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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①] “이천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도 저를 지켜봐 주세요

국내최초 장애우 실업 사격선수 김임연씨

본문

  태능에 위치한 십미터 종목 사격연습장의 한 곳에는 예쁘장한 빨간 휠체어가 밤새 다소곳이 놓여 있다. 다른 일반 선수들이 몰래 구리고 타보면서 신기하고 생소해 했던 그 휠체어는 어느덧 늘 그곳에 있어야 할 것만 같은 필수품이 됐다. 그 휠체어의 주인인 김임연 씨(32)의 존재도 마찬가지.

  김임연 씨는 주택은행 소속 사격선수다. 그리고 지체장애 3급의 장애우다.

  간단한 이 두가지 사실이 한 사람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그냥 들어 넘겨서는 안된다.

  과히 ‘평범하지 않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장애우가 일반 실업팀에 소속돼 고정적인 월급을 받으며 직업선수로 활약하고 있는 것은 국내 스포츠 역사상 그이의 사례가 전무후무하다는 점이 그것을 입증한다.

  사실 월급을 받으면서 안정적으로 운동을 할 수 있는 직업적인 운동선수가 되는 것. 그것은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대회에 참가하면서 스포츠를 하는 맛과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된 장애우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일일 것이다. 그들 중에서도 구십이년 바르셀로나 장애인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는 화려한 이력을 갖고 있는 김임연씨로서는 그 열망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컸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헤아릴 수 있다.

  그러나 장애우스포츠계에서 엘리트선수로 손꼽히는, 남부럽지 않은 그이의 기록도 그 꿈을 이루게 하는 데에는 오랜 세월,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했다. 현재 장애우만으로 구성된 실업팀은 없고 일반 실업팀에서는 장애우선수를 선발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장애우올림픽의 역사가 오래 되고 각종 세계장애우경기대회도 줄을 잇고 있다 해도 일반대회와는 완전히 구분된, ‘그들만의 잔치’ 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지체장애우들은 학창 시절 친구들로부터 가장 소외감을 느꼈던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체육시간을 떠올릴 것이다. 다른 반아이들이 모두 ‘와와’ 거리며 웃고 소리치며 달리기, 뜀틀이나 축구, 농구들을 할 때도 지체장애우들은 그냥 교실에 혼자 남아 시간을 때우는 일이 태반이었으니까.

  김임연 씨의 학창시절 추억 속의 체육시간도 그같은 풍경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네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지체장애를 갖게 된 그에게는 친구들과 달리기시합을 하며 놀았던 기억조차 없다. 그런 그가 세계 각국에서 열리는 각종 선수권대회에 참가하는 국가대표 운동선수가 된 것을 보면 어떤 사람에게 주어지는 한 가지 길은 운명처럼 열리게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처음 그가 운동을 시작한 것은 중학교 일학년 때, 단순히 체육점수를 잘 받기 위해 배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하필 왜 사격이었을까. 선이 고운 그이의 얼굴을 보면 어쩐지 자신의 키의 절반이 넘는 공기총을 들고 있는 모습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주위에서도 여성장애우라면 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권하는 종목은 양궁 정도인 것이 사실이다.

  “운동을 처음 시작할 때 양궁을 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얼마 후에 처음으로 총을 잡아 봤는데 양궁보다 훨씬 더 재미가 있더라구요. 그리고 얼마쯤 더 하니까 ‘내가 할 일은 바로 이거다.’ 싶어졌어요. 지금 생각해도 사격은 저랑 참 잘 맞아요. 그만큼 성과가 저한테 돌아왔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지 몰라도 지금 생각해도 종목 선택을 정말 잘한 거 같아요.”

  사격은 사실 조금 ‘비싼’ 스포츠이다. 기본 장비인 총이 몇 십만원씩 할 뿐만 아니라 한 번 총을 쏠 때마다 탄환과 표적지가 소모돼 계속 사서 써야 하기 때문이다. 양궁의 화살처럼 한 번 쓰고 또 쓸 수도 없어 연습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돈이 많이 든다.

  그이가 운동을 시작할 무렵 유복했던 집안형편도 몇 년 후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많이 어려워졌다. 그렇지만 그이의 어머니는 늘 허약해보였던 딸이 사격을 시작하면서 날로 건강해지고 생활태도도 적극적으로 변하는 것이 마냥 흐뭇해 모든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런 가족의 후원에 힘입어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 매년 열리고 있는 전국장애인경기대회에도 참가하게 됐다. 타고난 승부근성과 침착성에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은 덕이었다. 결국 팔십팔년 서울 장애인올림픽에 대표선수로 선발되기도 했다. 칠킬로그램까지 나가는 총무게를 이기기 위해 총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훈련하는 등 더욱 악바리처럼 연습했다. 그런 그에게 비보가 전해졌다. 삼개국 이상이 출전해야 하니 하나의 종목이 성립되는데 출전이 예되던 한 나라가 참가포기를 선언해와 종목 자체가 없어지게 됐다는 것이었다. 올림픽 메달에 대한 첫 번째 시도가 어이없게 허물어지는 찰나였다.

  절망해 있던 그이에게 상이군경 출신 스누크 포켓볼 선수로 정립회관에서 함께 훈련중이던 이상철 씨가 다가왔다. 그는 그러면 권총 종목에 도전해 보라며 직접 경남 창원까지 내려가 어렵게 총을 구해오기도 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다가오던 그가 어느 날 임연씨에게 청혼을 해 왔고, 자신에게도 이미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그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 보다 장애가 중한 척수장애우라는 점을 충분히 감안했음에도 결혼을 결심하였다.

  사실 팔십구년 결혼과 동시에 그는 운동을 잊고자 했다. 상이군경회 소속 선수들의 보이지 않은 압력에 의해 따논 당산이었던 세계대회 출전 기회를 몇 차례 놓치고 나자 장애계 운동판에 환멸을 느껴 운동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혹 미련이 생길까봐 소중히 간직해온 자신의 모든 기록이나 일지를 모두 불태워 버리고 어렵게 어렵게 마련해 왔던 총이며 모든 장비를 팔아버렸다.

  신혼시절 그럭저럭 살림하는 잔재미에 정을 붙여 살기도 했다. 그러나 왠지 허한 마음은 쉽사리 안정이 되지 못했다.

  “조심스럽게 남편한테 ‘나 다시 운동 해볼까봐’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안그래도 재능을 썩히는게 안타까웠다며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는 것예요. 그렇게 다시 힘을 얻어서 당장 다가온 장애우체전부터 준비했죠.”

  그 동안 쌓아온 실력은 숨길 수 없었는지 몇 년간 손을 놨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참가한 구십일년 체전에서는 손쉽게 금메달을 땄다. 그리고 다음 해로 예정된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 참가를 목표로 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연습을 했다. 결과는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단상에 선 금메달리스트로서 스포트라이틀르 받게 됐다. 아예 아파트 베란다에 연습장을 마련하고 하루 중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연습에만 투자하고 나머지 시간에도 인근 사격장을 찾아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던 결과였다.

  이후 몇 차례의 세계대화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의 다음 큰 목표는 아틀란타 올림픽이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사실 구십육년 올림픽 당시 그는 화제의 인물이었다. 급성 위염으로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링겔만 맞으며 십여일을 버틴 몸으로 메달을 그것도 두 개나 따내자 국내 방송사에서는 올림픽 정신의 표본이라면 그이의 사연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기 때문이다.

  “그냥 울면서 출전하겠다고 버텼죠. 제가 악바리라고요? 하지만 생각을 해 보세요. 악을 쓰며 연습하면서 그 날을 기다린 것이 사년이예요. 그래서 경기장에 왔는데 차라리 그곳에서 쓰러지더라도 출전은 하고 싶은 것이 모든 선수들의 심정 아니겠어요?”

  올림픽 개최지인 미국 아틀란타에 도착해서도 연습도 못하고 계속 선수촌에서 누워 지내야 했다. “소변검사를 해도 거의 맹물과 같은 성분만 검출될 정도”로 탈진했었다고 하니 그 때의 건강상태가 어떠했는 지는 상상이 된다. 메달이 확실시되는 그이였지만 주위 코치나 다른 선수들이 다른 경기 출전 자체를 말렸을 정도로 안 좋은 몸상태였고, 그래도 첫 경기에서 동메달을 따냈다. 평상시 컨디션 속도대로 총을 쏘자니 아무래도 금방 힘이 떨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다음 경기에서는 전략적으로 제한시간 내에서 최대한 힘을 분산시키며 경기에 임했다. 그제서야 제 실력이 나와 결과는 금메달이었다.

  다음 경기날, 혹시 모를 메달에 대한 미련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코치는 진심으로 경기 출전을 말렸다. 더 이상 옆에서 지켜 보기가  힘들 정도로 얼굴이 붓고 병색이 완연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냥 울면서 출전하겠다고 버텼죠. 원래 제가 악바리냐고요? 하지만 생각을 해 보세요. 그 날을 위해 사 년을 기다려 왔으니까요. 차라리 경기장에서 쓰러지더라도 출전을 하고 싶은 것이 모든 선수들의 심정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 경기에서 마지막 방아쇠를 당긴 순간 직감적으로 자신이 다른 모든 선수들을 따돌렸다는 사실에 깨달았다. 그 순간만큼은 너무나 감격스러워 그도 환호를 터져나왔다고 한다. “대회 기간 내내 오로지 저한테만 붙여 계셨던 팀 의사선생님이 ‘내 피가 다 마르더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암튼 그 때가 제일 기뻤는데, ‘아. 이 맛에 내가 운동을 하지”하는 생각이 새삼 들더군요”

  그렇게 귀한 두 개의 금메달을 보탠 극적인 사연 때문에 귀국 후에도 스포츠전문 케이블채널에서 그를 취재해갔다. 그 방송국 기자는 여러 가지를 물어 본 후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희망’을 물었다. 그는 오랜 시간 마음 속으로 준비하고 생각해왔던 바를 담담히 밝혔다. “국내 제일의 실업 사격팀인 주택은행에서 직업 선수로 뛰고 싶다”고. 실제로 일반 사격대회에서 다른 비장애선수들과 같은 종목에서도 경쟁할 수 있다며 직접 총을 쏘아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우연히도 그 방송을 주택은행 신명호 은행장이 본 것이다. 신 행장은팀 코치들에게 김임연 선수를 당장 찾아오라고 했고, 그 다음날로 주택은행으로 불려갔다. 그리고 드듸어 구십육년 시월오일, 그는 주택은행에 입행했다. 특채 형식을 띤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인사였다.

  그 자리에서 채용이 결정되고 처음 인사를 하러 가자마자 그이는 당당하게 자신 말고 다른 장애우도 혹시 채용할 위사가 있는지부터 챙겨 물었다. 그러나 그이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기존의 회사 시설을 고치지 않아도 되는, ‘걸어다닐 수 있는’ 장애우라는 점이 회사 내부의 혹시 모를 우려를 잠재울 수 있었다는 설명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덜렁 혼자 일반 선수들 틈에 놓이게 된 상황에서 그이는 남다른 각오를 새겼다. 자신이 좌지우지될 것이라는 사실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일반 선수 종목을 연습하고 금요일에는 휠체어에 앉아서 연습을 해요. 그런데 여기 태능에 와서 처음에 휠체어에 앉아 연습을 하니까 다른 팀 선수들이 다들 한 번씩 쳐다보고 가는 거예요 등 뒤로도 그런 시선이 느껴져서 조금 불편하기도 했는데, 그럴수록 더 연습도 열심히 하고 인사 잘 하고 깔끔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죠.”

  그이는 주위에서 알아주는 연습벌레다.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곧바로 연습하러 들어가는 그이를 보고 혹 코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저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오해를 했었노라고 나중에서야 다른 선수들이 쑥스러워하며 털어놓기도 했다.

  “초기에 다른 팀 남자선수들이 음료수내기 시합을 하자는 제안을 해오기도 했어요. 아무래도 장애우라서 얕본 측면이 있겠죠. 결과는 물론 제가 음료수를 얻어 마셨죠.”

  그런 노력의 결과로 주택은행에 들어간 후 처음 출전한 일반 대회에서 팀이 단체 일위를 하는데 김임연 씨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고 자부한다. 짧은 연습기간에도 불구하고 개인전에서도 일반 선수들과 나란히 경쟁해 사 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슬럼프 없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 앞으로의 대회에서도 계속 기록이 좋아질 것이라고 자타가 기대하고 있다.

  “예전에는 장애우선수들이 태능에 가서 연습하고 싶어도 어떻게 접근해야 할 지 몰라 망설이는 경우가 많았어요. 이제는 다른 선수들한테 내가 있으니 매일 편안하게 와서 연습하라고 말합니다. 다른 일반 선수들도 저를 늘 봐와서 이제는 휠체어장애우를 보면 자연스럽게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게 됐다고 얘기를 하더군요. 그런 조그만 변화들이 저는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현재 그이는 주택은행 소속 아홉 명 선수 가운데 제일 연장자이다. 과연 언제까지 선수로 뛸 수 있을까 그는 가끔 자문해보곤 한다.

  “외국에서는 여성 사격선수들이 마흔이 넘어서도 계속 출전하는 걸 봐 왔지만 사실 너무 힘이 들어요. 매번 올림픽을 겨냥해서 연습을 해왔는데 친구를 만나는 일이나 집안일 등 개인적인 것은 많은 것을 희생하고 지내왔거든요. 더 늦기 전에 아이도 갖고 싶고 체력적으로도 무리일 것 같아 다음 이천년 패렬림픽까지만 선수로 뛸 것이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천이년에는 부산에서 극동 및 남태평양장애우경기대회가 열리기 때문에 주최국의 체면상 하나의 메달도 아쉬운 상황이라 주위에서는 그이를 극구 말리고 있다.

  그러나 그때 사격을 완전히 포기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나름대로 꿈과 계획을 키워 가고 있다.

  “사실 장애우들이 처음 운동을 시작할 때 마땅한 지도 선생님이 없어 참 많이 답답해 합니다. 일정한 선수급으로 선발되면 다른 일반 선수팀의 코치나 감독을 맡고 계시는 분이 대회 준비기간에 잠시 저희 장애우 선수들을 지도해 주시는데, 가끔 장애 특성상 도저히 불가능한 자세를 요구하기도 하세요. 그것을 따라 하지 못하면 언뜻 이해를 못하시고요. 그래서 정말 각 특성으로  한 세밀한 신체구조에 대해서도 잘 아시는 분이 참 아쉬웠어요. 장애우스포츠 역사를 돌아볼 때 이제는 장애우선수 출신 전문코치가 배출될 때가 되지 않았나 싶고, 제가 그 선두주자가 되고 싶은 욕심이 있는 거죠.”

  올림픽 금메달 이연패의 주인공이지만 주택은행팀에 합류해 보니 기술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오랜 기간 제대로 지도를 받으며 훈련 받아온 일반 선수들에게 오히려 배우는 입장이 되었다. 그럴 때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는 다른 장애우 선수들이 자연스럽게 생각났고 자신이 새롭게 알게 된 기술 등을 차근차근 머릿속에 새겼다.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연수를 받고 시험도 통과해야 하는데, 연습시간에 쫓겨 시간을 내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다. 대신 그날 그날의 컨디션 뿐만 아니라 사격에 관한 자신의 기술 등을 기록하는 일지작성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계속 하고 있다. 그것이 앞으로 좋은 강의자료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외국에서는 손가락을 잘 움직일 수 없어 방아쇠를 당기기 어려운 척수장애우도 첨단 장비를 이용해 사격을 즐기는 모습을 봤어요. 그렇게 사격에 대한 저변 확대가 빨리 이뤄졌으면 좋겠고 거기에 제 미약한 힘이나마 보태고 싶기 때문이죠.” 얼마 전부터는 팔팔올림픽을 계기로 국내에서 처음 사격을 시작했던 동료들과 파이날 슈팅 크럽이라고 명명된 모임을 만들고 정립회관에서 정기적ㄱ으로 만나 연습ㅇ르 하면서 자신들을 이을 사격선수 발굴이나 육성 등의 문제까지 격없는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얼마전 장애인사격연맹도 만들어지고 거기에서 대회도 주최하기 시작했으니 이전보다는 상황이 나아지리라는 기대도 갖는다.

  올해는 몇 가지 굵직한 세게대회가 에정돼 있어 그는 요즈음 더욱 바쁘다. 주택은행 팀원들과 함께 출전하는 각종 국내 경기 외에도 그이 혼자 참가하게 될 여러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것이다. 특히 이천년 올림픽 출전권이 달린 스페인 세계대회가 당장 다가와 있고, 장애우아시안경기대회격인 페스픽대회가 태국에서 열린다.

  그렇게 차근차근 이년 앞으로 다가온 이천년 시드니 올림픽에 대한 준비도 하고 있다. 남들은 더 늦기 전에 아기 갖는 일을 서두르라고 하지만 지금은, 사격만 생각하고 싶다. 모든 것이 때가 있듯이 지금은 국가를 위해서나 자신을 위해서도 조금 더 선수로 뛰어야 할 시기이기 때문이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면 국가에서 지급하는 연금을 받죠. 그렇지만 장애우선수들은 일반 선수들에 비해 연금 지급 기준 자체가 턱없이 낮아요. 그래서 다들 부업을 해야 생활이 가능한데 그러다 보니 생계 때문에 아무리 재능이 이는 선수들이라도 운동에만 전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대회에도 꾸준히 참가를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제 경우를 봐도 주택은행에 들어온 후에는 잠시 마음이 헤이해지려다가도 ‘월급을 받은만큼 열심히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더 많은 장애우선수들이 실업팀에서 맘 편히 뛰게 됐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다가올 시드니 올림픽은 김임연 씨에게 큰 의미가 될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마지막 올림픽 출전이 될 지도 모르고 만약 그 대회에서도 금메달을 따게 되면 올림픽 삼관완이라는 역사적인 기록이 수립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금메달을 꼭 따서, 그 금메달만큼은 저희 주택은행 행장님께 걸어드리고 싶다”는 김임연 씨의 바람이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계속 그를 지켜보면서 커다란 마음의 응원을 해주고 싶다.

작성자한혜영 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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