작업을 할 때는 몇 번이나 눈물을 참아야 했다. “그럴수록 이제까지 민족의 아픔을 모르고 너무 제 자신에만 급급해서 살아 왔다는 사실 때문에 더 죄송해져요. 교회의 딸로서도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빠지고요.”

  그러하기에 과거뿐만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서 진행되고 있는 역사의 현장에도 늘 함께 하고 싶다.

  “작년에 노동법 가지고 싸울 때 저도 다른 수녀님들이랑 갔었어요. 저희들이 모여 있으면 전경들도 최루탄을 그렇게 심하게 쏘지는 못하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다른 시위 참가자들을 좀 보호해드리고 싶었어요. 몸이 안 좋아서 남들처럼 막 뛰지는 못해도 그렇게 뛰는 사람들 보면 저도 동참하고 싶어서 몸이 막 움직여져요.”


 한복 저고리를 입은 예수와 마리아

  가톨릭문화의 토착화 문제 또한 오랜 동안 그이의 화두가 되고 있다. 그러한 고민의 소산인 예수탄생 장면을 담은 작품을 보면 동방박사와 노란 곱슬머리 천사들이 있는 게 아니라 선녀들이 등장하고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아기 예수마저도 모두 수수한 한복 저고리를 입은 모습이다.

  그 밖에 천주교회에서 미사를 올릴 때 쓰는 간단한 집기들도 나무나 금은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통 종이공예품으로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초를 넣은 등도 우리 전통 문양을 담아 불이 켜지면 고운 모양이 은은하게 비취는 것으로 바뀌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 그이는 믿는다. 그래서 지금 열심히 여러 모양새를 시도해 보이고 있다.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순교자들의 일대기를 담는 작업도 시도했었는데 지금은 잠시 중단 중이다. 인형이라는 형식에 담겨지지만 모든 것은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옮긴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큰 흐름의 역사적 사실 뿐만 아니라 당시 복식과 사용되던 물품의 세밀한 모양새에 대한 자료까지 찾아 눈에 익히는 공부부터 먼저 해야 할 것 같아서란다.

  “인형들이 신는 짚신 같은 것 하나도 대충 만들게 아니라 만드는 법을 제대로 배워야 하잖아요. 상투도 어느 쪽으로 어떻게 틀었는지도 알아야 하고요. 당시 복식이나 물품에 대한 기록을 보면 말로는 설명이 길게 돼 있는데 눈에 잘 그려지질 않아서 참 안타까워요. 정말 공부할 게 너무 많아요.”

  그런데 그이가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 장면을 담은 작품을 선보이자 예상보다 훨씬 강한 반응이 왔다. 그리고 그 경험은 그이가 자신의 소임에 대해서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한다.

  “사진이나 글로 전해지는 얘기는 이전에도 많이 있었지만 당시 상황을 인형으로 대하고 보니까 더욱 그 느낌이 강렬하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위안부 할머니들 뿐만 아니라 시대적인 아픔을 갖고 계신 다른 분들을 소재로 작품을 해서 우리 역사에 이런 분들이 있다는 사실을 제 나름대로 알리고 싶어요.”

  그런 그이의 다음 화두는 양심수가 될 것이라고 한다. 노동자들의 대표로 지칭될 수 있었던 박노해 시인과 사십 년 이상 장기복역하고 출소한 김선명 선생을 비롯한 세 분의 장기수 분들은 통일의 상징으로 삼아 우선 다음 작품 소재로 꼽고 있다.

  출소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그 분들의 사진이나 수인번호 같은 자료를 모아가느라 마음이 바쁜데 특히 그 중 한 장기수인 안학섭 선생과는 이전부터 오랜 동안 편지를 나눠 왔기 때문에 우선은 남들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반도와 통일이 새겨진 낙관을 누르며

  종이는 고유의 특성상 습기에 약해 금방 휘어버리기 때문에 작품 보관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듯 싶었다. 기자가 찾아간 날 오랜만에 이전 작품을 꺼내 보이다가 안타깝게도 오랜 장마 끝에 약간의 곰팡이가 끼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복지회관에서 안 수녀님이 독점할 수 있는 장소가 비좁아 상자 안에 넣어 그냥 쌓아 놓으니 그런 사태가 생긴 것이다.

  “안 그래도 앞으로 지점토를 배워서 종이의 단점을 좀 보완해나갈 생각이에요. 그리고 다른 수녀님도 배우고자 원한다면 함께 하고 싶어요. 종이공예의 기초적인 것에서부터 작품 배경으로 쓰이는 나무 톱질하기까지 전부 저 혼자 하려니 속도가 안 붙어 좀 안타깝거든요.”

  그래서 한 동안 화제를 모았던 ‘우리 엄마 어렸을 적엔’과 같은 인형작품을 만든 부부 작가를 안 수녀님은 누구보다 부럽다고 했다. 부인은 인형의 골격을 만들고 남편은 각종 소품을 만드는 분업체계가 착착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란다.

  인형공예가 지역 주부들의 좋은 부업거리가 될 수 있을 듯 싶어 인형을 매개로 주민들과 만나고 싶었지만 그날그날의 생계가 급해 지원자를 찾을 수 없어 낙담하기도 했다. 그래도 도서관 옆에서 가만가만 인형을 만들고 있는 수녀님이 신기해 보였는지 가끔 공부하러 온 학생들이 그이 앞에 앉아 가만 지켜보곤 한다. 아이들의 정서적인 면에서나 서로 친밀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데 인형이 도움을 주는 것 같아 그도 더 즐겁게 손을 놀리곤 한다.

  “종이를 얇게 꼬아서 각종 공예품 만드는 방법을 요즘 문화센터 다니면서 배우고 있는데, 미리 종이를 꼬아 놓으면 좋거든요. 그래서 버스에서 자리에 앉기만 하면 조금 꺼내서 계속 꼬면서 가요. 다른 사람들한테 우리의 전통적인 종이공예를 알려주고 싶어 일부러 그렇게 하기도 해요. 그럼 사람들이 거의 예외없이 그게 뭐냐고 물어봐요. 그럼 또 신나서 얘기해주죠.”

  어떻게 보면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안 데레사 수녀, 이 자그마한 여인이 종이를 통해 만나는 사람들과 그리고 세상의 범위가 이렇게도 넓다는 사실이. 가만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무엇으로 사람을 만나나. 그런데 다른 능력보다 우선 중요한 것은 마음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보육원에 있을 때 관절염이 찾아 왔는데 하루 사이, 그리고 한 달 사이에 몸 상태가 저도 가늠해 볼 수 없을 정도로 급격히 안 좋아지는 거예요. 어느 순간에는 아, 이러다간 한 달 뒤에 식물인간이 되겠구나 하는 예감도 들더라구요. 그렇지만 그 때 그렇게 되더라도 오늘은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움직이자 하는 생각으로 계속 활동을 했죠. 그런데 병세가 점점 악화되니까 흔히 장애우들에게 가곤 하는 동정어린 시선이 저한테도 오더라구요. 그리고 저는 제 고집으로 병원치료를 한동안 거부했었지만 정말 돈이 없어 병원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구요. 그래서 지금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이 저한테 십자가가 되고 있긴 해도 저는 이 십자가를 너무나 사랑해요. 더 크고 다양한 사랑을 알게 해주거든요.”

  그러나 자신의 몸의 상태를 보건대 노년에는 다른 수녀님들한테 온전히 수발을 받아야 할 정도로 몸이 안 좋아지겠다 하는 느낌이 온다고 한다. 공동체생활을 하는 입장에서 그 점은 다른 수녀님들에게 몹시 미안하지만 당장의 건강에 신경 쓰기보다 그 순간까지 게으름 피우지 않고 자신의 소임을 다하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없다.

  그래서 오늘도 힘겹게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 후 이름이 적힌 낙관과 함께 한반도가 그려진 낙관도 꾹 누른다. 통일이라는 단어가 적힌 그 낙관을 누를 때마다 통일의 그 날이 한 걸음 성큼 다가오기를 바라면서.

작성자한혜영 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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