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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1] “한국의 장애우들도 저를 성원해 주세요”

내년 일본 구의원 출마하는 마쯔바 사꾸찌 씨

본문

  마쯔바 사꾸찌 씨는 요즈음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의 이력이 적힌 명함을 나누어준다. 그 명함에는 익살스럽게 그려진 그의 캐리커처와 함께 ‘가서 쳐부셔라! 휠체어’라는 구호가 실려 있다.

  ‘가서 쳐부셔라’라는 말은 ‘아톰’이란 만화영화에서 주인공 아톰이 악당을 물리치러 나갈 때 힘을 북돋워 주기 위해 아톰을 만든 노박사가 해주곤 하던 말이라고 한다.

  단발형의 생머리에 검게 탄 피부. 무테 안경 너머로 감춰지지 않고 드러나는 장난끼 어린 눈매를 보면 마흔 여덟 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지만 다섯 군데의 장애우작업장을 운영하면서 ‘차별과 싸우는 공동체전국연합’(공동련)의 부대표로 있는, 지역에서는 꽤 알아주는 인사다. 그 일만으로도 정말 눈코 뜰새 없이 바쁘지만 그는 지난 사 년 전부터 또 하나의 일을 준비하고 있다.

  바로 일본 구의원 후보로서 내년 사월 출마할 예정인 것이다. 만약 당선된다면 그 지역구에서는 역대 최초의 장애우의원이 된다고 하니 그로서는 선거 결과가 나올 때까지 막중한 책임감과 의욕으로 충만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장애를 갖기 전 그의 꿈은 자동차엔지니어. 그랬던 그가 이제 구의원을 바라보게 되었으니 어찌 보면 장애는 그에게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주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지평의 변화는 한창 피 끓는 나이인 열아홉 살 때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당시 야간학교 기계과에 다니면서 마쯔시다 전자회사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그는 퇴근 후 친구를 그의 애마였던 오토바이에 태우고 집에 바래다주러 가고 있었다. 그런데 급커브 길에서 갑자기 나타난 다른 차량을 미처 피하지 못해 사고가 났다. 그때 그의 뒤에 타고 있던 친구는 일주일 동안 입원치료 후 퇴원이 가능했을 정도의 가벼운 부상에 그쳐 천만다행이었다. 그런데 그 바로 앞자리에 있던 그는 경추 사번 골절, 즉 하반신마비라는 하늘이 무너지는 가혹한 선고를 받게 된 것이었다.

  “사고 직후 열흘 동안이나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는데 깨어나 보니 소변도 내 의지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몸이 되어 있었던 거예요. 의사가 커다란 주사를 다리에 놓는데도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제가 다시는 두 다리로 걸을 수 없고 평생 휠체어생활을 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전 그 말을 정말 믿을 수 없었습니다. ‘에이 무슨 소리냐, 열심히 훈련하고 걷는 연습을 해나가면 그래도 다시 걸을 수 있는 상태가 되겠지.’ 정말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고통을 참아가며 병원 내에서 정말 피나는 재활훈련을 시작했다. 그렇게 하기를 일년 반, 아무런 감각이 없던 다리에 뜨겁거나 차가운 것이 닿았을 때 미세한 변화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조금씩 신경이 살아나기는 했다. 그러나 사실 외견상으로 그렇게 큰 차도는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무작정 노력하는 그를 안쓰럽게 보다 못한 한 간호사에게서 그는 결국 이런 말을 들어야 했다.

  “아무리 그렇게 해도 마쯔바 씨 당신이 다시 걷게 되기는 불가능 할 거예요.”

  그 말은 오로지 두 다리로 걸으면서 다시 예전과 같은 생활을 해나가리란 일념만 갖고 있던 그에게 더할 수 없는 큰 충격을 주었다. 그렇지만 그 간호사의 말이 어쩔 수 없는 자신의 현실이라는 사실을 곧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서 중증 뇌성마비장애우나 다른 선천적인 중증장애우들을 많이 보게 됐는데 나도 휠체어생활을 하는 입장이면서도 그 사람들은 언젠가는 시설에 갈 사람들이고 나는 그래도 저 불쌍한 장애우들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간호사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으니 대단한 충격을 받았지만 사실 냉정하게 저를 돌라보게 하는 계기가 되더군요.”

  그제서야 마쯔바 씨는 퇴원 후 장애우로서의 삶을 살아나가기 위한 방법을 찾아나가기 시작했다. 다니던 마쯔시다 회사는 휠체어장애우가 된 그가 돌아가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상황이 안됐기 때문에 그만 두고 주변에서 수소문해 가내 수공업체를 찾아가 앉아서도 작업이 가능한 미싱 일을 하는 곳에 취직했다.

  그러나 미싱일은 너무 장시간 앉아서 일을 하느라 체력적으로 몸에 무리가 가서 계속하기는 무리였다. 그래서 다음으로 치과 기공일을 시작해서 한 동안 흥미를 가지고 일해 나갔지만 그 일은 또 보수가 너무 적어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다. 그 다음에 간 곳이 가스기기 만드는 회사, 가스기기회사에서는 같은 양의 일을 해도 장애우와 비장애우의 임금차별이 너무 심해 자존심이 상한 그는 회사를 뛰쳐나와 버렸다.

  다른 사람의 부당한 판단에 의해 자신의 보수가 결정되는 것 보다 자신의 능력만큼, 그래서 열심히 뛴 만큼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래서 주위 사람의 소개로 미싱세일즈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시기 동안 컴퓨터그래픽을 공부하기 위해 밤에는 이년 과정의 방송통신종합고등학교에 다시 입학해 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나름대로 끊임없는 재투자를 통해서 보다 나은 내일을 스스로에게 약속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 야간고등학교는 장애우, 노인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천민계층으로 꼽히는 부락민들과 재일교포 등이 많이 다니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마쯔바 씨는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됐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장애우들을 통해 당당한 시민으로서의 장애우 인권에 대해 눈을 뜨게 됐다.

  “그 때 학교에 삼십 명의 장애우가 다니고 있었는데 함께 많은 얘기를 나누다가 학교 내에 경사로가 설치돼 있지 않은 점, 장애우용 화장실 설치 문제, 다른 학생들과 같이 체육시간을 즐길 수 없는 점 등이 부당하다는 데 의견이 모아지게 됐어요. 그래서 다른 장애우들과 함께 학교를 상대로 개선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여 나가기 시작했죠.”

  그러면서 보다 많은 활동성을 갖기 위해 아는 사람의 어깨 너머로 운전도 익혔고 팔십오 년 무렵 같은 처지에서 열심히 장애운동을 하고 있는 동료들의 모임인 공동련을 알게 되면서 장애우들이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는 작업장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생기게 된 것이 바로 오사카시에 있는 ‘마쯔사꾸 공동노동센터’다.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이 작업장은 현재 다섯 군데에서 운영 중이다. 다른 지역 작업장에서도 많이 하고 있는 빵 공장 뿐만 아니라 알루미늄캔, 우유캔 등을 재활용하는 사업과 헌 책방 운영, 컴퓨터 워드프로세서 작업으로 각종 인쇄물을 만드는 기획 일을 하는 곳으로 나뉘어 있다. 기획일은 대부분 공동련에서 일을 받아서 하고 있으니 일감은 매우 안정적으로 들어오고 있는 셈이다.

  그밖에도 정신지체인을 고용해 이삿짐센터나 정원청소 등의 일에 파견하거나 자유시장 형태로 이미 사용 중인 물품을 서로 저렴하게 교환하는 바자회를 열어 수익을 올리고 있다. 또 자전거가 주요한 교통수단인 일본의 특성상 역 앞에 주인 없이 버려진 것들이나 다른 고물상을 통해 수집한 못쓰게 된 자전거들을 육천엔(약 육만 원)에 사서 일만 엔에 되팔아 수익을 남기고도 있다.

  거기다 일본의 경우 일년에 두 차례 지급되는 보너스 철에 공무원들을 상대로 자연식품이나 무공해식품, 매실이나 치약, 벼룩약 등의 상품들을 홍보하는 전단을 배포하고 주문을 받아 공급하면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이 중 특히 정신지체인을 이사짐 센터에 파견하고 보너스 철을 집중 이용하는 통신판매 등은 참신한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다. 그는 그러한 사업적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은 것일까.

  “제가 사고 후 여러 직업을 전전했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아무래도 그 때 갖가지 경험을 한 것이 이러한 아이디어를 얻는데 확실히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돌아보면 쓸데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없는 것 같아요.”

  빵공장에서 생산되는 빵을 매일 손수 배달하기도 하는 그로서는 아침부터 밤까지의 일정이 사실 몸이 열 개가 있어도 모자랄 지경이다. 그가 운용 중인 다섯 군데의 작업장 가운데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한 곳이 두 곳, 그 두 곳은 다른 곳과 비슷한 수준으로 수지타산을 맞춰 혹시 있을 지도 모를 한 사람의 불이익도 최소화하기 위해 그는 늘 고민한다.

  사실 그가 이렇게 다섯 군데씩이나 ‘일자리판’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개인적인 자산이 많아서가 아니다. 물론 작업장에 대한 임대료를 보조해주고 임금을 보전해주는 등의 정부 지원이 있기 때문에 한국의 장애우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는 훨씬 손쉽게 작업장을 세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경제에 미세한 변화만 있어도 문을 닫아야 하는 열악한 한국의 장애우작업장에 비해 일본의 장애우작업장이 도산하는 사례가 이제까지 한 건도 없었다는 사실을 일본의 한 장애우는 담담하게 전했다.

  사실 그의 작업장들은 각각 다섯 명의 장애우와 한 명의 비장애우가 고용돼 함께 일하고 있는, 그래서 세 곳을 합해야 열여덟 명 정도가 고용된 자그마한 작업장들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 스스로 조금 더 몸을 움직이면 한 명의 장애우라도 더 일할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의 사업장이 하나 둘 늘어나 다섯 개소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렇게 작업장을 운영하고 또 공동련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하다보니 보람도 많았지만 답답한 점도 많았다. 우선 현재까지 장애우복지에 대한 정책이 형성되는 과정뿐만 아니라 세부적인 내용에서 장애우 당사자들의 이해와 요구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이나 비장애우들이 때로는 비효율적으로 만든 틀이 많았다.

  그래서 다른 공동련 위원들과 함께 실질적인 정책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관계 공무원들과 직접적인 대화를 시도하려고 하면 그 공무원들은 또 보직이 너무 자주 바뀌곤 했다. 그 바람에 공무원들을 붙잡고 정기적으로 똑같은 말을 늘 되풀이해야 하는 상황을 너무나 오랜 동안 경험해왔다.

  이러한 요구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참다못해 그는 직접 정치에 나서기로 했다. 우선 그가 당선 후 주안점을 두고 싶은 부분은 그의 경험을 살려 장애우가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사회 여건과 실질적인 편의시설 개선을 추진하는 것이다. 그 밖에 장애우 통합교육 문제나 다이옥신 사용 거부 운동, 여성의 사회 참여 확대 방안 등 모두 일곱 가지의 공약을 내세울 참이다.

  “그렇지만 이 중에서 장애우 노동여건 개선과 편의시설 개선, 그 두 가지만 재임기간 동안 중점적으로 활동할 계획입니다. 이 두 가지에 있어서는 제가 출마할 히라노구 지역이 다른 어떤 곳보다 잘된 지역구가 되도록 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못지않은 학력 중심 사회, 거기다 장애를 갖고 있는 그가 당선되기 어렵다는 구의원 선거에 출마해 다른 후보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함에 있어 내심 어떤 면에서는 위축되는 면이 있지는 않을까.

  “학력에 대해서는 저도 당당해지려고 노력은 하지만 사실 그 부분에 대해 콤플렉스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장애우복지 부분에 있어서도 체계적으로 이론을 세우고 있는 다른 공동련의 리더들이 몹시 부럽더군요. 저는 몸으로 그냥 부딪히며 살아왔지 특별하게 이론공부를 철저히 한 건 아니거든요. 그렇지만 내년 선거에서 장애우 당사자인 제가 나와서 떨어지면 오사카의 장애우복지는 본질적으로 나아질 수가 없다는 점을 유권자들이 반드시 명심해 주었으면 합니다. 제가 출마하는 지역에는 일본 지역에서도 고령자가 많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좁히니까 장애우 뿐만 아니라 노인 당사자들이나 노인이 있는 가정의 많은 지지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미국 등 그는 적지 않은 외국여행 경험도 갖고 있다 좁은 땅에 많은 인구가 살고 있는 일본에 비해 광활한 대지와 풍성한 자연환경을 갖고 있는 그들 나라를 여행하는 것은 그에게 많은 행복감을 준다. 그러나 그러한 나라들을 여행하면서도 휠체어장애우인 그로서는 각 나라의 편의시설 수준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올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에 몇 차례 왔지만 아직 높은 보도 턱등 개선해야 할 점이 많은 것 같더군요. 일본의 경우 예전에 그렇게 되어 있는 곳을 장애우들이 운동을 통해 다시 고치도록 하는 작업이 일본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 몇 년 전에 새로 설치한 보도블럭을 장애우 편의시설 문제로 다시 뜯어고치고 있는 곳도 많은데 조금만 멀리 내다봤다면 그렇게 이중으로 예산을 낭비하게 되지는 않았겠죠. 일본의 그런 잘못된 전철을 한국도 따라 하지 말고 건물을 설계할 때 미리미리 장애우 편의시설을 설치하는 현명한 판단을 했으면 합니다.”

  일본도 편의시설과 관련한 법이 대형 건물에만 한정해 규정하고 있어 장애우가 마음 놓고 시설을 이용하는 데에는 아직도 적지 않은 어려움이 남아 있다. 그래서 그가 간절하게 하고 싶은 일 중 하나가 일본 전국의 건축 설계사들에게 편의시설의 중요성을 설명해 문제발생의 소지를 줄이는 일이다.

  덧붙여 그는 사회 전반적인 장애우 편의시설의 수준을 높여가기 위한 좋은 운동 방법을 하나 가르쳐 준다.

  “일본에서는 일년 중 하루 날을 정해 집에 있는 모든 장애우들이 휠체어를 타고 몰려 나와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는 형태의 집회를 갖기도 합니다. 현재 편의시설이 안된 지하철역은 역무원들이 대부분 직접 휠체어를 들어서 옮기고 있는 실정이지만 한꺼번에 몰려 나오면 그 역무원들도 정말 두손 두발 다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다른 누구보다 역무원들이 더 적극적으로 상부에 지하철 편의시설 설치를 건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하철 역무원들의 경우 그러한 장애우 집회 보다 이미 릴레이마라톤대회를 통해 장애우들의 입장에 더 쉽게 설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됐다. 매년 오월 열리는 이 마라톤대회는 마쯔바 씨의 아이디어에 따라 오년 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특별한 목적 없이 아홉시부터 다섯시까지 여덟 시간 동안 장애우와 장애를 갖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뛰면서 그들이 서로 함께 사는 사회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마련되고 있다.

  대회 운영방식은 등수는 매기지 않고 휠체어를 탄 사람은 탄 사람끼리 타지 않은 사람은 타지 않은 사람끼리 네 명에서 오십 명까지 한 팀을 이뤄 오사카 시내 꽃박람공원의 기점으로 일킬로미터 구간을 달린다. 그런데 여기에 공동련 산하 여러 사업장의 장애우들 뿐만 아니라 각급 사업장의 노조, 그리고 지하철 노조에서도 함께 참여해 참가자만 삼천여명에 달하면서 지역 내의 하나의 큰 축제행사가 되고 있다.

  지하철 노조원들은 바로 각 역의 역무원들이 대부분인 만큼 해를 더해 갈수록 러시아워에 휠체어 장애우가 타도 역무원들이 더 세심하고 친절하게 장애우들을 맞아주는 등 지역 사회 주민들의 인식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는 것이 마쯔바 씨의 자랑이다.

  이번 한일장애우교류대회 참가를 위해 한국을 찾은 그는 행사가 끝나자마자 돌아가 빵 배달 일에서부터 켜켜이 쌓여 있을 밀린 일을 해야 한다고 다소 걱정스런 표정을 지어보였다. 게다가 그 릴레이마라톤 대회가 오월 삼십일일이기 때문에 귀국하자마자 더욱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행사가 끝나도 그는 아마 제대로 푹 쉴 수가 없을 것이다. 내년도 선거까지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이 힘겨운 강행군을 해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출마하게 된 지역구는 대대로 여당인 자민당의 세가 강한 곳, 지난 선거의 경우 전체 팔만여명의 유권자 중 자민당이 삼만 오천표, 공산당이 일만 이천표의 득표율을 보였다.

  대체로 그의 지역구에서는 만 팔천표 정도를 얻어야 당선권 안에 든다는 것이 기본적인 분석인데 그가 현재 확보한 것으로 보고 있는 표는 팔천 정도에 불과하다. 따라서 앞으로 내년 사월까지 만표를 늘려 가야 하는 것이다. 선거비용도 약 오백만 엔 정도 필요한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데 후원금으로 대부분 충당해야 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고민도 사실 남아 있다. 그러나 그는 걱정하지 않는다. 주위의 많은 후원자와 지역구민들이 자신의 열정과 소신을 알아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절대 다시 두 다리로 걸을 수 없다던 어떤 간호사의 말은 들어맞지 않았다. 지팡이에 의지해서지만 그는 조금씩 걸을 수 있다. 척수 장애를 입은 사람 중에 이렇게 획기적으로 재활에 성공한 사례는 아주 드물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열성과 굳센 의지 덕분이라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워낙 적극적이고 밝은 성격이여서 장애우가 됐다면 당연히 자신의 권리를 찾는 장애운동을 했을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어쩌면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지도 모른다고 고백한다.

  “아무래도 방송통신학교에 다닌 그 시기에 만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제가 내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 자신만을 생각하며 사는 개인적인 삶에 만족했을지 모릅니다.”

  장애우의 정치세력화, 그 직접적인 방안인 정계진출을 위한 일본 장애우들의 단결은 우리의 눈에 매우 두드러져 보인다. 현재 일본에서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장애우 정치인들은 일본 전역에 걸쳐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일년에 이회 정도 모임을 갖고 복지정책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며 일본 전역의 확산방안을 논의한다고 한다. 역대 장애우 의원 가운데 단 두 명만이 여당이었던 사실도 작용했는지 모르지만 이들 장애우의원들은 소속 정당의 이해를 떠나 무엇보다 장애우 당사자로서 장애우복지 개선방안을 위해 함께 머리를 맞대는 것이다.

  “앞으로 장애우가 출마하는 지역구에 사는 친인척을 설득해 장애우 후보자에게 표를 모아주자는 움직임을 공동련 산하 장애우들을 중심으로 벌일 예정입니다. 바로 얼마 전에 사고 당시 저하고 같이 사고를 당한 친구가 선거 운동에 보태라고 오천엔(약 오만 원)을 보내 왔더군요. 그런 후원자들이 자그마한 성원을 등에 업고 열심히 한 번 해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마쯔바 씨에게 만약 투표권이 있다면 한 표 기꺼이 던지고 싶지 않은가.

작성자한혜영 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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