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가 이상하지 않은 사회, 그게 자연스러운 거죠" > 세상, 한 걸음


"장애가 이상하지 않은 사회, 그게 자연스러운 거죠"

미국에서 재활공학 전문가로 일하는 김종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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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지난 9월 중순, "장애인 인권운동의 이론"과 "미국 자립생활운동의 역사와 현재"를 주제로 열린 강연회에 취재를 갔다. 강사는 시종일관 유쾌하고 분명하게 "장애"가 무엇이며 장애를 차별하는 사회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지에 대한 본인의 신념을 보여줬다. 더구나 그것은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더 인상 깊었다. 기자는 강연을 듣고 "바로 이 사람"이라는 생각에 주저 없이 그이를 "사람사는 이야기"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그 사람이 바로 김종배 씨다.

사고, 모든 것은 멈췄다
"제가 사는 얘기, 다른 사람과 별로 다르지 않은데…사는 거야 다 그렇죠."
사는 이야기 좀 해달라는 말에 김종배 씨는 멋쩍게 웃었다. 그이 말에서 기자는 "장애우라고 해서 특별하게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숨은 뜻을 보았다.
그렇지, 사람 사는 거 어떻게 보면 거기서 거기다. 장애우라고 유별나게 사는 거 아니다. 정말 그래야 마땅한데, 우리 사회는 장애우들을 다르게 대하니 참 요지경이다. 사회의 장애차별은 당사자와 가족의 삶까지 송두리째 바꿔버릴 정도로 피해가 크다.
김종배 씨는 이십 년 전 사고로 경추를 다쳐, 하루아침에 중증 척수장애우가 됐다. 김 씨는 장애 유무에 따라 사회의 대우가 어떻게 다른지, 그 때문에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너무나 극명하게 경험했다.
"경추 5번을 다쳐서 전신마비가 됐죠. 이십 년 전에는 수동휠체어였는데, 휠체어에 앉혀주면 꼼짝 못하고 앉아서 성경책 읽는 것이 전부였죠. 혼자 나가는 건 꿈도 못 꿨죠. 그 때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어요."
당시 김종배 씨는 카이스트 대학원생이었다고 한다. 산업공학을 전공했고 석사과정 마지막 학기를 진행하던 김 씨는 88올림픽 당시 국가 전산화 프로젝트에 참여한 인재다. 그러나 갑자기 닥친 사고는 김 씨의 삶을 아예 정지시켰다.
"공부를 더 이상 할 수가 없었죠. 학교에는 중증 장애가 있는 학생을 지원하는 그 무엇도 없었으니까요. 당시 학교가 공릉동 산 중턱에 있었어요. 누가 매일 휠체어를 밀어줄 것이며 신변처리와 학습과정은 또 어떻게…후후후. 현실적으로 제가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는 그 어떤 방법도 없었습니다. 참 힘든 시기였죠."

전동휠체어와 컴퓨터,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다치고 나서 5년 뒤, 그러니까 90년대 초에 컴퓨터를 샀어요. 어떤 컴퓨터였냐면 그래픽은 전혀 없고 새까만 화면에 글씨만 나오는 도스 같은 거였죠. 컴퓨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제가 전공을 살려 다시 작업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2,3년 뒤에 전동휠체어를 샀는데, 전동휠체어를 처음 타던 날을 잊을 수가 없어요. 아마 신경을 재생해서 일어났을 때 꼼짝 못하다가 혼자 이동할 수 있게 됐으니까 감격 그 자체였죠."
컴퓨터와 전동휠체어는 김 씨에게 새로운 삶을 제공했다. 김 씨는 컴퓨터로 세계와 소통하고, 전동휠체어로 이동할 수 있게 되면서 새로운 희망을 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희망을 다른 장애우들와도 나누고 싶었다고. 그래서 한국수레바퀴선교회에 정보통신센터 만들어 재활정보를 공유하고, 대학교에서 강의도 했다. 이러한 경험은 김 씨에게 재활공학이 장애우들의 삶을 향상시킬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주었다.
"컴퓨터를 해도 저는 손이 불편해서 보조장치가 있어야 문서 작성을 할 수 있습니다. 윈도우에서는 키 기능을 다르게 설정해 사용할 수 있는데, 이런 기능이 없으면 저는 컴퓨터를 쓰기가 아주 불편합니다. 예를 들어 쉬프트, 알트, 컨트롤 키는 동시에 눌러야 하는데 저는 그럴 수 없거든요. 그리고 많은 장애우들이 마우스 대신 트랙볼이라는 것을 사용하는데, 드래그가 가능하도록 키를 설정하면 한 손으로 컴퓨터를 써도 큰 지장이 없지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 기술들은 중증장애우가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기능입니다. 만약 컴퓨터와 보조장치, 전동휠체어가 없었다면 저는 집에서도 나오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됐을 겁니다. 이러한 재활공학 장치들이 저를 다시 살게 해준 거죠. 삶이 바뀌는 겁니다. 그래서 재활공학을 제대로 공부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활동보조인, 동등한 경쟁 가능케 한다
올해 마흔 다섯인 김종배 씨는 미국에서 산다. 김씨는 2001년 미국으로 건너가 피츠버그대학교에서 재활공학 박사과정을 마쳤고, 지금은 피츠버그대학교 재활공학센터 책임연구원으로 일한다.
유학 초기에 영어 때문에 고생했지만, 우리나라에서 사회 장벽을 넘는 것보다 언어 장벽을 넘는 것이 훨씬 쉬었단다.
"영어공부야 좀 했지만,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려니까 잘 안되던데요. 예를 들어 버스 탈 때 휠체어 때문에 다른 도움이 필요한데, 그것을 영어로 말해야 하니까 쉽지 않았어요. 미국 생활 초기에는 이거 중복장애다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하하하. 그렇지만 이것은 제가 밖으로 나갈 수 있고, 버스를 혼자서 탈 수 있는 환경이기 때문에 생기는 고민이에요. 만약 한국에 있었다면 저는 장애를 더 심하게 겪어야 했을 겁니다."
김종배 씨는 미국에서 즐거움 중의 하나가 버스를 타는 것이라고 말한다. 캘리포니아 시내버스는 100% 저상버스고, 리프트 접고 펴느라 걸리는 시간 때문에 항의하는 승객은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어떤 운전기사는 아예 1, 2차선을 가로질러 정차해 맞은 편에서 오는 차량을 막아, 김 씨가 안전하게 길을 건널 수 있도록 배려한다고 한다.
그러면 이쯤해서 김 씨가 경험한 미국의 장애우 정책들을 좀 더 들어보자.

- 피츠버그 대학에서는 어떤 지원을 했나요?
"미국 교육기관들은 장애가 있는 학생들이 공부하는데 어려움이 없게 최대한 지원합니다. 제가 다닌 피츠버그대학교에는 장애학생지원국이 있는데, 제게 필요한 모든 책을 다 스캔해서 컴퓨터 파일로 제공했고, 공부하는 데 필요한 장비도 다 지원했습니다."

- 공학이면 손을 많이 사용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공부를 했나요?
"아무리 학교에서 지원을 많이 해도 장애 때문에 공부하기 어려운 분야는 있습니다. 기계공학처럼 손으로 하는 분야들을 제가 직접 하기는 힘들죠. 저는 재활공학 중에서도 컴퓨터로 연구할 수 있는 원격재활이라는 분야를 전공했습니다. 모든 연구 과정을 컴퓨터로 하기 때문에 제게 적당한 분야죠. 재활공학은 모든 학문들이 서로 연합한 학문입니다. 예를 들면 전동휠체어만 해도 인체공학, 기계공학, 전자공학, 의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재활공학 보조기기 최종 사용자가 장애우기 때문에 당사자 경험에서 시작하는 연구여야 정확하고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점입니다."

- 미국에서 활동보조인서비스를 받는다고 했는데, 어떤 방식으로 지원하나요?
"제가 미국에서 받는 지원들은 상당히 질 높은 서비스입니다. 그래도 활동보조인이 없었다면 상당히 힘들었을 겁니다. 제가 활동보조인서비스를 받는 시간은 하루에 7시간이고, 서비스 이용료는 1시간당 8불에서 12불입니다. 제가 한 달 동안 쓰는 활동보조인서비스 비용은 대략 2백만 원 정도인데요, 학생일 때는 소득이 없기 때문에 주정부가 비용을 전액 부담했습니다. 그러나 소득이 생기면 자기 부담금을 부과합니다.
활동보조인 급여는 주정부가 제게 개인수표를 보내면, 제가 활동보조인에게 직접 지급하는 방식으로 줍니다. 급여를 주고 받는 고용 관계여야 활동보조인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장애우가 최종적으로 급여를 주는 방식은 매우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고용한 활동보조인은 모두 5명인데, 한명은 간호사이고 4명은 간병인입니다. 4명은 피츠버그대학교 학생들에게 광고해서 직접 고용합니다. 활동보조인을 직접 고용하기 힘든 사람들은 센터를 이용하면 됩니다. 활동보조인을 고용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비용은 같은데 어떤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서비스 질이 상당히 달라지니까요, 맘에 맞는 사람 구하기는 것이 어렵죠. 어떨 때는 위험한 느낌이 들 때도 있어요. 그렇지만 다행히 지금은 안정적으로 서비스를 받고 있습니다."

- 그러면 김종배 씨 활동보조인들은 주로 어떤 서비스를 합니까?
"우선 아침에 활동보조인이 집에 와서 출근 준비를 돕습니다. 저녁에도 다른 활동보조인이 와서 쉴 수 있도록 서비스합니다. 출근하면 활동보조인 3명이 오전 9시, 점심시간, 오후 3시나 4시쯤에 오죠. 지금 활동보조인들은 저와 오랫동안 일했기 때문에 알아서 서비스를 착착합니다. 활동보조인서비스 때문에 직장생활 하는데 별로 불편하지 않습니다.
물론 학과에는 업무를 보조하는 조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활동보조인이 안 오는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조교나 다른 동료들에게 거의 부탁 하지 않습니다. 동료들은 제 장애를 보조하는 사람들이 아니니까요. 물론 부탁하면 잘 도와줍니다만, 제가 항상 도와달라고 하면 아마 싫어할 겁니다. 동료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일할 수 있어야 같이 일할 수 있습니다. 활동보조인서비스는 중증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직장에서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하는 아주 중요한 제도입니다."
학부모를 위해 편의시설 만드는 학교
김종배 씨에게는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딸 하나가 있다. 기자는 장애가 있는 부모들이 우리 사회의 장애인식 때문에 아이들이 상처받을까 걱정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그래서 슬쩍 물어봤다.
"가끔 딸이 소프트볼 연습 같이 못해준다고 투덜거리긴 합니다. 그러면 저는 "아빠 휠체어 뒤에 타면 다리 안 아프게 멀리 갈 수도 있잖아" 하고 맞받아치죠. 장애 때문에 해주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지만, 주눅 들면 안돼요.
저는 학교 행사 있을 때마다 가고, 딸 친구들도 집에 많이 옵니다. 미국은 등하교 때 아이들 데리고 오는데, 저도 아내와 번갈아 아이를 데리러 갑니다. 아이가 아빠의 장애 때문에 상처 받지는 않습니다. 이웃들과 딸 친구들은 제 장애에 관심이 없거든요. 그게 자연스러운 거 아닌가요. 집에 놀러 와도 "아빠 어디 아프니? 왜 그러니?" 하진 않습니다. 그런가보다 하죠.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공공 예절을 배웁니다. 자기와 다르게 생겼다고 쳐다보거나 하지 않아요. 그건 무례한 짓이잖아요. 아주 어린 아이들은 호기심 때문에 쳐다보거나 물어보기도 합니다. 그러면 부모들은 "저것은 휠체어인데 아저씨가 다리가 불편해서 타는 거야"라고 과장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설명합니다. 한국에서는 장애가 있으면 뚫어져라 쳐다보는 사람들 많잖아요. 한국에 있을 때 제 아내도 그런 사람들과 숱하게 싸웠어요."
덧붙여 딸이 다닌 두 곳의 초등학교에 경사로가 없어서 교실에 들어갈 수 없었는데, 학교 측이 김 씨를 위해 교실을 포함한 학교 건물에 경사로를 만들더라고 전했다.
"학생도 아닌, 학부모 때문에 편의시설을 만들었다고요?" 기자는 믿기지가 않아 다시 되물었다. 우리나라는 교육의 주인공인 장애아동들의 교육권조차 보장하지 않아서 학부모들이 삭발하고 단식농성을 하고 있지 않은가.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장애인식 바꾸는
중요한 발판
김종배 씨는 미국과 한국 장애우 정책의 차이가 장애인식에서 시작한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장애인고용촉진공단은 직장생활과 직접 관련 있는 것에만 서비스 합니다. 한국의 장애인고용촉진공단과 비슷한 미국의 관련부처는 직장에 다니는 장애우들의 집이나 화장실 등도 고쳐줍니다. 왜냐면 집에서 편하게 쉬어야 직장에서 일을 잘 할 수 있는데, 그건 장애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거든요. 특수교육도 우리나라 교육부는 교육과 관련한 것만 지원하지만, 미국은 교육과 재활서비스를 같이 진행합니다. 아예 부처 이름이"특수교육과 재활서비스국"일 정도죠. 미국 교육부는 재활공학에 많은 예산을 투자합니다. 장애가 있는 학생들이 잘 배우고 사회에 나가려면 교육은 물론이고 재활서비스와 재활공학도 교육부 소관이라고 보는 거죠."
사회안전망은 구성원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정책인데, 이 안전망을 잘 짜려면 복지에 대한 정부와 사회구성원들의 인식전환과 합의가 필요하다. 그런데 사회 구성원들이 좀처럼 편견을 극복하지 못하면, 법으로 강제해 인식을 바꿀 필요도 있다.
"미국 사회는 이제 "장애는 사회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물론 미국도 이러한 인식이 자리 잡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그 시간을 앞당긴 것이 바로 「장애인차별금지법」입니다. 장애 때문에 원하는 곳에 대중교통으로 갈 수 없고, 계단 때문에 건물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원이 없어서 더 이상 배울 수 없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 미국에서는 차별금지법 제정 이후 "차별"이라고 인식합니다.
장애 유무를 떠나서 국민이면 똑같은 권리를 누려야 하는데, 장애우가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면 차별입니다. 그래서 차별금지법 제정이 중요합니다. 차별을 법으로 금지하면, 차별을 당했을 때 고소할 수 있습니다. 특히 미국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있어서 더 강력합니다. 캘리포니아 장애 관련 단체들은 식당, 가게 등 개인사업장 편의시설을 조사해서 장애우가 접근할 수 없는 업소를 한꺼번에 고소하기도 합니다. 이정도면 아무리 개인사업장이라도 장애가 있는 사람이 이용조차 할 수 없는 건물을 만들지는 않죠."

장애, 사회 때문에 겪는 것
앞에서 김종배 씨가 "장애를 겪는다"라고 표현한 말에 주목한 눈치 빠른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김 씨는 장애는 "개인의 육체적 정신적 결손과는 다른 것이며 그런 특성이 있는 개인의 요구에 대해 사회가 제대로 정책을 펴지 않았기 때문에 겪는 차별과 곤란의 사회적 상태 "라고 말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장애인식입니다. 정부는 도와주려고 애썼지 언제 차별했냐고, 차별했다고 하면 좀 심하다라고 말합니다. 의료적인 관점으로 장애는 개인과 가족이 해결해야 할 문젠데, 국가가 도와주려고 노력했으니 차별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죠. 그러나 장애는 개인의 육체적인 약점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신체적인 약점이 없는 사람들과 똑같이 사회에서 활동 할 수 있는 환경을 정부가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거죠. 이렇게 생각하면 당연히 차별입니다. 예를 들어 공공시설에 계단만 해놓으면 휠체어 이용자들에게는 "들어오지 마시오"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것은 당사자에게는 분명한 차별이죠.
사회적 관점으로 보면 장애우가 불편 없이 살 수 있는 구조를 만들지 못한 주체는 바로 정부입니다. 그리고 모든 정책 분야에 장애우가 있습니다. 이를 고려하지 않고 정책을 만들면 차별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김종배 씨 경험 자체가 이러한 철학과 신념을 받치고 있는 증거들이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그것을 이룰 능력도 있던 한창 나이에 김종배 씨는 장애가 생겼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잃을 뻔했다.
이런 말 하기는 좀 뭣하지만, 솔직히 김 씨가 계속 한국에 있었다면, 게다가 컴퓨터나 전동휠체어를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면, 아마 지금쯤 시설에서 있을지도 모른다. 앞에서 김 씨도 만약 한국에 계속 있었다면 장애를 더 겪었을 거라고 말하지 않았나.
김종배 씨의 이야기는 사회가 장애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으며, 또 어떤 정책을 펴느냐에 장애우들의 삶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너무나 여실히 보여준다.
인터뷰 끝에 김 씨가 기자에게 써달라고 부탁한 것이 있다. 그리고 기자는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장애는 개인이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가 장애우를 차별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글 최희정 기자
사진 전진호 기자

작성자최희정 기자  prota102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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