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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 나는 내 인생을 살아간다

[사람사는 이야기] ‘지선아, 사랑해’의 저자 이지선

본문

비가 내린다.
그것도 갑자기 내리친다.
하지만 이 비가 소나기처럼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게 아님은 직감으로 느낄 수 있다. 소나기와 집중호우의 차이점 정도는 지나간 삶의 체험으로 이미 익혀두었기 때문이다.

약속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부슬부슬 내리던 빗방울은 이내 땅바닥을 내리치듯 굵어졌다. 이럴 때가 가장 난감해진다. 맑은 날씨의 커피전문점 창가 구도를 연상하며 인터뷰와 촬영 준비를 마쳤는데, 일기예보에도 없던 장대비가 내리치니 저 혼자 갑갑해질 따름이다. 하지만 방법은 가장 가까운 데 존재하는 법이다. 어렵게만 생각하면 절대 안 보인다. 분명히 대안이 있다는 확신으로 바라보고 찾아야만, ‘무언가’가 눈에 띌 테니까 말이다.

   
▲ ⓒ채지민 객원기자
‘사람사는 이야기’ 주인공과의 만남은 한 달 넘게 미뤄지기만 했다. 그래도 미뤄지는 이유를 덤덤하게 받아들일 만한 자연스런 과정이었다. ‘1’이라는 날에 약속했다가 ‘10’이라는 날로 바뀌고, 그 날짜마저도 ‘20’으로 뒤바뀌는 과정이 몇 차례 반복됐다. 약속이 어긋나고 편집마감을 바로 앞에 두면서도, 약속이 취소되는 이유를 서로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이지선 - 그 이름을 접하는 이들의 반응은 여러 갈래로 나눠진다. ‘아, 그 사람?’ 하며 곧장 받아들이면 오히려 반가워진다. 전후사정을 일정 수준 이상 알고 이해하는 독자들일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군데?’라며 생경(生硬)하게 질문하면 조금 힘들어진다. 그 설명을 처음부터 세세하게, 또는 간략하게 요약하며 지난 상처 모두를 되짚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만남의 글에서는 ‘이지선’이라는 이름 세 글자의 상징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고 시작하려 한다. 굳이 하나하나 짚어가며 이력서와 연혁을 들이밀듯 언급할 필요는 솔직히 못 느끼기 때문이다.

특정한 상처에 대해서 ‘주홍글씨’를 요구할 권리는 그 누구한테도 없다. 어렵게 시작하면 모든 게 어려워지고, 절친한 이웃으로 만나면 모든 게 편안해지는 법 아닌가. 결국 ‘주홍글씨’는 우리의 선입견 또는 선입관 속에서 남모르게 자리 잡고 있던, 우리 개개인의 심정적 ‘주홍글씨’였다는 게 해답으로 던져진다.

이 글의 시작이자 결론으로 내릴 화두는 단순하다. 우리는 지선 씨를 마음 편하게 만났다는 거. 그녀는 우리의 이웃이고 친구이자 지인이며, 언제든 마주칠 수 있는 같은 세상 안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 직접 만나 보니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게 최상의 진솔함이 아니었나 싶다.

인식의 차이… 왜 그렇게 바라보는가

“저는 미국에 갔을 때보다는, 한국에 있다가 처음 치료를 받으러 일본에 갔을 때가 오히려 더 기억에 남아요. 그때 일본에 가서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거든요.”

유학을 떠나서 느꼈던 주위 환경의 차이와,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에 관해 얘기해 달라고 했다. 첫 질문의 첫 대답은 위와 같이 시작됐다. 무슨 충격이었는지를 물었더니, 충격이 맞았을 것 같다는 생각부터 떠올랐다. 아무도 자기를 안 쳐다보더라는 것이다. 한국 땅에 있을 때는 너무 많은 시선이 와 닿고, 심지어 귀가 안 들리는 사람인 양 취급하며 바로 옆까지 다가와서 이런 말들을 남겼단다. “쟤, 왜 저런 거야?” “어머나, 어떡해…!” 그것도 지나가는 작은 음성이 아니라, 아예 대놓고 외치는 식으로 한마디씩 내던지는 이들이 계속 이어졌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외모가 다르면 지능도 떨어지고 귀도 안 들리고, 모든 기능을 다 같이 상실했을 거라는 그런 편견들이 있잖아요. 그런 편견 속에 휩싸여 지내다가 일본에 갔는데, 사람들이 저를 하나도 안 쳐다보는 거예요. 저는 정말로 그때 자유라는 거, 그걸 느꼈어요. 그 누구도 나를 향해 시선을 던지지 않는다는 거….”

햇빛을 받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기에 모자를 늘 쓰고 다니긴 했지만, 그 모자의 용도는 햇빛만이 아님은 자명한 일이다. 보다 더 많은 얼굴 부위를 가리고 감추며, 고개 숙여야 하는 과정으로 그 모자가 활용됐을 게 아닌가. 그런데 그런 시선 자체가 없었단다. 그래서 “나를 보는 시선을 막기 위해서 모자를 쓸 필요는 이제 없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일본의 경험은 그렇게 반갑기도 했지만, 못내 차가운 여운들을 남겼던 모양이다. 우리의 경우라면 어땠을까. 좋은 의미로 늘 표현하는 ‘우리 민족의 정’ 같은 언행에 파묻혀, 말 그대로 ‘막 대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그렇게 관심인 척 포장한 편견은 사실 아예 필요 없는 일이다. 일본에서도 그랬지만, 미국에서도 너무들 관심이 없었단다. 아무도 이지선을 ‘다르다’고 쳐다보지 않았다는 것.

   
▲ ⓒ채지민 객원기자
“한국에서 저를 바라보고 말을 거는 사람들의 반응을 얘기해줬더니, 다들 황당하다고 말했어요. 그냥 지나치면 되는데 다시 또 보러 오거나 불필요한 말을 건네는 언행을, 일본이나 미국 사람들 입장에선 이해 못하겠다는 것이었죠.”

일상의 풍경을 간단하게 생각해 봐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의 일에 너무 관심이 많다. 남의 일이라 선을 그으며 넘기지 않고, 자신의 화제 속으로 무조건 끌어들이는 것이다. 길을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도, 카페나 주점에 앉아 주변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온통 남 얘기들뿐이다. 누가 어쩌고 누가 뭘 하고, 연예인 누가 어떻고 누구랑 뭐를 어떻게 했다느니…. 그런 모든 대화와 화제 속에서 쏙 빠져 있는 건 무엇일까? 바로 주어인 ‘나’를 제외시키고 가렸다는 게 고스란히 드러난다. 스스로를 가리고 언급하지 않기 위해 제3자를 끊임없이 언급한다는 거, 그런 사회 환경 한가운데서 지선 씨가 심신(心身)의 상처와 함께 존재했던 셈이다.

“특히 미국 사람들은 그런 편견에 대해 이해를 못할 뿐 아니라, 굉장히 비인간적인 행위라고 반응을 해요. 한마디로 배려가 없다는 것이죠. ‘나도 저런 일을 당하면 불쾌할 수 있겠다’ 하는 부분의 얘기들을 우리는 너무 쉽게 많이 하잖아요. 성경 말씀에 ‘내 몸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게, 저 사람이 아픈 것만큼 나도 저렇게 되면 아프겠다는 마음을 가지라는 말씀인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인식이 너무 부족한 게 우리의 현실이잖아요.”

저는 무척 밝은 사람이에요

몇 달 전 ‘사람사는 이야기’를 통해 만났던 클라리넷 연주자 이상재 교수님의 경우를 가지고 잠시 대화를 나눴다. 아시아의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온 시각장애학생 단 한 명을 위해, 대학 당국이 캠퍼스의 모든 시설물 전체에 점자스티커를 일일이 부착했다는 것. 그건 장애를 이유로 대학 입학마저 거부하던 이 땅의 현실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 곳에선 그런 혜택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배려이자, 차별금지를 실천하는 생생한 증거가 아닐까? 지선 씨의 미국 생활은 어떤지, 캠퍼스 분위기라든지 동료들과의 관계는 어떠한지를 물었다. 기대와는 다른 지선 씨의 속마음이 흘러나왔다.

“저는 사실 장애인라고 말하기가 좀 그래요. 양 손에 개인적인 장애가 있기는 하지만, 남의 도움이 직접적으로 필요한 건 아니거든요. 물론 제가 화상을 입은 다른 얼굴 모습이지만, 외국 사람들의 눈에는 어차피 서로가 다 다르잖아요. 그래서 제가 스스로를 장애인라고 부르며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하면, 다른 장애를 가진 분들께 실례를 범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미국 생활에 있어서 지선 씨가 느꼈던 장애는 외모가 아니라 언어였다고 한다. 언어가 잘 안 되고 문화적 환경이 다르다는 게 더 큰 장애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방인을 대하는 그들에게선 적지 않은 배려가 전해졌던 모양이다. 한국말을 못하면 일단 무시하려 드는 우리와는 다르게, 외국에서 온 유학생의 입장을 이해하고 인정하려는 그 나라의 시스템이 유학 생활의 불안정을 해소시키는 데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

그렇지만 주어진 환경의 영향만으로 모든 게 안착이 된 건 아니란다. 자기 장애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을 바꾸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던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자신이 있는 것이고 여기까지 오게 된 거라는 그의 설명은 큰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그건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꼭 하고 싶었던 질문이 있었기에 곧장 말을 이었다. 어느 인터뷰를 보든 기사를 읽든 간에, 지선 씨는 항상 쾌활하고 낙천적인 이미지로 묘사가 되어 있는데, 본인의 성격이 실제로 그런 것인지가 나름 궁금한 대목이었다.

“네, 저는 굉장히 밝은 사람이에요. 밝은 편이고 어두운 걸 싫어해요. 예전부터 원래 성격이 그러긴 했는데, 다치고 나서 좀 더 그런 쪽으로 발달이 된 것 같아요. 제 상황이 어두운 쪽으로 빠지기 시작하면, 그 끝이라는 게 결국은 삶을 포기하는 방향으로만 흘러가게 되어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고, 아예 초반부터 그 싹을 키우지 말자는 다짐을 늘 했어요. 그래서 기분이 가라앉을 때면 농담을 하고, 그냥 털어버리는 식으로 계속 지내온 거예요.”

그의 홈페이지를 봐도, 언론에 오르내리는 모습을 봐도, 지선 씨는 항상 미소 짓는 편안한 인상을 남긴다. 직접 만난 자리에서 들어보니 본인의 성격 자체가 그렇단다. 그게 맞는다면 안심인데, 지선 씨와 마주앉은 이후로 내내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한 가지 있었다. 지선 씨의 표정이 몹시 굳어져 있고, 한 번도 즐거운 표정을 짓지 않았다는 점이다.

세차게 내리는 비 때문일까? 다른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혹시라도… 이 대화의 자리가 불편한 건 아닐까? 혼자만의 고민과 걱정을 복잡하게 이어가고 있는데, 그 고민을 단번에 해결하는 지선 씨의 부연설명이 뒤를 이었다.

   
▲ ⓒ채지민 객원기자
“저도 기분이 가라앉을 때가 있어요. 지금도 수술한 게 잘 안 되어서 마음이 좋지 않은 상태이고, 또한 이식한 피부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웃으면 절대 안 되거든요. 그래서 보름 가까이 웃긴 것도 안 보려고 일부러 애를 쓰며 지냈어요. 남들이 옆에서 웃겨도 “야, 웃기지 마!” 하며 그냥 받아넘겼죠. 그런데 이번 수술이 잘 안 되어서 내일 다시 수술을 받아야 해요. 그런데 신기한 게 있더라고요. 오랜 시간을 안 웃고 있다 보니까, 진짜로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아요. 마음도 굳어지고…. 이런저런 이유로 가라앉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도 저는 기본적으로 밝아지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거기서 더 깊게 우울해지거나 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물론 그랬기 때문에 제가 지금 살아 있겠죠.”

첫 인턴 생활의 값진 체험

지선 씨와의 만남은 당초 지난달에 예정되어 있었다. 미국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가, 방학을 이용해 보건복지가족부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일정을 잡았었는데, 수술 일자가 갑자기 잡혀서 뒤로 연기됐고, 그 치료 과정 때문에 날짜가 다시 몇 차례 변경됐던 것이다. 지선 씨가 웃지 않았던 이유를 알고 나니, 더욱 편안하게 질문을 건네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준비했던 질문부터 던졌다. 지금 인턴으로 잠시 활동하고 있는데, 학업을 모두 마친 다음의 과정이자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말해달라고.

“지금 하고 있는 공부는 내년 5월에 끝나거든요. 사회복지학 석사 공부를 하고 있는데요. 지금 계획으로는 박사 과정으로 갈 예정으로 시험 준비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겠죠. 저처럼 사회복지 쪽에서 일한 경험이 없는 경우에는 박사로 가기가 사실 쉽지 않거든요. 그래도 도전해 볼 생각이고, 만약에 안 된다면 일단 한국으로 돌아올 거예요.”

박사 과정까지 마친다면 어떤 실무적인 일을 할 건지, 아니면 교직에 몸을 담을 것인지를 연이어 물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있단다. 그동안 뜬구름 잡는 식으로만 알고 있다가, 복지부에서 인턴으로 있는 동안 정말 많은 부분을 적극적으로 관찰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까 ‘아, 이 일도 굉장히 의미가 있겠다’는 실감을 얻은 모양이다. 직업으로 복지행정분야를 택하는 것에 큰 흥미를 갖게 됐다는 것이다.

“유학 기간 동안 느꼈던 안타까운 부분이 있어요. 사회복지를 전공하는 사람들은 사회의 일정한 변화를 이루려 하고, 정말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하잖아요. 그런데 공부를 계속하는 사람들은 공부를 다 끝낸 다음에 결국 학교로 들어가더라고요. 물론 다른 인재를 양성하는 좋은 일들이 있겠지만, 또 연구를 하고 발전시키는 역할도 담당하겠지만, 좀 더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면 복지부 같은 현장에 가서 일하는 것이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아무것도 몰랐거든요. 그런데 와서 직접 경험해 보니까 생각보다 많은 권한이 있고, 재량을 갖고 일을 추진할 수도 있더라고요. 실제 현장에서 일한다는 게 저한테는 큰 체험으로 다가온 거죠.”

민감한 질문을 던졌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으니까 선진적이고 열려 있는 학문을 익혔을 텐데, 한국에 와서 실제적인 업무를 직접 해보니까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를 살짝 언급해 달라고 했다. 아직은 그렇게 깊게 보진 못했단다. 대신 인턴으로 있는 기간이 짧다 보니까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기가 너무 아쉬워서, 회의할 때나 브리핑을 할 때나 항상 따라다니면서 더 많은 걸 보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복지부 건물 앞에서 진행되는 시위의 모습도 완전한 제3자의 입장으로 바라보며, 실제 현장의 모습과 움직임을 하나씩 익혀갔단다.

“그런데 관계자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제가 있는 장애관련부서에 다들 진짜 열의를 가지고 오시는데, 발령이 나면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아서 나가신대요. 그러다 보니까 이 부서에 공무원들이 별로 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정말 안타까웠어요. 일대일로 대화를 나눠보면 진지한 의욕을 가지고 계신 분들인데, 정말 마음이 따뜻하고 상황만 허락된다면 뭐라도 더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진 분들이신데, 공무원의 업무라서 주어진 일을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열의를 갖고 더 하려는 분들이 많으신데, 그런 분들을 어렵게 하고 힘들게 만드는 부분도 있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좋겠다는, 그런 아쉬움이 많이 들었어요.”

    ▲ ⓒ채지민 객원기자 만남, 자연스러움, 대화 그리고 웃음

지난 7월 어느 날 저녁 뉴스를 보다가 복지부에서 인턴으로 일한다는 ‘이지선’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나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이와 재회한 것 같은 반가움을 느꼈던 바 있었다. 어떻게 인턴으로 일을 하게 됐냐고 물었다. 지선 씨는 막연하게나마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올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사회복지 중에서 정책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복지정책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곳을 경험하고 싶었단다.

그런 곳이 복지부일 거라 생각하며 무작정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가 돌고 돌아서 담당자의 손까지 전달이 됐고, 너무 감사하게 연락을 주셔서 인턴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거란다.

화제를 잠시 과거로 돌렸다. 정식으로 마주앉은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지선 씨와 거리에서 마주쳤던 일이 있었다. 2002년 아니면 2003년 그 즈음이라고 떠오르는데, 서울 시내의 한 지하철역 입구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지선 씨와 마주하며 지나치게 됐다. 지선 씨의 이야기가 방송에 나오고, 여러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하던 무렵이었을 것이다.

이 글의 앞부분에서 언급했듯이, 제3자에 대한 필요 이상의 관심은 애정이 아니라 편견이자 결례임이 분명하다. 당시의 상황도 똑같았다. 모두의 시선이 지선 씨에게 집중되는 상황에서, 개인적으로는 예고 없는 마주침에 반가운 마음부터 솟구쳤다. 다가가서 격려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정말 힘을 내고 꼭 이겨내서, 좋은 결론과 희망의 내일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었다는 뜻이다.

물론 아무 말도 전하지는 못했지만, 그런 언급이 당시의 지선 씨에게 격려가 될지 마음의 상처만 덧내는 건지는 미처 헤아리지도 못했지만, 그날 이후로 ‘이지선’이라는 존재는 살다 보면 언젠가는 만날 사람이라는 생각을 늘 간직하며 지내왔다. 만날 사람이라는, 만날 수 있는 사람이리라는,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갖게 하는 사람으로 기억됐다는 것이다.

‘사람사는 이야기’의 주인공 섭외가 시작되고 지선 씨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던 날, 남모르는 혼자만의 성취감 같은 걸 느끼기도 했다. 그동안의 기대와 희망사항이 실제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것, 그건 개인적으론 무척 기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잠시 뒤로하며 자유로운 대화를 나눴다. ‘사람사는 이야기’를 진행할 때마다, 중간에 ‘우리끼리 이야기’ 마당을 살짝 마련하곤 한다. 인터뷰라 해서 거창한 격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기에, 말 그대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만큼 즐거운 자리도 없다. 웃으면 안 된다는 지선 씨의 입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연이어 흘러나왔다. 크게 웃을 만한 내용인데도 서로가 조심스럽게 언급해야 한다는 게, 오히려 더욱 즐거운 긴장감을 만들기도 했다.

그제야 중요한 사항 한 가지가 떠올랐다. 당연한 일인데도 선뜻 언급하기가 주저됐던 부분, 바로 사진 촬영에 관한 내용이었다. 보통 ‘사람사는 이야기’는 인터뷰와 촬영이 동시에 진행되고, 대화를 모두 마친 뒤에 표지와 여분의 촬영을 위해 장소를 옮기곤 했다. ‘사람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함께걸음> 표지 인물로 선정되는 건 오랜 편집 방식이었는데, 지선 씨는 섭외가 시작될 때부터 표지를 사양한다고 했었다. 안 되는 게 아니라, 치료 과정의 모습이라서 지금은 곤란하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진 촬영을 진행해도 괜찮겠냐고. 지선 씨는 뜻밖에 환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얼마든지 찍으셔도 돼요. 그런데 표지에 들어가기에는 제 상황이 좀 그래서…. 저는 괜찮거든요. 이것(수술 이후 치료를 하고 있는 모습)이 영원할 게 아니니까 저는 괜찮아요. 촬영은 편하게 하시고, 표지가 안 되는 저의 지금 상황만 독자 여러분께 설명해 주시면 돼요.”

이런 걸 가리켜서 ‘흔쾌히’ 승낙했다고 표현해야 할 일이다. 지선 씨는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이끌었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카메라의 ‘찰칵’ 소리가 이렇게 늦게 시작되기는 처음이지만, 늦은 만큼 더욱 제대로 기록해야 할 일만 남은 셈이다. 퍼붓듯이 쏟아지는 빗줄기가 점점 더 요란해지면서, 상황이 아주 안 좋아질 것 같아 다시 녹취의 마이크를 올려놓았다. 남겨진 ‘우리끼리 이야기’는 다음 기회를 기약하기로 하면서.

    ▲ ⓒ채지민 객원기자 더 나빠지지 않는다는 점에 감사드린다

‘화상’이라는 건 사실 다른 어떤 증상보다도,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위험이기도 하다. 평생 동안 골절 같은 걸 경험하지 않을 순 있지만, 크고 작은 화상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법이다. 담뱃불 앞의 라이터에서, 냄비를 올려놓은 가스레인지 앞에서, 펼쳐놓은 옷감 옆의 다리미를 통해서, 우리는 몇 차례씩 화상의 경험과 흔적을 반복하게 된다.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경험하는 상처인데도, 치유가 된 다음에는 가장 빨리 잊어버리는 것 또한 일상의 화상인 셈이다.

통계로 나와 있는 수치보다 훨씬 더 많을 게 확실한데, 실제 생활의 주변에서 가장 마주치기 어려운 장애가 화상일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 화상 중에서도 최악의 고통을 경험한 지선 씨는 세상 한가운데 서 있는데, 이 사회에서 스스로를 감추며 지내는 이들이 많다는 점 또한 현실이다. 그래서 지선 씨에게 물었다. 세상 속을 살아가는 입장에서, 같은 장애를 가진 분들께 개인적인 생각이나 의견을 담담하게 전해주면 좋겠다고 부탁을 했다.

“저는 그게 약간 부담스러워요. 저는 물론 저 스스로의 의지로 힘을 낸 것이 큰 작용을 했겠지만, 저도 가족과 주변 여러 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하나님이 계획하신 말씀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적으로 보면 사실 운이 있었던 것이잖아요. 제가 세상에 알려지는 데 있어서 예전에 학교를 다녔다는 것, 제가 글을 썼고 그게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는 것, 책을 두 권 냈다는 것과 같이 저는 여러 가지로 진짜 많은 혜택을 받은 사람이에요. 그런 제가 ‘당신도 저처럼 해보세요’ 하며, 모든 상황에 제 입장을 대입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저는 그런 게 안타까운 거예요.”

실제로 그의 홈페이지에 이런 글이 올라온 적이 있었단다. 어느 분이 글을 올렸는데, 자신은 1살 때 크게 다쳤다고 밝히고선, ‘그래도 지선 씨는 23년 동안 예쁜 얼굴로 살지 않았나요’ 하는 말을 남겼다는 것이다. 갑자기 스스로가 너무 많이 미안해졌고, 거기에 대해선 정말 대답을 할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딱 한 가지 할 수 있는 얘기는 이런 것 같아요. 솔직히 다른 장애나 다른 병에 비해서 화상은 겉으로 드러나는 게 굉장히 크지만, 결국은 더 나빠지지는 않거든요. 이 장애라는 상태가 더 깊어지지도 않고, 이미 장애를 받은 상태에서 수술을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라는 게 남아 있잖아요. 물론 수술한다고 해서 수술한 만큼 결과가 좋지는 않아요. 무슨 정형외과 수술처럼 뼈를 딱 맞추며 끝나는 게 아니니까요. 이식한 피부들은 계속 줄어들어요. 그러면 다치지 않은 살 중에서 하나를 떼어내서 이식을 해야 하고, 그러면 또 하나의 상처를 몸 어딘가에 남겨야 하고…, 이 과정이 엄청난 인격수양을 해야만 견딜 수 있는 그런 것이거든요.”

그래서 스스로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 하고, 기대를 가졌다가 또 실망해야 하는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방법)이 남아있다는 점 하나가 희망으로 존재한단다. 그것이 바로 수술인데, 수술만으로 100% 완치라는 건 물론 없는 거란다. 하지만 100%가 아니더라도 10%나 20% 정도나마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는 게, 그나마 숨통을 트이게 만드는 등불로 남겨진다는 것이다.

“저는 인생이 그런 것 같아요. 사람들이 절망한 순간에 ‘아, 내 인생이 끝났다’ ‘앞으로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정말 그러면서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잖아요. 그런데 그 끝은 그 사람이 낸 것이에요.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의 생각이었지, 실제로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던 거잖아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기 때문에, 갈등하고 힘들어하면서 최악의 선택을 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절망하는 순간에 붙잡을 만한 한두 가지의 희망을 떠올리고 그 희망을 붙잡고서 일어선다면, 그렇게 해서 그 순간을 넘기게 된다면 또 하나의 생이 보일 거예요. 진짜로 저는 그렇게 지나왔거든요. 이걸 지나면 또 하나가 보이도록 찾아서 그걸 붙잡고 지나오고, 계속 또 하나를 붙잡으며 지나오고…. 정말 산 너머 산이었어요. 하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는 과정 속에 더 좋은 날이 분명히 있다고 저는 믿고 있어요.”

듣는 순간에도 마음속으로 밑줄을 두껍게 그었던 대목이 바로 위의 내용이다.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이지선’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그 생생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죽고 싶었다가도 아니, 죽어 싶었다기보다는 죽는 게 당연한 순서일 거라고 받아들여야 할 현실 앞에서, 지선 씨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게 자기 이름 석 자를 불러주었고, 낯선 형상의 거울 속 모습이 다시 이지선이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됐던 게 아닌가.

나름 힘들고 어렵다며 주저앉거나 한탄을 해야 할 때, 지선 씨가 던져준 위의 내용을 되새긴다면, 좌절은 오히려 호사스러운 넋두리로 치부될지도 모를 일이다. 산 증인의 언어는 그래서 인생의 무게를 담게 되는 법이다.

“저는 이 세상이 너무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선 특히 ‘다르다’는 말과 ‘틀리다’는 말을 혼용하면서 쓰잖아요. 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나하고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쳐다보고 다른 것에 집중하면서도,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기혼란을 겪게 되죠. 그런데 ‘나의 다름’에 있어서 스스로도 그냥 그 자체의 다름으로 끝났으면 좋겠어요. 굳이 구별하고 나누려 애쓰지 말고, 다름은 다름 그 자체로 인정하는 게 함께 사는 인생의 지혜가 아닐까 싶어요.”

    ▲ ⓒ채지민 객원기자 내일의 믿음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

<함께걸음>의 ‘사람사는 이야기’ 글 작성은 다른 기획 테마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를 만나 얘기 나눴던 내용 그대로 풀어낸 뒤, 읽기 좋게 정리하고 마무리한다면 이틀 안에 끝내는 것도 물론 가능하다. 그럴듯한 사진 몇 장 선택하고, 오탈자가 없는지 확인하며 편집실에 넘기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빨리빨리’의 법칙에 순응하는 습성이라면, 이러한 만남의 취재를 매달 두세 편씩 진행한다 해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다.

그런데도 이 글 하나를 적는 데만 일주일 이상 필요로 하게 되는 이유는 단순명료하다. 어느 누군가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현재를 ‘살아가는’, 앞으로 ‘살아갈’ 삶 전체를 보다 깊게 관찰하기 위해선 가능한 한 그 사람의 마음속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고, ‘그의 시선’으로 세상을 투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발언하는 언어 그대로를 복사하듯 전달하기는 아주 쉽다. 허나 ‘사람사는 이야기’의 존재이유는 그게 아니라고 늘 생각한다. 그 누군가의 삶을 가급적 진솔하게 공유하기 위한 ‘지면(誌面)으로써의 가치’를 지녀야 한다고 나름 굳게 믿고 있다는 것이다.

녹음한 대화 내용 전체를 거의 외울 만큼 듣고 또 듣는다. 그런 다음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모든 내용을 받아 적는다. 며칠간 그런 과정을 진행하다 보면, 취재대상으로 만났던 ‘그 누군가’가 실제 현실의 오랜 인간관계처럼 마음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같은 세상을 함께 살아왔던, 함께 살아가는, 앞으로도 함께 살아갈 절친한 지인(知人) 같은 존재로 그 이미지가 탈바꿈하는 것이다. ‘사람사는 이야기’는 바로 그 시점에서 활자로 기록되기 시작한다.

서울 올림픽공원 소마미술관 앞의 파라솔과 의자에 앉아 나눴던 지선 씨와의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녹음기록의 절반은 ‘쏴아’이고 나머지 절반의 절반은 ‘휘익’이었다. ‘쏴아’는 내리치던 폭우의 울림이고, ‘휘익’은 책장마저 넘겨버리던 거센 바람의 소리였다. 결국 지선 씨의 음성은 4분의 1 정도의 소곤소곤 음성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그 내용을 정확히 받아 적으려고 최대한 집중하며 며칠 동안 반복하다 보니, 이젠 이 글을 마무리하려는 순간에도 지선 씨의 음성이 귓가에 또렷이 들려온다. 바로 옆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자리를 정리하면서 나눴던 대화 가운데, 지금껏 지워지지 않고 가슴에 새겨진 대목이 한 가지 있다. 피부의 상태가 어떠냐고 개인적으로 물었을 때, 지선 씨는 정말 실감나게 이해할 만한 표현으로 자신의 상태를 전해주었다. “얼굴 여기저기에 빨래집게를 잔뜩 집어놓은 느낌, 그 아픔과 당김 같은 걸 이해하실 수 있을까요?” 뭐라고 대답할 만한 단어조차 떠오르지 않던 그 자리에서의 충격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런 상태에서도 “저는 굉장히 밝은 사람이에요!”라고 편안한 미소로 말할 수 있는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을까.

바닥을 경험한 사람만이 그 바닥을 딛고 일어선다고들 여기저기서 말한다. 그런데 지선 씨가 바로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인생의 바닥을 경험했다는 이들은 ‘자신의 생각만큼의 바닥’을 경험했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바닥이라고 선택한 그 시점에서 극단적인 생각을 떠올리는 게 요즘의 세상 흐름이 됐다.

진정한 바닥은 어디일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판단할 때 ‘최후의 바닥을 실제 경험했던 이는 누구일까?’라고 묻는다면, 많은 이들의 입에서 이구동성으로 ‘이지선’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리라는 건 의심할 여지마저 없는 일이다.

지선 씨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까? 물론 그의 선택에 따라 A가 될 수 있고 B가 될 수도 있겠지만, A든 B든 C든 D든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기대할 수 있는 확신을 얻게 됐다. 그가 무엇을 하든, 자신의 선택 안에서 최선을 다할 거라는 점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큰 목소리로 외치는 요란한 응원 같은 건 접어두고, 진지한 마음으로 지선 씨에게 나지막한 격려의 인사를 속삭이고 싶다. 이 작은 응원의 속삭임이 ‘나비효과’가 되어 되돌아올 날이 멀지 않았음을… 우리는 믿는다.
작성자채지민 객원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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