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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이야기] “저희 자립생활 강의 들어보실래요”

따로 또 같이 사는 두레가정공동체

본문

  서울 강동구 고덕동의 아파트촌을 지나 주택단지의 한 골목에 접어들어 가다 보면 대문도 없이 문이 활짝 열려 있는 한 다가구주택을 만나게 된다. 그 문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계단 사이에 시멘트로 된 경사로도 있는 것이 그냥 평범한 집은 아닌 것 같다. 더욱 평범하지 않은 것은 이 집의 전체적인 구성이다. 장애우가구 10, 일반 가구 6이 전형적인 다가구 주택에서 어울려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무의탁 노인도 1명 있고, 시각·지체·정신지체장애우들의 숫자가 모두 19명이나 된다. 이들은 모두 ‘두레가정공동체’라는 이름 아래 ‘따로 또 같이’ 사는 사람들이다.

 

  두레 가정 공동체가 90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독특한 공동체를 완성해 왔던 데에는 뭐니뭐니해도 집주인인 김미영 씨가 결정적인 산파역을 해왔다. 김미영 씨는 여느 집주인 같지 않게 돈에는 별 미련이 없는지 일반 가구들의 방을 빼서라도 갈 곳 없는 장애우들에게 전세값을 전혀 받지 않고 방을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김 씨가 그런 목적으로 집을 마련한 것은 아니었다.

  “90년에 이 집을 사서 와 보니 부모 중에 한쪽이 없는 결손가구가 두어 가정 있었어요. 또 얼마 후에는 나이 어린 아이들이 실질적인 가장이 돼 있는 소년소녀가장들과 주로 같이 살게 됐고요. 그래서 저도 아들 딸 키우는 엄마 입장에서 그냥 안된 마음에 아침저녁으로 그 아이들을 좀 돌봐줬죠.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런 결손 가정 아이들의 뒤에 장애우 부모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왜 장애우들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나 눈을 돌려 보니 장애우들이 시설을 나와 자립을 하려고 해도 돈이 없고 배운 것도 없어 일단 방 한 칸 구할 수 없어 오도 가도 못한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좀 금전적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방은 가진 것이 있으니까 그런 사람들이 자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무상으로 방 빌려주는 이상한 집주인

  물론 김 씨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사회복지법인 한국복지재단에서 오랜 동안 왕성한 후원회 활동을 해왔을 정도로 평소 나누는 삶에 대해 유별난 관심을 가져왔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평범한 주부면서도 이렇게 일을 벌여 나갈 수 있었을지 모른다. 아들은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있어 그의 든든한 동반자가 되겠다고 나섰고, 어렸을 땐 자신보다 세입 가구의 아이들에게 엄마가 더 애정을 쏟는다며 투정을 부리던 딸도 이제 누구보다 그를 이해해준다고 한다.

  처음엔 잘 적응하지 못하지만 곧 자신이 살아갈 방도를 금방 찾아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아름답게 살아가며 비로소 웃으며 생활하는 장애우들의 행복은 곧 김미영 씨 가족에게도 전염되는 듯하다. “우리 식구들 참 멋쟁이들이에요”라는 자랑을 감추지 못한다.

  그의 집을 찾아온 시설을 갓 나온 장애우들의 삶도 찬찬히 돌아보게 되면서 김 씨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우리나라 시설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시설에서 장애우들을 데리고만 있지 나중에 사회에 나와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나라 장애우복지의 전반적인 문제점에 대해서도 곧 눈이 뜨이게 됐다. 억센 말씨의 경상도 사람이라서가 아니라도, 1층에 경사로는 해놓고 정작 사회담당 공무원은 2층에 앉아서 서너 사람에게 들어올려진 휠체어장애우를 만나 일을 보는 우리나라 동사무소들의 행태에 대해 얘기할 때 그의 목소리는 커졌다. 그런 편의 시설 문제뿐만 아니라 두레가정 식구들의 취업 문제를 비롯한 장애우 전체의 직업재활문제 등에 대해서도 이제 그는 전문가가 다 됐다. 그 건으로 구청이나 시청에 진정서도 수없이 내서 이제 지역 내에서 알아주는 장애활동가이기도 하다.

  다른 무엇보다 김미영 씨가 지적하는 가장 큰 시설의 문제점은 인간의 자존심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롭게 가족이 된 장애우에게 김 씨가 가장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자존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자존심을 가진다면 자립은 절반 이상 된거나 마찬가지예요. 생각해 보세요. 자존심이 있다면 남이 주는 밥을 바라지 않고 자신이 먹고 살 일은 어떻게든 찾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간혹 오랜 동안 남이 해주는 대로만 살아온 타성을 버리지 못하는 장애우들도 있어요. 그럼 제가 막말을 해버리죠. ‘니는 보아하니 시설 스타일이다. 우리랑 같이 못살겠네. 어떻게 자기가 뭘 해볼 생각은 안 하고 남이 해주는 것만 바라나’하고 면박을 줘요.”

  새로운 장애우가 오면 일단 김미영 씨는 자신의 가정이 있는 공간에서 같이 생활하도록 하면서 그렇게 알게 모르게 자존심 회복 수업을 진행하는 한편 그 사람의 장애상태를 살펴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는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정도로 안정을 찾는 듯하면 기존 방들의 인원 등을 따져서 그 사람이 살아갈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까지는 온전히 김 씨의 몫이다. 가족들과 살면서 나름대로 자립을 꿈꾸다 이곳에 온 사람들은 그나마 조금 형편이 낫지만 시설에서 나와서 세상 여기저기를 떠돌다 소문만 듣고 찾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무일푼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인근 재활용센터에 가서 웬만한 기본 세간들도 싸게 사서 모두 마련해주기도 한다. 이제 두레가정에서 재활용센터에 가면 값을 절반만 받을 정도로 인심을 얻어놓고 있단다.


3년간 주어지는 자립준비기

  “시설에서 갓나온 장애우들은 처음 한 동안은 저를 자신이 늘 봐왔던 시설원장 같은 사람이 아닌가 하고 긴장하게 되나 봐요. 이런 저런 규율이 있다고 그것을 지킬 것을 강요하지 않을까 해서 저를 대할 때 좀 어려워하다가 시간이 지나서 저를 알게 되면 편해져서인지 맥주 한 잔 하자고 하고, 얘기하다가 같이 편하게 누워서 얘기 더 하자고 하기도 해요.”

  김 씨가 세운 두레가정의 운영원칙은 일단 3년간은 자립준비기로 돈을 전혀 받지 않고 방을 제공한다. 개개인의 사정에 따라 그 기한이 늘어나기는 하지만 대체로 3년이면 일자리를 잡고 얼마간 저축도 하면서 그야말로 자립을 할 수 있는 기반이 잡히더라는 것이 김 씨의 설명이다. 기한이 지나면 저금한 돈과 은행에서 융자받은 돈을 합해 그 방을 사거나 다른 곳으로 방을 얻어 나가게 되는데 계속 남아 사는 경우 일단 은행 융자금에 대한 이자는 당사자가 물어야 한다.

  그렇지만 빈손으로 그 집을 찾아온 대부분의 장애우들에게 당장의 급한 생활비와 세간을 마련해주고 또 그 사람을 위해 방을 비워주느라 일반 세입자 가구를 내보내게 되니 김 씨 가계에는 당연히 빚이 많이 늘게 되는 상황이 계속됐다. 현재 빚이 약 8백만원에 달하고 있어 이젠 자립 준비기간에도 월 1인당 2만원 정도를 관리비 차원에서 내도록 하고 있다. 그나마도 낼 수 없는 2명은 또 그것을 감해 주기도 하지만.

  김미영 씨는 초등학교 과정도 마치지 못한 장애우가 있으면 자원 교사로 활동하는 대학생들과 연결을 시켜 꼭 그 과정은 마치도록 한다. 게다가 개개 가구에 후원인을 연결시켜 주기도 하지만 그 가구에 들어오는 후원금이 얼마나 되는지,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전혀 노터치다. 다만 전체 운영비에 보태 쓰라고 들어오는 월 20만원의 후원금은 김 씨가 관리한다.

  그 돈을 모아 지난 해에는 모든 식구가 대구 팔공산으로 함께 놀러 가기도 했다.

  그렇게 끊임없이 마음을 쓰면서도 김 씨는 장애우세입자들에게 “집주인한테 자기 몸이 아프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 봤나. 다 자기 일은 자기가 해결하도록 해요”하고 애써 매몰차게 말한다.

  그래도 지체장애우의 경우 수술하면 상태가 훨씬 좋아진다는 진단이 나오면 수술을 받도록 하는 데에는 김 씨가 유난히 신경을 쓴다. 일단 수술로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쳐서 몸을 움직이기 쉬워져야 자립도 그만큼 빨리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동사무소 한 번 갔다 오는데 한 나절 걸리던 것도 1시간 정도로 절약되고 이런 저런 일거리도 더 쉽게 찾아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19명 중에 18명이 생활보호대상자이기 때문에 식구들이 수술을 받아도 병원비가 감면되니까 돈이 그렇게 많이는 안들어요. 특별한 검사를 받아야 한다거나 퇴원할 때 보조기 사는데 좀 들까. 시설에 있을 때부터 그런 수술을 미리 받으면 더 좋았을텐데 숫자가 너무 많아서 한 사람 한 사람한테 신경을 그만큼 쓸 수 없었는지 다 그런 제도를 활용하지 못한 것 같더라구요. 사실 어떤 면에서 우리나라 장애우복지제도도 제대로 알면 활용할 수 있는 게 많긴 해요.”

  물론 김 씨가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식구들의 일자리다. 옆에서 지켜보니 취로사업이 장애가 좀 있는 사람들이 일하기는 그 중에 나은 일자리이긴 한데, 영구임대아파트 단지가 아닌 일반 주택단지에서는 장애우한테 취로일을 잘 안 줘서 식구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별로 없다는 게 문제라고 한다. 그래도 접수날 제일 먼저 신청서를 들이밀라는 김 씨의 훈수가 들어맞았는지 두레가정 식구들 가운데 6명이나 지하철 가판대 운영권자로 당첨되기도 했다고 자랑한다.

  김 씨는 제 발로 걸어 들어오는 장애우 뿐만 아니라 소문에 딱하게 된 장애우가 있으면 찾아가 자신에게 보내달라고 청하기도 한다. 어느 경증 정신지체장애우의 경우 깡패같은 봉재공장 사장이 그의 임금은 중간에 다 가로채면서 노예처럼 부리고 못나가게 하는 걸 보고 크게 싸움을 해서 데려와서는 안정을 시켜 함께 살고 있기도 하다. 그 청년은 취로사업을 하면서 돈을 착실히 모아 이제 당당히 집세를 내고 산다. 얼마 전 김 씨의 생일날에는 엉성한 솜씨나마 드레스를 만들어와서 김 씨에게 선물을 해서 웃음을 선사했다.

  또 한 뇌성마비 장애우는 주몽재활원에 있을 때 컴퓨터에 대한 기본적인 것을 배웠으면서도 그것을 어떻게 직업으로 발전시킬 것인지 고민도 전혀 하지 않고 자신은 장애가 심해 안될 거라는 얘기만 되풀이 해댔다. 김 씨는 직업전문학교에 보내서 더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한 후 일단 자격증을 따라고 조언해 줬건만 원서를 내놓고는 정작 시험 당일에는 가봤자 떨어질 게 뻔하다며 아예 시험장에 안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더라는 것이었다.

  “그 때 제가 그 사람한테 ‘너한테 가서 붙으라고 안한다. 그냥 가서 시험만 치라는 건데 왜 그러느냐’고 막 화를 내서 우격다짐으로 시험장으로 보냈는데 떡허니 필기시험에 붙은 거예요. 그래서 동사무소 공무원들한테 관공서에서 장애우를 먼저 좀 고용해달라고 사정하고 간곡하게 청해서 결국 지금 전산 행정보조원으로 채용됐잖아요.”


샬롬의 집 여성장애우들의 새 보금자리

  지난해 시각장애우 원장의 성추행 사건을 세상에 알리고 보호를 요청했던 ‘샬롬의 집’ 4명의 여성장애우들도 이곳에 와 있다. 여기에 온 직후 전화소리에도 깜짝 깜짝 놀라며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돼 있던 그 여성들은 1년여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이제 많은 안정을 찾았다. 원장에 대한 고소건은 현재 검찰에 계류중이어서 아직 결말은 나지 않았다. 고소도 철회하고 용서를 하고는 싶은데 그 원장이 매번 너무 악랄하게 나와서 지금은 그 사람이 안쓰러울 뿐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함께 나왔던 여성 중 한 명은 안타깝게도 이곳에 온 후 세상을 떠났다. 그렇지만 경사스러운 일도 있었다. 이곳에 와서 정이 든 한 남성장애우와 올해 4월 20일 결혼을 해 신방을 꾸미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는 이곳에 온 후 수술을 받아 다른 사람의 손에 의지해야만 걸을 수 있던 것이 자기 혼자 힘으로도 잘 걸을 수 있게 됐다. 나머지 두 명도 올 가을에 수술을 받을 예정이라고 한다.

  그들에게 이전의 공동체 생활에 비해 무엇이 가장 크게 달라졌냐고 물었다.

  “이곳에서는 무척이나 자유로워서 좋아요. 예전 원장은 식사도 정해진 때 이외에는 먹지 못하게 하고 하다못해 물도 자주 못 마시게 했어요. 지금은 저 세상으로 간 다른 친구가 한 번은 냉장고에 있는 콜라가 너무 먹고 싶어서 조금 먹고 혼날까봐 물을 채워놨는데 그게 들통나 얼마나 혼났던지... 이제는 먹고 싶던 과자도 마음껏 사먹고 저금도 하고 있어요.”

  그 여성들은 교도소 재소자들에게 편지를 통한 선교활동을 오랜 동안 해왔는데 그것도 원장이 몹시 싫어해 몰래 눈치를 봐야 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먼저 온 장애우들은 나중에 온 장애우들에게 누구 못지않은 좋은 자립의 스승이 된다.

  집주인인 김 씨가 말하는 자존심이 무엇인지, 자신과 같은 장애우가 도대체 어떤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건지 자립에 대한 상을 잡지 못하는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그곳에 먼저 와 있던 장애우들의 생활 모습을 보게 된다. 자신보다 심한 장애를 가지고도 취로사업이나 가판대 운영, 화장지 노점 같은 일을 하면서 밥도 스스로 지어 먹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감’을 잡는다는 것이다.

  점점 늘어나 결국 20명 가까운 장애우들이 그 집에 드나드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하루가 멀다하고 걸핏하면 와서 목소리를 높이던 이웃주민들의 항의도 이제는 많이 줄었다고 한다.

  자립을 위해 동네에서 화장지 노점을 열심히 하는 장애우들을 보고 직업없이 집에 놀면서 지내던 남자들이 자극을 받고 일거리를 찾아 나서는 작지 않은 동네의 변화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소리가 얼마간 조금만 크게 나도 당장 항의하러 오는 주민들도 아직 있다. 그런데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해 이웃주민들의 항의가 집주인인 김미영 씨에게 집중되는 것을 보고 미안한 마음에 장애우들은 고쳐야 할 점들은 회의를 소집해 자숙하자고 결의를 하기도 한다. 이번 수해 때는 장애우 식구들끼리 조를 짜 교대로 침수구역의 물을 퍼내는 단결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시설 행사 때 자립에 성공한 선배를 부르라

  김 씨는 경제적인 이유 뿐 아니라 두레가정이 장애우들만 사는 또 하나의 시설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일반 가구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원칙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간혹 집을 구하기 위해 방만 보고 갔다가 나중에서야 그 집의 내력을 알게 되는 세입자 가운데에는 복덕방에 가서 왜 그런 집을 소개해줬냐며 항의하는 경우도 물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는 일반 가구들이 전세 기간 만기가 돼도 나가지를 않으려고 해요. 장애우 식구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쭉 지켜보면서는 이런 것이 사람사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저한테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요.”

  다른 두 명의 장애우와 함께 한 방에서 살면서 화장지 노점상을 하고 있는 중증 뇌성마비 장애우 장효성 씨는 “20년 동안 부산에 있는 시설 한 곳에서만 생활하다가 나온 후에 시설을 다시는 들어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며 살아왔다”고 말한다. 다른 장애우들과 허름한 지하공간을 빌려 살다가 여관에서도 한 동안 지내고, 그나마도 돈도 다 떨어져 오갈 데가 없어 강원도에 있는 한 장애우공동체에도 몇 년 있었던 것도 그의 탈시설 투쟁기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이 두레가정은 장애우가 자립해가는 중간단계로서 매우 적절한 대안이다. 정부에서 그런 취지에서 영구임대아파트를 제공하고 있긴 하지만 자신과 같은 단독세대는 아파트 당첨되기가 하늘의 별따기이기 때문에 딴 나라 얘기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시설에 그렇게 넌더리를 내는 장애우들이 많지만 현실의 불가피한 구조상 시설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장애우들이 많다는 사실을 김 씨는 잘 알고 있다. 일부 시설 원장 가운데에는 충분히 자립할 수 있는 장애우도 머릿수대로 지급되는 정부 보조금 때문에 오히려 자립을 막는 경우도 적지 않게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장애우공동체라고 해서 비닐하우스 같은 곳에서 장애우들이 모여 사는 곳엘 가보면 제가 보기에 충분히 자립할 수 있을 것 같은 장애우들이 70~80%가 넘어요. 지체장애우시설에 청각장애우도 생활하고 있는 것도 봤는데 그건 그 사람의 인생을 빼앗는 무책임한 일이에요. 그곳에서 장애우들이 그냥 아무런 삶에 의욕이나 희망 없이 살고 있는 것을 보면 막 화가 나요.”

  그렇지만 김 씨도 시설에 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는 걸 인정한다. 현재 식구 가운데 무의탁 노인과 학교도 못가고 고등학생인 누나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심한 정신지체아가 있는데 두 사람은 올해 가을 꽃동네와 두레마을에 가기로 되어 있다. 다른 식구들이 계속 붙어서 돌봐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곳으로 가는 것이 그 두 사람에게는 좋을지 모른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우선 일단은 시설이 소규모화되어야 하고 아무리 장애가 심하더라도 그 사람이 자립생활을 할 수 있도록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현재로서의 시설 상이다.

  “제가 경기도 광주에 있는 한 시설의 높은 분하고 잘 알아요. 근데 무슨 행사가 있다고 저보고 와서 축사를 해달라고 해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높은 분들의 재미없는 고매한 말씀만 줄줄이 듣게 하지 말고 우리 식구들 가운데 훌륭하게 자립에 성공한 사람을 데려다가 자신이 어떻게 자신의 힘으로 자립적인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는지 얘기를 들으세요. 정말 그 아이들한테 필요한 얘기는 바로 그런 얘기 아닙니까’라고요. 전국 시설의 모든 행사에 그런 순서를 꼭 마련해서 시설 장애우들이 자립에 대한 희망과 꿈을 키워나갔으면 좋겠어요.”

  만약 전국의 시설 운영자가 이 말에 동의해 초청 강사들을 찾는다면 두레가정 식구들이 단골강사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작성자한혜영 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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