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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기적을 만들어낸다

[사람사는 이야기] 뇌병변 피아니스트 김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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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취재를 나가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 이번에 만나는 인물이 누구인가를 미리 파악하는 준비 작업이 그것이다. 지금이야 인터넷이라는 손쉬운 수단이 온 세상에 널려 있지만, 십여 년 전만 해도 큰 서점을 전전하거나 잔뜩 오려 놓은 신문 스크랩 더미를 뒤적거리기가 일상이었다.
이번 호의 주인공을 만나러 가는 동안, 그런 생각들이 오래된 사진첩을 펼쳐드는 듯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왜 그랬을까.

뇌병변 장애를 가진 이가 피아니스트라고 했다. 다른 장애라면 고개를 끄덕거렸을 텐데, 뇌병변이라는 단어에 잠시 갸우뚱했었다. 손가락 사용이 가장 어려운 장애 중 하나가 뇌병변이 아닌가. 그런데 비장애 입장에서도 어렵다는 피아노 연주를, 그것도 직업적인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니….

인터넷을 통해 바라본 그의 모습은 의심 반 확신 반이었다. 뇌병변 장애가 맞다는 건 그의 몸동작과 언어 표현으로 확인이 됐지만, 그의 연주를 담은 동영상은 말 그대로 ‘의심’부터 떠오르는 게 당연한 내용뿐이었다. 방송계에 만연하고 있는 ‘립싱크’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오를 만큼, 완전한 선율이 그의 손길에서 연주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을 가누는 것조차 힘들 게 확실한 장애의 피아니스트를 직접 만난다는 거…, 그건 제3자의 입장으로 혼자만의 상상을 쌓기에는 충분한 조건이었다. 얼마나 우수에 찬 얼굴을 하고 있을까. 피아노 앞에 앉아 혼자만의 시간을 어떻게 견딜 것이며, 세상과 소통하려는 그의 노력은 얼마나 힘들게 진행되고 있을까….

‘제부도’라는 표지를 단 버스들이 오가는 걸 보니, 그를 만나기 위해 조금 멀리 왔다는 느낌부터 떠올랐다. 휴대전화로 나눴던 문자메시지 내용에 따라, 경기도 안산 인근의 어느 아파트 단지 앞에 내렸다. 그리고 집이 어딘지, 아니면 현재 위치가 어디쯤인지 묻는 전화를 다시 하려는데, 며칠 동안의 선입견을 완전히 깨 버리는 모습이 갑자기 눈앞에 등장했다. 그가 바로 앞에 서서 환하게 웃고 있는 게 아닌가.

김경민 - 본인 스스로 ‘뇌병변(뇌성마비) 피아니스트’라 새겨진 명함을 사용하는 사람. 얼마 전 대한민국 국회 안에서 콘서트를 열어, 인터넷 공간을 뜨겁게 달궜던 바로 그 주인공. 수많은 입상 경력과 함께 개인 연주회까지 열고 있는, 말 그대로 ‘아마추어’가 아닌 ‘진짜’ 프로 피아니스트를 만나게 된 것이다. 뇌병변이란 단어는 잠시 동안 까맣게 지워져 있었다. 너무도 당당하게 걸으면서 등장한 그의 모습 때문이다.

   
▲ ⓒ채지민 객원기자
그는 일단 헬스클럽으로 같이 가자고 했다. 난데없이 무슨 헬스클럽? 그 말의 의미는 뭔지, 더욱이 그렇게 제안을 한 사람이 바로 김경민 씨였기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을 잡기 어려웠다. 인근 상가 지하의 헬스클럽에 들어서니, 이 클럽의 주인인지 이용자인지 모를 만큼 여유로운 그의 언어와 행동이 눈에 확 들어왔다.

그동안 수많은 취재를 해왔지만, 이번만큼 시작 단계부터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경우는 드물었다. 아니, 중증의 뇌병변 장애라고 하지 않았던가. 인터넷으로 미리 확인했던 그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저만큼 당당하게 걸으며, 또한 역기까지 들고 내리는 힘든 운동을 바로 앞에서 척척 해낸다는 말인가.

물론 그의 발음과 몸의 움직임 자체는 뇌병변 장애를 가진 이가 확실하게 맞았다. 다만 예상을 뛰어넘게 여유 가득한 그의 언행이 첫 인상부터 파격처럼 느껴졌고, 그런 의미에서는 취재용 호기심(?)이 무한대로 펼쳐졌다는 게 기존의 취재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었다.

헬스클럽에서 갖가지 운동기구와 함께 잠시의 운동시간을 보낸 뒤, 우리는 인근 아파트 단지 놀이터로 향했다. 그를 만난 날은 베이징장애인올림픽 성화가 타오른 지 이삼 일 정도 지났던 9월 9일이었고, 한여름 같은 무더운 열기가 모두를 짓누르던 오후 시간이었다.

단번에 긴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그의 몸 상태 특성과 맞게 단답형으로 짧은 내용을 주고받는 게 더 많은 화제를 이끌어내기 편했다. 자신이 해야 할 답변의 핵심 단어를 재차 반복하는 그의 화법은 인상적이었다. 그렇기에 김경민 씨가 했던 언어 표현은 그와 나눴던 녹음 취재의 내용 그대로 이 지면에 올리고자 한다. 그게 보다 더 현실감과 현장감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저의 장애는 태어날 때는 몰랐대요. 백일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고 해요. 목을 잘 가누지 못하고 하다 보니까, 어머니가 그때야 알게 됐다고 말씀하셨어요.”

김경민 씨는 이란성 쌍둥이인데, 장애가 없는 형님은 현역 군인으로 잘 다녀오셨다고 한다. 그런 형님이 이번 10월에 결혼을 한단다. 피아니스트 입장에서 당연히 결혼 축하곡을 연주해야 마땅하겠지만, 직계가족의 결혼식에 친동생이 연주를 하기에는 좀 그래서 고민하고 있는 중이란다.

“제가 피아노를 처음 알게 된 시점이요? 그건 제가 14살 때 저의 집이 한식집 아니, 한식당을 했었어요. 그때 바로 옆 건물에 피아노 교습소가 있었어요. 그래서 무작정 찾아가서 가르쳐달라고 얘기를 했죠.”

악기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많이 있는데, 왜 굳이 피아노를 선택하게 됐는지를 물었다. 그냥 눈에 띄었던 건지, 아니면 현실적인 의미로 집과의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인지가 궁금해졌다.

“학원이 집과 식당하고 가깝다 보니까, 왔다 갔다 하면서 듣게 되는 피아노 소리가 너무 좋더라고요. 그리고 학원생들을 다 보내고 난 저녁때가 되면, 선생님이 혼자 피아노 연주를 하셨거든요. 그 선율을 들으면서 너무 많이 감동을 받았어요.”

피아노 건반에 첫 손가락을 올려놓은 게 14살 때라고 했다. 그렇다면 피아노가 자신의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한 것은 얼마 정도 지난 후의 일이었는가. - 질문은 그렇게 단답형으로 계속 이어졌다.

   
▲ ⓒ채지민 객원기자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저의 교장선생님께서 저를 추천해 주셨어요. 음대를 진학하라고요.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의 교장선생님이 버클리 음대 출신이셨거든요. 그래서 ‘너한테 재능이 있으니까, 음악 쪽으로 진로를 결정하는 게 좋겠다.’ 하시면서 음대에 진학하도록 많이 도와 주셨어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많이 반대하셔서 못하게 됐어요. 결론적으로는요.”

그래서 대학은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게 됐단다. 스스로 재능이 있다고 느낀 게 고3 시절이고 피아노를 전공하는 게 좌절되기도 했는데, 그럼 그 이후에는 어떤 의미로 피아노를 접하게 된 걸까.

“저도 그 이후로는 피아노를 취미로 했죠. 좋으니까… 제가 좋으니까요. 길을 가다가도 피아노가 눈에 보이면, 그냥 못 지나가고 그 자리에 앉아 건반을 눌러 보며 지냈어요.”

그렇다면 피아노를 ‘나의 직업이다!’라고 확신하게 된 전환점은 언제였는가. 자신이 UCC 동영상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사람들의 관심과 함께 연주회 일정이 잡히다 보니 희열이 느껴졌단다. 그러면서 더 많은 사람들한테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는 열망이 샘솟아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이력서와 같은 개인 약력의 첫 줄은 항상 ‘1997년 안산 올림픽 기념관에서 열린 피아노 콩쿠르’라고 새겨져 있다. 거기에서 은상을 받았단다. 은상이라면 잘했다고 축하를 받아야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전혀 다른 데 있다. 비장애 일색의 콩쿠르에서 김경민이라는 사람이 은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때는 저의 손가락에 장애가 심해서 완벽하게 치지는 못했었어요. 그런데… 저의 연주가 다 끝났는데… 갑자기 객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전부 다 일어섰어요. 그리고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싶을 만큼의 축하를 받았어요. 그때는 장애가 있는 사람이 저 혼자였으니까요. 비장애 위주의 콩쿠르였거든요.”

그렇게 얘기한 뒤 말문을 잠시 닫던 김경민 씨의 눈가에 아득한 느낌이 맴돌았다. 당시 그 현장의 우렁찬 환호를 남몰래 떠올리고 있으리라 싶은 눈빛이었다. 그런 얘기를 전해 듣는 입장에서도 소름이 끼칠 만치의 감동이 몰려드는데, 당사자의 입장에선 얼마나 생생한 현장감으로 그 자리가 새겨졌을까.

좋아하고 존경하는 피아니스트는 많지만, 그 중에서 하나만 언급하라면 쇼팽이란다. 현재 활동하는 연주가 중에서는 유키 구라모토도 정말 좋아한단다. 마침 지난주에 유키 구라모토가 안산에서 공연을 했다고 한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김경민 씨도 그 객석 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서, 시선이 다시 한 번 감동의 눈빛으로 출렁거렸다. 공연 현장의 생생한 느낌이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그동안 많은 콩쿠르 참가와 개인적인 연주회를 가졌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연주나 장소가 있는지를 물었다. 김경민 씨는 첫 번째 공연이라고 했다.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내걸고 처음 갖게 된 첫 번째 독주회. 작년 3월에 올렸던 ‘흰 건반 위 자유, 검은 건반 위 희망’이라는 타이틀의 독주회가 가장 가슴에 남는다고 한다. 질문을 살짝 돌려 보았다. 무대에 서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진짜 떨리고 긴장이 된단다. 그럼 건반에 처음 손을 얹는 순간은 어떨까.

“그 순간이요? 숨이 멎을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그 다음부터는 계속 연주 하나에 집중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저의 장애가 뇌병변, 일반적으로 뇌성마비라 불리는 장애이기 때문에, 긴장을 하게 되면 근육이 많이 굳어지잖아요. 흔히들 경직된다고 말을 하죠. 그렇기 때문에 연습했던 것보다는 연주회에서 연주하는 게 많이 틀려져요. 연습할 때는 잘 됐었는데, 연주회를 하다 보면 막상 그게 잘 안 돼요. 그게… 좀 많이 아쉽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며 물었다. 피아노를 친다는 게 손의 장애를 연습으로 이겨낸 건가. 아니면 증상 자체가 좋아진 건가. 지금은 너무나 양호해진 거란다. 손이 아예 안 펴질 정도였으니까. 그렇다면 피아노가 장애 극복의 수단으로도 정말 좋은 것인가. 김경민 씨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아주 좋은 거예요. 제 경험에 비춰 봤을 때는 정말 좋은 도구예요. 제가 중증이었잖아요. 이렇게 손가락을 펴면서 피아노를 친다는 건 꿈도 못 꿨었어요.”

그렇다면 손이 좋아짐으로써 몸 전체가 함께 좋아지게 됐다는 건가? 그렇단다. 거의 기적과도 같다 한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는 말이 두세 차례 반복될 정도로, 그의 몸은 피아노와의 만남을 통해 180도 달라진 모양이다.

그럼 피아노를 알기 이전에는 어느 정도의 장애 증상을 갖고 있었다는 걸까. 그는 걸음마를 8살 때 비로소 처음 시도하고 시작했단다. 처음에는 중심을 잡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정말 많이 심했단다. 8살 때 걷기 시작해서 14살 때 피아노를 만났다면, 피아노를 만났을 때의 그의 증상 또한 중증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은 상태였으리라는 유추가 가능해졌다. 그는 비슷한 장애 증상을 가진 다른 이들에게도 피아노를 적극 권하고 싶다 했다.

“정말로 적극 추천해요. 그리고 저한테 요청만 하신다면 가르쳐 드릴 의향도 있거든요. 인터넷 카페 같은 공간에도 일부러 제가 올렸어요.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피아노를 무료로 가르쳐 주겠다고요.”

김경민 씨가 스스로 밝힌 특기는 수화·컴퓨터 수리·피아노 연주이고, 자신의 취미는 UCC 동영상 제작·운동·음악 공연 관람이라고 했다. 수화는 이해가 되는데, ‘컴퓨터 수리’는 뜻밖의 내용이었다. 언제부터 했느냐고 물으니까, 본격적으로 컴퓨터를 만진 건 6년 정도 됐단다. 전문가 수준이냐고 다시 물으니까, 거의 그렇다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아예 직업 차원에서 A/S 출장도 몇 년 동안 진행했었단다. 작년에는 사업자 등록도 해서 개인사업자로 활동한다는 대답이 흥미로웠다. 그렇다면 수화는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도 알고 싶었다.

   
▲ ⓒ채지민 객원기자
“대학 다닐 때 저의 룸메이트가 청각장애였어요. 그래서 그 친구한테 다 배웠다고 할 수 있겠죠. 밤새도록 수화로 떠들었거든요. 지금은 사용한 지가 좀 되어서 많이 잊어버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알아듣고 대화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이 지면을 통해 만나게 될 <함께걸음> 독자들에게 수화로 인사를 전할 수 있겠냐고 물으니까, 능숙한 손놀림으로 ‘모두 반갑습니다!’라는 표현을 해낸다. 특기와 취미가 다양하고, 단순한 여가 생활이 아닌 전문가 수준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건 사실 대단한 일이다. 장애의 몸으로 그만큼의 실력을 쌓고 연마했다는 건, 그 시작점이 하나의 계기를 통해 이뤄졌다는 게 확실했다. 바로 피아노와의 만남이 그 모든 결과를 이끌어낸 게 아닌가.

“네, 결론적으로는 그럴 거예요. 손가락 운동으로 시작되어 모든 게 다 가능해진 것이니까요.”

개인적인 질문을 던졌다. 자기 소개를 할 때 항상 ‘뇌병변(뇌성마비) 피아니스트’ 또는 ‘뇌병변 피아노 연주자’라고 스스로를 밝히는데, 이것이 자기 표현의 방식으로 사용하는 거냐고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했다. 장애를 가리거나 감추지 않고 자연스럽게 드러낸다는 점이 새롭게 다가왔다.

“피아니스트들은 상당히 많잖아요. 그냥 ‘피아니스트 김경민’이라고 내놓으면 그냥 지나쳐버릴 수가 있어요. 그런데 솔직하게 ‘나는 뇌병변 장애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피아니스트이다.’ 이렇게 어필을 하면 보다 더 당당하게 저를 소개할 수가 있잖아요.”

그와 처음 만났던 시점으로 화제를 잠시 돌렸다. 헬스클럽을 다니고 젊음이 가득 느껴지는 복장을 한 그의 첫 인상은 정말 예상 밖이었기에, 운동에 관한 대화를 빼놓기가 어려웠다.

“운동은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했어요. 안 해 본 운동이 없거든요. 재활 차원이 아니라, 그냥 좋아서 취미로 매일 했어요.”
안 해 본 게 없다고 했는데, 주로 무엇을 잘 했냐고 물었다. 수영 2년, 헬스는 3년째, 사이클도 2년, 스쿼시는 1년, 그밖에 농구와 축구 같은 건 기회가 될 때마다 자주 했다고 한다. 마침 베이징올림픽 기간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그렇게 운동을 잘 하는 사람이 올림픽에 안 나가고 왜 여기 있느냐?’고 농담을 던지니까, 김경민 씨는 파안대소를 하며 ‘글쎄요. 명단이 바뀌었나?’ 하며 익살스럽게 맞대응을 한다.

연주할 때는 악보를 다 외워서 하고, 지금이라도 공연이 가능할 만큼 몸과 마음으로 익힌 곡은 20여 곡 정도 된단다. 다른 피아니스트의 공연도 자주 가는지를 물으니까, 공연 자체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꼭 찾아가곤 한단다. 공연이나 전시 문화를 무척 즐기고, 뮤지컬과 연극도 정말 좋아한다고 한다. 그 모든 것들 중에서 특히 좋아하는 분야가 무엇이냐 물으니까 그림이란다. 그 중에서도 풍경 쪽보다는 인물 그림을 가장 좋아한단다.

“그 이유는요. 얼굴 속에는 인생이 들어 있잖아요. 기쁨과 슬픔과 외로움과 그리움 같은 게 모두 다 들어 있으니까요.”
불필요한 질문 같지만, 14살 시절 당시 만약에 피아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지금은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 것 같은지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피아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건 제가 아니었겠죠. 그런 건 생각도 해보지 않았어요.”
인생의 무게가 담긴 한마디가 짧게 이어졌다. 피아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건 자신이 아니었을 거라는…. 그 무게감의 깊이를 잠시 헤아리면서, 피아노와 관련한 대화를 더 나누고 싶어졌다.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로 쇼팽을 언급했었는데, 피아노곡의 장르도 여러 가지가 있기에 그 중에서 어떤 스타일을 선호하는지 물었다.

“제가 연주하는 곡 대부분이 뉴에이지 분야라서 그 쪽을 좋아하는 것 같지만… 그건 아니거든요. 단지 제가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할 부분이 있잖아요. 저한테 장애가 있기 때문에 어려운 곡들은 소화하기가 약간 힘들어요. 그래서 뉴에이지를 택했을 뿐이지, 뉴에이지 자체를 좋아한다는 건 아니에요. 대신 듣는 건 장르와 상관없이 다 좋아해요. 저는 특히 클래식을 좋아해요. 그 중에서도 쇼팽의 음악을 가장 사랑하고 있는 거죠.”

사회생활을 하는 누구든지 마찬가지겠지만, 지금 현재 사용하는 명함이 자신의 인생과 현실적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법이다. 피아니스트라는 명함으로 활동하며 살아가는 김경민 씨가 앞으로 자신의 미래를 어떻게 설계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런데 대답은 뜻밖의 내용으로 전해졌다.

“사람들이 저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단어가 있게 되면 좋겠어요. 바로 ‘희망’이라는 단어예요. 누구든지 김경민이라는 사람을 떠올릴 때마다, ‘희망’이라는 단어를 연상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거예요.”

희망이라…. 자기 자신을 상징하는 단어나 표현으로 ‘희망’을 드러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김경민 씨는 주저함 없이 희망을 얘기했다. 그건 그의 입장에선 당연한 발언이라는 생각부터 앞섰다. 그 자신이 희망을 실천하고 실현시킨 바로 그 장본인이 아닌가. 불가능이라던 중증 장애의 사회적·상식적 한계의 틀을 깨버리고, 세상 속에서 다양한 분야로 ‘프로’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거… 그건 우리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생생한 증거이자 가시적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 피아니스트로 활동할 것인가를 물었다. 피아니스트로 영원히 기억될 것인지, 아니면 아직 젊은 가슴에 또 다른 무언가의 ‘희망’이 꿈틀거리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의 대답은 몇 초의 침묵 뒤에 천천히 이어졌다.

   
▲ ⓒ채지민 객원기자
“설령… 제가 피아노 공연을 못할지라도, 저는 항상 가까운 사람들한테 희망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피아노가 그 중 하나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하면서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는 거,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저의 모습으로 희망을 보여줄 수가 있잖아요. 꼭 피아노가 아니어도 괜찮아요. 저는 희망을 얘기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싶어요.”

뭔가 중요한 화두가 등장한 것 같았다. ‘꼭 피아노가 아니어도’라는 표현이 그냥 스쳐지나갈 만한 의미가 아님은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확인 차원으로 질문을 이었다. 미래의 자신을 ‘희망’이라는 단어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지금은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면서도 ‘피아노가 아닌’ 상황까지 언급을 했다. 그렇다면 혹시라도 다른 직업이나 다른 인생을 생각하고 설계하는 건 아닌지…. 그런 게 가시적으로 보이는 게 있다면 얘기를 해달라 했다.

“말씀드리기는 좀 어려울 수도 있지만…, 저의 최종 목표가 피아니스트는 아니에요. 저는 아동복지를 할 것이니까요. 그렇기 위해서 전공도 사회복지로 했던 거예요.”

이번 만남의 마무리를 지으려는 시점이었는데, 난데없는 ‘폭탄선언(?)’이 등장했다. 피아니스트 김경민을 취재하러 와서 지금까지 대화를 나눴는데, 이제 와서 피아니스트가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니…, 이건 무슨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문득 떠오른 게 쌍둥이 형님이 사회복지사로 활동하고 계신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되물었더니 형님과 같이 할 계획이란다. 형님도 지금 장애 관련 사회복지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최종적으로 함께 일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8살 때 걷는 연습을 시작할 정도였다면, 피아노를 만날 때까지도 몸 상태는 힘겨웠을 게 분명하다. 인간 김경민은 그 모든 과정을 희망의 신념으로 극복하며 이루어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과 비슷한 장애를 가진 이들한테 무슨 ‘희망의 언어’를 전해 줄 것인가. 솔직하게 말해 달라는 부탁을 하자마자, 그의 대답이 곧장 뒤를 이었다.

“매 순간마다 ‘포기’라는 단어를 쓸 수 있었지만, 저한테는 ‘포기’라는 단어가 가장 어려웠어요. 안 되면 진짜 끝까지 물고 늘어졌거든요.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라.’는 게 저의 생활신조예요.”

저절로 감탄사가 느껴졌다. 현역의 군대 생활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보다 더 확고한 생활신조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안 되면 되게 하라!’ - 이건 군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어깨를 부르르 떨 만큼의 체험적인 아픔이 담긴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남들이 볼 때도 그렇잖아요. 장애가 있기 때문에 못할 것이라고 보통 늘 생각하시죠. 저는 그걸 깨고 싶었어요. 충분히 할 수 있는데, 왜 못한다고만 생각하는지 저는 이해가 안 됐거든요.”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 건지, 아니면 어느 책이나 누구의 강연을 통해 얻게 된 건지의 그 유래와 출처를 묻고 싶어졌다. 돌아오는 대답은 간단했다. 원래부터 자기 생각이 그랬단다. 몇 살 때부터 그런 굳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느냐고 재차 물으니까, 중학교 때부터 그랬고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에 반드시 해내자는 일념 하나로 살아왔다 한다.

어릴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특수학교를 다니는 동안, 자신의 인생 목표는 기아문제에 집중이 됐다고 했다. 아동복지 중에서도 기아대책과 기아문제의 해결이 자신의 최종적인 인생 목표로 결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원래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고, 또 방송이나 전시회 같은 데를 가서 보면, 제가 좋아하는 인물들 특히 아이들의 사진을 집중적으로 보게 돼요. 그런 사진들의 대부분은 어려운 아이들의 모습이잖아요. 저는 그 어려운 아이들의 눈을 자주 보며 지냈어요. 그럴 때마다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게 되는 거죠. 저는 꼭 그런 아이들을 위한 삶을 살겠다고 말이에요.”

   
▲ ⓒ채지민 객원기자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사는 이야기’ 취재를 마치고 나면, 인생의 큰 교훈을 생생하게 얻는다는 실감이 든다. 자신의 삶으로 희망을 전달하고 싶다는 김경민 씨 또한 마찬가지로 인생의 커다란 스승을 만난 느낌마저 든다. 장애를 장애 자체로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새로운 삶을 위한 디딤돌로 사용할 만치의 가치관을 분명히 확립하며 지냈다는 것.

그를 만난 이후로 머릿속에는 하나의 공간을 항상 그리게 됐다. 객석을 가득 채운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어두운 무대에 비춰지는 한 줄기 조명을 통해 드러나는 피아노와 피아니스트. 그 연주자의 손길이 움직일 때마다 객석에서는 감동의 물결이 파도를 치고, 연주가 끝날 때마다 모두의 함성과 박수갈채가 실내 전체를 터지게 만들 정도로 울려 퍼진다는 것….

다음 번 연주회가 시작되기 전에 그를 직접 만날 기회가 생긴다면, 악수를 나누며 이런 말을 전해 주고 싶어진다. 연주를 하다가 한두 번 틀리는 것 따위는 전혀 걱정하지 말라고. 한두 번이 아니라 수십 번 틀리는 손놀림을 반복하게 됐다 해도, 사사로운 잡념 같은 건 절대 떠올릴 필요조차 없는 거라고.

왜냐? 그대는 이미 ‘피아니스트’의 단계를 뛰어넘은 인생의 ‘아티스트’가 됐기 때문이라고. 이 말을 절대 잊지 말아 달라며,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먼저 전해야겠다. 그에게 이런 덕담을 진심으로 전해 주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결과에 안주하지 말고, 피아니스트로 반드시 대성하기를. 그리고 아동복지를 위한 인생도 멋지게 실현시키기를. 더불어 아동복지가 성공하게 되면, 그 아이들한테 당신의 피아노 선율을 무제한의 선물로 전해 주기를. - 그날의 당신 이름은 바로 ‘인생의 아티스트’로 완성을 이루게 되리라는 사실, 그것을 이 글을 읽는 독자 모두가 마음 가득 기원한다고 말이다.
작성자채지민 객원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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