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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이야기]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김제 ‘따뜻한 집’ 식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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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집’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따뜻한 마음을 가진 22명의 장애우들이 살아가는 곳이 있다. 전북 김제에 위치한 이 따뜻한 집은 장애우들이 모여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 따뜻한 집에 살고 있는 식구들을 만나 그들이 살아가는 얘기를 들어봤다.


 두명의 가족이 서른 다섯명이 된 사연

  전북 김제시 진봉면 정당리 261번지. 그곳에 가면 평범하지만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웃는 얼굴이 해맑아 예쁘게만 보이는 길자(31. 뇌성마비)씨와 순하기만 해길자 씨를 투정꾼으로 만들었다는 한상돈(42. 반신불수)씨가 부부로 살고 있고, 애교가 많은 주심이(16)의 무뚝뚝한 엄마와 김형석(38. 소아마비)씨가 보금자리를 꾸미고 있는 집. 그곳이 바로 따뜻한 집이다.

  사람들에게서 상처입고 갈 곳 없는 22명의 장애우들이 모여 한 식구처럼 공동체 생활하는 장애우들의 공동체다.

  ‘따뜻한 집’의 마당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건물은 기와가 으리으리한 중앙 건물이다. 옛날 갑부집을 개조해서 만들었다는 집에는 여성장애우들과 부부들이 살고 있다. 제일 좋은 곳에 여자와 부부의 보금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건물의 왼편으로는 식당이 보이는데 식구들이 모두 둘러 앉아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도록 가운데 큰 테이블이 놓여 있다. 따뜻한 집 식구들이 먹을 음식을 장만하는 곳이기도 하다. 여자들의 방이 있는 건물 왼쪽으로는 남성 장애우들이 사는 건물이 있다. 그리고 작년에 공사를 마친 원장실과 예비 도서관이 있을 뿐이다.

  따뜻한 집이 처음 문을 연 것은 96년 12월. 겨울의 한가운데서였다. 24살에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장애우가 된 정경원(30. 지체장애) 씨가 형을 졸라 얻어낸 자본금으로 장애우를 위한 안식처를 마련한 것이 따뜻한 집의 시작이다. 그러나 1백평이 넘는 넓은 땅을 차지하고 산 장애우는 단 두 사람, 개원 당시 수용장애우의 수는 두 명이었다고 한다. 원장인 정경원 씨와 간사로 재직 중인 최재우(25. 지체장애)씨가 따뜻한 집의 유일한 식구였다. 당시를 정경원 씨는 이렇게 회상한다.

  “막상 장애우를 위한 시설이라고 문을 열었는데 찾아오는 장애우도 없고 관심을 가져주는 후원자들도 없었어요. 그래서 재우 씨와 난 추운 겨울을 보내야 했습니다. 연료비가 없어서 추위에 몸을 떨었고 같이 하는 사람도 없어서 마음도 차가웠던 겨울이었죠. 말이 따뜻한 집이지 사실은 그렇지 못했어요.”

  96년의 겨울을 그렇게 단촐한 두 명의 식구가 서로를 위로하며 보냈고, 따뜻한 집에 새 식구를 맞이한 건 이듬해 1월이 돼서였다. 평소 신앙생활을 하던 정경원 씨가 기도원을 다녀오던 중에 한상돈 씨를 차에 태웠는데, 그것이 인연이 돼 지금까지도 따뜻한 집의 같은 식구로 살고 있다. 우연한 인연이 따뜻한 집에 새 식구를 마련해준 것이다. 그후부터 한명 두명 가족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현재까지 따뜻한 집을 다녀간 식구들만 따져도 35명을 넘는다고 한다. 단 2명의 식구가 이제 대가족이 된 셈이다.


 두 쌍의 부부가 함께 살게 된 이야기

  그러나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다고, 22명의 장애우들이 한 곳에 모여 가정을 꾸미며 살아가다 보니 웃고 웃을 일들이 많기만 하다. 우선 따뜻한 집에서 만나 가정을 꾸민 사람들의 얘기부터 하자.

  따뜻한 집에는 현재 2쌍의 부부가 함께 생활하고 있는데, 그 첫 번째가 김길자 씨와 한상돈 씨 부부다.

  길자 씨의 경우, 따뜻한 집에 들어오기 전에는 칠십이 넘은 노모의 수발을 받아가며 생활했다고 한다. 스스로를 돌보기에도 힘든 노모의 시중을 받다 보니, 길자 씨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을 것은 안봐도 뻔한 사실이다. 정경원 원장이 처음 길자 씨의 방문을 열었을 대, 악취로 코를 잡아야 했다고 한다. 그만큼 그녀의 삶은 궁핍하고 어려웠던 것이다.

  무슨 일이든 시키는 대로 할테니 자신을 받아달라는 그녀를 뿌리칠 수 없어 길자 씨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길자 씨가 따뜻한 집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받기만 해오던 길자 씨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며 배려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1년 동안의 시간이 지나 지금의 길자 씨는 잘 웃는, 그렇지만 조금은 고집에 센 아줌마일 뿐이다. 자신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주는 한상돈 씨를 만나 혼인신고를 한지 3개월이 지났다. 사람과 눈길만 마주쳐도 곧잘 웃는다. 아마도 행복하다는 그녀만의 표현일 것이다.

  두 번째 부부는 애교가 많아 따뜻한 집의 귀염둥이로 통하는 주심이의 부모다. 어린시절 주심이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혼을 했다고 한다. 주심이는 어느 한 쪽 부모와 살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주심이는 전국의 기도원을 돌아다니며 엄마를 찾기 시작했다. 친척들에게서 받은 더부살이의 서러움이 참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 날도 주심이는 엄마를 찾아 김제에 있는 기도원에서 내려오는 길이었다. 아직 햇볕이 따가운데도 겨울옷을 미리 꺼내입은 주심이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집나온 사람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주심이와 정경원 원장의 인연은 그곳에서 시작됐다. 기도원을 등지고 내려오는 주심이를 태워주며 주머니에 있던 얼마간의 노잣돈도 건넨 것이 인연이었다. 언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는 원장의 말에, 1년도 넘은 후에 전화가 걸려왔다. 돈이 없으니 순천역으로 자신을 데리러 와 달라는 전화였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 정경원 씨와 최재우 시는 김제에서 순천역까지 차를 몰았다.

  역에 도착했을 때 그녀 옆에는, 주심이가 1년이 넘도록 찾아 헤매던 어머니가 서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이후 주심이와 그녀의 엄마는 따뜻한 집의 식구가 됐다. 어머니는 부엌일을 돌봐주고 주심이는 현재 중학교 2학년에 재학중이다. 아직은 형석 씨를 아버지라고 부르기 어색하고 엄마와 셋이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익숙하지 않지만, 주심이가 따뜻한 집에서 완벽한 가정을 꾸미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비록 아버지라는 말이 낯설기는 하지만 따듯한 집의 장애우들 모두가 주심이에게는 언니 오빠들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연들

  길자씨 부부와 순심이 부모 말고도 따뜻한 집에 모여 사는 삶들은 나름대로 사연도 많고 인생의 우여곡절도 많은 사람들뿐이다. 사고로 정신장애를 갖게된 오은임(24)씨는 언제나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그립다고 말한다. 부모를 교통사고로 잃고 은임양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생에 대한 그리움과는 별도로, 따뜻한 집의 사람들은 좋아한다. 자신을 받아주는 사람들이고 멀리있는 친척보다는 옆에 있는 이웃이 더 가깝다는 것을 그녀 역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모가 자신을 정신병원에 넣고 부모님의 목숨값이라고 할 수 있는 보상비만을 챙겼을 뿐이다. 이 일을 계기로 임 씨는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세상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은임 씨에게 있어서 따뜻한 집의 동료 장애우들은 돈돈한 배경이고, 그녀를 지탱해주는 버팀목으로 느껴진다.

  따뜻한 집에는 사람들로부터 100%의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 두 명의 어린아이가 있다. 그 중에 한 명이 시간만 나면 벽이나 창틀에 자신의 머리를 찧어대는 박양수(15. 자폐)다. 투명하도록 하얀 피부와 고양이처럼 날카롭지만 예쁜 눈을 가진 양수는 15살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다. 두 손은 언제나 뒤로 묶여져 있고, 가끔은 방안에 묶여있을 때도 있다. 여기 저기 보이는 대로 몸을 부딪치고 자해를 하기 때문에 양수는 따뜻한 집의 몇 안되는 요주의 인물에 속한다. 그런 양수가 가끔은 희죽이며 웃지만, 언제나 자신의 생각 속에 갇혀 지내기 때문에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른다. 화장품 외판원을 하며 번 돈으로 몇 푼의 후원금을 내는 어머니마저도 양수에게는 남처럼 무덤덤한 존재이기는 마찬가지다. 양수의 몸은 ‘따뜻한 집’에서 살지만 그의 정신은 다른 곳을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양수의 얼굴에 씌워져 있는 보호대와 두 팔을 묶고 있는 끈이 풀릴 날이 언제가 될지.....

  아름이(11. 뇌성마비)는 양수와는 반대로 사람을 반길줄 안다. 처음 본 사람의 손일지라도 내밀어 잡으려고 한다. 자신을 돌봐주는 미정 씨가 옆에 있으면 기어가 안기기도 하고 같은 방을 쓰는 양수에게 다가가 건드리다가 흠집을 내기도 하는데, 모두 아름이의 작품들이다. 표현방법이 다를 뿐 사람의 관심을 끌려는 표현인 것이다.


 서로를 돌보며 살아가는 사람들

  매 끼니 식사 때가 되면 따뜻한 집에는 종이 울린다. 식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다. 마치 초등학교 시절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듯한 종소리는 따뜻한 집 식구들에게는 즐거운 소리로 여겨진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김미정(25. 뇌성마비) 씨의 잔소리 역시, 따뜻한 집 식구들에게는 듣기 좋은 소리로 통한다. 엄마의 잔소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김미정 씨는 다른 시설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다. 하루 종일 작업을 하고도 10만원이라는 적은 돈을 받았고, 간사들로부터 위협을 당한 적도 있다고 한다. 25살의 그녀가 헤쳐 나가기에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청바지와 티셔츠 하나만 입고 여기 저기를 뛰어다니며 일하는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이제야 그녀가 자신을 쉴 수 있는 곳을 찾지 않았나 하나 생각이 든다. ‘따뜻한 집’ 식구들을 돌보며 그들의 어마로 세월을 담아내는 모습이 그녀에게 무척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애교덩어리 주심이가 원장님께 애교부리는 모습을 보면 금새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며 반응을 보이는 모습은 사랑을 시작한 여자의 모습이지만, 식구들의 더러운 빨래를 하거나 아이들을 돌보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중년의 노숙미마저도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어눌한 발음으로 ‘이제는 편안하고 좋다’고 말하고는 그녀는 환하게 웃어보였다. 미소년의 웃음을 간직한 그녀가 따뜻한 집에 정착한 후, 다른 식구들에게 엄마와 같은 존재가 됐다. 아마도 다른 시설에서 느꼈던 고통의 시간들이 그녀로 하여금, 보호받고 있는 사람으로서 어떤 것들을 필요로 하는 지를 알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재우(25. 지체장애)씨는 따뜻한 집의 멋쟁이로 통한다. 염색방법을 몰라 너무 노랗게 물이 들었다며 쑥스러운 듯 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는 외모에서부터 활동적인 사람일 거라는 인상이 풍겨나온다. 원장과 함께 다른 공동체 생활을 함께 했던 것이 인연이 돼 친형제처럼 지내게 됐고, 또 그것이 계기가 돼 지금은 따뜻한 집의 일을 맡아서 하는 일꾼이 됐다. 그가 따뜻한 집에서 하는 일은 일인 다역의 배우와도 같다. 식구들을 돌보는 일부터 운전기사로 식구들의 외출도 돕고 집에 수리를 해야 할 곳이 생겨도 당연히 최재우 씨의 몫이 된다. 명색이야 ‘따뜻한 집’의 간사라고는 하지만, 따뜻한 집에 간사와 가족들간의 구분이 없으니 최재우 씨 역시 간사라기보다는 한 명의 가족일 따름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주제로 한 권의 베스트셀러를 쓸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사람들은 많은 사연과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따뜻한 집’에 원장으로 있는 정경원 씨 역시, 30살의 나이에 과하가 싶을 정도로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 20대 초반에 류마티스 관절염을 심하게 앓고 장애우가 되고 나서는 형과 부모님의 보호 아래서 생활했다고 한다. 그러다 찾아간 곳이 장애우 보호시설과 공동체생활을 하는 곳들이었다. 그러나 여러 군데를 다녔어도 그가 얻어나온 건 상처 뿐이었다. 장애우이기 때문에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 수 있을 거라고 찾아간 곳에서, 그가 본 사람들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장애우들과 장애우를 이용해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 다가온 시간들이었겠지만, 아마도 그런 시간들이 정경원 씨가 따뜻한 집이라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96년, 정경원 씨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의 정신적 도움과 가족들의 물질적인 도움으로 따뜻한 집을 만들기까지의 경험이 그에게 따뜻한 집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을 것이다. 그는 머물렀던 곳과는 다른 공동체를 만들어보겠다는 꿈을 그에게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경제적 어려움, 서로간의 조화가 문제

  96년 처음 문을 열고 지금까지 따뜻한 집은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후원금을 보내주는 사람도 드물고 마음을 같이해주는 사람들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개원 당시만 해도 수입이 전혀 없어 정경원 씨가 집에서 돈을 가져다 생활하기도 바빴다고 한다. 사회가 장애우들에게 주는 일감이라고 해봐야 어린아이 용돈도 안돼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수입으로 스무명이 넘는 식구들을 건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작년에는 따뜻한 집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호떡장사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호떡을 맛있게 만드는 사람을 찾아가 그 근방에서는 장사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비법을 전수받아온 것이다.

  장사를 시작한 초기에는 크기나 모양이 가지각색이라 어려움도 많았다. 호떡의 크기가 부침개만해서 손님들이 웃는 일도 많았고 설탕이 안녹거나 반죽이 제대로 안돼 낭패를 본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3개월간의 장사기간 동안. 1백 50만원의 순이익을 냈다고 한다. 먹는 장사라서 그런지 맛을 본 손님들은 다시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고 단골손님도 꽤 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따뜻한 집 식구들은 기대에 부풀어 있다.

  “호떡장사를 끝낼 때쯤은 따뜻한 집이 있는 만경일대에서는 유명한 호떡집으로 소문도 났었어요. 처음에야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크게 부풀어 오른 호떡 덕분에 인심좋다는 소리도 들었고 올 겨울에는 아마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을 거예요. 비법을 확실하게 익혀 놓았거든요.”

  호떡장사를 도맡아서 하다시피 했던 최재우 씨는 그만큼의 수익을 낼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한다.

  재우 씨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 따뜻한 집 식구들 역시 신이 나기는 마찬가지다. 뒤뜰에 세워져 있는 호떡장사용 리어카를 볼 때마다 따뜻한 집 식구들은 하루 발리 날씨가 쌀쌀해 졌으면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철장사로 호떡을 판매해서 얻은 수입으로 따뜻한 집이 운영되는 것은 아니다. 따뜻한 집을 염려하는 사람들의 계속적인 관심과 대책이 될 수 있을만한 꾸준한 수익사업을 만들어야만 한다는 것이 따뜻한 집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다.

  한때는 알로에를 판매하는 회사에서 일감을 가져다 식구들끼리 모여 앉아 이야기하며 일한 적도 있었지만, IMF한파를 타고 기업이 어려워지면서 그나마 있던 일감마저도 떨어져 나간지 오래라고 한다. 식구들의 발이 되는 차량을 유지하고 식구들의 양식도 마련해야하고 겨울이 되면 난방비를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은 문제다. 꾸준히 치료를 받아야 하는 식구들도 있기 때문에 따뜻한 집에서 돈이라는 문제는 식구들의 목숨과도 같다. 며칠 전에도 식구 중 하나가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치료비를 마련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하루 종일 누워서 생활하는 할아버지의 약값도 문제고 간질 때문에 고생하는 주심이 엄마에게도 약을 사드려야 한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양수나 몇 분의 노인분들에게는 기저귀 한 장이 아쉬운 게 따뜻한 집의 실정이다.

  따뜻한 집에 몇일 전 김태근(34. 지체장애) 씨가 새로운 식구로 들어왔다. 척수염과 골다공증으로 목발을 짚고 힘겹게 걷는 태근 씨는 여기에 들어오기 전, 형님과 함께 생활 했다고 한다. 그래서 공동체생활을 하면서 사람들과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형님집에서 지냈는데 따뜻한 집에 오니까 심심하지 않고 얘기 상대가 있어서 좋아요. 내가 노력하면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 생활할 수 있을 겁니다. 이제는 여기가 제집이니까요”


 “우리가 만든건 공동체가 아니라 가족입니다”

  김태근 씨의 말대로 따뜻한 집 식구들은 ‘이곳이 내집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생활한다. 한 방에 두 사람씩 기거하면서 형제 자매로 이야기를 나누고 부부로서 애정을 나누면서 생활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방을 치우면서 집을 가꾸고 돌봐줘야 할 사람을 가족이라고 생각하면서 부양해가고 있다. 움직이지 못하는 식구를 위해서는 밥을 떠먹여 주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아이를 위해서는 기저귀를 갈아주고 몸을 씻겨준다. 식구를 위해 돈을 벌어 오고 음식을 할 줄 아는 여성장애우들은 식구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한다. 그리고 한자리에 둘러앉아 기도를 드리고 함께 밥을 먹는다.

  가끔 찾아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따뜻한 집을 찾아준 손님으로 맞이한다.

  한 달에 몇 번 찾아오는 김제의 홍산교회 청년반은 따뜻한 집에 가장 반가운 손님들이다. 홍산교회 청년반이 오면 가장 반기는 사람은 정길자 씨다. 눈길이 마주쳐야 수줍은 듯 웃는 그녀가 소리를 지르며 반기는 것이다. 매주 정기적으로 잊지 않고 찾아주는 청년반들이 따뜻한 집 식구들과 놀면서 장난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친구로 이야기도 나누고 장난도 치면서 서로를 향한 애정을 쌓아가는 것이다.

  정경원 원장의 계획대로라면 가까운 시일 내에 버려진 뒷집을 사서 교회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장애우들을 위한 교회를 말이다. 그리고 경원 씨가 다니는 산학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그 곳에서 장애우들을 위한 설교를 하고 싶다고 한다. 도서관도 만들고 싶어서 열심히 책도 모으고 있다.

  그러나 이런 꿈과는 달리 따뜻한 집의 하루는 조용하기만 하다. 양수가 자해를 하지 않는다면 별로 소란한 일도 없을 것이고, 하루 종일 누워만 계시는 할아버지에게 욕창이 생기지 않는다면 또 그렇게 하루가 갈 것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그런 평범한 날이면, 따뜻한 집 식구들은 모여 앉아 바둑을 두거나 TV를 본다.

  일감이 있을 때는 포장일을 했지만 그것도 없어졌으니 오늘은 모여앉아 바둑을 두면서 이야기를 할 것이다. 정자 씨와 상돈 씨 부부에게 애기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얘기도 하고, 원장님과 미정 씨가 언제 결혼을 할 수 있을 지에 관한 농담도 할 것이다. 진섭(20. 다운증후)씨가 좋아하는 20살 연상의 순순(정신지체)씨를 놓고 놀리면 식구들 모두가 한바탕 웃을 수 있다. 그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저녁달이 떠오르면 ‘따뜻한 집’의 하루는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다

작성자서현주 객원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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