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3] “가시물고기같은 사랑을 주고 싶습니다”
본문
지난 오월 팔일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에서는 올해의 좋은 아버지로 장애우 장종수 씨를 선정했다. 최근 아이엠에프로 인한 구조조정 등으로 직장에서 밀려난 우리 아버지들이 사회와 가정에서 설 것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데 이 시대의 좋은 아버지란 어떤 아버지일까? 올해의 좋은 아버지 장종수 씨를 만나 그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자.
올해 마흔 여섯인 장종수 씨는 일남 육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쉽게 짐작이 가겠지만 장종수 씨 부모님이 아들을 낳기 위해 늦게까지 아이를 보신 것이다. 칠남매 중 막내, 그것도 외동아들로 태어났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텐데 장 씨는 늘 사랑에 굶주렸다고 이야기한다. 장 씨가 워낙 늦동이인데다 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시는 바람에 오히려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덜 받고 자랐던 것이다. 게다가 부모님과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 아버지에 대한 장 씨의 기억은 자상하고 친근한 존재로서 보다는 무서운 할아버지로 남아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장종수 씨는 자신의 자녀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남다르다. 친구처럼 부드럽고 다정한 방법으로 아이들을 대하는데, 그 단적인 예가 매일 아침 아이들에게 보내는 쪽지편지다.
장 씨는 매일 아침 아이들 학교 준비물을 함께 챙겨준다. 아이가 그 날 학교에서 뭘 배우는지를 알 수 있어서 좋고, 대화할 때 좋은 화제 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간단한 쪽지편지를 함께 넣어 보낸다.
“한결아, 서예준비물은 상자 속에 다 들어 있다. 한석봉처럼 잘 써 보아라. 아빠도 서예는 힘든 것이라 생각하는데 연습이 제일 중요하다.”
소풍가는 날 아침 엄마와 아빠가 함께 가주지 못하는 때는 이렇게도 써서 보낸다.
‘초등학교 삼학년이면 슬픈 속상한 일이 있더라도 인상을 찌푸리고 우는 것은 약한 행동이란다. 아버지는 한결이가 용기를 내어 어떤 일이 닥쳐도 웃으면서 살았으면 한다. 그리고 기념품 살 일이 있으면 이천 원 한도 내에서 쓰도록 하고 즐겁게 지내고 오도록 해. 추신, 도시락을 두 개 더 쌌으니 혹시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친구가 있으면 나눠먹도록 해라.’
아무리 부모 자식 간이라도 가끔은 말로 하기 거북한 이야기가 있다. 그럴 때 역시 쪽지편지를 보낸다.
‘어느새 사학년 누나가 되었구나. 아버지 무등타고 기뻐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커서 아버지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는 구나. 한결아, 이제부터 신체적인 변화가 온단다. 그것은 아름다운 소녀가 된다는 이야기야. 아버지한테 말로 하기 어렵거든 너도 편지를 써서 보내거라. 아버지가 아는 대로 적어 보내도록 하마. 너에게 항상 사랑을 보내는 아버지가’
한결이가 초등학교 사학년이 되면서 초경을 할 때 장 씨가 한결이에게 보낸 편지다. 한결이는 처음에 다친 줄 알고 자지러지게 놀라 장종수 씨한테 달려왔는데 장 씨도 당황한 나머지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고 한다. 이럴 때 다른 집 아이들 같으면 아이들 엄마가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을 텐데. 불행히도 한결이네는 엄마가 없다. 이년 전 엄마가 가출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 씨는 혼자 고민을 하다 쪽지편지에 위와 같은 내용의 글을 써 보냈던 것이다.
장종수 씨는 서른여섯에 결혼을 했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왼손이 사용이 부자연스러워 그런 이유로 장 씨는 결혼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그이가 다니던 야학에서 한결이 엄마를 만나게 되면서 마음을 바꾸게 됐다. 당시 야학 국어교사였던 장 씨는 일 관계로 가끔씩 들르던 김 씨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 만나면 만날수록 김 씨가 자신만큼이나 외롭고 힘겨운 생을 살아온 사람이란 것을 알고서 차츰 그녀에게 친근감을 느끼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 외롭고 불쌍한 사람끼리 서로 의지하며 잘 살아 보자고 백년가약을 맺었다.
결혼 후 장 씨 부부는 처갓집이 있는 충남 예산으로 내려 갔다. 당시 백세가 넘은 친할머니를 역시 연로하신 장인 장모가 모시고 사는 것이 불효란 생각이 들어 장 씨 내외가 직접 모시기 위해 내려간 것이다. 이 때가 큰 딸 한결이가 두 살이 되던 해다.
장 씨는 이 곳에서 여섯 해를 보냈는데 이 때만큼 행복했던 시절이 없었노라고 말한다. 앞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뒤에는 과수원이 있고 작은 텃밭도 일구면서 정말 그림같이 소박하게 살았다. 또 예산에 내려간 다음해 둘째 새힘이가 태어나 장 씨는 손수 예쁜 집도 짓고 평생 이 곳에서 눌러 살 계획까지 세웠었다고 한다.
장 씨는 마당에 평상을 만들어서 한결이랑 새힘이 이웃 아이들까지 모두 불러 모아 동화도 지어 들려주고 노래도 부르고 끝말 이어가기 놀이도 함께 했다.
“그 때는 주변 환경 모두가 동화의 소재였어요. 특별히 동화를 짓기 위해 애를 쓰지 않아도 생활을 그대로 풀어내면 한 편의 동화가 되었죠.” 워낙 산골짜기어서 마을에 변변한 유치원 하나 없던 차에 장 씨네가 이사 온 후부터 장 씨네 앞마당이 마을 유치원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 행복한 가정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아내의 친할머니가 돌아가시는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 장인과 장모님이 연이어 돌아가신 것이다. 한꺼번에 할머니와 부모님을 모두 잃은 아내는 그 슬픔과 허무함을 감당하지 못했다. 아내의 얼굴에서 어느 새부턴가 웃음이 사라졌고 그저 멍하니 먼 산만 바라보곤 했다. 어느 날인가는 저 구름처럼 멀리 떠나고 싶다고 했다가 또 어느 날은 새로운 종교 이야기도 했다. 장 씨는 새 종교라는 게 뭔가 꺼림칙했지만 아내가 빨리 마음을 잡았으면 하는 생각에 크게 간섭하지 않고 그냥 지켜만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아마 사이비종교가 아니었나 싶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날 아내는 갑자기 자취를 감춰버렸다.
장종수 씨는 집을 나간 아내를 찾기 위해 아내가 갈만한 곳은 다 연락을 해보고 전단도 뿌려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 아내가 장 씨의 인감도장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 그이가 지은 집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빈털털이가 된 장 씨는 간단한 옷가지만 챙겨서 아이들과 함께 다시 서울로 올라오고 말았다.
그 때 너무 급하게 올라오느라 전에 찍어두었던 아이들 사진과 예산에서의 추억이 담긴 앨범, 장 씨가 애지중지하던 천 장이나 되는 클래식 음반들을 고스란히 남기고 와 장 씨는 그것이 아직도 못내 아쉽다고 한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오고서도 아내가 장 씨 몰래 진 빚 때문에 빚쟁이들이 아이들 학교로 찾아와 아이들 학교도 여러 번 옮겨야만 했다고 한다.
하루 아침에 모든 꿈이 깨져버린 장 씨는 아내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그 분노로 심장병까지 앓게 됐다. 그리고 지금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올라 자다가도 깰 정도라고 한다.
그래도 한 일 년이 지난 지금 한편으로 아내를 이해한다고도 말한다. “부모님이 한꺼번에 모두 돌아가시고 많이 힘들었겠지요. 또 결혼할 때는 제게 장애가 있다는 것이 크게 보이지 않았겠지만 나중엔 그게 아니었을 수도 있고...”
말문을 다 잇지 못하는 장종수 씨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운다. 그런 이유로 장 씨는 사람 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것을 처음에 꺼려했다. 이 글을 읽고 이제 막 시작하려는 장애우 연인들이 혹 상처를 받게 되지는 않을까하는 걱정과 엄마가 어떻게 해서 가출하게 된 것인지 그 이유를 잘 모르는 아이들이 혹 기사를 보고 엄마에 대한 좋은 이미지마저 더럽혀질까봐 장 씨는 가급적이면 방송 및 언론지 와의 인터뷰를 모두 사양해왔던 것이다. 아니 더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올해의 좋은 아버지상 수상을 거절해 왔다.
“요즘 개봉한 영화 중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라는 영화가 있죠? 지금 제 상황이 그 반대에요. 이보다 더 나쁠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오년 전 케이비에스 ‘아침마당’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주최한 아버지동화구연대회에서 제가 대상을 받았을 때 좋은 아버지상을 주셨다면 받았을 거예요. 그 때는 아내도 가출하지 않았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가정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뿐인데 무슨 상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정 주시려거든 지친 아버지상을 달라도 했죠.”
그러자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 위원장은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에 힘들어하는 아버지가 어디 한 둘이냐며 장종수 씨의 이야기는 그 분들에게 큰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회원들 모두가 만장일치로 뽑았으니 제발 받아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해 결국 장 씨는 마지못해 이 상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동화구연을 잘해서 아이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아버지도 좋은 아버지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아내의 가출로 인한 정신적 물질적 어려움 속에서도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역경을 헤쳐 나가는 아버지 장종수 씨야 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좋은 아버지일 것이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가시물고기의 생애를 본 적이 있어요. 어미가 알을 낳으면 새끼는 아버지 가시물고기의 살을 뜯어 먹고 자라죠. 수천 마리의 새끼 가시물고기가 아버지 가시물고기한테 달려 들어 살을 뜯어 먹고 뼈만 앙상하게 남으면 이번엔 그 뼈 사이에 집을 짓고 사는 거예요. 저는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미물인 물고기도 저렇게 새끼를 지키는데 저도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다시 시작하자고 다짐했죠.”
장종수 씨는 현재 아주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직업란에 무어라 써야 할지 망설여질 정도인데 첫 번째 직업은 동화작가다. 아직까지 그이 이름으로 된 동화책을 단 한 권도 낸 적이 없지만 매일같이 아이들과 소풍을 나갔다 돌아올 때마다 동화 한 편씩을 짓는다고 한다.
집 근처에 작은 공원이 있는데 그 곳이 장 씨 가족의 소풍 장소다. 매일 오후 세 시가 되면 학교에서 돌아온 한결이와 새힘이는 자전거와 롤러 스케이트를 가지고 장종수 씨는 음료수와 간식이 든 가방을 메고서 공원에 나타난다. 공원에 도착하면 아이들은 각자 흥미있는 놀이를 한다. 시골에서 자라서인지 한결이와 새힘이 모두 자연에 관심이 많다. 주로 논에서 다슬기를 잡거나 신기한 풀들을 보면서 노는데 한결이가 종이컵에 다슬기를 담아서 그이에게 달려왔다. 그 모습을 보고 장 씨는 금세 동화를 한 편 지어냈다.
‘다슬기 형제들이 논으로 소풍을 나왔습니다. 세상이 참으로 아름다워 보여서 한 다슬기가 살금살금 논으로 올라오다 한 소녀의 손에 잡혀 버렸습니다. 소녀는 다슬기를 정겹게 쳐다보았습니다. 다슬기는 ’얘야, 나 집에 가고 싶어. 다시 놔줄래?’소녀는 그 다슬기의 눈빛을 생각하며 다시 논에 다슬기를 부어 주었습니다.’
장 씨의 동화는 생활동화이면서 자연을 소재로 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등장 인물들은 모두 한결이와 새힘이의 실명을 쓴다. 실명을 쓰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결이와 새힘이가 동화에 나오는 등장인물처럼 자연을 사랑하고 바르게 자랐으면 하는 그이의 바람에서다. 정말 한결이는 돌아갈 때 잡았던 다슬기를 모두 연못에 놓아주었다.
“자연이 주는 기쁨처럼 좋은 게 없어요.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까지 그래서 시골에 내려가서 살았구요. 지금도 형편만 된다면 다시 시골에 내려가 마당 넓은 곳에서 아이들이랑 살고 싶어요. 우리 애들이 서울 아이 같지 않더라도 정서만은 밝게 자라줬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요즘 한결이네 소풍 일행에 못 보던 사람이 한 명 더 생겼다. 몸이 불편한 이웃집 아저씨네 아들 해찬이가 올해부터 한결이네 집에서 같이 살게 된 것이다.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워 아저씨가 세 살바기 해찬이를 보육원에 맡기려는 것을 장 씨가 대신 돌봐 주기로 한 것이다. 수저만 하나 더 놓으면 되니까 크게 문제될 게 없다며 아이들을 설득한 장 씨는 어디 외출할 때마다 해찬이의 손을 꼭 잡고 다니다 해찬이에게 막내 자리를 놓친 새힘이는 좀 서운해 했지만 그래도 새힘이는 동생뻘인 해찬이를 잘 챙겨준다. 그래서 네 식구가 밖에 나가면 정말 한 가족 같아 보인다.
장종수 씨의 또 다른 직업은 동화구연가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장 씨가 동화구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후 여러 곳에서 출연 요청이 들어온다고 한다. 가장 최근에는 새힘이 반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 소풍가는 날 동화구연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해 새힘이 소풍에도 따라 간 적이 있다.
그리고 밤에는 아이들이 다 잠든 사이 남자 환자의 간병 일을 한다. 대부분 간병인으로 건강한 사람을 원하기 때문에 한 쪽 손이 불편한 장 씨로서는 쉽게 자리가 나지 않지만 아는 사람을 통해서 이년 전부터 해 오고 있다.
그러나 장종수 씨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다.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그냥 취미로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비록 며칠 서지는 못했지만 한 때는 직업가수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정도로 장 씨의 노래 솜씨는 뛰어나다. 간병일이 매일 생기는 게 아니어서 장 씨가 집에서 쉬고 있는데 밤무대에 서보지 않겠냐는 제의가 들어 왔다. 그래서 장 씨는 다음 날 업소에 나가 오디션을 봤는데 관계자들이 모두 만족해 해 그날로 바로 무대에 서게 됐다.
그런데 그가 장애를 감추기 위해 손을 주머니에 넣고 노래를 부른 것이 화근이 되어 장 씨는 며칠 못가 그만 두고 말았다. 가수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부르는 것이 손님들에게는 건방지게 보였던 모양이다. 장 씨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 것은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장 씨는 지금도 노래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 경로당에서든 정식 무대에서든 어디든 불러만 주면 바로 달려가 민요든 가곡이든 가요든 뭐든지 부를 자신이 있다. 그이의 학창시절 별명이 ‘뮤직박스’, ‘장가사’였고, 충남 예산에 두고 온 집에 천 장이 넘는 클래식 음반이 있었다고 하면 그이의 노래에 대한 열정과 소질이 어느 정도인지 쉽게 집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여간 그렇게 해서 밤무대 자리도 놓치고 장 씨는 여전히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올해부터 새힘이 까지 급식을 하게 돼 두 아이의 급식비만도 만만치가 않다. 그래서 아이들이 학교에 간 사이 빈병을 주으러 다닌다고 한다. 한 번은 빈병을 잔뜩 주워서 짊어지고 오는데 친구 집에 가는 한결이를 만나 무척 당황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이들 방학 때는 아이들과 함께 시골에 내려가 침식을 제공하는 곳에서 한 달간 일을 하고 올라온다. 거기서 그이는 난이나 분재를 가꾸는 일을 하고 아이들은 자연 속에 파묻혀 신나게 놀다 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종수 씨의 좋은 아버지가 되는 비결이다. 되도록 모든 일을 아이들과 함께 하고 자연과 가깝게 자라도록 배려하는 것이 장 씨가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인 것이다.
장 씨는 아이들에게 절약하는 것을 철저히 가르친다. 가난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원을 재활용하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다. 새힘이가 즐겨 타는 롤러 스케이트와 한결이 자전거도 모두 동네 형들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그리고 매주 토요일이면 동네 벼룩 시장에 가서 오백 원, 천원하는 헌 옷이나 신발, 생필품 등을 사가지고 온다. 처음엔 아이들이 우리 집이 많이 가난하다고 기죽어 할까봐 걱정을 했는데 아이들이 벼룩시장에서 오백 원 주고 산 옷을 친구들에게 자랑하는 모습을 보고서 많이 흐뭇했다고 한다.
한결이는 나중에 커서 기자가 되는 게 꿈이라고 한다. 새힘이는 얼마 전까지 조각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지금은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어느날 새힘이가 아버지 팔을 베고 잠을 자다가 아버지의 가는 손을 만져 보고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저 의사가 될 거에요”라고 했단다. 장 씨는 아버지로서 새힘이가 무엇이 되든 본인이 원하는 것이 되기를 바라지만 아버지를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한 새힘이가 그렇게 대견할 수 없단다.
한결이와 새힘이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아버지를 이해하고 성숙한 행동을 보이는 것은 아마 장 씨가 강한 아버지보다 인간적인 아버지로서 아이들에게 다가갔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아내가 가출을 했지만 서로를 끔찍이 위하는 장 씨 가족에게 요즘 한 가지 걱정이 있다. 장 씨 가족이 빈털터리 신세로 서울로 올라왔을 때 사글세 방 하나 얻을 돈이 없어서 거리에 나앉을 판이었는데 다행히 장 씨의 딱한 사정을 들은 노부부가 방을 한 칸 내주었다.
그 노부부는 마침 시골에 장사하러 내려 가려던 참이어서 한 이년쯤 이 곳에 없을 거라며 그 동안 이 집에서 살라는 것이다. 그 집이 바로 장 씨 가족이 현재 살고 있는 곳인데 최근 아이엠에프 때문에 장사가 안 되자 노부부가 다시 서울로 올라온 것이다. 곧 방을 비워져야 하는데 그 동안 모은 돈이 많지 않아 걱정이다. 게다가 아이들도 지금 다니는 학교에 정이 들어서 전학시키는 것도 마음 아픈 일이다.
이렇게 힘이 들 때 의논할 사람이라도 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재혼할 생각이 없는지 물어 보았다. 주위에서 재혼 이야기를 꺼내기도 하는데 장 씨는 그럴 생각이 없다고 한다. 누군가 장 씨에게 재혼하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한결이가 그 소릴 듣고 울먹였던게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는 것이다. “아이 엄마가 죽은 게 아니어서 새 엄마가 들어오면 아이들이 마음 아파할 거예요. 대신 아이들을 친손주처럼 돌봐줄 할머니가 한 분 계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어려서 부모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제 역시 안길 품이 그리운데 아이들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가끔씩 아이들 엉덩이를 툭툭 두드려줄 수 있는 할머니가 계시면 정말 잘 모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 장종수 씨는 사할린에서 내려 온 할머니를 한 분 만나는 중이라고 한다. 그 분이 아직 결정을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중이다. 애들한테 잘 해줄 수 있을지 걱정이 되시는 모양이다. 한 식구가 된다는 게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요즘 새삼스럽게 느낀다는 장종수 씨는 욕심을 버리고 조금씩 다가갈 것이라고 한다. 그러다 정이 들어 정말 한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앞으로의 바람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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