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후회 없는 삶을 만든다 > 세상, 한 걸음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후회 없는 삶을 만든다

국가사법고시 합격 시각장애인 최 영

본문

인간의 능력은 어디까지 허용되고 실제로 가능한 걸까? ‘걸어서 태평양을 건너겠다.’ 따위의 황당무계한 잡설(雜說) 차원의 얘기가 아니다.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는 전제가 있다고 해도, 도대체 그것이 어떻게 정말로 가능했을까 싶은 소식을 가끔씩 접하게 된다. 단순히 감탄사만 내지르는 게 아니라, 놀라움을 놀라움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다는 뜻이다.

굳이 예를 든다면 손 또는 발이 없는 외국의 어느 장애인이 비장애 등산가들조차 성공하지 못했던 높고 험준한 산을 정복했다는 얘기가 가끔씩 우리 곁에 들려온다. 그런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되곤 한다. 얼마나 힘겨운 고통 속에서 수많은 날들을 보냈을까. 자신의 한계 끝에서 도전과 포기의 갈등이 얼마나 심각하게 반복됐을까. 그리고 모든 고난을 딛고 이겨낸 성취 직후에, 그는 가장 먼저 무엇을 가슴속에 떠올렸을까….

먼 나라 외국의 예를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불가능을 이뤄낸 이들은 우리 곁에 더 많이 있고, 우리가 직접 찾지 않았을 뿐인 감춰진 보석들은 얼마든지 넘쳐날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 1월호에서는 그 중에서 눈에 확 띄는 보석 하나를 찾아 인터뷰의 마이크를 내밀고 돌아왔다. ‘불가능’은 단지 선입관일 뿐이라는, 그 대답을 확실한 인생의 증거로 증명해 낸 이가 있어 찾아갔던 것이다.

지난 2008년 후반기에 들어서서, 각 언론사의 보도와 기사 중에는 이런 내용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곤 했었다. ‘시각장애인 사법고시에 최종 합격’, ‘사법고시 50년 역사상 첫 시각장애인 합격’, ‘시각장애의 벽을 넘어 사법고시에 합격하다’ 등등,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접했을 만한 초유의 희소식이 만천하에 울려 퍼진 것이다.

고시 공부를 직접 했거나 관심이 있었거나, 아니면 법전 1권의 두께가 어느 정도인지를 최소한 아는 독자들이라면, 시각장애의 입장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했다는 그 무게감을 일부분이나마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굳은 의지로 실천한다면, 이 세상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생생한 증거가 탄생하고 제시된 셈이기도 하다. ‘사람사는 이야기’가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 나선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 호의 주인공 최영 씨를 만나기까지는 약간의 준비과정이 필요했다. 취재 섭외를 시작했을 때부터 그의 반응이 몹시도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언론의 조명을 너무 집중적으로 받는다는 게 부담스러운 탓에, 얼마 전부터는 일체의 취재 요청을 완곡하게 사양한다고 했다.

그런데 최영 씨의 인생길에서 일정한 자문과 조언을 구하고 전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였다고 했다. 그 가족인 <함께걸음>에서 섭외가 들어왔는데, 그의 반응은 어떻게 이어졌을까. 다행스럽게도 아니, 취재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고맙게도, 그는 <함께걸음> 앞에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 ⓒ채지민 객원기자
그를 만나기로 한 시각은 오전 10시.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림역에 내려서 고시촌이 밀집한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가 기다리고 있다는 집을 찾아 전화를 걸고 또 걸기를 몇 차례, 골목 안쪽 건물 앞에 서서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계단의 난간을 잡고 아주 천천히 내려오는 이가 눈에 띄었다. 각종 언론매체를 통해 익숙해졌던 그의 얼굴이 맞았다. 그런데 최소한의 시력은 남아 있다고 어디서 읽었던 것 같은데, 현관문을 열고 나온 그의 몸동작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의 움직임과 똑같았다.

만나게 되어 반갑다는 인사와, 합격을 축하한다는 또 한 번의 인사로 최영 씨와 첫 악수를 나눴다. 대화를 나눌 만한 자리를 찾기 힘든 오전 10시의 시간대라서, 거리를 한참 걸어간 뒤에 아늑한 분위기의 카페를 발견하고 들어가 앉았다.

취재를 위해 사진촬영이 진행돼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겠냐고 카운터에 먼저 문의부터 했다. 여러 손님들이 있는 공동의 자리에서 일방적으로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는 건 큰 결례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된 카페 측에서는 대환영으로 촬영을 허락함과 동시에 그를 반기며 환대했다.

“다시 한 번 더 축하드립니다!”
“아, 감사합니다.”


정말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대학 시절과 그 이후에 고교 동기 친구들이 줄줄이 국가고시에 합격하는 걸 축하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누가 합격을 하든 말든 간에 아무런 감흥도 없던 기간을 십여 년 보낸 끝에, 절친한 누군가가 합격한 듯한 기쁨이 저절로 샘솟아난 것이다. 몇 번이라도 축하한다는 인사를 반복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고향인 경남 양산에 부모님이 계시고, 2남 중 장남이라는 가족 얘기로 대화를 시작했다. 지금 그가 앓고 있는 망막색소변성증, 일반적으로 알피(RP)라고 부르는 그의 시각장애증상에 대한 얘기로 대화의 물꼬를 활짝 열었다. 그게 왜 생기는 건지는 유전적이든 후천적이든 간에 정확히 밝혀진 건 없다고 한다. 가족 중에 같은 증상을 가진 분은 없어서 다행이라 하기에, 언제부터 눈이 안 좋아졌고 그 증상이 진행됐는지를 물었다.

“어릴 때부터 눈이 안 좋다는 생각을 계속 했어요. 초등학교 이전부터 자꾸 넘어지고 밤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거든요. 불빛이 있어야만 보이고, 꼭 다른 분들의 손을 잡고 다녀야만 했어요. 그래도 어린 시절에는 단순히 눈이 안 좋은 정도로만 알고 있었죠.”

안경을 쓰고 지내면서도 야맹증이 심한 수준이라고만 생각했단다. 그런데 안경을 쓰고 있어도 넘어질 때는 날마다 항상 똑같은 상황에서 넘어지니까, 정말 많이 다치는 게 일상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럼 학교생활은 어땠는지, 정확한 증상을 알게 된 건 언제였는지를 연이어 질문했다.

“체육시간의 공놀이를 제일 싫어했어요. 공이 날아와도 못 보고, 어디로 굴러가는지도 안 보이니까요. 공이 갑자기 사라지고, 바로 앞에 있던 친구들도 갑자기 사라졌거든요. 저의 눈 증상은 시야가 좁아지는 병입니다. 어릴 때는 그냥 단순하게 안 좋다는 정도로만 지냈는데, 일반적인 안과를 가더라도 시력을 검사하지 망막검사를 직접 하는 경우는 드물잖아요. 저는 알레르기성 비염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한의원에 갔다가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에 저의 눈 얘기가 나왔어요.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큰 병원에 가서 망막검사를 받아보라고 하신 걸 계기로, 고3 때가 돼서야 저의 증상을 정확히 알게 됐습니다.”

그럼 고3 때까지는 책을 볼 수 있었냐고 물으니까, 대학 3학년 때까지는 책을 읽는 게 가능했단다. 보조기구 없이도 책을 읽는 건 어떻게든 가능했다가 그 이후에 갑자기 나빠졌다기에, 그럼 지금은 어디까지 보이냐고 되물었다. 마주 앉은 사람의 얼굴은 물론 몸 형태도 안 보인다고 한다. 탁자 위에 있던 메뉴판 자체가 안 보이는 건 물론, 손을 뻗어 최영 씨의 눈 바로 앞에서 흔들었는데도 그 손의 움직임마저 안 보인단다.

어느 인터뷰 기사에서 오른쪽은 아예 안 보이고 왼쪽 눈은 희미하게나마 보인다고 읽은 것 같다 하니까, 왼쪽 눈은 빛이나 아주 커다란 형상 정도까지만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것도 정확한 형상이 아니라, 그냥 흐릿하게 무언가가 있다는 정도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럼 완전 실명과 뭐가 다르냐고 하니까, 빛 정도는 느낄 수가 있기에 전맹의 개념은 아니란다.

“시각장애등급상으로는 3급 2호입니다. 시각장애등급의 구분에서 얼마간 바꿔야 할 문제이긴 한데, 2호라는 건 시야가 좁아지는 증상이거든요. 1호는 시력이 안 좋아지는 것이고요. 그런데 시야가 좁아지는 건 3급 2호가 끝이에요. 1급과 2급엔 2호가 없어요. 미국 같은 데를 보면 1급과 3급 2호를 같이 놓고 보거든요. 그걸 ‘법적실명’이라 합니다.”

   
▲ ⓒ채지민 객원기자
그렇다면 무언가가 보인다는 추억은 없는 건지, 없다고 봐야 하는지를 물어봤다. 그런 건 아니란다. 점점 악화되며 진행되는 병이기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좁은 시야 안에서는 볼 것을 봤단다. 사람 얼굴도 봤고, 친구들 얼굴도 희미하게나마 바라봤다는 것이다. 2005년 이후 급속하게 악화되어 지금은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하는 수준이 됐다는 건데, 3급 2호에서 ‘2호’라는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가 궁금해졌다.

“저의 병이지만, 저 역시도 이 증상을 확실하게 표현은 못하겠는데요. 보통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손을 좌우로 벌리며) 이만큼의 시야로 본다면, 저는 어릴 때부터 보는 각도가 계속 좁아지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는 터널 형태로 좁은 공간의 모습만 볼 수 있다가, 그 좁은 터널마저 흐릿해지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를 지금 밟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원래 넓은 데서 조금 좁아지면 얼마나 좁아졌는지를 확실하게 잘 모르잖아요. 그런데 좁은 화각에서 더 좁아지면 급격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어요. 그게 저의 증상인데… 그 증상을 확실하게 설명한다는 게 좀 애매하고 힘든 것 같네요.”

최영 씨는 애매하고 힘든 설명이라고 완곡하게 표현했는데, 사진 촬영을 직접 진행하며 지내는 입장에서는 그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되며 이해가 됐다. 최영 씨의 설명을 부연한다면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사람의 시야는 상하좌우 180도의 영역을 동시에 인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런데 두 손을 펴고 눈가 바깥쪽에 댄 다음 손바닥을 앞쪽으로 조금씩 오므리면, 눈으로 볼 수 있는 각도가 180도 아닌 150도, 120도와 같이 좁아지게 된다. 손바닥으로 가린 그 바깥 부분을 보거나 느낄 수 없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점점 더 눈으로 보는 각도가 줄어들다가 바로 앞쪽만 보는 게 가능한 단계까지 오게 되고, 그것마저도 아예 보이지 않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는 뜻이 된다. 최영 씨가 터널이라고 묘사했던 건, 우리가 경험하는 쌍안경을 연상하는 게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점점 좁아지던 시야가 쌍안경으로 보듯 동굴의 형상으로 줄어들고, 그 좁아진 영역마저 안 보이게 되는 수순으로 이어졌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몇 년 전의 기억으로 ‘기억을 기억하는’ 거죠.”

부모님이나 형제의 얼굴은 어디까지, 언제까지 기억이 나는지를 묻자 그가 대답한 한마디이다. ‘기억을 기억하는’ 거라…. 어느 감동적인 시 한 편의 마지막 줄을 읽는 듯한 여운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친구들 얼굴도 다 기억하느냐고 물으니까, 몇 년 전이나 어릴 적 모습으로 떠올리는 거란다. 그런데 점점 흐릿해진단다.

“어릴 때의 기억과 오래된 기억이라는 건 천천히 없어져 가는 거니까요.”

최영 씨의 그 한마디 대답은 듣는 입장에서도 아득한 그 무언가를 느끼게 만들었다. 오래된 기억이 천천히 사라진다는 거….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같은 표현으로 말하는 게 가능할 대목이지만, 최영 씨의 입에서 그런 표현이 나온다는 건 상실의 느낌을 보다 더 진하게 전달했다. 서로가 생각할 여지가 필요했는지, 잠시의 침묵이 3초 정도 이어졌다. 3초는 순식간이지만, 대화 도중의 3초 공백은 엄청난 빈자리를 남기는 법이다.

해결사(?)는 이때 등장했다. 카페에 자리 잡고 앉아 이렇게 긴 얘기를 나누면서도, 아직까지 무슨 차를 마실 건가를 주문하지 않았던 것이다. 메뉴판을 펼치는 소리를 들었는지 최영 씨는 어떤 게 있냐며 물었고, 메뉴판의 내용들을 하나씩 천천히 읽어 내려가며 그에게 들려주었다.

원두커피를 마시겠다고 했다가, 잠시 뒤 원두커피에는 어떤 것들이 있냐는 질문이 되돌아왔다. 하나씩 커피 이름을 언급하니까,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하며 주문을 마쳤다. 이때 최영 씨 앞에는 먹음직스러운 아이스크림이 놓여졌고, 주문을 받던 직원의 한마디가 이어졌다.

“이건 저희가 드리는 서비스인데… 잘 드시고요.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다시 한 번 합격의 축하를 받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축하를 받는 최영 씨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는 것 같아서, 대화 진행의 틀을 이 시점에서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를 중심으로 한 대화는 이쯤에서 끝내고, 오늘 만남의 주된 화제인 사법고시 얘기로 건너뛰기로 한 것이다. 그 테마를 언급하려 하자마자,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라는 말이 새롭게 술술 쏟아져 나왔다. 그래, 축하는 밤새워 반복해도 즐겁고 행복한 일이겠지. 그런 마음과 함께 본격적인 질문을 시작했다.

학번이 어떻게 되냐고 물으니까 00학번이란다. 00학번은 당연히 2000년도 입학생을 의미하지만, 당시에는 꽤 많은 화제를 낳곤 했었다. 00학번을 ‘영영’학번이라 읽어야 하는지, ‘공공’학번이라 읽어야 하는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계속됐던 것이다. 최영 씨도 당시의 분위기가 기억이 나는 모양이다. 최영 씨는 눈이 아주 많이 안 좋은 학생으로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고, 2005년에 급격히 악화된 이후 2008년에 국가사법고시에 최종 합격을 했다. 왜 법대를 선택했는지, 또한 사법고시에 도전하게 된 계기가 무언지 알고 싶었다.

“사법고시를 도전한 건 법대에 들어왔기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진행된 것 같고요. 법대를 지원하게 된 계기는 가족, 특히 할아버지와 부모님의 권유가 컸어요. 저 또한 그걸 통해서 뭔가를 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죠. 정확하게 그 분야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는 확실하게 몰랐지만, 아주 막연한 기대감으로 법대에 진학을 했습니다. 그 전공이 뭔지, 어떤 미래상이 구현되는지를 제대로 알고 선택해야 하는 게 맞고 그러면 좋을 텐데, 우리나라에서는 좀….”

하긴 그 말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다. 거의 대부분 구체적인 내용도 모르고, 학과의 이름만 보며 해당 학과에 진학을 한다. 다닌 이후에야 그 학과의 진짜 모습과 현실을 알게 된다. 졸업 후의 직장 선택도 마찬가지다. 나름 열심히 알아봤다고는 하지만, 입사 이후에야 이 회사가 자신과 정말 맞는지 여부를 되돌아보게 되지 않던가. 그건 사람 관계 역시 똑같은 일이다. 친하게 만나며 지내도, 몇 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 사람의 진짜 내면을 알게 되는 법이다. 그건 결혼 생활 역시 예외가 아니다.

대학 생활은 어땠는지 물으니까 3학년 때까지는 친구를 꼭 붙잡고 다녔고, 특히 아무것도 안 보이는 밤 시간에는 친구들의 도움을 참 많이 받았던 것 같단다. 눈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진 3학년 이후부터 시각장애 학생들을 위한 대학 차원의 도우미 시스템을 신청해서, 2006년 2월 졸업할 때까지 이용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약간 시사적인 질문을 던졌다. 시각장애인 당사자 입장에서 현재 우리나라 대학 시스템의 문제점과 시급히 보완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그 생생한 체험의 증언이 듣고 싶어졌다.

   
▲ ⓒ채지민 객원기자
“제일 문제가 되는 게 교재인 것 같아요. 대학 교재. 시각장애 입장에서 활동보조도우미나 친구들 도움을 받아 이동하는 건 어느 정도 해결이 되는 것 같은데, 대학은 공부하는 곳이잖아요. 공부하는 게 기본인 그런 곳에서 대학 교재가 마련이 안 돼서 공부를 못하는 분들이 많으시거든요. 그걸 점자로 미리 만들려 해도 텍스트 파일이 필요하고, 듣고 공부할 때도 텍스트 파일이 필요합니다. 그 파일을 민간기관 같은 곳에서 일일이 직접 타이핑해서 만들거나, 대학에서 봉사장학생을 도입해서 직접 입력을 하거나 하면 미리미리 공부를 준비하기 힘들거든요. 대학 교재의 저자들은 거의 대부분 그 학교의 교수님들이시잖아요. 그러니까 시각장애 학생들을 위해 컴퓨터를 통해 음성으로 변환해 듣고 공부할 수 있도록, 교재의 컴퓨터 파일이나 원본 파일을 주실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아쉬운 점이 참 많이 있습니다.”

물론 최영 씨 스스로도 자문자답을 했다. 교수님들이 그 원본 파일을 주시기 어렵다는 것 또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직접 연구하고 집필한 학자로서의 저작권 문제가 걸려 있고, 출판사의 재산권 문제도 걸려 있는 게 1차적인 현실이다. 그런 문제점들이 보다 더 합리적인 방향으로, 그러니까 출판사도 손해를 안 보고 시각장애인 학생들도 혜택을 볼 수 있는 그런 방향으로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모든 시각장애인들, 특히 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꿈꾸는 청소년들이 대학에서 자유롭게 공부하는 것도 훨씬 더 수월해지지 않을까 싶다는 것이다. 문득 그가 나왔던 방송 뉴스에서 했던 발언 내용이 떠올랐다. 자신의 담당교수마저 저작권을 이유로 교재 파일 사용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

“아, 그건 제가 아니라, 같은 방송에 나왔던 다른 시각장애 학생이 했던 말로 기억하는데요. 정말로 안 준다고, 안 된다고 했다 하더라고요. 너무한다 싶기도 했지만…, 사실 입장을 바꿔보면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해요. 그 교재가 그 교수님 혼자만의 저작물이 아닐 수도 있고, 계약을 해서 출판한 그 교재의 원본 파일이 외부로 유출되어버린다면 정말 크나큰 타격일 테니까요. 그걸 다른 정안인들이 이용할 수 없게 시각장애 학생들만 이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한다든가, 시각장애인들만 듣고 사용 가능한 파일 형태가 되어서 정안인들이 보는 파일 형태로의 전환이 절대 안 되도록 프로그램 방지 장치 같은 걸 개발하면 나을 것 같아요.”

미국에서는 국립교수자료센터 같은 지정된 기관에서, 시각장애 학생들이 교과서 등의 교재들을 공부용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계약을 하고 열람하며 활용하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시각장애인들만 볼 수가 있고, 자료유출이 방지되게끔 시스템이 구축되어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먼 나라 딴 나라의 얘기로만 들어야 할까? 인터넷과 최첨단 정보기술의 중심지라는 대한민국에서는 그런 걸 개발하는 게 불가능한 걸까? 아니면 혹시라도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우선순위에서 턱없이 밀려나고 있는 건 아닌지….

교재마저 제대로 볼 수 없는 여건 속에서, 최영 씨는 어떤 방식으로 학업과 고시 준비를 지속했는지가 궁금해졌다. 사법고시의 시험 과목은 여러 가지이고, 거기에는 기본 교과서와 두어 권의 참고서, 거기에 문제집 몇 권이 각 과목마다 개별적으로 준비되어야 한다. 그 많은 분량의 교재들을 그는 어떤 방식을 택해 공부했다는 걸까.

“정인욱복지재단이라는 곳이 있거든요. 거기에서 타이핑하는 분을 고용해서, 교과서와 문제집들을 일일이 타이핑해 주셨고요. 민법이나 형법 같은 각각의 법전 내용은 법제처 사이트에 올라와 있기 때문에, 그걸 이용했습니다.”

그렇게 도우미의 손길로 타이핑한 책이 몇 권 정도나 되냐고 물으니까, 몇 권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분량은 정말 엄청나다고 한다. 그 재단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 같았기에, 언제부터 그 곳과 인연을 맺게 됐는지를 물었다.

시력이 대안도 없이 나빠지던 2005년 후반기에, 잘 아는 시각장애인 선배가 소개를 시켜주셨다고 한다. 시각장애인을 위해 개발된 스크린리더라는 프로그램 중에 센스리더라는 게 있는데, 그 프로그램을 개발한 회사에서 일하시는 선배의 소개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시발점이었다는 것이다.

“스크린리더가 어떤 형식이냐 하면, 컴퓨터에 그 프로그램을 깔아놓고 그 안에 한글 파일 같은 텍스트 파일을 넣으면, 그 파일을 열어서 한 줄씩 음성으로 변환시켜 주는 시스템이에요. 공부를 하기 위해 도우미가 타이핑한 것으로 읽은 것이니까, 별도의 저작권 문제는 없었던 셈입니다.”

   
▲ ⓒ채지민 객원기자
구하면 얻고 두드리면 열린다는 건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구하고’ ‘두드려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최영 씨는 그 방법과 기회를 직접 찾아 나섰기에, 해결 방법과의 연결이 상대적으로 빠르게 이루어진 셈이다. 눈으로 반복해서 읽고 또 읽어도 이해하기 어려울 내용들이 뻔한데, 그걸 음성으로 하나씩 듣는 동안 그의 모든 정신은 얼마나 치열하게 집중되고 있었을지…, 그걸 짐작한다는 건 제3자 입장에선 무리일지도 모를 일이다.

대화 내용을 과거가 아닌 미래로 바꾸기로 했다. 지금 모든 언론에서 최영 씨를 기사로 쓸 때, 꼭 등장하는 말이 ‘국가사법고시 50년 역사에 최초의 시각장애인 합격자’라는 한 줄의 문장이다. 그런데 이 한 줄은 앞으로도 정말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할 게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가 어떠한 미래를 택하든 간에, 무조건 대한민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그의 이름 앞에 등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연수원을 마치고 판사가 되면 대한민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판사가 된다. 검사가 되면 ‘최초’의 시각장애인 검사, 변호사의 길을 걸어도 ‘최초’의 시각장애인 변호사라는 언론보도가 끊임없이 이어지게 된다. 이왕 내친 김에 대한민국 ‘최초의 법무부장관’까지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그에게 덕담을 전했다. 그는 지나친 과찬이라며 두 손을 내저었다.

“일단 저도 판검사나 변호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아직은 정확하게 모르거든요. 앞으로 변호사의 길을 걷고 싶다고 지난 여러 인터뷰에서 얘기했던 건, 기본적으로 사법시험을 통과하고 연수원을 마치면 변호사자격증이 주어지기에 최소한의 의미로 말씀드린 것이고요. 변호사로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건지, 아직은 구체적으로 모르기 때문에 고민을 계속하는 중입니다. 계속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미리 언급하는 것이지만 이번 인터뷰 내내 느낀 건, 그가 세상 모든 것에 대해 무척 조심스럽게 접근한다는 점이었다. 인터뷰라는 게 지면에 활자화되는 내용만 대화로 나누는 건 아니다. 다양한 얘기를 주고받은 과정 뒤에, 기사로 올릴 만한 내용을 선별하는 과정이 바로 편집이기 때문이다. 최영 씨는 대화의 말끝마다 ‘자세한 건 아직 잘 모른다’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건 100% 그 심정이 이해되는 부분이었다. 그는 학업과 도전에 정진했던 결실을 손에 쥐고 서서, 이제야 비로소 세상 속에 직접 발을 내딛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국가사법고시에 6번 도전했다고 알고 있는데, 더 이상의 도전은 어렵겠다고 절망이나 좌절한 적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예상했던 대로 2005년 이후 눈이 급격히 나빠졌던 시기가 정말 심각했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눈이 거의 안 보이게 되니까 책을 읽는 속도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많은 양을 보는 것도 불가능해지다 보니까 심각하게 그만둘 것을 고민했다 한다. 다른 분야의 취업도 알아보고 주위의 여러 분들과 상담도 하고, 각각의 복지관이나 장애단체 등에 문의도 해보며 지냈다고 한다.

그러한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인생 갈림길에서 만나게 된 게 시각장애인 입장에서 공부가 가능한 시스템이 있다는 희소식이었고, 그 시스템을 만나게 되어 개인적인 학업과 준비를 계속할 수 있었다는 게 그에게는 지금까지 한숨 돌리는 동력으로 남아 있는 듯했다. 그럼 점자를 공부할 생각은 안 했냐고 물으니까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뒤늦게 점자를 배워도 느리게, 나이 들어서 배우니까 어릴 때부터 배웠던 사람들의 속도는 전혀 따라갈 수가 없을 거라는 판단과 결론이 났다고 한다.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써의 점자는 그에게 한계가 미리 주어졌다는 것이다.

사춘기 시절도 괜찮고 대학 시절도 괜찮고, 살아오면서 굉장히 크게 좌절했던 시기나 특정한 기억이 있는지를 물었다. 최영 씨는 ‘좌절’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혼잣말로 그 단어를 몇 차례나 반복하면서, 스스로의 과거를 되짚어 보는 표정을 잠시 동안 이어갔다. 인터뷰를 위한 대답을 찾는다기보다는, 자신 스스로 그런 경우가 있었는지를 실제로 되돌아보는 것 같은 몇 초간의 여운이 이어졌다.

“눈이 급격하게 안 좋아지던 때가 전환점이기는 한데, 그때부터 제가 시각장애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됐거든요. 그 이전까지는 눈이 많이 안 좋은 상황일 뿐이었고, 나는 장래의 시각장애인라는 생각만 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 내가 시각장애인이 맞다고 생각하게 된 게 바로 2005년 즈음이었죠. 사법고시시험을 포기하려던 갈림길에서, 스스로를 시각장애라고 받아들이게 됐던 그 시기가 좌절이었다면 좌절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최영 씨는 자신이 받은 질문의 내용을 계속적으로 되물었다. 예를 들어 언제가 가장 힘들었냐고 질문을 받으면, ‘가자님은 언제가 가장 힘드셨나요?’ 하는 식의 되물음이 연이어 반복됐다는 의미이다. 계속되는 그의 되물음은 색다른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27년 인생 동안 학업에 전념하다가 이제야 세상으로 나서는 그의 입장에선, 자신이 받는 질문만큼 타인의 입장과 관점은 무엇인지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뜻과 같았기 때문이다.

좌절에 대한 대화에서도, 그의 입에서는 되물음의 질문이 이어졌다. “기자님은 언제 좌절을 하십니까?” 뜬금없는 그 질문에 대해서, 역시 뜬금없는 한마디로 대답을 했다. “좌절이요? 기사가 안 써질 때요.” 그는 한참 동안 이어진 파안대소로 응답을 대신했다.

어릴 때부터 꾸준히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성장했는데, 왜 공부를 하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이끌어갔던 건지, 또한 다른 취미를 가질 수도 있고 좌절과 함께 반항을 하거나 다른 길로 접어들 수도 있었을 텐데, 본인 스스로 공부를 하겠다고 다짐한 계기는 어떤 것이었는지가 궁금했다.

“제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저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이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겠다는 게, 다른 취미나 그런 게 아니라 공부에서 찾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자신의 시력이 좋다, 괜찮다 했다면 어땠을 것 같냐고 물으니까 그의 대답은 아주 간단명료했다. 그랬다면 분명히 공부를 안 했을 거란다. 그러면서 껄껄 웃는다. 공부는 대강 적당히 하고, 다른 분야에 관심을 많이 가졌을 것 같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진지한 질문 하나가 추가되어야 한다. 공부 이외에 자신이 꼭 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그걸 못해 너무 안타깝다 내지는 아쉽다 하는 분야가 있는지, 그게 취미든 일상적인 놀이문화든 뭐든지 편하게 얘기해 달라고 했다.

“꼭 시각장애 때문이라기보다는…, 어릴 때 공부 말고 다른 걸 못했던 게 너무 아쉬워요. 제가 눈이 점점 안 좋아지며 활동반경이 좁아지다 보니까, 제가 앞에 놓고 할 수 있는 건 공부가 유일했거든요.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 뭔가를 같이 할 수 있는 게 저한테는 거의 없었기에, 좀 더 활동반경이 넓었더라면 공부 이외의 다른 걸 할 수 있었을 테고, 체육시간에 열외로 지냈던 소외의 기억 같은 건 저한테 지금까지 남겨지진 않았을 거예요.”

그 얘기를 들으면서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 의미가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뭐랄까…, 같은 인생을 사는 입장에서 감정이입으로 공감하는 게 충분히 가능했다고나 할까? 그에게 힘을 불어넣기 위해, 마무리 차원의 질문을 던졌다. 최영 씨는 대한민국 최고 학부라는 대학을 나와 이렇게 큰 시험에 합격을 했고, 뭔가 인생의 성취를 이룬 입장이 되셨는데…라고, 거기까지 얘기를 진행하고 있는데, 그의 반론 아닌 반론이 즉각 이어졌다.

“그건 아니고요. 뭔가를 이뤘다기보다는 이제부터 시작이죠.”

정말로 듣기 좋은 표현이었다. 겸손과 진지함과 도전의식이 동시에 묻어나는, 더불어 젊음과 패기가 함께 우러나오는 한마디였기 때문이다. 최영 씨한테 자신의 길을 따르고 싶은 후배들이 앞으로 많아질 텐데, 그들에게 해줄 만한 덕담이나 조언을 말해 달라 했다. 시각장애가 있다 해도, 공부를 하고 싶다거나 법조인의 꿈을 꾸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젠 그들 모두가 희망을 품어도 된다. 불가능이 아니라 가능이라는 게, 또한 가능성의 세상이 실제 존재하고 있다는 게 증명됐기 때문이다.

“저는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거든요. 운이 좋았다고 할 수가 있어요. 제가 눈이 안 좋아져서 사법시험을 포기하려 할 때, 시각장애인이 사용하는 스크린리더라는 프로그램으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죠. 그리고 그 이후에 일본에서는 음성으로도 시험을 치르더라, 미국도 그 스크린리더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시험을 치른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걸 법무부에 같이 신청해 주신 선배님과 후배들이 있었고요. 그 신청을 한 이후에 법무부에서 바로 검토하며 받아주셨고, 그 시험을 치르는 데 필요한 교재를 마련해 주신 정인욱복지재단을 소개 받아 알게 됐고….”

이어지는 그의 얘기들이 한마디마다 가슴에 남겨졌다.

“저는 참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운이 좋아야 공부할 수 있으면 안 되잖아요.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하잖아요. 분명히 저도 시험에 통과를 했지만, 앞으로도 계속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연수원 공부 과정 그리고 법조인이 돼서도 어떻게 법조업무를 수행할 수 있을지 어려움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어려움은 삶 속에서 언제나 맞대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은 경제위기라 해서 더 어려워지고, 조금 더 사회가 각박해질 우려나 가능성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제일 중요한 건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인 것 같아요. 도와주는 사람이 많을 수도 있지만, 도와주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잖아요. 결국은 자신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그 마음으로 후회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거든요.”

   
▲ ⓒ채지민 객원기자
그렇기에 마음을 놓아버리거나, 좌절해버리거나 하며 후회를 남기지 말라고 덧붙였다. 들으면서도 ‘맞는 말이다!’ 하는 맞장구를 계속 이어갔다. 왜냐? 일반적인 강의나 좌담회 수준이라면 그런 언어를 무시할 수 있는데도, 최영 씨의 의견은 스스로의 성취와 최선의 결실이 알알이 맺힌 살아있는 체험담이었기 때문이다.

얼마간의 덕담을 더 나누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하는 동안에도 카페 측의 진심어린 축하를 계속 받았다. 그건 커다란 시험에 합격했다는 자체만을 축하하는 게 아닌, 인간승리의 산 증인을 직접 마주대한다는 격려와 반가움의 의미 같다고 느껴졌다. 아까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그의 집까지 도달한 뒤에 앞으로 좋은 만남이 계속 이어질 것을 약속하며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이십 대 후반 나이의 이웃집 청년 같은 그가 계단을 오르며, 마지막으로 사라질 때 남겨놓은 뒷모습이 마음에 새겨졌다.

취재하는 입장과 취재원의 나이 차이가 15살 정도 되는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최영 씨를 만난 결론은 ‘그가 존경스럽다.’는 한 가지 사실이었다. 취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면서 그를 존경한다는, 그를 존경하고 싶다는 입놀림과 마음이 끊임없이 입가와 가슴속을 맴돌았다. 물론 국가적인 주요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존경이라는 단어까지 사용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그의 정신력이다. 안 보인다는 이유만으로도 무언가의 목표를 포기할 경계선이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이상 존재했을 게 분명하다. 그건 그가 그러한 표현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없던 일이라 치부될 건 아니기 때문이다. 두 눈이 멀쩡하고, 듣고 말하는 데 전혀 불편이 없고, 손과 발을 사용하는 데 여유로움을 만끽하며, 정신적이나 신체적으로 하등의 문제가 없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오늘 하루를 얼마나 진지하게 보내고 있을까.

고통은 고통의 깊이를 헤쳐 나오는 데서 희열로 승화되고, 좌절은 그 좌절의 시간마저 소모적 낭비임을 직시하는 데서 인생의 전환점이 시작되는 법이다. 그리고 인생의 전환점은 그 전환점을 돌았다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먼 훗날 저 먼 곳에 서서 그 전환점을 바라볼 여유가 생기는 시점일 때 비로소 완성의 여유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최영 씨에게 남겨질 ‘최초’라는 수식어는 무엇이 더 남아 있을까. ‘최초’의 법조인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그가 부담스러워할 만큼의 기대치를 그의 어깨 위에 올려놓고 싶어진다. 또한 그를 응원하는 만큼 그의 어깨 위에 놓여 있는 짐들을 내려놓도록 만들어 주고 싶어진다. 사회적 기대치가 큰 만큼, 그의 하루하루 발걸음이 보다 더 진지한 움직임으로 내일을 향해가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그리고… 지겹도록(?) 들었을지 모를 한마디를 다시 한 번 더 남겨놓는 것으로, 이번 만남의 끝맺음을 장식하고자 한다.

“최영 씨, 진심으로 그대의 성취를 축하드립니다!”
작성자채지민 객원기자  016272962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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