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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 차별 문제 해결에 함께 해 주세요”

일본 ‘연금제도의 국적조항을 완전 철폐하는 전국 연락회의’ 교토지부 김순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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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진호 기자  
 
장애인 연금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언제, 장애인 중 누가, 어느 정도 액수의 연금을 받게 될지 장애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에도 제도 도입이 가시화되고 있는 장애연금 제도는 이웃나라 일본이 모델이다.

일본은 장애인들이 자존심을 지키며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장애연금으로 지급해 오고 있다. 하지만 일본 내 모든 장애인들이 장애인 연금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추산에 따르면 약 5천 명의 장애인들이 연금 혜택에서 제외되어 있는데 그 대다수가 재일 한국인 장애인들이다. 어느모로보나 민족차별이라고 보이는 이 문제는 뿌리가 깊다.

30년 가까이 한일 양국에서 문제 제기를 했지만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장애인 복지의 핵심이 장애연금인 일본에서 연금을 받지 못한 채 살아야 하는 재일 한국인 장애인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일본에서 ‘연금제도의 국적조항을 완전 철폐하는 전국 연락회의’ 교토지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순희 씨를 만나 살아온 얘기를 들어봤다.

일본도 중증장애인 취업 안 돼

우리나라 사람들이 싫어하는 나라, 하지만 닮고 싶어 하는 나라 1위가 모두 일본이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한 신문에 보도됐다. 이 여론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에게 있어 일본은 애증이 교차하는 나라다.

어쨌든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나라와 일본이 닮은 점이 많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일 것이다. 장애인 복지만 해도 우리나라가 일본을 뒤따라가는 형국이다. 일본을 뒤따라가서 활동보조인 제도도 도입했기 때문에. 잔가지는 몇 개 남아 있을지 몰라도 큰가지는 이제 연금 제도만 도입하면, 마침내 우리나라도 일본과 거의 비슷한 장애인 복지의 틀을 갖추게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복지뿐만 아니라 장애인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도 비슷하기는 마찬가지다.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경제력이 앞서 있기 때문에 일본 장애인들이 마치 천국에서 살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내막을 알고 보면 전혀 아니다. 특히 중증장애인으로 태어나서 견뎌내야 하는 삶은 일본이나 한국이나 고단하기는 매한가지다. 다른 예를 들 필요도 없이 일본에서 중증 1급 장애인으로 살고 있는 김순희 씨의 사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점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연금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의 중증장애인과 거의 다를 게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김순희 씨는, 흔히 말하는 장애와 여성 이중 차별에다 민족 차별이 더해져 삼중의 차별을 받으며 살고 있다. 그이는 어떻게, 언급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 오는, 심한 차별 상황들을 헤쳐 나왔을까, 그이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보자.

   
 
  ▲ ⓒ전진호 기자  
 

올해 46세인 그이가 태어난 곳은 일본 교토시 후시미구라는 곳이다. 그이는 재일조선인이라고 불렸던, 양쪽 모두 한국인 부모의 삼 남매 중 장녀로 세상에 나왔다.

그이 집은 몸이 약한 아버지가 야쿠르트 배달 일을 해서 겨우 먹고 살 정도로 가난했기 때문에, 뇌병변 1급 장애인으로 태어난 그이는 집에서 자라지 못하고 인근 병원에 맡겨졌다.

그이는 자기 소개서에서, ‘치료와 수술을 받기 위해 세 살 때 기독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성 요셉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입원할 때 어머니께서는 울면서 병원 직원들에게 우리 딸이 엄마, 엄마, 라고 부르며 울면 그것은 한국말로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제발 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저를 맡기셨다고 합니다.

저는 부모님 뜻에 의해 일본식 이름은 쓰지 않고 김순희란 본명으로 생활하면서 병원 안에 있는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아홉 살 때 병원에서 퇴원해서 크레타케 특수학교 초등부에 편입했습니다. 크레타케 특수학교에서도 본명을 썼는데, 제가 4학년 때인 1973년에 일본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납치를 당한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그때 처음으로 민족 차별을 당했습니다. 저의 성과 김대중 씨의 성이 같았기 때문에 아이들 모두가 저를 향해서 ‘김대중, 김대중’ 이라고 큰 소리를 치면서 칠판에 이름을 쓰고 놀렸습니다. 하지만, 한국 사람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 자라왔던 저에게는 처음으로 경험한 큰 민족 차별 사건이었습니다.’ 라고 유년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크레타케 특수학교에서 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친 후, 그이의 나이 19세 때, 그이가 간 곳은 장애인에게 직업교육을 가르치는 한 수용시설이었다. 특수학교를 졸업한 장애인이 갈 곳이 없어 수용시설에 보내지는 것은 일본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이는 당시 나고야에 있는 한 훈련소 시설에서 2년여를 지내면서 직업 교육으로 경리 일을 배웠다. 지금은 컴퓨터로 회계를 처리하지만 그이가 시설에 들어갈 당시에는 컴퓨터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회계와 경리 일이 장애인에게 유망한 직업으로 꼽혔다는 것이 그이 말이다.

그래서 직업훈련 시설에서 취업이 잘된다는 경리일을 열심히 배우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중증장애인이었던 그이에게 취업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그이는 장애인에게 직업을 알선해 주는, 우리나라의 고용촉진공단 같은 역할을 하는 기관 사무소를 휠체어 바퀴가 닳도록 찾아 다녔지만, 취업 대신 김순희 씨 장애가 너무 심해 취업이 어렵겠다는 대답만을 들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당시에는 일본에 장애인 고용촉진법도 없었고, 장애인은 비생산적인 사람이라는 일본 사회의 낙인이 찍혀 있었기 때문에 직업을 갖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는 것이 이어진 그이 설명이다.

취업이 좌절되면서 우리나라의 중증장애인처럼 꼼짝없이 집안에 갇혀 지내야 했던 그이는 그 후 7년여를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집에서 어머니를 도우며 지냈다. 어머니가 김치장사를 했는데, 김치장사를 직접 도와주기 보다는 장사 때문에 어머니가 못하는 일, 즉 가사 일들을 도우며 지냈다는 게 그이 말이다.

“장애 때문에 청소를 하는 건 어려웠고, 장보기도 어려웠지만, 설거지 정도는 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어머니가 요리할 때 옆에서 가령 오이나 양파 정도는 다듬는 걸 도와줄 수 있었죠.”

그러다가 그이 나이 28살 때, 그이 가슴 한켠에 꺼지지 않은 채 남아 있던 취업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그이를 집 근처 컴퓨터 학원으로 이끌었다. 그이는 정보처리사 자격증 취득과 취업을 목표로 2년여를 꼬박 컴퓨터 학원에 다녔다. 하지만 역시 취업의 문은 열리지 않았고, 목적이었던 정보처리사 자격증도 과정이 어려워서 취득하지 못했다는 게 그이 말이다.

다시 집에만 있게 된 그이, 그 후로 지금까지 그이는 단 한 번도 돈을 버는 직업을 가진 적이 없다. 이쯤에서 뻔한 질문이지만, 그이에게 본인이 직업을 못 갖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어봤다.

그이는 “중증장애 때문이죠. 제가 취업을 완전히 포기한 건 컴퓨터 학원을 수료하고 나서인데 취업을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봤는데 안됐어요. 그때부터 설상가상으로 장애가 더 심해지고 살도 찌면서 직업을 갖는 걸 완전히 포기하게 됐죠.”라고 말하며 쓸쓸한 표정을 짓는다.

이런 김순희 씨 사례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임이 분명하다. 말인즉슨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똑같이 중증장애인들은 어떻게든 취업하려고 발버둥치지만 취업의 문은 열리지 않고 굳게 닫혀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일본이 우리나라와 한 가지 다른 점은 취업 대신 연금제도가 있다는 것이다. 거칠게 말하면 일본은 ‘취업 대신 연금’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런데 김순희 씨는 취업도 안 되고, 앞에서 지적했지만 대안인 연금도 받지 못한다. 이건 차별 이전에 생존권의 문제다. 자연스럽게 그럼 어떻게 살라고, 라는 질문이 가능한 것이다.

수당은 받지만 연금 없이는 생활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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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진호 기자  
 

이제 문제의 장애인 연금에 얽힌 이야기를 할 차례다. 그이가 연금 문제에 눈을 뜬 건 크레타케 특수학교에 다닐 때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친구들에게는 연금 제도 안내에 대한 일본 정부의 통보가 왔어요. 그런데 저에게는 통보가 오지 않아 친구에게 그게 뭐냐고 물어 봤죠. 그때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얼마 안 가 저는 친구들이 받을 수 있는 장애인 연금을 저만 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여기서 잠시 이해를 돕기 위해 본지 9월호에 소개된 일본의 장애연금 제도에 대한 기사를 간략하게 인용해 본다. 그이와 똑같이 뇌병변 1급 장애를 가지고 있는 오오모리 세키코 씨는 인터뷰에서 만 20세 때부터 장애연금을 받고 있으며, 액수는 월 8만2천508엔이라고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 돈으로 75만 원 정도 되나, 아무튼 이 돈을 김순희 씨는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세키코 씨는 이어 지자체에서 지급하는 특별장애인 수당 등을 합쳐 정부의 보조금을 매월 11만 엔 가량 받는데, 혼자 살기엔 많이 부족한 액수지만, 근본적으로 장애연금이 지급되지 않으면 생활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렇게 김순희 씨와 거의 비슷한 조건에 놓여 있는 세키코 씨가 전적으로 장애연금에 의지해서 살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고 있는데, 그러면 연금을 받지 못하는 그이는 어떻게 살아야 할 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그이도 연금을 제외한, 일본 지자체에서 지급하는 장애인 수당은 지급받고 있다. 하지만 연금액수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생활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30대까지는 어머니가 김치장사를 했기 때문에 사는데 별 불편이 없었어요. 당연히 돈에 대해 감각이 없었고, 나중에 돈 없이 어떻게 살까 고민해본 적도 없었죠. 그런데 지금은 어머니가 일흔이 넘으셨고, 아버지가 3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집에서 늙은 엄마와 둘이 살게 되면서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살아야 될까를 고민하게 되면서 연금에 대해 절실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젊었을 때는 집에만 있으면서 밖에 나갈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돈 쓸 일도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거든요. 연금 문제와 관련해서 지역에서 소송이 벌어지거나 국회에 가서 진정해야 한다든가 해서 돌아다닐 일이 많거든요. 그런데 돈이 없으니까 갑갑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죠.”

그이 전언에 따르면 일본은, 일본 국적을 갖고 있지 않은 장애인라도 연금 문제만 제외하면 나머지 혜택에서 차별이 없다고 한다. 외국인 장애인일지라도 특수학교에 들어가면 학비도 보조해 주고, 또 중증장애인에게 활동보조인 서비스도 제공해 준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심각한 차별임이 분명한 연금 문제에 있어서만은 1982년을 기점으로 선을 그어놓고 차별을 해소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 그이 말이다.

“개인적인 얘기를 해보면 1982년에 제 나이가 21세 였어요. 기준이 되는 20세를 딱 9개월 나이를 더 먹어서 연금을 받지 못하게 됐죠. 그래서 조금만 나중에 태어났으면 연금을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을 안 해본건 아니지만 이 문제는 내 문제를 떠나서 차별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아쉬움은 없어요. 그 기준 때문에 나 말고도 연금을 못 받는 재일 한국인 장애인들이 많으니까 이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차별을 없애기 위해 열심히 싸울 거예요.”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그이를 비롯해서 5천 명에 이르는 재일한국인 장애인들은 왜 장애연금을 받지 못하게 된 걸까, 그리고 30년 가까이 된 문제인데 정녕 해결책은 없는 걸까, 여기 그이가 정리해온 재일 한국인 장애인 연금 차별과 관련된 리포트가 있다. 이 문제의 근원과 연금 문제 해결을 위해 싸워온 재일 한국인 장애인들의 역사를 정리해서 인용해 본다.

1982년 기준으로 20세 넘으면 연금 못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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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진호 기자  
 
일본에는 공적연금제도가 있다. 1959년 일본에서 국민연금법이 시행되었을 때 국적조항이라는 것이 존재했기 때문에 재일외국인은 연금 제도 수혜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다가 1982년 연금 지급에서 국적 조항이 철폐되어서 외국인이라도 그 해를 기준으로 60세가 넘은 노인에 대해서는 갹출없이 노령복지연금을, 그리고 20세가 넘은 중증장애인에게는 외국인 장애인라도 일본 장애인과 똑같이 무갹출로 장애복지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일본 정부는 무연금자가 생기지 않도록 구제 조치를 계속 확대했는데, 예를 들어 오가사와라와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었을 때나 납치피해자 등이 귀국했을 때 본인 및 그 배우자에 대해 특별입법으로 구제조치를 만들었다. 그런데 국적조항 철폐에서 25년이 지난 현재에도 재일한국인의 무연금자에 대해서는 이러한 구제 조치가 전혀 강구되지 않고 있다.

2000년 이런 차별을 없애기 위해 교토에 살고 있는 재일한국인 7명이 법에 호소했다. 첫째, 다른 나라에는 이런 연금차별이 존재하지 않고, 둘째, 원고들은 일본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계속 일본에서 일하고 세금도 납부했으며, 셋째, 제도의 미비 때문에 같은 재일외국인이라도 나이에 따라 연금을 받는 사람과 못 받는 사람이 부당하게 구별하게 되는 거, 마지막으로 이런 것들이 국제인권조약에 의한 차별이라는 것을 법원에 호소했다. 그런데 소송에서 패했다. 교토 지방법원의 결정에 이어 작년 10월 27일 오사카 고등법원도 이 소송을 기각하는 판결을 내렸다. 왜 그랬을까?

외국인이기 때문에, 이유는 그것밖에 없다. 그러나 현재 1~2년간 일본에 살고 있는 중도장애 유학생은 외국인이라도 장애 기초연금을 받고 있다.

우리 재일교포들은 외국인이라고 하더라도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라고 평생 일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대부분은 전쟁시 일본 식민지 정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일본에 건너온 사람들이다. 우리 부모들이나 조부모들은 일본어를 충분히 읽고 쓸 수 없어서 병이 들어도 보험이 없기 때문에 의료비를 낼 수조차 없었다.

치료를 충분히 받지 못했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 사람과 장애아를 출산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또한 우리 재일 장애인 중에는 시설에 갇혀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연금을 받을 수 있으면, 지역사회로 자립생활을 할 수 있지만 연금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시설에서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전쟁 중에는 같은 일본신민으로서 일본에 봉사하기를 강요당했고, 일본이 전쟁에 지면서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본 국적을 빼앗기고 외국인 취급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어 일본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법적으로도 다른 일반적인 외국인과는 구별해서 특별영주자가 되어 있고, 계속 세금도 내왔다. 그러나 왜 세금으로 조성된 사회보장제도에서는 차별을 당해야 하는지, 도대체 이것이 정당한 것인가.

일본인이나 외국인이나 장애를 가짐으로써 발생하는 생활의 어려움에는 아무 차이가 없다. 우리는 일본에서 태어나 자라고 공부하고 일본에서 죽어갈 것이다. 우리는 나쁜 짓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 장애인과 동등한 자격을 원하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정부 차원에서는 1991년 이후 매년 개최되어 온 한 일 아시아 태평양국장급협의에서 매회 한국 정부에게 조기 해결을 언급받고 있으나, 일본 정부는 검토하겠다고 회답하고 있을 뿐이다. 그 검토가 언제 어떤 방법으로 진행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를 공개하도록 요구했으나 해당하는 문서가 하나도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즉 그동안 아무 검토가 없었다는 말이다.

2005년 11월 유엔총회 인권위원회 때 특별보고자였던 드드 디엔 씨가 처음으로 재일 한국인 무연금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에 권고를 하였다. 이는 인종차별적 조치이며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인종차별철폐조약비준국으로서 보고서에 현재 사회보장에서 제외된 외국인 집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거짓 보고를 했다. 2006년 여름 외무성에 이를 추궁한 결과, 정부는 재일 한국인 무연금자는 구제하지 못한다는 견해를 들을 수 있었다.

2006년 가을, 재일한국인 무연금 소송 원고가 한국을 방문하여 국회의원, 국무총리실, 국가인권위원회, 한일 의원연맹 사무국에 대해 이 문제를 제기하고, 로비를 했다. 그 결과 2006년 12월에 동경에서 개최된 한일의원연맹합동총회의 공동성명 안에 재일 한국인 무연금 문제의 조기해결을 요구하는 성명이 처음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이는 이어진 보충 설명에서 “이런 정부간 해결 노력 외에도 얼마 전 그 동안 연금제도 개선 불가를 고수해 왔던 집권 자민당이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자민당 대신 민주당이 집권하면 연금 문제가 해결 될 가능성이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다.”고 전망했다.

연금 외에 자부담 10% 조항도 문제

   
 
  ▲ ⓒ전진호 기자  
 
그이에게 조심스럽게 장애연금을 받기 위해 일본으로의 귀화를 생각해 보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이는 정색하면서 “귀화해도 연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귀화를 생각해 본 적이 없고, 연금 문제를 떠나서 나는 한국인이라는 민족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절대 귀화 안 한다. 음식도 김치 등 한국 음식만 먹는다.”고 강조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렇게 당당한 그이도 문제는 그이를 돌봐주고 있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의 삶일 것이다. 그이는 타국인 일본에서 남은 생을 어떻게 살게 될까.

“지금 계획으로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면 시에서 운영하는 공영주택에 들어가서 살 생각을 하고 있어요. 공영주택은 임대료가 싸고 휠체어를 타고 생활할 수 있으니까 거기 들어가서 살면 되는데, 문제는 내가 평생 활동보조인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데, 자부담 조항 때문에 어려움이 있다는 거죠.”

그이가 연금 문제 외에도 분개하는 또 하나 문제는 일본에서 새로 시행된 자부담 10% 조항이다. 그전에는 장애인이 활동보조인을 이용할 때 드는 모든 비용을 일본 정부나 지자체에서 부담했지만, 작년 10월부터 일본에서 자립지원법을 시행하면서 비용의 10%를 장애인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활동보조인은 식사 및 배설 등 중증장애인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동작에 대한 도움을 받는 건데 나 같이 수입이 없는 장애인 당사자가 어떻게 돈을 낼 수 있겠습니까? 돈을 내야 한다면 내 삶은 더욱 힘들어 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이는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무거운 분위기로 인터뷰가 끝날 무렵, 갑자기 그이가 뜻밖의 발언을 했다.
“지금 결혼할 지 안 할지는 모르겠지만 사귀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나보다 더 장애가 심한 일본 장애인인데, 지금 마음 같아서는 같이 살고 싶은 사람이에요. 어쩌면 저 결혼할 지도 모르겠어요.” 그이는 쑥스러워 하며 소녀처럼 빨갛게 뺨을 붉힌다. 그이의 말 한 마디에 무거운 분위기가 일순간에 날아갔다.

재일 한국인 장애인으로서 연금차별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그이, 더욱이 중증장애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삶이 얼마나 고달플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이는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다. 그이의 바람대로 가까운 시일 내에 연금 문제가 해결되고, 결혼을 하면 그이의 삶은 더 이상 비루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이의 바람이 꼭 이루어지길 성원해 본다.
작성자이태곤 기자  a352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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