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이야기3] 밥이 아닌 꿈을 먹고 사는 젊은이 > 세상, 한 걸음


[사람사는이야기3] 밥이 아닌 꿈을 먹고 사는 젊은이

장애와 위암을 이기고 장애우야학 운영하는 조태흥 씨

본문

  대전 중구청 뒤편의 조그마한 한 건물의 온통 유리문으로 되어 있는 일층 공간에는 매일 일곱시 경만 되면 장애우들과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모여든다. 그리고 거의 한 명씩 짝을 지어 앉아 제각기 가방에서 책을 꺼내 드는데 손으로 글씨 쓰기가 곤란한 어떤 장애우는 발에 연필을 끼우기 위해 자리를 깔고 앉아 준비자세를 갖춘다. 너른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진지하고 조금은 부산한 이러한 모양새들이 건물 바깥에서도 한 눈에 들어오는데 이들이 바로 새날공부방, 이름하여 양지공동체를 이끌어 나가는 주인공들이다.

  그 중에서 휠체어를 탄 몸으로 가장 분주하게 움직이며, 교사들과 장애우들을 이끄는 사람이 바로 조태흥 씨다. 소년 같은 얼굴에 자그마한 체구여서 벌써 서른 해를 넘겨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웬지 믿기지 않기도 한다.

  사실 대학가에 횡행하는 ‘학번’중심의 세계관으로 보면 올해 방송대에 들어간 그는 다른 교사들을 우러러 봐야 하는 새내기다. 그러나 새날공부방에서 실무를 총책임지고 있는 그인지라 매일 수업을 마치고 아홉시 쯤 시작되는 교사회의를 주재하는 폼에서는 적당한 카리스마도 느껴진다.

  그 방송대는 그가 세 번째 들어간 대학이다.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제대로 구경도 못해본 첫 번째 대학합격 이후 두 번째 들어간 대학에서도 마음 놓고 공부를 하기는 어려웠다. 이후 한동안 이래 저래 바쁘기도 해 미뤄놓고 있던 공부를 큰 부담없이 계속 하기 위해 방송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가 처음 학교라는 곳을 알고 다니기 시작한 곳이 대전의 성세 재활학교. 그곳에 들어갔을 때 그의 나이가 열세 살이었다. 정상적으로 들어간 사람이 졸업할 무렵 그는 그제서야 초등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물론 한글은 혼자 텔레비전이나 책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깨친 상태였다.

  “그 때까지는 저나 저희 부모님이나 제가 들어갈 수 있는 학교가 있다는 사실을 잘 몰랐죠. 여덟살에 학교에 가는 두 동생들을 봐도 나는 장애가 있으니까 날 받아주는 학교가 없어서 그냥 늦게 갈 수밖에 없나 보다 하고 생각하고 말았죠, 뭐.”

  그는 어찌보면 태평한 사람인 것도 같다. 어렸을 때 잠시 가족들과 함께 외출을 했을 때 자신을 유심치 쳐다보며 가곤 하는 사람들의 눈길에 위축 되고 싫은 느낌이 들기 보다는 외국인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보게 되는 것처럼 그냥 ‘내가 다른 사람들하고 다르니까 쳐다보나 보다’ 했단다. “제가 나중에 다른 사람들 얘기를 들어봐도 저는 장애를 그냥 쉽게 받아들인 편이더군요.”

  중학교 과정 공부는 다시 경기도에 있는 명혜학교로 옮겨 계속 했고 팔십구년 졸업했다. 그냥 기술이나 배울 생각으로 한 일 년간은 같은 법인 내에 있는 명휘원에서 대한진학이나 다른 꿈은 접고 그저 하나씩 하나씩 기술을 배웠다. 그러나 다시 불현듯 도중에 그만둔 공부에 대한 미련이 생겨 대전에 정착한 가족들 곁으로 돌아와 혼자 검정고시를 통해 고등부 과정을 마쳤다.

  조태흥 씨의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셨다. 그 사실로 미루어 ‘어지간히 이사를 많이 다녔겠구나’하는 생각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평소 몸에 밴 군인 정신으로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진짜 남자’라는 말을 평생 수십번은 되뇌였을 지 모른다. 그래서 기대 속에 낳은 장남이 돌 지나고 장애를 갖게 돼 스스로의 힘으로는 걷지도 못하는 몸으로 성인이 되어가는 동안 그 아들과 의 사이에 ‘애증’도 형성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도 조심스럽게 헤아려진다.

  이 질문에 그는 고통스러웠던 지난 기억들을 들려주었다.

  “제가 아버지랑 어디 같이 가서 다른 사람에게 인사할 때 아버지는 저를 조카라고 소개하셨어요. 아버지라고 처음 불러 본 것이 스물 세 살때였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당시에는 군대내 보안관계족 일을 하는 사람을 선발할 때 친인척 중에 사상문제와 관련된 전력을 갖고 있거나 해도 안되지만 장애우가 있어도 결격사유가 됐기 때문에 숨길 수밖에 없었다고 부모님은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부모님의 말을 믿어 드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가족 중에 장애우가 있다고 왜?... 언뜻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얘기다. 당시 정말 그랬는지 모르지만 부모님이 과장스럽게 받아들이신 부분도 있는 것 같다고 그도 수긍한다.

  “스물 세 살까지 제가 주민등록증이 없었어요. 호적에만 올려 놓고 그때까지 주민등록증 만드는 일도 미루고 있었던 거죠. 장애우등록도 안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에 입대하라는 영장이 나오기도 했는데 아버지 빽도 이용하고 가족들 거주지에서 떨어져 있어서 영장을 전달받기 어려웠다는 등등의 이유로 그냥 저냥 영장처리를 미루기만 하고 있었고요. 그런데 대학공부도 하기 어렵고 앞으로 먹고 살 길도 걱정이고 해서 스물 세 살 때 공무원 시험을 봤는데 이차 면접시험을 볼 때 당연히 그런 문제가 걸림돌이 된 거예요. 어떻게 이런 기본적인 것을 갖춰놓고 있지 않았냐고 면접관들이 모멸스럽게 따져 묻는데 그 때서야 제가 그 동안 가족들 사이에서 부대꼈던 일들이 분노로 치밀더군요. 특히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폭발해서 처음으로 막말을 해가며 대들었었죠.”

  그러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그러한 상처가 다른 장애우와 함께 일을 해아가면서 오히려 많은 도움이 된다고 담담하게 덧붙인다. 가족의 헌신적인 사랑과 지원으로 정규 이상의 혜택을 받고 자라났던 일부 선택받은 장애우들도 있지만 장애로 인해 가족에게서조차 내몰리는 일들을 겪으면서 크고 작은 상처를 안고 살아온 다른 장애우를, 자신은 보다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어 금방 마음을 터놓을 수 있다는 것 같다면서.

  그러한 일들을 겪으면서 어차피 기존 사회에 남들처럼 끼어들어 살 수 없는 몸이라는 생각에 조금은 자포자기해 있다가 한 장애우 선교단체를 알게 됐다. 처음에는 회원으로서만 열심히 활동했는데 마침 실무자가 필요하다고 해서 구십이년부터 그가 그 일을 맡았다. 그러다 당시 양지글방이라는, 지역사회내 문맹주민들을 위한 야학을 운영하고 있던 손병의 목사를 알게 됐고 구십사년 다섯명의 장애우를 새롭게 받아들이면서 장애우야학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새날야학으로 이름을 바꾸었던 그 시점부터 그가 실무자로 이곳에서 일하게 됐다.

  그러나 말이 좋지 않아 실무자지 들어올 때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월급을 받아본 적이 없는 고달픈 나날이었다. 새날야학의 구십칠년 결산을 보면 일년 전체 예산 가운데 실무활동비는 백오십만원에 불과하다. 한 달에 십만원 약간 넘는 돈을 받으며 그는 이런 저런 활동을 해왔던 것이다. 그리고도 남아있던 백이십만원의 빚.

  그렇게 힘겨운 야학 살림을 꾸려 나가는 것은 그야말로 ‘돈’과의 전쟁이었는지 모른다. 간혹 검정고시에 합격해 무엇보다 큰 기쁨과 보람을 선사하는 학생들을 보면 힘이 났지만 예전에 활동했던 다른 친구들이 사회 속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는 반면 자신은 항상 제자리에서 반복되는 일만을 하고 있는 듯한 정체감이 그를 슬슬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찾아왔다. 바쁜 일정 속에 그냥 넘겨 보려 했지만 그 통증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지자 병원을 찾아 종합검진을 해 보니 놀랍게도 위암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것도 말기인 3기, 그 때가 지난 해 삼월이었다.

  그 때 의사는 그랬다.

  “십일월을 넘기면 기적입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당분간 하고 싶은 일이 마음껏 다 하라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다 가고, 해보고 싶었던 일이 있으면 하라고 말이다. 그리고선 의사는 애써 웃으며 덧붙였다. “세상에는 기적이란 것도 있을 수 있으니까 희망을 가지세요.”

  ‘저런 말이면 나도 하겠다’하는 생각에 분노가 인 것도 잠시, 그는 생각에 빠졌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었나, 무엇을 해야 하나.’ “사실 할 게 없더라구요. 의사말로는 앞으로 살 수 있는 시간이 한 칠개월 남았다는데 그제서야 뭐 다른 일을 할 수도 없고 그냥 남은 시간만이라도 그 동안 해온 이 야학일을 잘 마무리하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족들은 그 몸으로 무슨 일을 하냐고 만류했지만 그는 다시 야학으로 돌아간 것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물론 그도 인간인지라 아직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야학일이며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많은 사업들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하고 자신의 생을 마감해야 한다는 생각에 심적으로 무척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 와중에도 사정도 모르고 운영기금 마련을 위한 일일찻집 사업을 진행하려고 분주해 있던 그에게 어떤 이는 이렇게 비아냥대며 결정타를 먹였다. ‘장애우 이용해서 돈 많이 벌었냐?’는 것이다.

  “내 깐에는 죽을 병이 걸렸어도 최선을 다 한다고 해 왔는데 그런 소리를 듣고 나니까 모든 일에 정나미가 뚝 떨어지더군요. 여기 손 목사님도 위암이라고 그렇게 손 놓고 있지 말고 더 늦기 전에 치료를 받아보라고 간곡하게 권하시기도 해서 야학은 잠시 접고 병치료를 했습니다.

  그가 소개받은 곳은 자연식과 식이요법을 통해 병을 치료하는 사람이 운영하는 곳으로 암환자도 많이 치료했다고 들었다. 그가 치료에 들어간 것이 지난해 유월부터실제 본단식 사십일을 비롯해 예비단식과 보호식 등의 기간까지 합하면 모두 백이십일 동안 단식을 해갔다. 삼십팔 킬로그램 나가던 몸은 삼십이 킬로로 빠졌으니 성인 남자의 정상 몸무게라고는 믿어지지 않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서서히 차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결국 암 세포덩어리가 몸 밖으로 떨어져 나오더니 올해 이월 검진결과, 드디어 완치 판정을 받았다. 이런 걸 기적이라고 한다면 정말 아직 세상에는 기적이란 것이 존재하는가 보다 생각했다.

  “최근에 새로운 암치료법이 개발됐다고 해서 화제가 됐잖아요. 관심 있어서 자세히 봤더니 제가 시도했던 단식법과 그 원리가 비슷하더라구요. 암이라는 세포덩어리도 영양을 섭취해서 커나가는 것인데 모든 영양소를 아예 끊어버리니 그 암세포도 살 수가 없는 거죠.” 사람은 그렇게 곡기를 끊어도 살 수 있더라구요.

  무엇보다 자신의 손금을 보면 생명선이 그닥 짧은 편이 아니라는 사실이 맞았나 보다며 그는 웃는다.

  그렇게 지난해 시월말까지 치료를 받고 조금 몸을 추스린 후 다시 야학일을 시작했다. 새로운 삶을 얻은 자신이 무엇을 하기 위해 다시 살게 됐는지 생각하니 다시 열정이 솟았다.

  누구는 이렇게 말할 지 모른다. 특수교육진흥법도 있고 그래서 중등부 교육까지 의무적으로 다 배울 수 있는데 요새 같은 세상에도 왜 이런 장애우 야학이 필요하냐고.

  “한 때 한참 힘들어서 야학은 그만 두려고도 했는데요. 그 때 학생들도 울고 여기 오는 장애우들도 다 울면서 그럴 수는 없다고 그런 결정을 말리더군요. 사실 그 때 저 친구랑 저 친구 아니면 그냥 접어버렸을 지 몰라요.”

  그가 가리키는 한 명의 장애우는 전동휠체어를 탄 채 어렵게 책장을 넘기며 혼자 공부를 하고 있는 친구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자리를 깐 채 앉아 발가락으로 글을 써가던 그 친구다. 이들의 나이는 지금 서른과 스물 일곱. 이런 이들이 배움을 위해 갈 수 있는 어디일까. 나이도 많고 신변 자립도 조금 어려운 이들은 애시당초 특수학교에서도 거부당한 신세들이다. 그렇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면서 이제까지 알지 못해왔던 배움의 맛에 흠뻑 빠져 있다. 그 사정을 누구 보다 잘 알고 있는 그는 결국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몇 년 전부터 나이가 많은 장애우는 특수학교에서도 받아들여 주지 않는가 봐요. 아무래도 다른 학생들이나 교사들과의 관계 때문이겠지만 그래서 저 친구들은 이곳밖에는 배울 곳이 없어요.”

  그런 장애우 뿐만 아니라 이 새날야학에는 나이가 지긋한 주부들도 함께 미쳐 못다한 배움의 한을 풀어나간다.

  “이제는 한글을 모르는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없는 것 같죠. 그런데 아니에요. 사실 저도 놀랐는데 아직도 입소문을 듣고 또 친구의 손목에 이끌려 적지 않은 분들이 이곳에서 가나다라부터 배워 나가세요.”

  야학은 기본적으로 학생과 교사들의 회비와 후원금으로 운영된다. 유월 초 입주해 들어온 지금의 건물은 두 달의 유예는 받아놨지만 당장 전세금을 마련해야 하는데 지난 번 야학공간으로 썼던 주택 전세금이 아직 빠지지도 않았고 그걸 빌리느라 은행 융자를 받았던 삼천만원에 대한 이자가 요즈음에는 월 오십만원이 넘기 때문에 그 기금을 마련하는 일이 요즈음 조 시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다.

  “다른 대안이 있냐고요? 일단 일일찻집과 같은 방법을 또 고민해야죠. 그렇지만 장애우 팔아서 돈 버네 하는 얘기를 들으면 또 굉장히 화가 나고 허탈해지겠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안하고 있으면 불편을 겪는 것은 여기 장애학생들이라는거에요. 전세금을 구하지 못해 문을 닫으면 정말 막막해지는 건 그 장애우들이니까요. 그래서 이젠 그런 뒷말들 신경쓰지 않기로 했어요.”

  야학을 통해 하나하나 한글부터 깨우쳐 나가는 장애우들에게는 교육 자체가 급선무이긴 하다. 그렇지만 또 그것만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그는 괴로웠다.

  “취업이나 생활적인 문제는 전혀 손을 못대고 있습니다. 사실 그것이 해결돼야 궁극적으로 자립할 수 있을텐데... 대전지역에서 정서장애쪽은 부모들이 조직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지만 중증지체장애우들의 권익을 위한 활동을 고민하는 장애우단체가 없어서 더욱 제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합니다. 저희가 일단 교육적인 측면에서 접근했지만 단순한 야학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활 정보도 제공하는 종합적인 교육센터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할 겁니다.”

  그래서 조태흥 씨는 바쁜 일정 가운데에도 나름대로 여러 사업을 구상중이다. 특히 문화적인 접근에 있어 그는 관심이 많다. 의식주문제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통합사회를 위해서는 문화에서부터 풀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실현시킬 그의 복안 중의 하나가 장애청소년이 직접 연기하는 극단을 만드는 것. “현재 대전시내 특수학급에 다니고 있는 지체장애 학생들이 많으니까 자원은 충분할 것 같아요. 그런데 그냥 장애우 연극이라고 대충 만드는 건 싫어요. 대전에서 가장 실력있는 연출가 분에게 취지를 설명해서 자원활동으로 참여를 유도해서 연기지도도 제대로 받으면서 한 번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지체장애 중애 소아마비 장애우는 많이 사라진 상황이기 때문에 뇌성마비장애우가 출연자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언어장애에 근육이 경직되는 공주를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겠냐고?

  그러나 생각을 달리해보자. 그런 배우들이 나와서 벌이는 한 판 연극을 보면서 우리는 한 가지를 깨닫게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늘 보아왔던 세상과는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할 수 있고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도 어쨌든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 장애청소년들의 연기를 같은 나이 또래의 청소년들이 진지하게 끝까지 관람하게 된다면 바로 그 사실 하나는 분명하게 알고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당장 할 일이 벅찰 것 같은데 그는 또 하나의 꿈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우리 나라도 어떻게 보면 장애국가잖아요. 남과 북인 갈리느라 허리가 잘려 있다는 장애를 갖고 있으니까. 그럼 의미에서 한 한달 동안 장애우하고 대학생들이 분단된 이 국토를 순례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분단 국가에 대한 아픔 뿐만 아니라 진정한 장애의 의미를 다시금 느끼는 행사를 마련하는 겁니다. 장애우와 함께 행군하면서 몸으로 그 사실을 서로 느끼게 되겠죠.”

  사실 이 말을 들으면서 ‘요새 대학생 중에 누가 한 달이나 그 일에 시간을 투자하겠는가’ 하는 걱정이 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저렇게 끊임없이 야학을 찾아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의 일부라도 다른 사람들과 나누려는 대학생들을 보면서 이 사회에는 아직 나누는 기쁨과 맛을 알아버린 젊은이들이 많다는 사실에 위안을 가져보면서, 거기다 조태흥 씨의 열정까지 더해진다면 섣부른 부정은 곤란할 것이다. 아무튼 그런 꿈들이 오늘 그를 배부르게 한다.

  조태흥 씨를 만나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스물 세 살까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다는 그의 얘기가 머리를 계속 맴돌았다. 그 상처의 깊이를 감히 헤아리지도 못하겠는데 더욱 어처구니없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바로 나와 같은 세대의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호부호형을 못하는 설움을 뼛속 깊이 새기며 홀로 집을 나선 홍길동과 같은 서자가 존재하는 조선시대도 아니고 이런 대명천지에 그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였다.

  조태흥 씨가 그런 슬픈 영화의 마지막 주인공이길 간절히 바란다.

작성자한혜영 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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