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를 믿으세요, 그럼 변할 수 있습니다” > 세상, 한 걸음


“변화를 믿으세요, 그럼 변할 수 있습니다”

척수장애인 이미애 씨

본문

참는 게 미덕이라고들 말한다. 좀 불편해도, 좀 거추장스러워도 나만 좀 참으면 되는 거라고 생각하면 싫은 소리하고 얼굴 붉히기 싫다.

대개 잘못된 것을 강하게 지적하는 사람보다는 참는 사람의 인격이 대접받는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내 입 좀 놀린다고 세상이 뭐 달라지나? 세상은 원래 불편했고, 늘 부당했다.

괜히 주변사람들에게 까탈스런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도 않다. 가만히 있어도 세상은 늘 적대적인데 왜 사서 또 적을 만드나. 대충 적응해 살면 그만이지.

그런데, 갑자기 궁금한 적 없었는가? 폭탄 맞은 것처럼 망가져 있던 화장실 문짝이 하룻밤 새 고쳐져 있을 때, 고소공포증 생길만큼 가파르던 은행 앞 경사로가 어느새 완만해져 있을 때, 어느 날 부터인가 집 앞 대형 할인매장 장애인용 주차장에 진짜 장애인 차만 주차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너무나 당연한데도 절대 바뀌지 않을 것 같았던 일들이 갑자기 해결된 순간, 당신은 혹시 그것들이 저절로 된 거라고 순진하게 믿었는가?

  ▲ ⓒ 전진호 기자   변화를 믿는 자에게만 변화가 찾아온다

“학교 안에 장애인 화장실이 너무 좁아서 휠체어 돌리기도 불편해. 내가 지금 학교에 계속 이야기하고 있어요. 장애인 화장실 옆 칸을 터서 조금만 넓게 만들어 주면 좋을텐데. 잘 안 바꿔줘요.”

이미애 씨는 지금 신흥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재학 중이다. 신흥대학의 첫 번째 장애인 학생인 그녀에게 학교는 온통 장애물투성이다.

주차문제에서 수업의 어려움까지. 도서관 이용도 지금은 1층밖에 할 수 없고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수업하는 건물 1층까지 어렵게 내려와야 한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의 영어회화 수업은 포기해야만 했고, 학교에서 마련해준 커다란 장애인용 책상은 종종 사라진단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어떻게 학교생활이 가능한지 오히려 그게 궁금해진다. 그리고 살짝 회의가 든다. 어차피 안 바뀔 텐데 가서 이야기해 뭐하나. 괜히 맘고생만 하는 거 아닌가. 비단 장애인 관련 문제뿐만이 아니다.

사회라는 곳이 원래 그렇지 않은가. 유지하는 건 쉽지만 바꾸는 데는 몇 배의 노력이 든다. 하지만 그녀의 의견은 단호하다.

“근데, 사회가 바뀌려면 바뀌길 바라는 마음만으론 안 돼요. 내가 장애인 주차장 자리에 비장애인 차를 못 대게 하는데 꼬박 1년이 걸렸어요. 이게 나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시간이 걸려도 꼭 해야 하는 거고요. 이제 우리 아파트 단지에서는 다 알아. 절대 그 자리에 비장애인들이 차 안대요. 그게 그냥 된 게 아니거든. 내가 새벽 네 시에 경비랑 싸우고 소리소리 지르고…. 세상에 사소한 일이라는 게 없어요. 어느 것 하나 그냥 이루어지는 게 없으니까.”

1년이 걸렸지만 어쨌든 성공이다. 이제 더 이상 장애인 주차장을 넘보는 비장애인은 없을 테니까.

이뿐만이 아니다. 이미애 씨가 살고 있는 일산 주엽역 대형 할인매장의 장애인 화장실도 그녀의 주장으로 고쳐졌다. 근처 농협의 지나치게 가파른 경사로 역시 농협 담당자를 직접 불러 말했단다. 휠체어를 줄 테니 이 경사로를 올라와 보라고. 얼마 후 다시 찾은 농협 경사로는 완만해져 있었다.

일산공원에서 자원봉사자박람회를 할 때 장애체험을 프로그램에 넣은 것도 그녀고 일산 내 대형 할인매장의 주차장에 비장애인이 주차하지 못하게, 그리고 전담 주차요원이 관리하게 만든 것도 그녀였다.

“내가 장애인이 되고 나서부터 시작한 내 나름대로의 운동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언젠가 대형 할인매장에 갔는데 장애인 화장실을 찾으니까, 지하 1층에 있더라고요. 어렵게 어렵게 찾아갔더니, 세상에 변기 뚜껑이 없어서 일을 볼 수가 없게 되어 있었어요. 장애인은 화장실에 갈 권리도 없나?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내 집 근처부터 하나씩 바꿔 가는 거죠. 그게 비단 나만을 위한 일은 아니니까요. 나는 언젠가는 될 거라고 생각해요. 조금씩 되고 있잖아요. 완벽하지는 않지만 조금씩이요. 사람들은 제게 너무 민감하게 구는 거 아니냐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해요. 하지만 제 입 하나 아프고 세상이 변한다면, 차라리 그냥 내 입 아픈 쪽을 택하겠어요.”

변화에 대한 믿음. 그녀에게는 그것이 있었다. 지금도 세상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고 자신이 그 변화에 일조하고 있다고 믿는 이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얼굴에는 활기가 넘쳤다.

교통사고로 인해 척수장애인이 된지 5년이 되었다는 그녀. 아무리 생각해도 긍정적일만 한 상황은 아니다. 도대체 그녀 믿음의 근원은 무엇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희망도 버리세요!”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가슴이 뛰어서 진정이 안 돼요. 사고가 났던 그 자리를 지나가기만 해도 심장이 벌렁거리고 손에 땀이 나요. 자꾸 그때 장면이 머릿속에서 되풀이 되는 것 같아요.”

2002년 1월 21일, 새벽 5시 36분. 그녀는 사고 날짜와 시간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운명의 시침이 멈추어 버린 순간. 한 사람의 삶이 통째로 다시 쓰이기 시작한 순간. 어떻게 그런 순간을 잊을 수 있겠는가.

“그때 제가 요리사를 하다가 그만두고 버스 운전기사로 일하던 때였어요. 그날 첫차를 배차받았는데 첫차가 5시 50분 차였으니까 45분까지 도착하면 되는 거였죠. 그때 제 차가 고장이 나서 아는 사람 차를 빌려서 출근을 했어요. 1월이었으니까 조금 추웠고 노면은 살짝 언 그런 상태였죠. 하지만 위험하지는 않았어요. 새벽이라 차도 거의 없었고, 과속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버스운전이 직업이었다면 운전 미숙이 원인이라고 할 수도 없다. 한산한 새벽길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사고라는 게 왜 그럴 때 일어나잖아요? 피곤해서 졸음운전을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근데 제 정신은 정말 말짱했어요. 새벽 3시 반에 일어나서 출근 준비하고 커피 한 잔 마시고 할 건 다하고 나왔으니까요. 그렇게 말짱한 정신으로 운전을 한 거예요. 제가 마지막으로 시계를 본 게 5시 35분이었어요. 거기가 회사에서 5분 거리 지점이었어요.
도착하는 데까지 시간도 충분했죠. 그런데 갑자기 운전대 축이 저 혼자 한쪽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손으로 핸들을 꽉 잡고 있는데 도저히 내 힘으로 어떻게 못하게 그냥 도는 거예요. 어? 이게 왜 돌지? 왜 돌지? 하고 두 번쯤 머릿속으로 생각하는데 바로 눈앞에 전봇대가 보이데요. 아, 이제 죽는구나, 생각하고 정신을 잃었어요.”

정말 어이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사고다.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을 때 눈앞에 한 아저씨가 서 있었다. 그녀는 살려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저씨는 차 밑에 깔린 이미애 씨를 직접 꺼내주는 대신 119를 불러주었다. 억지로 꺼내주려다가 더 위험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부서진 차 틈에 낀 왼쪽 팔은 떨어져 나갈 것처럼 고통스러웠지만 이상하게도 목 아래로 다른 부분은 감각이 없었다. 잠시 후 119 차가 오고 그녀의 몸은 신경이 손상되지 않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옮겨졌다.

“목이 부러졌다고 하대요. 근데 그때까진 말이죠.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왜 다리 부러지면 기브스 하고 있으면 붙잖아요. 목도 그런 줄 알았어요. 그냥 뼈만 붙으면 별 문제 없을 줄 알았어요. 근데 목이 부러지면서 경추가 손상됐죠. 목 아래로 모두 마비가 돼 버린 거예요. 눈 깜박이고 말하는 거 정도가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어요. 그 때 제 담당이었던 의사가 와서 그러대요. 이제 아줌마는 못 걸어요. 절대로 못 걸어요. 그래서 제가 말했죠. 희망은 버리지 않게 해 주세요. 그러니까 그 의사가 이렇게 말했어요. 희망도 버리세요.”

고통스럽지만 달콤한,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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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전진호 기자  
 
의사의 말을 듣고 그녀는 꼬박 이틀 동안 대성통곡했다 한다.
병원이 난리가 날 정도로 쉬지 않고 울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 마흔 하나. 이제 인생의 반을 살았는데, 너무 억울했다. 사고가 났던 그 때 죽었어야했다. 그러면 모든 게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살아 있었다. 그렇다면 살아야했다. 살아있을 거라면 정말 살아있는 사람처럼 살아야한다고 그녀는 만 48시간을 울면서 생각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스스로가 증인이 되어서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의사가 던진 악의적인 절망은 그녀에게 쓰린 상처가 되었겠지만 그녀는 그것을 쓰린 상처로만 남겨놓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통해 깊은 희망의 불을 지폈다.

“그럼 내가 살려면 뭘 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를 누워서 계속 생각했어요. 어쨌든 신경을 살려야 되는 거잖아요. 누워서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자. 해서 그땐 손을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는데 누워서 계속 손을 비볐어요.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가족들을 만나면서도 움직일 수 있는 신체 부위는 쉬지 않고 계속 움직였어요.”

그때 그녀는 생각했다. 3개월 안에 다시 걷고, 6개월 안에 혼자 샤워를 하고 1년 안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살겠다고.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재활을 했다. 하루 종일 재활훈련을 하고 나면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였다. 말로 다 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쉬지 않았다. 5시 반에 일어나서 잠이 드는 12시까지 한시도 멈추지 않고 재활에 매달렸다. 그것만이 살길이었다.

그리고 의사의 단언과는 달리 그녀는 서고 걷고 혼자 씻을 수 있게 되었다. 결국 그녀는 사고 10개월이 지난 후 비록 보장구를 착용한 채였지만 다시 운전을 할 수 있을 정도까지 호전되었다. 병원에서는 1만 명에 한 명 나올까 말까한 기적이라고들 했다고.

“10개월 만에 운전을 하고 도로를 달리는데, 아 그때 그 기분을 잊을 수가 없어요. 나는 비록 척수장애인지만, 비장애인들하고 똑같은 도로에서 운전을 하는 거잖아요. 차 밖에서 보면 누가 아나요, 내가 장애인인지? 그때 기분은 정말 내가 날개를 단 천사가 된 기분이었어요. 새털같이 가벼운 그런 기분이요. 저는 장애인들 만나면 말해요. 운전 배우라고요. 장애인라고 못할 거 없어요. 정말 다른 삶이 또 기다리고 있거든요.”

처음 사고를 당했을 당시보다 많이 나아졌다고 해도 그녀는 장애인다. 타인의 시선을 견뎌야 하는 일 역시 그녀에게 과제로 남겨졌다. 그녀는 도망가는 대신 맞서는 쪽을 택했다. 그녀는 어린 딸에게 휠체어를 밀게 해서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어차피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도망칠 수는 없다. 그렇게 겪어내야 할 일이라면 자진해서 감당하고 싶었다.

“지하철을 타면요. 일부러 맨 앞 칸이나 뒤 칸 끝 통로 한가운데에 휠체어를 가져다 놨어요. 그러면 제 눈 앞으로 쭉 앉아있는 성한 사람들이 보이죠. 속으로 생각했어요. 나도 한때는 너희들처럼 그렇게 성한 몸으로 그렇게 앉아있었지. 나도 몰랐어.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는 거야. 예기치 않은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숱한 사람들의 시선을 버텨냈어요. 제 나름대로의 사회적응 훈련이었던 셈이죠.”

그렇게 재활훈련을 받는 동안에도 그녀는 계속 웃었다. 병원 사람들이 미친 게 아니냐고, 저런 상황에서 웃음이 나올 리가 없다고 쑥덕거렸다. 그래도 그녀는 웃었다.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도 웃으라고, 희망적으로 생각하고 밝은 마음을 가지면 좋아질 수 있다고 희망을 불어 넣었다. 그리고 스스로 희망이 되었다.

“장애가 생겼지만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어요. 다만 예전만 못할 뿐이거든요. 된다, 안 된다는 결국 마음에서 결정 나는 거니까요. 장애인이 돼서 잃은 게 참 많지만, 얻은 것도 있어요. 장애인라고 해서 할 수 없는 게 아니다. 그런 걸 이해하게 된거죠. 기적이 별건가요. 내가 할 수 있다고 믿어서 그게 이루어지면 기적이죠. 그렇다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본인인 셈이죠.”

꿈을 향해 한 발짝씩

몸이 조금씩 회복되고 나자, 이제 이 몸으로 뭘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가 고민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시 지혜를 짜내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 동안 가장 열심히 한 일이 재활이었고 제일 잘 알고 있는 것이 장애인의 삶이었다.

“세브란스 병원에 있을 때 알게 된 동갑내기 친구가 있었어요. 이 친구가 빌라에 살고 있었는데 말이죠, 집에서 한 발자국도 못나간 채 세월을 보냈대요. 그러다가 재활원에 들어가게 됐고요. 한번은 우리 친구들 몇 명이 같이 가서 그 친구를 보고 왔는데, 아휴, 너무 외롭고 힘들게 지내고 있는 거에요. 그 친구를 뒤로 한 채 돌아서려는데 발길이 안 떨어지데요. 그때 생각을 했어요. 우리 장애가 있는 아는 사람들 몇몇이라도 같이 좀 살 수 없을까. 그런 쉼터를 만들어 보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미래에 뭘 해보면 좋겠다던지, 이렇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소망은 누구의 가슴에나 있다. 하지만 그 미래를 위해 현재를 변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미래는 아름답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다. 머릿속에만 담아놓고 끝없이 유예시키기만 한다면 누구도 상처입히지 않을 수 있다. 그에 비해 현실은 엄중하고 불손해서 바로 지금 여기에서 늘 고통스러운 두려움을 불러온다.

“쉼터를 하려면 일단 사회복지사가 되어야 하더라고요. 어떻게 해야 되나, 또 막 연구를 하다 보니 길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물론 두렵기도 했어요. 과연 이제 와서 공부를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제일 컸죠. 사고 전에는 이박사로 통할만큼 상식도 풍부하고 말도 잘하는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정말 뭘 읽어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니 이거 과연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 정말 많이 했어요.”

하지만 그녀는 그 두려움을 안고 나아가는 쪽을 선택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재활훈련에, 따라가기 벅찬 수업까지. 하루 종일 앉아서 수업을 듣고 나면 온몸이 쑤시지 않은 데가 없었다.

과제를 제출하기 위해서도 남들보다 두 배의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밤을 꼬박 세워가며 준비를 한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녀를 포기하지 않게 하는 그 힘은 무엇일까?

“배운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어요. 배우면 배울수록 할 일이 눈에 보이고 사명감이 생기거든요. 제가 이걸 공부하는게 제 노후를 준비하는 거고 또 우리 친구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길인데 공부하면 할수록 길이 보여요. 저는 예전에는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갔어요. 왜 저걸 저렇게 열심히 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아,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공부를 하고 그걸 통해 사명감을 얻게 된 거 그것도 제가 장애인이 되면서 얻게 된 것 중 하나죠.”

앞으로 그녀의 계획은 우선 사회복지사 1급 자격을 따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그녀를 보건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꿈을 향해 한 발자국씩 나아가며 환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이 아름답다.

“제가 제일 행복할 때는요, 제가 웃는 게 너무 밝고 좋아 보인다고,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 마음까지도 따듯해지고 기분이 좋아지게 만든다고 할 때에요. 그럴 때, 아 살아 있어서 행복하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제 세상의 변화를 믿고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는 그녀가 이해된다. 스스로를 희망으로 변화시킨 이미애 씨에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분명히 해낼 수 있는 일인 것이다.

그녀는 오늘도 세상을 향해 작지만 귀한 목소리를 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참는 게 미덕이라면 참지 않는 것은 용기라고.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는 미덕보다 용기가 필요하다고.
작성자박채란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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