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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노력을 투자하면, 인생의 기회는 반드시 찾아온다"

[사람사는 이야기] 솟대문학 발행인 방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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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지민 객원기자
비 내리는 오후의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 우렁찬 선창의 구호들과 함께, 비장한 내용의 음악들이 끊임없이 크게 울린다. 그런데 앰프를 통해 멀리 퍼지는 하울링(howling : 윙윙거리는 소리)은 전혀 다른 외침들로 뒤섞이며 혼잡한 느낌만 더해간다.

한쪽에서는 ‘누구 퇴진!’, 또 한쪽에서는 ‘공영방송 사수!’가 메아리친다. ‘임을 위한 행진곡’과 각종 군가(軍歌)들이 뒤섞이는 풍경은 2008년이라는 시대적 현실과 함께 특별한 의미를 남겨놓는다. 지난 봄부터 시작됐다던 누군가의 ‘소통’이 이 자리에서 그 실전(實戰)을 벌이는 걸까? 대통(大通)이 아닌 소통(小通)은 그 존재가치를 잃은 지 오래됐음을, 불과 몇 분 남짓의 둘러봄만으로 결론 내리게 된다.

그 현장 한가운데서 KBS 본관에 들어가고자 발걸음을 옮기는데, 방송국 전체를 둘러싼 채 가로막는 건 완전무장을 한 푸른 제복의 사내들이다. 무슨 이유로 누구를 만나러 왔다는 설명조차 통하지 않는다. 15분 넘는 실랑이를 벌인 후에야 가까스로 본관 출입구를 통과했다. 만나기로 약속했던 오늘의 주인공은 출입문 안쪽 바로 십여 미터 거리에서 20분 째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방귀희.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인데, 뭐라고 소개를 해야 가장 정확한 답이라고 인정받을까. 방송인? 방송작가? 대학교수? 수필가? 시인? 솟대문학 발행인?
그런 직함들보다는 초빙강사의 모습으로 더 많이 마주쳤던 것 같기도 한데….

해답은 본인의 입을 통해 나와야 할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가깝게 알고 지낸 지 십 년이나 훌쩍 넘었는데도, 그의 ‘진짜’ 직업이 뭔지는 아직도 모른다. 장애를 언제 갖게 됐냐는 질문으로 오늘의 대화를 시작했다.

1살 때 소아마비에 걸렸단다. 아예 걸어본 경험이 없는 거냐고 또 물으니까, 돌 이전에 걷기 시작해서 돌상 위에 자기 손으로 떡을 올려놓고 난 뒤 소아마비에 걸렸단다.

“소아마비는 병균이 침투한 거예요. 체한 것처럼 증상이 와서 열이 막 나는 것이거든요. 엄마의 증언에 의하면, ‘우뚝우뚝’ 잘 걸어 다니던 아이였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 얘기를 하면서 또 환하게 웃는다. 도대체 이 사람의 웃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 ⓒ채지민 객원기자
‘방귀희’라는 인물한테는 세 가지 이미지가 늘 떠오른다. 첫째로 항상 밝고 맑게 웃는다는 것, 둘째로 하루 종일 걸려오는 휴대전화를 연신 귀에 대고 열심히 얘기한다는 것. 그리고 세 번째로 항상 ‘뭔가’를 집중적으로 몰두하는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 준다는 점이다. 대화를 하던, 책을 읽던, 메모를 하던, 뭐를 하던 간에 말이다.

빙빙 말을 돌릴 필요도 없이, 본질적인 질문을 곧장 던졌다. 어느 인터뷰나 모든 관련 글을 읽을 때마다, 방귀희는 항상 밝은 모습으로 묘사가 된다. 그런 이유가 도대체 뭔가.

“언론에서는 장애인이 좀 어둡다는 식으로 평가를 하잖아요. 아주 예전부터 저는 그게 싫었어요. 그러니까 나름 의도적인 면도 없잖아 있었다는 거죠. 장애인이 무조건 어두운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 주고자 했던 것도 있었고요. 저 스스로도 실제 그랬어요. 왜 어두워야 하나요? 그리고 왜 어둡게만 기사가 나와야 하는 거죠?”

너무 어릴 때부터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나는 동네의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가 보다.’ 하며 지냈단다. 동네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린 마음의 심정이 어땠는가 물으니까, 당시에는 장애가 너무 심해서 바깥의 애들을 우두커니 쳐다볼 여유조차 없었다고 한다.

“계속 집안에 있었죠. 외출을 하게 되면, 엄마가 포대기를 둘러서 업고 다녔어요. 그냥 손으로 업으면 제 허리의 힘이 너무 약해서, 뒤로 그냥 넘어가버리는 몸이었거든요. 초등학교를 다닐 때도, 저는 포대기에 업힌 상태로 등하교를 했으니까요.”

초등학교 당시에는 어떤 아이였는지를 물었다.
굉장히 얌전하면서도 눈에 띄게 침울한 아이였으며, 매사에 아주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교우 관계는 어땠냐고 질문을 던졌더니, 뜻밖에도 정말 좋았다며 얼굴에 흥이 돋기 시작했다. 친구 관계는 너무 좋아서, 지금까지 만남을 이어가는 초등학교와 중고교 동문 친구 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청소년기 당시는 제가 영악하지 못했던 탓인지, 미래에 대해 무슨 희망을 가져야겠다는 식의 준비를 못했어요. 그냥 엄마가 원하던 대로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죠. 엄마는 한의사가 되라고 늘 말씀하셨거든요.”

그의 여러 저서나 인터넷 어디를 뒤적거려 봐도, 방귀희는 항상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다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 ‘실제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나?’ 나름 도전적인 질문을 던졌는데도, 돌아오는 건 여전히 방글방글 웃는 얼굴이다.

“왜냐하면… 일 년 내내 열심히 업어서 학교에 데려다 주시는 엄마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어요. 개인적으로 열심히 하겠다는 욕심도 물론 있었지만, 학교에 매일 오고가시는 엄마한테 공부 못하는 아이라는 실망을 안겨드리고 싶진 않았거든요.”

휠체어를 타면서 중학교에 진학했는데, 계단이 많은 학교의 1층 교실을 배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2층과 3층까지 매번 업고 오르내리면서 수업을 들어야 하는 생활이 청소년기 내내 이어졌다고 한다.

21세기인 요즘도 장애인의 1층 교실 배정이라는 배려를 받기 힘든데, 너무 앞선 희망사항이 아니었는가 - 라는 질문을 하려다가 입을 꾹 닫았다.

방귀희 씨의 인생역정을 담은 약력 중에서, 항상 등장하는 또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수석 졸업 / 수석 입학 / 수석 졸업 / 수석 입학….’

“제가 76학번인데, 그때가 제일 심했던 것 같아요. ‘대학입시전쟁’이라는 말이 그때 생겼거든요. 우수한 시험성적으로 1차는 합격했는데, 2차 면접에서 탈락하는 입시생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날 때였죠.”

그는 1957년생이다. 민족 간의 비극 당시를 언급해도 될 나이이기도 하다. 휴전으로 포연이 멈춰진 뒤, 방역상태가 극히 열악하던 시절에 유행했던 소아마비를 직접 겪게 됐으니까 말이다. 비슷한 연배의 소아마비 학생들 중에서 나름 성적이 우수했던 이들이 많았는데, 장애를 이유 삼아서 대학 입학을 취소당하는 사태가 연이어 발생했던 시기가 바로 그때라 한다.

   
▲ ⓒ채지민 객원기자
언론에 한창 등장하던 대학입학탈락사건의 주인공 세대 중 하나가 방귀희 씨였던 셈이다.
‘나의 장래희망은 무엇일까?’라는 구체적인 밑그림을 떠올린 게 언제였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막연히 가르치는 직업이 맞을 거라고 생각했단다. 개인적으로 공부하는 걸 좋아했기에, 직접 하는 공부와 가르치는 공부 모두에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꼭 어떤 과목의 교수가 아니더라도, 제가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굉장히 컸어요. 불교철학이었던 전공이 아니더라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욕망은 계속 가지고 있었거든요.”

혹시 인생의 멘토(Mentor : 현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상담 상대, 인생의 지도자)가 된 스승 같은 분이 있었는지 물었다. 자신의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며 의욕적으로 활동하게 된 데는, 무언가의 계기가 된 인물이 있었을 거라는 짐작이 확신처럼 떠올랐기 때문이다.

“제가 장애인 잡지나 장애인 방송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에요. 무슨 의미냐 하면, 자기한테 경쟁자가 되는 사람은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경우이어야 한다는 점이에요. 예를 들어서 제가 최고의 여성 연예인 ‘누구’처럼 되고 싶다고 굳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죠. 저와 비슷한 입장에 있으면서도, 저보다 훨씬 더 잘 된 사람을 멘토라는 모델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에요.”

대학 입시를 앞두던 고교 시절, 방귀희 씨는 어느 판사(判事)의 기사를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었단다. 서울대 법대를 나와 법조계에서 활동하던 그 분도 역시 소아마비였는데, 장애인도 좋은 대학을 나와 지도적 역할로 살아간다는 게 당시의 그 여고생한테는 깊은 인상을 남겼던 모양이다. 그 분 이외에도 사회에서 활동하는 여러 장애인들의 기사를 접할 때마다, 그들의 인생 모습이 하나씩 가슴에 담겨졌다고 한다.

“그래서 저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저한테는 더욱 확실한 멘토가 된 거예요. 꼭 누구라고 지정하기보다는, 그때그때 새로운 얼굴들이 귀감의 대상으로 생겨나는 것이죠.

지난 호 <함께걸음>을 읽을 때도 그랬어요. 인권운동가 송정문 씨의 삶을 읽으면서 ‘아, 이 분한테는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강인함이 이렇게 있구나.’ ‘만약에 내가 이 분의 입장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그리고 이렇게 해냈을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됐거든요. 그렇듯이 언제나 저와 비슷한 사람들 중에서 멘토가 나타나곤 해요.”

마지막 부분에 언급하려 했는데, 대화의 진행상 미리 꺼내는 게 나을 것 같아 다음 질문으로 이었다. ‘방귀희’라는 인물은 이미 많은 이들한테 멘토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혹시 알고 있는가? 방귀희 씨는 그런 느낌을 종종 받는다고 했다. 본인이 바라보던 멘토가 따로 존재했듯이,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 방귀희를 멘토로 삼아 오늘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한다. 그들에게 전해 줄만한 자신만의 희망 메시지가 있는지를 물었다.

“제가 살아온 과정으로 먼저 말씀드린다면, 저는 저 자신의 인간적인 상품가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인정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었죠. 집안에서 인정을 받아야, 사회에 나가서도 인정을 받게 되는 법이에요. 제가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를 꾸준히 다닐 수 있었던 게 그 실증적인 예가 되겠죠. 엄마는 저를 업고 학교에 보내면서 ‘그래도 초등학교는 마쳐야지.’라고 항상 말씀하셨고, 초등학교 때는 ‘그래도 중학교까지는 마치게 해줘야지.’라며 다음 단계까지만 말씀하셨어요. ‘내가 너를 끝까지 책임지고 공부하게 가르쳐 주겠다.’ 뭐, 이런 내용의 말씀은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으셨거든요.”

그래서 어린 시절의 학생 방귀희는 상급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스스로 공부 잘하는 아이가 되어야만 했단다. ‘얘는 공부를 가르칠 만하다.’ - 이런 인상과 믿음을 주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만드는 데 노력했다는 것이다.

‘어휴, 얘는 공부도 못하는데, 학교에 보내서 뭘 해!’ 이런 말을 듣지 않는 게 당연하도록 스스로를 이끌어갔다는 대목에선, 인간 방귀희가 단순한 운(運)에 따라 성취를 이룬 인물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만들어 준다.

   
▲ ⓒ채지민 객원기자
“그건 지금의 사회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아, 그 사람은 참 깔끔하게 원고를 잘 써.’ ‘방송 프로를 같이 하고 있지만, 일 진행에서 하나도 불편한 게 없어.’ 피디(PD : 방송 프로듀서)한테 그런 얘기를 들어야 돼요. 그래야만 다른 피디들과 대화할 때도, 저하고 일하는 걸 거북하게 생각하지 않는 거죠. 그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끊임없이 개발해 나가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노력이 처음엔 남을 위한 몸부림이었단다. 남한테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서, 그 다음으로 자신이 인정받기 위해서 그랬던 건데, 생각해 보니까 결과적으로는 그 모든 과정이 자기 자신에게는 굉장히 큰 힘으로 다가오게 됐다 한다. 자신에게 힘이 되니까, 그 의욕을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전해 주는 상승작용이 연이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꾸자꾸 투자를 하니까 결과가 생겨난 것이거든요. 그래서 만약에 저를 보며 힘을 얻는 분들이 정말로 계시다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자기 자신에게 투자하라. 노력을 투자하든, 시간을 투자하든, 어떤 고통을 투자하든 간에, 끊임없이 투자를 하게 되면 내가 변하고 사회가 변하게 되는 거다. 실제로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진지하게 노력하다 보면, 어떤 선물이 주어지는지 아세요? 좋은 기회가 오더라고요. 그 말이 맞아요. 기회는 분명히 와요.”

대화에서 열기가 느껴질 만큼 그의 눈빛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언젠가는 꼭 하고 싶었던 마음의 말을 꺼내놓은 듯한 눈빛이었다. 화제를 잠시 바꿀 겸 “경력이 굉장히 화려하신데…,”라고 말을 꺼내자마자, “그게 다 소용이 없다니까요.”라는 답변이 웃음과 함께 곧장 되돌아왔다. 폭넓고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는데, 본인은 자신의 전문분야를 무엇이라고 규정하는지를 듣고 싶었다.

“누군가 저한테 ‘당신의 직업은 뭔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방송작가라고 대답합니다. 왜냐하면 직업이라 하는 건 일을 해서 수입을 얻는 분야를 말하니까요. 그런데 또 누군가가 ‘당신이 하는 일은 뭔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솟대문학을 만들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대답해요. 우리나라의 장애인문학을 대표할 수 있는 계간지를 17년 동안 한 차례도 빠뜨리지 않고 열심히 만들어 왔다는 거, 그 자부심이 지금의 저를 이 자리에 있게 만들었거든요.”

또 다른 누군가가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이렇게 묻는다면, 앞으로 강의를 많이 하는 인생을 살고 싶다고 대답할 거란다. 어렸을 때의 꿈이 막연하게나마 교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대중의 의식을 바꾸는 일에 몰두하고 싶다고 한다. 무엇을 바꿀 것인가? 바로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고정관념을 바로잡는 일에 매진할 거란다.

“꼭 학교에서 강의하는 인생을 의미하는 건 아니에요. 장애에 대해선 비장애의 생각을, 비장애한테는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놓고 싶다는 것이죠. 대중들한테 다가가서 제 삶의 모습을 보여 주고, ‘내가 이렇게 살아왔는데, 앞으로 내 후배들한테 이런 일이 없도록 하면 좋겠다.’는 얘기를 진솔하게 전하고 싶은 거예요.”

우리 모두는 서로를 오해하고 있다 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벽이니 뭐니 하는 건, 서로에 대한 오해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장애인차별문제만 해도, 누구든 ‘저 사람을 차별해야지.’ 하며 행동하는 사람은 없단다. 다만 자신도 모르는 상태에서 관념에 익숙해진 습성이라는 게 사람의 언행을 돌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왜 차별을 했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대답이 똑같다는 게 일반화 되어 있어요. ‘어, 그게 차별이었어요?’ ‘뭐라고요? 내가 언제 차별을 했어요?’ 그래서 저는 그 모든 오해와 왜곡된 관념들을 좀 더 솔직하고 감동적으로 풀어내는 걸 제 인생의 의무라고 판단했어요. 방송을 통해서 늘 하고 있는 것처럼, 앞으로는 기회가 닿는 대로 대중 강연을 많이 하고 싶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 ⓒ채지민 객원기자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일반적인 대화가 아닌, <함께걸음>이기에 던질 수 있는 질문 내용이 또 하나가 있다. ‘당신의 장애는 당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 까놓고 얘기하자는 주문에, 방귀희 씨는 정말로 ‘까놓고’ 대답을 했다.

“솔직히 말한다면… 장애는 안 갖는 게 제일 좋아요. 그건 당연하잖아요. ‘왜 장애를 갖게 됐느냐?’ 그런 질문의 대답을 한마디로 말하면 재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저는 늘 솔직하게 그런 진심으로 표현합니다. 그게 본질적인 심정이잖아요.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졌다면, 그걸 스스로 수용해야 할 일이죠. 그걸 수용하지 못한다면 대안이라는 게 뭐가 있나요?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장애를 현실로 받아들여야 해요. 그것이 바로 새로운 삶을 창조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자 출발점이 되는 겁니다.”

한 번이라도 장애를 심각하게 거부한 적이 있었냐고 물었더니, 그렇지 않은 장애인이 어디 있겠냐며 살짝 눈을 흘긴다. 사춘기 때 정말 심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집안에다가 하소연을 했더니, 엄마가 같이 죽자며 단호하게 말씀하셨단다. 그런 상황 속에서 마음을 고쳐먹고 또 고쳐먹는 과정이 몇 차례나 반복됐다는 대목에선, 잠시 동안의 침묵이 뒤따라야 했다.

취재를 하며 자칫 어색해지기 쉬운 이런 분위기일 때, 정말로 고마운 건 예고도 없이 울리는 휴대전화의 방문(?)이다.

인터뷰를 하던 방귀희 씨는 순식간에 방송작가로, 솟대문학 발행인으로, 또한 인간 스스로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그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며 모든 통화를 마쳤을 때, ‘기회는 지금이다!’ 하며 엉뚱한 질문 한 가지를 던졌다. 결혼 생각은 없었냐고.

“내가 요즘 가장 후회하는 게 바로 그거라니까!”
KBS 본관 2층 로비에서 외치듯이 울려 퍼진 그 목소리와 함께, 한참 동안 ‘깔깔’ ‘호호’ 웃음꽃이 피어났다.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에게는 일상의 동료가 아니었던가. 서로가 손을 흔들며 한두 마디씩 주고받는 시간이 얼마간 더 이어졌다.

“저의 인생에서… 가장 잘못했다 후회되는 부분은, 제가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거예요. 학교 다닐 때는 진지한 만남이 가능해질 만한 기회가 의외로 많았거든요. 그런데 그 당시는 ‘나는 결혼하면 안 되는 사람인가 보다.’ 이런 생각에 지배되고 있었어요. 아마도 그게 바로 가정 내부에서의 차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뒤늦게 떠올리게 됐죠.”

엄마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너는 결혼하지 말고 살아라.’ 아주 어렸을 때부터 ‘너는 나랑 같이 살자.’ 이렇게 말씀하셨지, ‘너도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해라.’는 언급은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공부 잘하는 딸을 응원하는 데는 적극적이셨지만, 결혼에 대해선 의외로 싫어하신 것 같았다는 여운이 길게 남겨지는 모양이다.

“몇 해 전 엄마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비로소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너도 시집을 갈 걸 그랬다.’ 그 한마디를 나중에 되새기면서, ‘역시 엄마도 후회를 하셨구나.’ 하는 엄마의 마음을 깨닫게 됐죠. 엄마가 없다는 건 제가 이 세상에 ‘달랑 혼자’ 남겨진다는 뜻이니까요. 그 이후로는 여성 장애인들만 만나면 꼭 결혼을 하라고 권해요. ‘조물주가 만들어놓은 원리를 깨면 안 돼!’ 이렇게 강조를 하는 거예요.”

방송국에 있다 보니 화려한 아름다움은 넘쳐나게 마주치지만, 깊이가 없는 ‘질리는’ 아름다움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아쉽다고 한다. 내면의 따뜻함이 없는, 채워지지 않은 마음이기 때문이라는 진단도 덧붙인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인간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저 사람과 같이 만나서 얘기하는 게 참 좋다.’ ‘함께 있어서 편안한 사람이다.’ 그런 평가를 듣는 게 정말 아름다운 거란다.

글을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한 번 더 ‘까놓고’ 적어야겠다. 생각할수록 듬직한 누이 같은, 많은 이들의 멘토 같은 언니로 존재하는 게 ‘방귀희’라는 사람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너무 순수하기에 ‘혹시라도 지금 개울가에 가까이 있나?’ 하며 막내조카를 관찰하듯 바라봐야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도대체 어느 것이 본래의 모습일까?

십 년 넘게 그를 관찰해 온 바로는 별다르게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함께걸음> 지면 안에 이렇게 적어놓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바로 옆의 조그만 사진 한 장처럼 그는 또 ‘깔깔’ ‘호호’ 해맑게 웃을 것이다.

방귀희는 그런 사람이다. 그 넉넉한 가슴 안에 더 많은 활동의 설계도가 풍성하게 그려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꿈은 이루어진다!’- 진짜로 맞는 말이다.
작성자채지민 객원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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