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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겠다는 의지가 인생을 이끌어간다

[사람사는 이야기]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 이사장 이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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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지민 객원기자
한 시대를 풍미(風靡)한 인물’이라는 표현을 쓸 때, 우리는 무언가 거창하고 당장 눈에 들어올 만한 어느 누군가를 찾게 된다. ‘풍미’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인가. ‘초목이 바람에 쓸리듯, 어떤 위세가 널리 사회를 휩쓸거나, 또는 휩쓸게 함’이다. TV 화면을 도배하듯 등장하는 방송연예인들과, 각종 화젯거리로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면면들만 떠올리다 보면, 진정한 풍미(風味 : 사람 됨됨이의 고상한 멋)를 놓쳐버리는 게 일상인 셈이다.

그렇다면 풍미(風靡)를 풍미(風味)로 일궈낸 인생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길을 오가며 건물 벽 네온사인 하나하나에 몰두하듯, 당장 눈에 띄는 것만 찾으려 한다면 내용 있는 결과물을 발견하긴 어려울 것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건 ‘아래로부터’의 움직임이며, 그것이 바로 사회개혁의 시작이자 기반이 된다.

그 사소한 모래바람들이 모이고 모여 세상의 틀을 바꾸고, 변화와 개혁을 이끌어내는 운동으로 결실을 맺음은 당연한 일이다. 진정한 풍미(風靡)와 풍미(風味)는 그 안에서 찾아야 제대로 된 진주를 발견하게 되는 법이다.

이철용, <함께걸음>이 8월호 ‘사람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나기로 한 인물이다. 그가 누군지는 부연설명의 필요성마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역시 386세대일 거라 지레짐작으로 생각했던 건, 386시절을 보내는 동안 너무 많이 익숙해졌던 그의 이름이었기 때문일까?

만남의 준비를 위해 이런저런 자료들을 살펴보다가, 그의 나이가 이미 환갑을 넘었다는 사실에 잠시 일손을 놓았던 바 있다. 생생하게 기억되는 ‘5공 청문회’ 당시에 그가 사십 대의 혈기를 그대로 표출했던 까닭이리라 싶으면서도, 그 현장과 그 모습이 벌써 20년 넘게 지나갔나 하는 시간의 아쉬움이 남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있다는 서울 어딘가의 자리로 찾아갔다. 입구의 벨을 누르자마자 등장하는 얼굴…. 바로 이런 대목에서는 ‘말줄임표’가 필요해진다. 아니, 저 사람이 환갑을 넘었다고? 마흔 중반 정도일 것 같고, 서른 후반이라 우겨도 대강 인정하며 넘어갈 만한 외모였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다시 한 번 확인해봤다. 이 사람이 정말 환갑을 넘겼다고?

당당한 인상의 인물을 만나면, 그 사람이 왜 그런 이미지를 남기는지를 궁금해 하면서, 그 당당함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게 되기 마련이다. 대화가 시작되면서 그 궁금증은 단번에 정리됐다. ‘그가 그였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결론이 해답으로 추가된 것이다. 이번 취재를 위해 그를 찾아갔던 이들이 전부 다 오랜 동료이자 후배였기에, 그는 아주 편안한 일상의 언어로 대화를 이어갔다.

<함께걸음>독자들에게는 미리 양해를 구해야겠다. 그가 발언하는 어법은 ‘반말’이 아니라, 취재하는 기자들을 만난 반가움의 표현이라는 점을 말이다. 이 자리에선 그의 어투 그대로 활자화시켜 옮기겠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린다. 녹음취재를 정리하는 입장에선 얼마든지 존칭으로 바꾸며 각색하는 게 가능하지만, ‘그의 표현법’ 그대로를 살리는 게 훨씬 더 살갑게 다가오리라 결정했다는 점을 기억해 주시면 좋겠다.

   
▲ ⓒ채지민 객원기자
“나는 태어난 지 6개월만에 아버님이 결핵으로 돌아가셨어. 그 결핵균이 나한테 온 거지. 그러니 사실 난 아버지 얼굴을 모르는 유복자와 마찬가지야. 또 우리 어머니가 6·25 때 피난가면서 집을 다 태워버리고 짐도 다 잃어버려서 사진이 한 장도 없대. 그래서 아버지 얼굴을 지금껏 한 번도 못 본 거야.”

이 정도의 어법으로 풀어간다면, <함께걸음> 독자 여러분도 편안하게 받아주시리라 기대한다. 이번 ‘사람사는 이야기’ 내용 작성은 그동안의 문체와 문법을 잠시 접어두며, 위에 예시된 어법 형식대로 진행하고자 한다.

결핵으로 잃게 된 유년시절

태어난 이후로 아버지 얼굴을 단 한 차례도 확인한 적이 없었다는 거, 그렇기에 그는 아버지 얼굴을 어떻게든 찾고 싶어서, 아버지 고향인 경기도 포천을 수도 없이 수소문하며 돌아다녔단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단 1장마저 구하지 못했다는 게 듣는 입장에서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의 부연설명이 뒤따랐다. 아버지가 16살일 때, 너무 배가 고파서 서울로 도망을 왔다고 한다. 공부 또한 하고 싶은 마음에 서울행(行)을 택했는데, 서울 생활을 하던 과정에서 인생의 배필을 만나고 2세를 맞이한 뒤 곧이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아버지의 기록이 거의 남겨진 게 없을 거라는 점이었다.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한 결핵, 그게 나한테 왔지. 그런데 그게 폐로 온 게 아니라 다리로 온 거야. 요즘은 결핵성관절염 정도는 약을 먹고 적절하게 치료만 하면 다 고칠 수 있지. 그런데 그때는 약도 없었잖아. 내 골반 부위가 엄청나게 부어올랐대. 결핵균이 관절을 다 갉아먹을 때까지 그냥 있었다는 거야.”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아기한테 결핵성관절염이 왔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의 어머니는 어떻게 조치를 할 방법도 없는 상태에서 평소 머리를 빗던 참빗, 그 빗의 빗살을 하나씩 떼어내서 아기 다리에 부풀어 올랐던 고름을 따주는 도구로 사용하셨다 한다. 지금의 기준으로 이 대목을 읽는다면, 참으로 무정하고 무책임한 엄마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순명료하다. 가난 때문이다. 병원비가 없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치료했던 어린 시절의 흔적은 지금도 내 몸에 크게 남아 있어. 당시엔 병원을 못 갔지. 돈이 없으니까. 그런데 내 몸이 하도 부어오르니까, 그래서 애가 죽을 것 같으니까 어머니는 날 끌어안고 미군부대 병원으로 무작정 가셨대. 병원 정문 앞에서 하룻밤을 꼬박 새면서, 이 아기를 살려달라고 하셨다는 거야. 영어를 모르니까 밤새며 몸짓으로 하소연을 하셨던 거지.”

밤새우며 이어진 절규의 끝에서, 미국인 하나가 아기의 다리 상태를 확인하게 됐단다. 또한 어머니의 애끓는 애원을 받아들인 뒤 병원 안으로 들어가게 해줬다 한다. 그런데 아기의 상태를 확인한 의사는 다른 말도 없이 ‘절단해라!’ 그 한마디로 결론을 내렸단다. 아기의 발을 자르겠다는 의사의 말에 어머니는 ‘애를 죽이면 죽였지 절대 안 된다’ 하셔서, 결국 항생제 같은 걸로 대충 염증만 가라앉혀 놓는 수준에서 마무리했다 한다. 그 결과로 다리는 그 상태 그대로 굳어져 버렸단다.

그런데 염증이 사라진 걸로 만족할 문제가 아닌 게, 다리 뒤꿈치가 엉덩이 쪽으로 붙어있는 자세로 살아야 하게 됐던 모양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정형외과에 가서 정식으로 펼 때까지, 그는 결핵균에 의해 손상된 고관절을 그대로 지닌 채로 걷는 것 자체가 신기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고 한다. 굳어버린 결핵균과 관절을 잘라내고 나니, 왼쪽 다리 길이가 7에서 10센티미터 정도 짧아진 것 같단다.

   
▲ ⓒ채지민 객원기자

 “그런데 나는 등산을 워낙 좋아하고, 다리에 힘을 가하는 운동을 매일 하거든. 장애인일수록 운동을 많이 해야 한다는 거야. 난 다리의 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운동의 중요성을 아주 잘 알아. 아침에 일어나면 줄넘기를 15분씩 꾸준히 계속해. 도구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줄넘기 하는 자세로 손을 움직이면서 제자리 점프를 하는 식이지. 그리고 몸의 관절을 풀어내는 운동도 1시간 넘게 해. 그런데 이런 운동법을 어디서 배웠는지 알아? 전부 다 교도소에서 배운 거라고.”

그는 자문자답을 하면서 껄껄 웃었다. 인생여정 속에서 몇 차례나 들락날락해야 했던 교도소의 좁은 공간 안에서, 그는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에게 맞는 운동법을 개발해냈다고 한다. 몸에서 가장 중요시해야 할 곳이 바로 척추란다. 특히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면 더욱 더 운동을 해야 하고 척추만큼 중요한 게 없다면서, 그는 나름의 운동법과 건강관리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이어갔다.

너무나 진지한 내용이었기 때문일까? 대화는 난데없이 건강을 주제로 10분 넘게 진행됐다. 취재만 아니라면 아주 길게 토론하고픈 내용이 가득했는데, 일에는 앞뒤가 따로 있는 법이 아닌가. 그 주제를 잠시 접어두고, 대화의 순서를 어린 시절로 다시 옮겼다. 장애를 가졌고 더욱이 다리의 자세와 모양까지 남다른 상태에서 마음고생이 심했음은 물론이겠지만, 그의 입을 통해 그 내용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졌다.

“지금은 참 많이 좋아졌지. 장애인을 장애우라고 부를 수 있는 세상까지 됐으니까. 내가 어릴 때는 지나갈 때마다 절름발이, 찔뚝발이, 찐따, 니나노처럼 장애인에게 붙이는 놀림용어, 그런 호칭들이 참 많았어. ‘이철용’이라는,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은 사라지고 전부 다 나를 그렇게 불렀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나는 다리가 이러니까, 아무래도 성격이 내성적일 수밖에 없었거든. 그랬던 내 성격이 갑자기 포악해지기 시작한 사건이 있었어.”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고, 그 누구하고도 잘 어울리지 않던 소년 이철용의 일생일대 전환점이 그때 찾아든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신발을 신고 복도에 올라간 적이 있었단다. 신을 벗고 신는 동작 자체가 힘든 몸이었기에, 더욱이 지금까지도 구두를 신는 행위가 간단하지 않다는데 당시는 오죽했을까. 그렇게 복도에 들어섰는데 담임이었던 선생이 신발을 신었다는 이유로, 그에게 복도 끝까지 뛰어갔다 오라는 벌을 내렸단다. 다리가 불편한 제자한테 뛰라는 체벌을 내리다니…, 이런 일그러진 교육자를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인생은 예고도 없이 바뀐다

“선생이 시키니까 힘들어도 안 할 수가 없잖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절룩거리면서 힘들게 뛰어가는데, 내 뒤에서 그 선생이 내 걸음걸이를 흉내를 냈어. 담임이라는 교사가 내 장애를 흉내를 냈다고. 그러니까 복도에 있던 아이들이 동시에 ‘와!’하고 웃는 거야. 그때… 어린 마음에 너무 크고 처절한 상처를 받게 된 것 같아. 그 상처가 어떻게 발전됐는지 알아? 사람이 굉장히 잔인하게 변하더라.”

그래서 지금까지 그는 교육을 굉장히 중요시하며 얘기하게 됐단다. 선생의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가 얼마나 큰 영향을 남기는지를 지금껏 강조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집에서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책 읽기를 즐기며, 영리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던 평범한 소년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선생의 놀림과 행동이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는 것이다.

그 일 이후로 이상하리만큼 사람들을 피하게 됐단다. 아이들 전체가 복도에 서서 자신을 막 놀리던 그 영상이 절대로 잊어지지 않았단다. 지금도 그 장면이 생생하고 선명할 정도라는 대목에서는, 지금껏 털어내지 못하는 분노의 여운이 짧게나마 그의 눈가를 스쳐갔다.

그때부터 소년 이철용은 폭력적으로 돌변해버렸다 한다. 그 이전까지는 심한 놀림을 당해도 주눅이 들어 가만히 있었는데, 그 일을 당하고 나선 ‘이제 이대로 져선 안 되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 누구든 놀리거나 비하하는 호칭만 사용해도, 그는 가만히 넘어가지 않고 ‘처절한 방식’으로 응징을 하게 됐단다.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건 그렇게 순식간에, 생각지도 않았던 시점에서 갑자기 찾아드는 법이라는 건 이처럼 실제로 맞는 말이다.

“그렇게 된 이유 중 하나가 5학년 때 다리 수술을 해서 1년을 쉬었잖아. 지금이야 의술이 발달해서 더 정밀하고 빠른 치료가 가능하겠지만, 당시엔 관절을 도려내는 큰 수술이었기 때문에 가슴까지 깁스를 한 채로 9개월을 치료해야 했어. 그런 나를 어머니가 업고 통원치료를 했던 거지. 그런데 그때 우리 어머니가 수술하기 전에, 의사선생님한테 제일 먼저 물어봤던 게 뭔지 알아? 결혼생활을 할 수 있느냐를 물어봤대. 혹시 다리 때문에 결혼생활을 못하는 건 아니냐고, 애를 낳을 수 있느냐고…. 나는 그게 바로 어머니의 사랑이 대단하다는 증거라고 지금도 생각해.”

   
▲ ⓒ채지민 객원기자
의사선생님은 가장 짧고 확실하게 대답했단다. “그럼요!” 9개월에 걸친 깁스 생활 그리고 1년의 휴학을 마치고 지금의 자세처럼 서는 게 가능해지자, 소년 이철용의 삶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단다. 스스로의 표현 그대로 ‘완전한 깡패’, ‘짱돌’, ‘잔인’이라는 단어가 사용될 수밖에 없는 나날이 계속 이어졌던 모양이다. 그러다보니 초등학교 6학년이 됐을 때는 아이들이 기마전을 하듯, 그를 위에 태우고 등하교를 하게 해줬다는 무용담까지 이어졌다.

선생들도 그를 못 건드렸단다. 뭐라고 하면 곧장 욕을 하며 덤볐다니, 당시 분위기가 어땠는지가 대강 짐작될 만하다. 한번은 동네 한의원집 아들이었던 고등학생이 초등학생이었던 그를 얕잡아보고, 그의 걸음걸이를 그대로 흉내내면서 놀린 적이 있었단다. 그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대답은 예측이 가능할 만한 내용 그대로이다. 그날 밤에 돌을 들고 그 집에 가서 그 집 대문을 완전히 다 때려 부셨다고 하니, 당시의 심정을 억지로라도 헤아려볼 만한 내용이 될 듯하다.

선생의 놀림으로 시작된 변화의 끝은 무엇이었을까? 당연한 일이겠지만 아무도 그에게 덤비지 않게 됐다는 거다. 놀림 같은 게 완전히 사라져버린 건 물론이다. 그런데 중학교엔 왜 진학을 안 했냐고 물으니까, 대답은 단순명료한 한마디였다. “가난했으니까.”

다시 떠오른 어머니의 말씀

“어머니가 혼자 행상을 하면서 힘들게 지내셨잖아. 그런데 또 실패한 일들이 생겨서 집마저 다 날아가 버렸어. 집을 날려버리고 가족은 풍비박산으로 다 흩어지게 되고…. 결국 나는 15살 때 처음으로 소년원에 들어갔어. 난폭한 성격이 되고 가난에다가 집마저 풍비박산이 났으니까 고아 아닌 고아가 된 거잖아. 그러다 보니까 유유상종이라고 끼리끼리 모이게 되더라고. 그런 놈들끼리 패거리로 몰려다니면서, 동대문시장 남대문시장과 남산 등지를 돌아다녔지.”

당시의 생활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아침을 먹으면 점심을 걱정해야 하고, 점심때가 되면 또 저녁 걱정을 해야 하고, 저녁을 먹고 나면 오늘은 어디서 잠을 자야 할까를 고민해야 하는, 말 그대로 하루살이 인생이었단다. 그런 나날이 반복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더 난폭해질 수밖에 없었고, 살아남아야 했기에 저절로 뒷골목의 불량배가 되어버린 거라는 대목에선 작은 한숨도 뒤따랐다. 하지만 세상은 일방적으로 한쪽으로만 진행되는 게 아니다. 변화의 계기는 항상 가장 가까운 곳, 바로 집안 내부로부터 찾아드는 법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나한테 귀가 따갑도록 교육을 시킨 게 있어. 남의 눈에 눈물이 나게 하지 마라. 그게 첫 번째야. 남의 눈에 눈물을 내면 네 눈에는 피눈물이 난다. 그 다음엔 남을 고발하지 마라. 그런데 그 말은 내가 커서 보니까 그 뜻을 알겠더라고. 남을 고발하면 고발당한 사람이 구치소든 어디서든 간에 앙갚음을 품게 될 게 아니야. 그리고 보증은 서지 마라. 이건 아마도 외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보증 서다가 망했기 때문에, 삶의 경험에서 말씀하셨던 것 같아. 거기에다가 가장 큰 거는 너는 왕손이다. 전주 이씨(氏)라는 거야.”

당시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왕손을 찾느냐며 콧방귀를 끼듯 무시하며 넘기곤 했단다. 하루하루 생활은 사건과 사고의 연속이고, 술 마신 뒤 기물을 전부 파손하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보면 유치장에서 형사와 마주치는 날이 비일비재했던 모양이다. 그런 와중에 모 경찰서에서 20일을 선고 받고 유치장 바닥에 누워 있는데, 갑자기 그 생각이 들었단다. 콧방귀를 끼며 무시하던 어머니의 말씀이 생생하게 떠올랐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어머니의 힘인 것 같아. 더 나쁘게 빠질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귀가 닳도록 말씀하셨던 내용들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한 거야. 눈물 나지 않게 하라, 고발하지 마라, 보증은 서지 마라. 그리고 너는 왕손이라는 거….”

세상 한가운데로 뛰어들다

인생의 전환점은 그렇게 소리도 없이 찾아드는 법이다. 1974년에 이르러 그는 허 목사라는 한 목사님을 만나게 됐고, 그 만남을 통해 생각이 많이 바뀌는 체험을 얻게 되었다 한다. 당시에 살던 곳은 신설동 4번지, 바로 그의 대표작인 <꼬방동네 사람들>의 무대가 됐던 그 동네였단다. 그는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판자촌을 일본말로 ‘하꼬방’이라고 하잖아. 거기에서 ‘하’자를 빼고 그냥 ‘꼬방동네’라고 이름을 지었던 거야.”

물론 살던 버릇과 생활의 방식은 단번에 바뀔 리 없다. 사람을 때려서 수배가 되고, 도망간 지역에서 또 사고를 쳐서 다른 지역으로 도주하고, 그렇게 사고와 도망을 반복하다 보니, 강원도 정선 탄광지역까지 이르게 됐다고 한다. 거기에서도 끼리끼리 어울려 탄광의 십장 노릇을 하며 부족함 모르고 지냈다 하니, 그의 생존능력은 남과 다른 게 분명한 듯하다. 

   
▲ ⓒ채지민 객원기자

월급 대신 쌀로 주던 시절, 하루하루의 노동을 전표로 대신 나눠주고 나중에 현찰로 바꿔주는 게, 낡은 흑백사진과도 같은 당시의 탄광촌 모습이었다. 그런 사회상 속에서 지급 능력을 가진 십장의 위치에 있었기에, 그는 그 와중에도 아버지 없이 혼자 살거나 남편이 없는 사람들한테는 돈을 더 많이 줬다고 한다. 어머니가 떠올랐기 때문이란다. 그런 까닭에 지금도 사람을 만날 때 아버지가 없다고 하면 그 사람을 더 잘해 주고, 시장에 갈 때도 가게를 이용하기보다는 좌판행상을 하는 분들의 물건을 주로 구입한다고 한다. 역시 홀어머니가 떠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내가 나의 장애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건 돈과 힘이라고만 생각했어. 돈이 있어야 하고 나를 지킬 힘이 있어야 한다는 거, 그렇게만 알고 있었던 거야. 내가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1인자가 돼야 한다. 항상 이 왕초의 자리를 놓쳐선 안 된다. 그런 생각에만 사로잡혀 지냈거든.”

신설동으로 다시 돌아와서, 그는 구두닦이를 100명 거느리는 기업주로 다시 살게 됐단다. 학교를 못 다닌 탓에 공부에 대한 미련이 많아서 생활야학의 학원을 운영하기도 했고, 시장에 옷가게를 열어 사업적으로 성공의 길을 걷기도 했다 한다. 그런데 그 시절 그의 곁에는 허 목사라는 그 분이 있었기에, 이슬에 옷 젖듯이 청년 이철용의 사고와 사상과 철학이 조금씩 변화됨을 깨달아가게 됐다는 점이 주목할 대목이다.

‘이철용’이라는 인물에게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뭘까? <꼬방동네 사람들>, <어둠의 자식들>로 대표되는 소설가의 모습과 ‘5공 청문회’로 상징되는 13대 국회의원의 삶도 물론 포함되겠지만, ‘이철용 = OOOO’이라는 하나의 공식을 대입시켜야 한다면 그 해답은 ‘빈민운동’이라는 네 글자가 들어가야 정답이 될 일이다. 우리나라의 빈민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을 남겼던 이가 바로 인간 이철용이기 때문이다.

그 시작점은 어떻게 찾아들었을까? <꼬방동네 사람들>이 발표되면서 이 세상에 던진 사회적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를 기억하는 독자들이라면, ‘꼬방동네’가 소설 속 허구가 아닌 실제 현실이었다는 당시의 시대상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꼬방동네 사람들>의 무대가 됐던 신설동 4번지에 난데없이 철거장이 나온 거야. 동네를 없애고 밀어버리겠다는 거지. 그래서 내가 그 철거장을 다 모았어. 다 회수해가지고 구청에 가서 던져버린 거야. 제대로 된 대책이 있으면 철거를 하라고. 그래서 주민들을 다 모아가지고 하루아침에 리더 비슷하게 돼서, 교회 교인들까지 모아서 큰 교회를 점거했지. 우린 못 나간다는 거야. 살게 해달라고 막 싸운 거야. 내 빈민운동의 첫 몸짓이 그렇게 시작된 거지.”

빈민운동을 계기로 학원과 가게를 모두 정리하고, 운동 하나에 본격 몰입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다 잡혀 들어갔는데, 그는 멀쩡히 운동을 계속할 수가 있었단다.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이들은 빈민운동을 하는 이유로 사회구조적인 모순과 독재가 어쩌고 파쇼가 어쩌고 유신헌법이 어쩌고 하며 싸웠는데, 그는 딱 한 가지 ‘생존권’만 가지고 싸웠다는 것이다. 먹고 살게 만들어줘야 할 게 아니냐는, 철거당하면 길에서 잘 수밖에 없는데 무슨 대책이 있는 거냐는 것. 그런데 일은 다른 곳에서 터지고 말았다.

“당시 집권자가 영구집권을 위한 개헌을 하려 할 때였어. 그런데 어떤 건달 녀석이 투표용지를 다발로 들고 거리를 다니는 거야. 그러면서 찬성을 찍으라고 강요하고 다니는 거야. 그래서 그걸 뺏어서 증거를 확보해가지고, 기자를 불러 언론에 폭로시켜버렸어. 언론에 대서특필이 됐지. ‘부정투표용지 뭉치 발견, 이철용 폭로’ 유신정권에서 제일 살벌했던 시기가 그때였잖아. 나는 그 다음날 바로 잡혀 들어갔어.”

결혼한 지 20일만에 그는 경찰서로 연행되어 허위로 고발했다는 누명을 쓰고, 결국 투표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6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단다. 당시의 독특한 일화 한 가지를 덧붙인다. 아침에 기상나팔이 울리고 나면, 매일 똑같이 감방의 창문 밖으로 당시 집권자였던 이의 이름을 이렇게 외친 이가 있었단다. “박OO 죽어라!” 그 사람이 누굴까? 바로 이철용이다.

그의 성향이 감옥이라 해서 바뀔 리가 없는 법. 그는 아침마다 똑같은 외침을 부르짖으면서, 그걸 막으려는 교도소 측과의 실랑이 과정에 몸이 많이 망가지게 됐다고 한다. 결국 교도소 소장과의 면담을 거치면서, 그는 또 다른 ‘최초’ 한 가지를 만들어낸다. 형무소에 ‘장애인 전용’ 방을 마련한 것이다. 똑같은 죄수복을 입고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는 교도소 생활에서 장애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를 요구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져서 세면장과 가장 가까운 방 3개를 장애인용으로 탈바꿈시켰단다.

   
▲ ⓒ채지민 객원기자

 ‘장애인’도 아닌 ‘장애자’였던 시절, 그는 그 어감 자체가 싫어 ‘대용(代用)병실’이라는 명칭을 붙이게 만들었단다. ‘장애인복지법’ 이전의 ‘심신장애자복지법’ 자체도 없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교도소 운영 차원에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최초로 바꾸게끔 계기를 만들어낸 사람, 그 또한 이철용이다.

그가 수감되어 있는 동안, 신설동 4번지는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경기도 성남의 허허벌판에 내버려진 이웃들의 모습 속에서 그의 빈민운동은 가속력을 내기 시작했고, 하월곡동과 중랑천 등 빈민운동이 벌어지는 곳마다 그의 존재는 뚜렷하게 부각되어갔다. 판자촌동네와 사랑방교회 설립의 역사 안에도 그의 이름이 등장하고, 목동사태와 여의도 부활절 행사 점거사건 및 극동방송 습격사건에도 ‘이철용’이라는 이름은 한가운데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 빈민운동단체에서 월급을 주더라고. 뭔가 양심에 맞지 않는 거야. 운동이라는 것은 월급을 받다 보면 직업이 되어버리거든. 그래서 돈을 안 받겠다고 선언했어. 빈민운동이라는 게 도대체 뭐야? 근성과 삶의 가치를 알려줘야 하는 것이잖아. 살아있다는 게 소중하고 축복이라는 점을 알려줘야 한다는 거야. 살아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삶이 아름답다는 걸 보여줘야 하는데, 이게 직업이 되다 보면 빈민들을 연구대상으로 바라보게 돼. 난 그때 그런 현실을 봤던 거야.”

운동 현장에는 많은 종교인들과 대학생들이 자원봉사를 한다며 참여했는데, 그는 그들에게 빠짐없이 지적을 하고 강조를 했단다.

빈민운동을 학생들의 낭만으로 하지 말라는 것, 이 사람들이 당신들의 연구대상이 아니라 같은 생명체이고 인간이라는 것, 이 사회구조가 더러워서 이렇게 된 것이기에 이 속에 직접 들어와서 하라는 것, 탐구하고 논문을 쓸 대상으로 여긴다면 아예 나타나지 말라는 것. 빈민운동의 기본은 ‘와서 살아라!’ 이 한마디로 실천돼야 한다는 것, 목사나 신부 같은 성직자 직위 같은 건 다 버리고 와서 직접 살아가라는 것, 빈민처럼 살고 빈민처럼 노동해야 빈민들의 삶을 깨닫게 된다는 것….

그래야만 빈민들의 삶의 질이 어떻게 해야 높아질 것인가의 답이 나온다는 것이다. ‘살지 않고선 하지 마라’는 게 그의 실천철학인 셈이다.

나의 철학은 살아남자는 거야

그의 삶에는 우리가 언론을 통해, 문화와 종교를 통해, 각종 시민운동을 통해 익숙하게 알고 있던 명사(名士)들의 이름이 총망라되듯 등장한다. 그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바로 그 자신이 실제 현장에 있었다는 것, 역사의 현장 안에서 직접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렸다는 살아있는 증거가 되는 셈이다. 어린 시절 소년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던 이가 담임이라는 선생이었듯이, 어둠 속에서 거칠게 내달리던 그의 삶을 햇살 아래 빈민운동으로 바꿔놓은 이는 허 목사라는 인물로 그의 인생에 자리 잡는다.

1976년이라고 기억되는 어느 날, 고(故) 문익환 목사가 그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고 한다. “이 선생, 시(詩) 한번 써 보지, 그래.” 그건 말도 안 된다며 줄기차게 손사래를 쳤는데도, 문 목사는 진지하게 제안을 했단다. “아니야, 자네는 글이 되겠어. 써 봐.” 책과는 거리가 멀었던 인생이었는데, 그나마 제대로 읽고 감동을 받았던 건 허 목사가 감방에 넣어줬던 성경책이 달랑 전부인데, 그런 그에게 시를 쓰고 글을 적어 보라는 제안은 어떻게 나왔을까.

중랑천사태 당시에 어머니 몇 분이 찾아와서, 그에게 ‘호소문’이라는 글을 써 달라고 했다 한다. 참으로 어렵고 난감한 부탁이었지만 그는 자기 자신의 체험을 적어 전달했고, 그 글이 집회에서 울려 퍼지자 집회 현장은 눈물의 바다가 된 일이 있었단다.

이 대목에선 중요한 사항이 발견된다. ‘체험’과 ‘진실’이라는 게 그것이다. 허구와 가공에 젖은 글은 타인을 감동시키지 못한다. 화려하고 유창한 정치인들의 연설과 기고문에서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문법마저 틀리는 어눌한 문체의 시골 아낙네 글에선 살아있는 진짜 인생의 냄새를 느끼는 것처럼, 이철용의 글에서는 현실과 실제 체험과 삶에 대한 인간의 진실이 그대로 묻어난다. 문학수업조차 받지 않은 그가 <꼬방동네 사람들>과 <어둠의 자식들>로 대한민국 사회를 뒤집어놓은 원동력은 무엇인가. 자기 자신의 실제 체험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래서 나는 ‘만남’이 첫 번째로 중요하고, 그 다음이 ‘칭찬’이야. 칭찬!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는 게 바로 칭찬이잖아.”

현(現) 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 이사장인 그를 만나면서, 사실 그에게 듣고 싶었던 건 13대 국회의원의 목소리도 아니었고 베스트셀러 작가의 음성도 아니었다. <함께걸음>이기에 장애에 대한 몇 가지는 질문할 수 있지만, 정작 듣고 싶었던 건 ‘그의 삶을 이끌어 온 추진력의 정체’였다. 각종 언론 인터뷰를 통해 그의 인생은 대부분 공개가 된 바 있다. 언제 무슨 일을 했고, 언제 어떤 직책을 수행했다는 식의 내용은 인터넷 안에도 가득하다. ‘사람사는 이야기’의 만남을 계기로 듣고 싶었던 건, 그 수많은 사건과 인생여정의 풍파 속에서도 그를 지금까지 이끌어온 힘이 무엇인가? - 바로 그 부분이었다.

“나는 전국 어디를 가서 어떤 일을 해도 살아남았어. 그게 내 삶의 근성이거든. 자기 생명은 자기가 보전해야지, 누가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건 아니잖아. 장애는 슬픔이 아니고 잠시의 고통이라서 잠시 불편할 뿐이라는, 뭐 그런 X 같은 얘기들은 다 필요 없어. 장애는 당연히 불편하지. 그리고 고통이잖아. 그런데 고통에 젖어서 살 수는 없다 이거야. 왜? 어차피 태어난 인생이니까 고통을 감수하자, 이 말이거든. 그래서 나는 늘 상어 얘기를 해. 상어는 태어날 때부터 부레(어류 배 속에 있는 얇은 공기주머니)가 없이 태어나잖아.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가라앉다 보니까, 가라앉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헤엄을 친 결과로 바다의 왕이 된 거야. 그것처럼 우리도 상어를 닮자는 거야. 우리는 부레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하자. 가라앉지 않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우리도 왕이 될 수 있다는 거지. 이게 바로 내 삶의 철학이야. 살아남자는 거.”

   
▲ ⓒ채지민 객원기자
“우리는 장애인운동이든 빈민운동이든 노동운동이든 뭐든 간에, 생존권운동이 기본이 돼야 하고 생존권은 생명 그 자체야. 내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생존권이 있는 거지. 예수도 타살을 당했기 때문에 부활이라는 역사가 뒤따랐던 것이고, 우리나라에서 민주화가 실현됐던 건 박종철과 이한열이 고문당하고 최루탄 맞아 죽었기 때문에 6월항쟁의 결실이 맺어진 거야. 그 이전에는 백날 자살해봤자 아무것도 안 됐거든. 나의 생존권운동이라는 것도 끝까지 살아남자는 거야. 끝까지 말이야. 나도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얼마나 많았는데, 죽고 싶다는 생각은 언제나 머릿속에 가득했지. 그러나 죽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야. 어떻게든 살아서 문제를 해결해야 돼.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는 거야.”

이철용 이사장과 나눈 대화는 100분이 넘는 길이였지만, 국회의사당 내 활동과 관련된 30여 분과 빈민운동의 야사(野史)가 주종을 이룬 20여 분 분량은 일부러 녹취를 진행하지 않았다. 국회든 빈민운동이든 해당 현장에 직접 있었던 당사자였기에 객관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하지만 관련되는 상대방 입장에선 민감하게 반응할 만한 수준의 내용이 제법 많았기 때문이다. 대신 <함께걸음> 독자라면 ‘아하, 그렇구나!’ 할 만한 사항 몇 가지만 간추려 본다.

13대 국회의원 활동을 하면서 당시 이철용 의원이 새겨놓은 발자취는 장애계 안에 지금도 뚜렷이 남아있다. 그가 해놓은 건 거의 전부가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닌다. 고급차 대신 봉고차를 타고 등원했다는 시시콜콜한 내용이 아니다. 장애인 편의시설이 ‘아예’ 없던 국회에 의원회관 설계도부터 뜯어고치게 만든 이가 이철용이다. 국회 시설 전체에 휠체어와 시각장애인 이동이 가능하게 만든 것도, ‘장애자’가 아니라 ‘장애인’이라는 용어를 공식화시킨 것도, 장애 관련 예산을 획기적으로 증액시킨 것도, 장애인고용촉진법을 제정한 인물에도 역시 같은 이름이 등장한다.

장차관들이 화단에 물을 주고 있을 때, 단수가 된 산동네 주민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를 아느냐고 꾸짖던 이. 책상에 앉아 관련 서류를 가져오라 지시만 하는 게 아닌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서, 단적인 예로 팔당댐 수질오염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증명하기 위해 직접 현지의 물을 길어왔던 이. 죽음으로 가는 완행열차를 멈춰달라고 신문광고로 호소했던 이. 그랬던 그 사람은 현재 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 이사장으로 십 년 넘게 재직하면서, 장애인들의 문화복지개념을 바꾸고 증진시키는 데 남다른 성과를 쌓아가고 있다. 몇 해 전부터는 안국역 인근에 인생상담소를 열어 적잖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동안의 인생은 일을 저지르며 살아왔지만, 이젠 정리를 하며 나가야 할 때라서 그 자리를 마련했단다. 지금까지는 다중을 위해 일을 했지만, 이제는 개개인을 위해 살고 싶기 때문이란다. 구두닦이부터 대통령까지 모든 직업과 면면들을 다 겪어봤기에, 인생의 조언과 희망을 전해주는 데는 자신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의 인생상담소 활동이 자신의 빈민운동의 마지막 과정이 될 거라고 생각한단다.

<함께걸음> 독자들에게 전달할 마지막 인사를 부탁했다. 짧고 명료한 그의 음성이 그날의 녹취기록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었다. “장애라는 땅에 넘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장애라는 땅을 딛고 일어설 수밖에 없죠. 우리 삶을 대신할 자는 아무도 없지만, 우리 삶을 가로막을 자 역시 아무데도 없답니다. 도전하세요. 절대로 포기하지 마세요. 굳건하게 살아남고 실천하세요. 성공과 성취가 남들의 얘기가 아닙니다. 반드시 목표를 이루게 될 테니까, 우리 모두 자기 인생의 주인공으로 함께 살아갑시다!”

작성자채지민 객원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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