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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이야기 1] “저를 더 필요로 하는 곳에 써 주소서”

국내 최초의 장애우 사제 백학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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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십칠년 삼월 사일, 이른 봄의 햇살이 조금은 따사롭게 차창 안으로 전해지던 오후 무렵.
  바로 보름 전인 이월이십일 사제서품을 받고 신부로서 세상에 다시 태어난 백학현(31 * 베드로) 보좌신부는 함께 서품을 받은 동기 보좌신부와 함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열흘 동안 내리 원주교구내 서른 네 곳의 모든 성당을 찾아다니며 각 본당의 신부님과 신도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그 곳에서 첫 미사를 수행하는 강행군을 막 끝낸 시점이었다.

  가족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가 바로 눈 앞에 보이는 지점까지 다달았을 무렵이었다. 이제 다 왔구나 하는 생각에 잠시 긴장이 풀리면서 방심했던 탓일까. 운전 중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계속 각인시키려고 했지만 눈치없이 눈꺼풀은 자꾸만 내려왔고, 결국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주인의 손길에 놓여난 핸들은 어느 덧 도로에 접해있던 논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얼마나 깊이 잠이 들었는지 백 신부는 차가 울퉁불퉁한 논두렁을 험하게 부딪쳐 가며 삼십미터 쯤이나 지날 때까지도 눈을 뜨지 못했다.

 “열흘 동안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 내에 원주교구 내 모든 성당들을 찾아다니며 미사를 올려야 했기 때문에 고된 일정이었죠. 그때 사고 지점이 여기서 삼십 분 거린데, 지금 가봐도 그냥 도로하고 같은 높이의 별 것 아닌 논이에요. 아마 그때 깨어 있었다면, 그래서 차가 그렇게 굴러갈 때 바짝 긴장을 하고 어느 정도 몸에 힘을 주고 있었더라면 지금 상황이 조금 달라져 있을 수도 있죠.”

 고삐 풀린 말처럼 질주하던 차는 어느 높다란 논둑이 이르러 결국 급정거를 했고, 안전벨트에 매여 있던 무방비 상태의 몸은 출렁대면서 힘없이 반으로 접혔다. 그것은 곧 중추골절로 이어졌다.

 중추골절, 그것이 대부분 곧바로 하반신마비 장애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사고 직후 아무리 힘을 줘도 전혀 들리지 않는 다리를 보며 이미 얼마쯤은 감지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도 바로 사흘 뒤인 삼월 칠일자로 발령받아 가게 돼 있던 횡성본당으로 가기는 글렀구나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사제서품을 받은 지 정말 딱 보름만의 일이었다.

 “횡성본당이 아니라 병원으로 발령 받은 거죠, 뭐.”

 남의 말하듯 평안하게 말하는 그에게서 중도장애를 갖게 된 ‘장애우 2년차’가 사고 당시를 회상할 때 언뜻언뜻 비칠 법한 분노나 절망의 그림자는 없었다. 남다른 그의 평안함은 그야말로 ‘신부님’이어서 그랬을까.

 서품을 받는다는 것, 그것은 신으로부터 사제로서의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는다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어느 책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그 서품식의 절차 중에는 온 몸을 바닥에 던져 땅과 몸이 하나가 될 정도로 바짝 엎드린 채로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의식도 있다고 했다. 그것은 이후의 모든 삶을 오로지 신 앞에 헌신하고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가 되겠다는 의미의 서약이라는 것이다.

 가톨릭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집안에서 성직자가 나는 것을 더없이 대단한 영광이자 축복으로 여긴다. 오남 사녀라는, 유난히 많은 형제 중에 형님 한 분과 누님 한 분이 이미 성직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아온 가족환경 속에서 백 신부는 자신 또한 그 형제들의 뒤를 따르게 되리라는 생각을 아주 자연스럽게 가져 왔었다.

 그렇게 자신의 길을 결정한 고등학교 일학년 이후 광주가톨릭대학교에 입학해 신학을 공부하는 육년 동안 자신의 길에 대한 추호의 의심없이 이후 사목활동을 할 때 어느 분야에 자신의 손과 머리를 보탤 것인지만을 고민해왔던 그였다. 명도회라는 학술연구동아리에서 가톨릭신앙을 어떻게 한국이라는 환경에 토착화시킬 것인가를 놓고 학우들과 머리를 맞대며 공부하고 여가에는 각종 스포츠를 즐기던 학창시절은 다른 점을 떠나서도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행복했던 시간이 아닐 수 없다.

 부모님은 당신들의 여덟 번째 자식이 그렇게 사제의 길을 차근차근 밟아가는 것을 감사와 영광으로 지켜보셨다. 그런데 이제 서품식도 마치고 어엿한 보좌신부가 된 아들에게 닥친 사고 소식은 부모님에게는 말 그대로 청천벽력이었다. 그때까지 하반신마비장애를 가진 신부는 국내에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놀라움과 슬픔을 금치 못하셨는지도 모른다.

 사고로 인한 고통과 장애우로서의 앞으로의 삶을 감내하는 것은 베드로 신부 자신에게 온전히 다가온 한 동안의 기도거리였다. 수술을 받고 원주기독병원에서, 다시 부천성가병원으로 옮겨 열 달이 넘게 입원해 물리치료를 받는 동안 자신이 장애우가 됐다는 사실은 시간이 갈수록 분명해지는 터였다. 함께 차에 타고 있던 동기 신부가 대퇴부만 탈골한 부상에 그쳤던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친구마저 심한 장애를 갖게 됐다면 그 죄책감으로 그에게 더욱 긴 기도거리를 안겨주는 인생의 숙제가 됐을 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병문안을 와 주었다. 그런데 연세가 지긋한 분들 중에는 병실에 들어오면서부터 벌써 눈시울을 붉히며 손수건을 찾는 분들이 많았다.

 밤이면 차라리 천주님이 자신을 빨리 데려가 주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로 극심한 육체적 고통 가운데 있었지만 백 신부는 그런 그들을 향해 웃음을 보이며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사고 직후에는 아, 천주님이 나를 따로 쓰실 곳이 있어서 이런 길을 열어주시는구나 하고 생각했기 때문에 담담했어요. 그런데 수술 후 회복하고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육체적인 고통이 너무나 커서 사실 남모르게 스스로에게 짜증을 낼때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신부인데, 몸이 아프다고 사람들한테 짜증을 낼수도 없잖아요.(웃음) 그래서 저를 병문안 온 분들을 제가 오히려 위로하려고 하고 억지로라도 밝게 웃으려고 했죠.”

 그러다 퇴원을 결심했던 지난해 말, 국립재활원에 대해서 얘기 해주며 그곳으로 옮겨 보라는 말씀을 해 주시는 분을 만났다. 그 곳에서는 다른 병원과 달리 휠체어장애우가 혼자 힘으로 일상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기본 동작훈련을 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져 있다는 것이었다.

 “육개월 동안 입원해 있었던 부천성가병원에는 저와 같은 척수장애를 가진 입원환자는 아무도 없었거든요. 진작 국립재활병원으로 갈 걸 그랬어요. 시설도 시설이지만 그 곳에서 만난 같은 척수장애우 분들한테 얼마나 많은 힘을 얻었는지 몰라요. 사실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끼리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정보나 도움을 주고 받는 것이 참 좋더라고요. 국립재활원에서 장애를 갖게 된지 십육 년째라는 분도 있고 또 삼 개월째인 사람도 모두 만났는데, 장애이력이 오래되신 분들이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장애에 대해서 말하면서 저같은 초년장애우들을 위로하는 얘기를 듣다보면 정말 힘이 절로 생기더라고요.”

 사실 어찌보면 참 신기하기조차 한 삶들이었다. 남들 보지 않는 밤이면 분명히 자신처럼 잠을 설치며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텐데도 누구보다도 넉살좋고 밝은 웃음을 자주 터뜨렸다. 그리고 주위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웃음을 웃게 만들었다. 위로하고 힘을 주는 것은 직업상(?) 자신이 더 담당해야 할 몫인 것 같은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그냥 후배장애우로서 마음 편하게 지냈다.

 그 곳에서 환자들과 휠체어를 타고 타구도 하고 국립재활원 내에 있는 운전연습장에서 이전과 달리 두 손만으로 운전하는 방법을 익힌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일반 가정집과 같은 공간에서 휠체어를 타고 혼자 옷을 입거나 욕실에 들어가고 나갈 때 어떻게 해야 하는 지도 익혀나갔다.

 그리고 그곳을 나와 올해 이월 사일부터 정착한 곳이 바로 원주 가톨릭사회복지회 법인에서 운영하고 있는 ‘천사들의 집’이다. 정확히는 천사들의 집 바로 옆 건물인 사택에서 백 신부는 현재 요양 중이다. 그 사택에는 네 분의 신부님들이 기거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원주가톨릭사회복지관 관장님도 있고 천사들의 집 원장으로 있는 최기식 신부님도 있다.

 “원래 제가 쓰고 있는 이 방이 최기식 신부님이 쓰시던 방이었어요. 전 원래 이층에 있는 방으로 가야 하는데, 계단 때문에 올라가 질 못해서 최 신부님이 저한테 방을 내주시고 대신 이층의 골방을 쓰고 계시죠.”

 이층 공간을 빼고는 사택 일층의 시설들은 장애우가 된 사제를 맞기에 부족함이 없는 시설이었다. 그 곳에서 백 신부는 천천히 운동도 하고, 오후에는 앞마당으로 나가 천사들의 집 아이들을 안아주기도 하면서 지낸다.

 아직 외출은 거의 못했다. 큰 사고 이후라 일 년이 지났어도 몸의 소화기능이나 배변기능이 완전하지 않은 등 아직 몸의 상태가 그렇게 좋지 않은 상황이고, 차가 없어서 외출할 때마다 다른 사람의 힘을 빌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모처럼 한 번 외출한 것이 천사들의 집 원생들이랑 다들 휠체어를 밀고 원주시내에서 머나먼 문화극장까지 영화를 보러 갔는데, 하필이면 진눈깨비가 쏟아지는 날이어서 실컷 고생을 한 적이 있다.

 대중교통에 대한 문제점이나 사회 전반의 편의시설 수준 등에 관해서는 다른 장애우들한테 전해 들었지, 백 신부 스스로 휠체어를 끌고 다니며 불편부당한 체험을 많이 당해보지는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런 것쯤은 안봐도 훤한 것 같은 상황이다.

 예전에 국립재활원에서 만난 한 휠체어장애우가 택시를 잡느라고 너무도 오래 기다리는 것을 봤다고 한다. 그 친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듯 짜증을 내지도 않고 계속 참을성 있게 택시를 기다렸지만 그는 그걸 보면서 ‘그냥 휠체어로 택시 앞을 확 막아서서 잡으면 되지 않을까’하는 다소과격한(?) 생각도 했었다고 한다.

 “다른 곳에 가게 되면 제일 먼저 화장실부터 보게 됩니다. 저같은 척수장애우들은 규칙적으로 배변을 봐야 하는데 수세식 화장실이 없으면 너무 불편하거든요. 그런데 다른 성당들도 그렇고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이 흔하지 않아요. 그렇게 예전에는 눈에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많이 눈에 띄여요.”

 사실 아직도 가끔 이유없이 우울해질 때도 있다고 백 신부는 털어 놓는다. 한 버는 얼마 전에 예전 학교 다닐 때랑 서품반기 직전 사진들을 보다가 왈칵 눈물이 솟기도 해서 당분간 지난 날의 사진일랑 좀 더 시간을 가진 후에 다시 꺼내 봐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자신을 위해 준비하신 신의 남모를 뜻이 헤아려질 때는 감사함으로 충만해지기도 한다. “제가 워낙 본당에 배치된 후에도 사회복지쪽으로 사업을 많이 하려고 했었거든요. 그래서 ‘하느님의 뜻이 바로 이것이로구나’ 하는 깨달음을 새삼새삼 갖게 됩니다.”

 군대에 가기 위해 잠시 휴학해 있는 동안에는 항간에 ‘거지대장’으로 잘 알려진 우총평 씨가 운영하는 부랑인시설에서 석 달 동안 그들과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그곳은 정신장애우들과 부랑인들이 모두 함께 생활하고 있는 곳이었고, 그 밖의 공간에서도 장애우들을 자주 접해보긴 했죠. 학창시절 앞으로 성직자의 길을 가면서 그들을 위해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기도 했지만 사실 지금 돌아보면 동등한 인간이라는 측면 보다 솔직히 동정적인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장애우가 된 지금의 느낌은 확실히 조금 달라진 걸 보면요. 그러니 장애우를 위한 사목활동은 같은 장애우가 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그래서 전 장애를 사실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백 신부가 장애를 갖지 않았으면 자연스럽게 가게 됐을 지도 모르는 또 하나의 길, 보좌신부 2~3년을 거쳐 성당 안에서 신도들과 함께 하는 본당에서 사목활동을 하는 길은 자연스럽게 접게 됐다.

 그러나 그 길에 대한 미련은 전혀 없을까. 그리고 장애우 가운데 수많은 개신교 목회자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천주교계에서는 장애우에게 아직 닫아걸고 있는 빗장은 언제쯤 풀리게 될지, 혹 지금 그부분에 대해서 달리 생각해본 적은 없는지, 다소 대답하기 곤란할 내용이겠지만 물어버렸다.

 “본당사목에는 이제 더 이상 미련은 없어요. 하느님이 뜻하는 바가 그것은 아닌 것 같고요, 그래서 저는 이전부터 생각해왔던 사회복지쪽의 특수사목을 담당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천주교에서 성직자의 자격요건에 장애에 대한 제한조항이 쉽게 사라지게 될 것 같지는 않군요. 성직자가 되려면 기본적인 성무를 수행하는 조건을 갖춰야 하고, 그 과정에 규격화된 성구를 똑같이 사용하게 되는데 장애우들은 그게 좀 힘들잖아요. 저같은 경우면 어떻냐구요? 아, 물론 저같은 정도의 장애우도 성무를 보자면 다 할 수는 있죠. 그렇지만 의식을 수행하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더 오래 걸리고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을 겁니다. 글쎄, 장애우들만 모여 예배를 드린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죠.”

 그리고 그 말 끝에 한참 만에야 백 신부는 나름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놀랍게도 장기간의 외출을 계획하고 있었다.

 “당장은 뭐라 말씀드릴 순 없고, 날도 따뜻해지고 했으니 이번 달 쯤에 차를 마련해서 직접 운전하면서 전국의 사회복지시설들을 모두 돌아보고 싶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지는 그렇게 현장을 견학한 다음에 대략 윤곽이 잡힐 것 같아요. 그러면 제 대답을 누구보다 기다리고 게실 주교님께 계획을 말씀드리고 실행에 옮겨 나가야죠.”

 휠체어에 의지해 살다보니 백 신부의 물리적인 눈높이는 많이 낮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야가 훨씬 깊고 넓어졌을 것이라는 점이다. 땅과 가까이 있는, 이 세상에서 스스로 키를 낮추고 있는 자연물과도 대화를 할 수 있을 만큼  언제든지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더 열린 마음도 가지게 됐을 듯 하다. 특히 장애우들에게는 더욱.

 취재를 마친 다음 날, 지난 해 참가자였던 원주지역 다른 장애우분의 권유로 오는 5월 경주에서 열리는 제4회 한일장애인교류대회에 백 신부님이 참가하기로 결심하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한일장애인교류대회, 그것이 백 신부님이 가게 될 앞날에 좋은 나침반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가절하다.

 모든 종류의 운동을 다 좋아했다는 백 신부님. “평생의 운동은 학생시절에 다 한 것 같다”며 웃는다.

 그런 백 신부님께 휠체어장애우도 즐길 수 있는 스포츠는 무궁무진하다고 알려 드렸다. 휠체어테니스, 휠체어농구, 양궁, 사격... 그러나 “운동에 힘쓰기 보다 더 중요하게 할 일이 너무 많다”는 백신부님의 대답. 그래도 테니스장에서 멋진 폼으로 서브를 날리는 백 신부님의 모습도 보고 싶다.

작성자한혜영 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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