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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소, 세상과 부딪히는 순간 힘이 생깁니더"

대구 ‘장애인지역공동체’ 박명애 대표

본문

기자가 박명애 씨를 처음 본 것은 올해 초 국가인권위원회에서였다.
당시 중증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활동보조인서비스를 권리로 인정하라며.
인권위를 점거하고 단식 농성을 하고 있었다.
투쟁 현장은 그 사안에 분노하는 젊은이들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박명애 씨는 더욱 눈에 띄었다.
“어쩌다보니 서울서도, 대구서도 왕언니네예.”라며 환하게 웃던 박명애 씨.
마흔 일곱에 야학을 통해 세상으로 나왔고, 지금은 대구 ‘장애인지역공동체’ 대표로 일하고 있다.
희끗한 퍼머 머리가 우아하게 어울리는 활동가, 박명애 씨가 이번 호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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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장애인지역공동체' 대표 박명애 씨   ⓒ 최희정
   
“니 와 그리 뜸했노? 마, 얼굴 잊어뿌리겠다아!”

“영희야, 그거 너무 고민하지 마라. 잘 될끼다. 알았재.”
“인제 안 아프나. 그러게 와 차에 덤비노. 이 문디 자슥아.”
“니 와 그리 뜸했노. 마, 얼굴 잊어뿌리겠다아.”
“우리 말복 때 온양에 매운탕 묵으러 가자. 철수야 어떻노. 갈꺼재.”

박명애 씨를 만나러 간 날 마침 평생교육과 관련한 강의가 있었다.
박 씨는 강의 시작 전에 미리 가서, 도착하는 사람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치며 안부를 물었다.
‘인사’는 상대방 일상을 모르면 말 그대로 ‘인사치레’가 되기 십상이다.

박명애 씨는 일일이 안색과 기분을 살펴 인사를 전했고 치우침이 없었다. 거기엔 기운을 북돋게 하는 어떤 힘이 있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어깨를 토닥거려주는 듯한 느낌이랄까.

사실 지역에서 장애차별에 저항하는 운동을 하는 것은 돌밭을 개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박명애 씨는 ‘보수의 고향’라는 대구에서 ‘장애인지역공동체’를 2년 째 운영하며 활동을 하고 있다. 그이가 불도저처럼 돌밭을 개간해 나가는 힘의 원천은 아마 ‘사람’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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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 참가자가 박 대표에게 싸온 초밥을 건넸다. 즐거워 하는 박 대표 모습 ⓒ 최희정
   
이는 박 씨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사람들은 “느낌에 충실하고, 경험한 것을 당사자 후배들에게 전하려 애쓰는 사람”, “일상에서 사람 잘 챙기고, 관계 맺으며 신뢰 쌓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탁월한 조직가”라고 전했다.

박명애 씨를 보아온 민주노동당 대구시당 차은남 씨는 “아무리 열정이 있어도 나이를 먹으면 보수적, 폐쇄적으로 변하기 쉽잖아요. 그러나 박 대표님은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주시죠. 그런 모습이 후배들에게 강한 자극을 주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작년 여름 대구에서 벌어진 활동보조인서비스(이하 활보서비스) 쟁취 투쟁 때, 전경들이 현장을 기습해 비장애우 활동가들을 연행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박 씨는 “우리 문제로 싸우는데 왜 비장애우들을 끌고 가냐.”고 항의하며, 전동휠체어를 버리고, 그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2시간이나 누워서 시위를 했다고. 이는 ‘박명애 씨’ 하면 후배들이 떠올리는 명장면(?) 중의 하나다.


“활보 투쟁, 더 바짝 땡겨서 해야지예”

박명애 씨에게 활보서비스 투쟁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중요한 운동이다. 장애차별에 반대하는 운동에 직접적으로 뛰어들게 한 계기였기 때문이다.

“활보서비스 시작하기 전 얘긴데예, 같이 활동하는 친구가 주말이면 굶는 거라. 주말엔 복지관이나 교회 봉사자들도 안 오니까. 장애가 심하고 손도 못 쓰기 때문에 보조 해줄 사람이 없으면 꼼짝도 못하는데. 묵고 싶을 때 못 묵고, 화장실도 맘대로 몬 가고. 이래 살아서 되겠나, 뭔가 해봐야겠다 싶었지예.”

그래서 시청, 동사무소 등을 찾아가 지원을 요구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예산 없어서 못 한다.”는 뻔한 대답이었단다. 그러다 활보서비스 투쟁 소식을 듣고 ‘이거다’ 싶어서 뛰어들었다고.

박 씨는 작년 여름 대구에서 43일간 했던 활보 투쟁을 이끌었고, 올해 초 인권위에서 23일간 단식 농성을 했다.
“작년에 활보 투쟁하면서 자신감 많이 얻었지예. 농성장을 지나치는 시민들의 눈총도 견딜만하대예.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거냐고, 최소한 밥은 묵고 화장실은 가게 해 달라고 하는 건데, 뭐 부끄러운 게 있겠습니꺼.”

여러 우여곡절 끝에 시작한 활보서비스는 아직도 난항을 겪고 있다.
박 씨는 “활보서비스 최대 받아봤자 한 달에 160시간인 경우가 많은데, 이는 하루에 5~6시간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분량”이라고 설명했다.
중증 장애가 있는 사람은 그 시간 안에 세 끼 밥을 다 먹고, 샤워를 하고, 화장실 가고, 시장도 보고, 은행도 가고, 친구도 만나야 한다.

박명애 씨는 “우리가 얘기 안하면 복지부는 절대 모릅니데이. 내가 47년 동안 방 안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형제들도 잘 모른다 아입니꺼. 어떻게 보면 당연한기라예. 장애가 없는 사람은 잘 몰라예. 그러니까 당사자들이 자꾸 알리고 설명해서 바꿔야 합니더.”라고 강조했다.

“작년 활보 투쟁으로 얻은 성과도 있지예. 전에는 시청 같은 곳에 가면 공무원들이 비장애우 활동가들에게만 설명했다 아입니꺼. 지금은 장애 당사자들과 협상하고 설명해야 일이 진행된다는 거 정도는 알지예.”
활보서비스를 시작은 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박명애 씨는 말한다.

그이에게 활보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지금부터 시작이다.

“학교에 못 간 거, 내 잘못도 우리 가족 책임도 아니라예”

박명애 씨는 3녀 1남 중 맏이로 태어났고 2살 때 열병을 앓아 소아마비가 생겼다고 한다.
박 씨는 초등학교 입학 통지서가 온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렇지만 학교에 갈 수는 없었다.

“제 밑에 2, 3살 터울로 동생들이 죽 안 있습니꺼. 학교에 가려면 엄마가 저를 업고, 어린 동생들을 죄다 데리고 가야했으니까 포기했어예.”

박명애 씨는 동생들 어깨너머로 글을 깨우쳤고, 동네 친구들이 빌려주는 책을 읽으면서 자랐다.
그이가 세상에 나온 것은 마흔 일곱, 2000년에 ‘질라라비’라는 야학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박 씨는 6년간 ‘악착 같이’ 학교를 다녔다. 학교를 계속 다니고 싶어서, 언제 졸업하냐고 물으면, “검정고시 다 통과해야 졸업합니더.”라고 했단다.

비 오는 데 왜 학교 가냐고, 늦게까지 뭐 하러 그렇게 공부해야 하냐고, 돈 안 되는 거 배우지 말고 기술이나 배우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박 씨는 2시간이나 걸리는 학교에 이를 악물고 다녔다.

박명애 씨에게 ‘야학’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야학을 다니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봤고, 자기가 한 경험을 바탕으로 운동해야겠다고 생각했단다.

“예전에는 학교 몬 간 거 내 탓이고, 내 가족 일인데 어떻게 넘에게 얘기하겠노, 라고 생각했지예. 사람은 이 세상에 필요해서 왔다카던데, 내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도 받지도 몬했지예. 방 안에서 살 때는 ‘환상’만 먹고 살았어요. 책에서 본 그대로 세상이 돌아가는 줄 알았던 거라예.

세상에 나와 보니 그게 아니대예. 학교에 못 간 거는 내 잘못도 우리 가족 책임도 아니었던 거라예. 사회가 첨부터 아예 기회를 안 준거지. TV에 있는 ‘아름다운 세상’은 현실엔 없더라꼬요.”

그이는 야학을 통해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세상에 맞설 자신감을 키웠고, 관점을 세웠나갔다.
껍질을 깨고 나와야만 살아서 하늘을 날 수 있는 새들처럼, 박명애 씨는 그렇게 세상으로 나왔다.

“엄마, 에디슨도 오십 넘어서 발명왕 됐다고 안하나, 지금도 늦은 거 아이다”

“마, 오늘 인터뷰 한다카니까 딸아가 ‘인기 좋네, 엄마. 근데 내 얘기는 하지마라.’ 카대예. 제가 어디서든 우리 딸아 자랑 많이 하거든예.”

박명애 씨는 1남1녀를 둔 어머니다. 딸에 대해 묻자, 박 씨의 입가에 금방 함박웃음이 핀다.
자식 얘기를 하는 어미 마음은 등불을 밝힌 듯 환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기자 때문에, 박 씨는 당찬 딸의 입단속을 또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박명애 씨의 딸 김서희(고2) 양은 박 씨에게 든든한 친구이자 버팀목이다.
“딸아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야학에 저랑 같이 다녔어예. 그 때는 수동휠체어 탔으니까, 휠체어를 밀어줘야 제가 학교에 가니까 밀어주기 싫어도 가야 했지예. 그래서 지금도 딸아가 내보다 야학 교사들과 더 친한 기라. 그러다가 딸아가 중2가 돼서야 전동휠체어를 탔지예.

참 많이 미안하지예. 아이들이 어릴 때는 편의시설도 형편없었기 때문에, 심부름을 많이 시켰는데, 딸아는 6살 때부터 은행 심부름을 했지예. 심부름 보내놓고 맘 졸이며 기다린 시간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더. 그 때 전동휠체어가 있었다면, 아이들 어렸을 때 같이 많이 구경 다녔을 낀데…. 지금은 마, 다 커 뻐려서 친구들이랑 놀라카지예.”

그리고 박명애 씨가 야학을 시작하면서 ‘지금 이 나이에 시작해도 되겠나.’ 하는 생각에 흔들릴 때, 그이를 잡아준 사람도 서희 양이었다.

“엄마, 에디슨도 오십 넘어서 발명왕 됐다고 안하나. 지금도 늦은 거 아이다.”라며 박 씨를 지지했단다.
박 씨는 활보 투쟁 때문에 한참 힘들었을 때 서희 양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이는 활보 투쟁을 딸에게 이렇게 설명했단다.
“장애가 있는 사람도 최소한 인간다움은 지킬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거, 그게 엄마가 하는 일이고 앞으로도 하고 싶은 일인기라. 니가 데이트 할 때마다 활동보조 하라고 불러내야 한다면, 그게 어데 사람 사는 거가. 아이다. 그렇지 않은 세상을 만드는 중이다.”라고.

“살기 좋은 세상 되려면, 더 이상은 어머니 희생이 없어야 안되겠습니꺼”

박명애 씨 마음에 있는 또 한 명의 여성은 바로 어머니다.
어머니 얘기에 박 씨는 “제가 빚을 많이 졌지예.” 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제가 친척 중에서 가장 먼저 태어난 첫아기여서 기대와 사랑을 많이 받았지예. 2살 때 열병을 앓아 장애가 생겼는데, 하필 외가에 갔을 때 발병을 한거라. 그 후로 어머니가 시집살이 많이 했지예. 원망도 많이 듣고예. 아버지 성격 불 같지, 내 같은 딸 뒀지, 원체 내성적이시고 순종적인 분인데, 맘 고생 많이 하셔서 그런지 치매가 빨리 왔어예.”

올해 일흔네 살인 박 씨의 어머니는 지금 치매를 앓고 계시다고 한다.
박 씨는 “예전엔 저보고 ‘꼬박 밥 해 묵으라.’고 당부도 하셨는데, 얼마 전부터는 전화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시네예.”라며 많이 걱정했다.

어머니는 늦게 공부를 시작하는 딸에게 미안하다고, 정말 다행이라고, 격려하셨단다.
“어머니도 일을 하고 싶어하셨지예. 하지만 어데 그 시절에 쉬웠겠습니꺼. 제가 이렇게 활동하고 다니는 것을 제일 기뻐하실 분인데…. 어머니가 안 잡순 음식 먹을 때, 어데 좋은 곳 갔을 때, 엄마 생각 제일 많이 나지예. 빚이 많아예. 내 같은 딸 때문에….”

그래서 박명애 씨는 현재 장애아동 교육권 확보를 위해 온 몸을 던져 투쟁하는 엄마들을 보는 시각이 남다르다. 장애가 있는 당사자로써 어머니와 자신이 살아낸 삶이 그 안에 투영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 때는 왜 그렇게 철이 없었는지…, 집에 혼자 있는 게 지긋지긋해서 어머니가 어디 나가는 거 정말 싫었어라. 어머니는 당신의 삶을 포기하고 저에게 양보하셨지예. 어머니 인격도, 내 인격도 모두 없는 시절을 살았다 아입니꺼.”

그 시절을 더듬으면서 박 씨는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이의 눈에 맺히는 눈물이 기자의 마음도 적셨다.
잠시 후, 그이는 말을 이었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사회가 방치하기 때문에, 장애아동이 있는 가족들은 참 힘든 과정을 많이 겪습니더. 그 안에서 엄마들이 희생을 하지예. 살기 좋은 세상 되려면, 더 이상 어머니의 희생은 없어야 안되겠습니꺼.”

박명애 씨는 “교육권 확보 투쟁을 하는 젊은 엄마들이 대단하고, 부러버예.”라고 말했다.
장애를 개인 문제로 떠안고 희생해도 장애가 있는 자식들의 삶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일찍 인식했다는 것이 부럽고, 그것을 바탕으로 현장에 뛰어들어 실천하기 때문에 대단하다는 뜻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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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박 대표와 활동가들 ⓒ 최희정
   
“중증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세상을 맞추면, 비장애우들도 살기 좋아집니데이”

박명애 씨는 서 있는 자리에서, 투쟁하는 그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야 다른 이들에게도 용기를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오늘 내가 나가서 활동하면 그 현장에 충실해야 합니데이. 더운 날 와 나와서 이래야 하나 싶으면, 본인을 다시 진지하게 돌이켜봐야 합니더. 아무리 더워도 방에서 나올 수 없는 장애우들이 아직 우리 사회에는 많습니더. 현장에서 이렇게 하면 빠개진다는 거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살아갈 희망을 품을 거 아입니꺼. 그걸 잊으면 안되지예.”

그이는 왜 사람들이 현장에 나오지 않느냐고, 원망하진 말자고 설득한다.
“우리나라 독립도 그 문제 해결이 절실한 운동가들 주축으로 시작했고, 거기에 국민들이 뜻을 모아 이뤄낸 것 아입니꺼. 독립해서 어데 그 사람들만 행복해졌습니꺼. 아이라예.

장애 해방을 독립에 빗대면 웃기다고 할런가 모르겠지만서도, 장애 차별을 없애는 거는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그 정도로 의미가 큽니더. 차별을 없애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한 사람들부터 모여서 빡시게 하면, 거기서 용기를 받은 다른 사람들도 함께 하게 될낍니더. 중증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세상을 맞추면 비장애우들도 살기 좋아집니데이.”

건강이 허락한다면 일흔까지 운동하고 싶다는 박명애 씨.

“용기를 내서 무조건 나오소. 나와서 느끼는 순간, 힘이 생깁니데이. 세상에 나와 부딪히는 순간부터 시작하면 됩니더.”


작성자최희정 기자  prota102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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