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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장애인 복지 지원은 통일의 초석이다

[함께걸음이 만난사람] 사단법인 등대복지회 상임이사 신영순

본문

국가적 과업이라고 드러낼 만한, 자랑할 만한, 자화자찬 일색의 사업일수록 예산이 필요 이상 투입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다수의 국민적 의견은 아주 쉽게 무시해버리면서도, 3,4년 후의 일 따위는 괘념치 않는다. 힘이 있을 때 밀어붙여야 각종 혜택을 서로 나누고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혜택은 ‘그들만의 리그’ 즉, 권력과 자본을 가진 극소수에게 집중된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해당 사업에 세금 한 푼 쓰지 않겠다던 공약도 거짓으로 드러난 지금, 이 땅에 환경대재앙의 불씨를 당기려고 수십 조 원의 국가 예산을 몰아넣는 작업이 시작되고 있다. 그 자금은 어디에서 충당하는가. 후손들이 알아서 갚도록 미래에서 빌려오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영역을 줄이고 없애며 마련하는 게 가장 빠르고 손쉬운 방법이다.

이 대목에서 우문(愚問) 한 가지를 던진다. ‘그들’의 눈높이에서 ‘중요하지 않은 영역’은 어디이고 무엇일까? 관심도 없고 심각하게 들여다본 적도 없으며, 불필요하게 여겨지는 분야부터 예산을 삭감시키는 행정은 이미 공공연하게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우문에 대한 해답은 ‘사회복지’ 즉, 자신들의 목적달성을 위해 무시해버려도 상관이 없을 분야는 ‘복지정책’이라 해야 될 일이다.

10년 넘는 절규와 투쟁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최소한의 기반을 일궈낸 바 있던 정책들이 일순간에 붕괴되는 지금, 그 탄식과 좌절과 울분에 너무 많은 이들이 쓰러져가고 있는 지금, 이런 시점에서 우리 사회가 아닌 북한의 장애 관련 정책을 들여다본다는 건 지나치게 한가로운 생각일까? 당장의 현실이 이토록 어려운데, 평소 관심조차 없었던 북한 내부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는 건 본말전도(本末顚倒)일 뿐일까?
아니다.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몰랐던 더 많은 사실을 알아야 하고, 그 하나하나의 자료들을 모아 객관적인 증거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북한 장애계의 현실은 멀게 느껴야 할 막연한 대상이 아닌, 언젠가는 함께 풀어야 할 당면과제로 부각될 폭발력을 지닌 사안이기도 하다.

남북을 잇던 햇볕이 사라지고 모든 교류가 끊어져버린 먹구름의 정국이지만, 그 속에서도 북한 장애계를 위한 실질적 지원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단체가 있기에 방문의 손길을 두드렸다. 사단법인 등대복지회 신영순 상임이사를 만나, 우리가 몰랐던 북한 현지의 생생한 소식을 함께 들어본다.

대담 내용 중에 등장하는 장애 관련 비속어(卑俗語)들은 대담자의 의견이 아닌, 북한에서 실제 사용되고 있는 일상적 언어 표현의 인용임을 미리 밝혀둔다. (편집자 주)

   
▲ ⓒ채지민 객원기자
- 현 정부 들어서 남북 간의 교류가 완전히 끊겼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민간차원의 교류, 그것도 북한의 장애인들을 위한 지원이 계속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너무나 기쁜 소식이었다. 그동안의 활동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말씀해 달라.

“우리 등대복지회의 설립취지부터 말씀드리는 게 낫겠다. 등대복지회는 2004년 5월에 통일부 산하 비영리 민간단체로 설립됐다. 북한을 포함해서 소외되고 고통 받는 국내외 이웃들에게 사랑과 나눔의 정신을 실천함으로써, 더불어 함께 잘 살 수 있는 복지사회를 건설하고 민족화해를 위해 이바지하자는 정신으로 시작했다. 특히 북한 어린이와 고아, 장애인과 노인, 산모 등 북한 사회의 취약계층을 위한 인도적인 사업을 중점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중이다.”

- 인도적인 사업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포함하고 있나.

“최우선적으로 미래 통일세대의 주역이 될 북한 어린이들을 지원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어린이들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콩우유와 빵을 급식하게 하며, 육아원과 애육원·탁아소와 소학교 아동들을 위한 식량과 교육의 개선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생활환경개선과 의료지원사업을 더불어 실시함은 물론이다.”

- 보건의료 분야에도 지원이 있다고 들었다. 그 내용을 알고 싶다.

“평양적십자병원 안과수술차량을 지원했고, 회령산원수술실 지원을 했다. 구급차와 긴급의료구호 지원 등 북한의 보건의료환경의 개선과 발전을 위한 의약품과 의료장비 지원과 함께,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질병의 예방과 치료 지원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이지만, 지금의 남북관계는 거의 단절됐다는 표현이 나올 만큼 굳건한 벽이 쌓였다고 다들 알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실질적인 사업을 진행한다는 건 사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게 어떻게 가능하고 어떤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듣고 싶다.

“질문에 대한 답변 이전에, 우리 복지회 차원의 질문을 먼저 드리고 싶다. 등대복지회 활동에 관해서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가 우리 입장에서는 먼저 궁금해진다.”

- 장향숙 전 국회의원님과 같이 북한에 가셨다고 들었다. 얼마 전에 그 분을 만났는데, 이런 움직임에 대한 상황을 말씀해주셨다. 그러면서 우리 장애계도 북한에서 장애를 가지신 분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냐는 충고와 의견을 전하셨다. 그래서 상임이사님을 만나 뵙고 등대복지회의 활동이 지향하는 바를 진지하게 확인하고 싶어진 것이다. 처음에 어떻게 북한으로 시선을 돌리게 되셨는지, 그리고 2005년부터 장애인 중심으로 주력하시게 됐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방향을 전환하게 된 이유가 있으신가.

“처음에는 북한 어린이 돕기를 주요사업으로 시작했다. 고아원 중심으로 시작했었는데, 고아원은 지금도 지원을 많이 하고 있는 편이다. 내가 1998년에 북한을 갔을 때의 에피소드부터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다. 북한의 장애계가 실질적으로는 어떤 상황인지를 전혀 몰라서, 함께 하던 북한 관계자한테 물었다. “북한에 장애인들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장애인이 뭡니까?”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니까 이런 답변이 나왔다. “아, 그 머저리들 말입니까?” 그러는 거다.”

- 정말로 그렇게 얘기를 했나? ‘머저리’라는 표현은 참으로 충격적이다.

“그래서 나는 반대의 경우로 다시 질문을 던져야 했다. “머저리가 뭡니까?” 정말 그렇게 물었다. 나는 ‘머저리’라는 표현의 의미를 몰랐지 않은가. 그런데 거기에서는 장애인을 머저리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너무 기가 막히는 표현이 아닌가. 그래서 되물었더니, 그들은 “아, 우리는 장애자라는 그런 사람 없습니다. 딴 나라에선 그런 사람이 많습니까?” 하며 다시 되묻는 거다. “우리 조국에는 그럼 사람 없습니다.”라는 부연설명까지 뒤따랐다.”

   
▲ ⓒ채지민 객원기자
- 난감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과 표현이다. 그렇다면 상임이사님은 어디까지 직접 목격하며 관찰을 했다는 것인가.

“북한을 다녀온 이들은 다 똑같은 말을 한다. 길거리에 장애인이 없다고. 안 보인다고. 그런데 사실 우리가 북한의 장애인들을 길에서 쉽게 볼 수 없다는 건 다른 관점에서 확인해야 할 문제이다. 북한에 가는 남한 단체들이 보통 2박 3일 내지 3박 4일 정도 있다가 오지 않는가. 그런 식으로 다양하게 돌아다니지 못하는 상태에서 필요한 사업장 위주로 돌아보게 되니까, 오가는 길에서 그 나라의 특징 같은 걸 관찰하며 내부까지 들여다볼 수 없다는 건 당연한 일이다.”

- 그런 상황까지 목격하면서도, 장애인 쪽으로 지원사업을 바꾸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1998년부터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됐다.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막내딸이 지적장애를 갖고 있다.”

- 아, 그런가? 그건 몰랐다. 가슴이 많이 아프시겠는데 장애가 몇 급인가.

“현재 미국에 있다. 그래서 장애등급 같은 건 없다. 아주 심한 중증은 아니지만… 어렸을 때 뇌막염을 앓아서 지적장애가 됐고, 최소한의 기본적인 언어만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14살 때 뇌수술을 한 이후로는 걸음도 잘 안 돼서 휠체어에 앉아 생활하고 있는 중이다. 1979년 당시에 나는 전라남도 순천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집 바로 옆이 애향기술원이었다. 그 기술원을 아시는가?”

- 당연히 안다. 우리나라 장애인들이 수술을 많이 했던 애향병원의 그 기술원을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그렇다. 그 기술학원이 바로 옆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장애인들을 접하게 되었고, 장애인들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갖게 됐다. 당시는 내 딸이 2살이던 때였다. 그런 인연으로 서울에 이사를 온 이후에도 우리 집에서 장애인들의 모임을 매달 한 차례씩 가지며 지냈다. 81년부터 91년까지 꾸준히 진행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장애계와의 인연은 아주 오래된 셈이다. 지금 내 딸이 33살이니까 말이다.”

- 그렇게 많은 활동을 하셨는데도, 그런 사실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것 같다. 장애계에서 그렇게 활동하셨다면 두루 알 수 있고 널리 알려질 만했을 텐데, 처음 듣는 사실이라서 오히려 새롭게 느껴진다.

“내가 91년부터 서울 번동에서 장애인보호작업장을 7년 동안 운영했다. 처음에는 지역 장애인들 중심으로 옷 만드는 일을 했었다. 서울 강북구 번동 지역에 영세민 영구임대아파트가 있지 않은가. 특히 2단지 3단지 5단지가 영세민 임대아파트라서, 내가 5단지 2층에 보호작업장을 받게 됐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한테 편지를 보내서 그 자리를 무상으로 받은 것이다. 그래서 91년 9월에 문을 열고, 그 지역사회에서 작은 형태의 복지관 형식으로 노인무료급식과 특수교육을 함께 병행했다. 그러다가 97년 말에 이르러 ‘북한이 더 어려운 곳인데 그 곳으로 가야겠다’결심하고, 그 장애인보호작업장을 온누리교회에 넘겨드렸다.”

- 보호작업장을 운영하다가 북한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 계기 같은 게 있는가.

“처음의 계기는 이렇다. 미국의 샬롬 장애인선교회에서 ‘사랑의 휠체어 이야기’라는 음악회를 열었다. 그렇게 음악회를 열어서 모금되는 기금을 가지고, 한국 중국 필리핀 등지에 200대에서 300대의 휠체어를 장애인 시설에 지원하는 후원행사를 계속했다. 그런데 그 행사 담당자가 “우리는 이 휠체어 후원을 북한에도 보내고 싶은데, 길이 없어서 못 보내고 있다”는 고충을 얘기하는 걸 듣고 나서 “아, 그럼 내가 그 심부름을 하겠다”고 자원했다. 장애인을 위한 휠체어 220대는 그런 과정과 인연을 통해 북한에 전달이 됐다.”

   
▲ ⓒ채지민 객원기자
- 그냥 전달한 건가. 아니면 국가기관이나 특정단체를 통해 지원했던 것인가.

“90년대 말에 ‘조선장애자협회’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그 단체가 우리와 만난 이후 2년만에 ‘조선장애자보호련맹중앙위원회(KFPD)’로 명칭을 바꾸며 발전하게 됐다. 우리는 그 련맹을 직접 소개 받아 지원사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올해는 중앙위원회가 발족한 지 1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기도 하다.”

- 그럼 그때부터 북한 장애인들의 실태를 많이 들으셨을 것 같은데, 우리 장애계도 그 대목을 많이 궁금해 한다. 북한에는 주로 어떤 장애인들이 많은가.

“소아마비가 우리 남한보다 훨씬 더 늦게까지 있었다고 들었다. 농아들이 많고 맹인들, 그러니까 청각장애와 시각장애를 가진 분들도 많다. 지금 농아학교, 그러니까 북한식 표현으로 ‘롱아학교’인 청각장애인 학교가 여덟 군데 있다. 소아마비나 뇌성마비들을 위한 특수학교는 없다.”

- 없다는 의미는 그들이 일반학교를 다닌다는 건가?

“그들을 위한 학교 자체가 없다는 뜻이다. 학교 공부를 안 하고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냥 부모님들이 돌보는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그런 건 전혀 모르는 상태이다. 물론 북한의 공식 발표로 본다면 장애인 숫자는 76만 명이라고 알려져 있다. 련맹에서 나온 얘기니까 공식적인 발표라고 보면 될 것 같다.”

- 상임이사님이 한국에서 장애인 분야의 일을 직접 하셨으니까, 북한에 가서 관찰한 결과를 본다면 남과 북의 차이를 잘 아실 것 같다.

“차이가 많이 난다. 내가 91년에 했던 보호작업장은 당시만 해도 독립된 장애인 보호작업장으로는 처음이었다. 그 당시의 에피소드 한 가지를 예로 들어야겠다. 장애인 보호작업장을 하겠다고 했더니, 당시 시청의 사회복지과 담당자가 나한테 이런 말을 했다. “아니, 울고 다니려고 이런 일을 하냐? 젊은 아줌마가 이런 일을 왜 하냐? 장애자들 도와봐야 나중에 혼자 울고 다니게 된다. 그러니까 하지 마라.” 이건 당시에 중간책임자였던 사람이 내게 직접 했던 실제 얘기이다.”

- 행정 담당자가 그런 얘기를 했을 정도라면, 듣는 입장에서는 정말 기분 나쁜 얘기일 수밖에 없다. 그게 사실인가.

“물론 사실이다. 당시에 듣고 있던 나 역시 정말 기분이 나빴다. 그런 일들이 남한의 이 땅에서 90년대 초에 벌어졌다고 해보자.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인가. 그런데 북한은 우리나라의 6,70년대를 떠올리시면 될 것 같다. 분명히 열악한 상태임은 분명하다. 대신 장애자보호련맹에서 일하는 분들은 정말 최고의 엘리트들이다. 더욱이 유럽동맹과 같이 협력해서 일을 하기 때문에, 아주 급발전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 등대복지회가 같이 협력하기 시작하면서, ‘보통강 종합편의(북한 최초의 장애인 자립자활센터)’가 생겼다. 지금 장애인예술단에 맹아연주단… 아, 이 대목에서는 양해를 바란다. 북한에서 쓰는 표현으로 말하다 보니까, 우리의 표현과 다른 점이 많아 오해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

- 그건 전혀 아니다. 그 정도는 우리 독자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오히려 현지의 생생한 표현을 듣게 된다는 게, 우리에게는 훨씬 더 큰 도움이 된다. 개의치 말고 편하게 말씀해 달라.

“그럼 평소 업무 차원에서 하던 용어 그대로 편하게 말씀을 드리겠다. 장애인예술단으로 맹아연주단과 농아연주단이 생겼다. 또 지금은 지체장애인들 체육 훈련을 시키고 있다. 그리고 11곳의 특수학교에서 우리의 지원 하에 기술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남과 북의 수화체계가 전혀 다르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얼마나 다른지 조차 모르는 게 현실이다. 조선시대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남과 북의 체제가 나눠지고 달라진 다음부터, 북한은 옛 소련과 옛 중공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순수한 남과 북의 언어로 된 수화가 개발이 되지 않았고, 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채지민 객원기자
- 그런 부분들을 바로 잡기 위해 시급한 일이 남과 북, 북과 남의 장애인들이 함께 모여서 교류와 세미나를 빨리 열어야 한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바로 그것이다. 나도 그 대목을 굉장히 중요하다고 보고 있는데, 정말 아쉽게도 지금 남북의 관계가 경색되어 있는 상태라서 많은 계획들이 무기연기가 된 상태이다.”

- 남한에 여러 장애인 관련 단체가 있지 않은가. 그들이 북한의 중앙위원회와 연결될 수 있도록 등대복지회가 역할을 담당해주면 좋을 것 같다.

“우리가 2006년에 합의서를 맺은 것이 있다. 남한과 해외의 장애인 단체들이나 개인들이 북한을 돕고 싶다면, 등대복지회를 통해서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 모든 대외 단체와 개인을 장애자보호련맹과 연결시키는 일을 우리가 담당한다. 즉, 장애와 관련된 대외창구 역할을 우리 복지회가 전담하게 됐다는 것이다.”

- 그런 합의까지 맺고 합의서를 작성했다는 의미인가?

“그렇다. 이번 주말에도 북경에 가야 한다. 장애자보호련맹의 부위원장이 지금 북경에 와 있는데, ‘장애인원아발전기금’을 조성하기 위해서 거기에 대표부를 세우기로 했다. 원아들을 장애자보호련맹에서 돕겠다는 것은 원아들을 잘 먹이고 건강을 지켜주는 자체가 장애자 예방 차원으로 본 것이다. 또한 장애를 갖게 된 아이들을 회복시키는 차원에서도 아주 중요한 사업이다. 그걸 담당할 대표부가 조선장애자보호련맹중앙위원회에서 북경에 설치하는 ‘장애인원아발전기금’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북한의 용어대로 ‘장애자원아발전기금 북경대표부’이다.”

- 용어를 잠깐 정리해야겠다. 장애자원아발전기금의 ‘원아’가 무슨 뜻인가.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의미하는가.

“아니다. 장애인과 원아, 그러니까 원아는 고아를 말하는 것이다. 그 사업을 우리 등대복지회가 같이 협력하며 진행할 것이다.”

- 외람된 질문일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 규모면에서 크고 활동범위도 넓은 민간단체들이 적지 않은데, 북한의 중앙위원회가 등대복지회 하나만 대외창구로 인정한다는 건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건지 궁금해진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남쪽 단체들에서 련맹중앙위원회의 문을 두드린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위원회에서는 더 이상 안 만나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불필요한 오해와 불협화음이 많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무조건 만났다가 ‘우리가 무엇무엇을 해주겠다’고 해놓고선 안 해주는 단체가 많고, 또 자기(련맹)들이 하지도 않은 얘기를 만들어 발표하는 등의 부작용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의향을 가진 단체들이 있다면 우리가 먼저 직접 만난다. 만나서 무슨 일을 하고 싶고 어떤 일을 추진해 달라고 하면, 우리가 서로 긴밀하게 토론을 해서 이 단체가 정말 해줄 만한 단체인지 확인하고, 그런 의사가 확실할 경우에 한해 련맹에 말을 해서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게 하고 있다.”

   
▲ ⓒ채지민 객원기자
- 아까 11곳의 학교가 있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지원하는가.

“맹아학교는 세 군데인데, 거기에는 주로 악기를 보내고 점자인쇄기와 전필 등을 우선적으로 보낸다. 그리고 학교용 교재와 기술교육을 위한 기자재들, 거기에다 선생님이나 부모들이 농사를 짓는 경우도 많으니까 농기구들도 지원한다. 국수기계와 콩우유기계도 보낸다. 생활개선과 특수교육을 위한, 장애인 능력개발을 위한 물품들은 거의 대부분 포함된다고 보시면 되겠다. 우리가 련맹에 보내면, 련맹 차원에서 각 학교별로 필요한 물품들을 파악한 뒤에 전달하게 된다. 그런 교섭을 우리와 아주 긴밀하게 하고 있다.”

- 그런 긴밀함이라는 건 사실 그동안 한 번도 신뢰관계를 잃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한 것 같은데, 결정적으로는 보통강 종합편의의 건립과 운영이 아니었을까 개인적으로 판단하게 된다. 그 대목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그렇다. 북한 사회의 관점으로 볼 때는 아주 획기적으로 장애자 마크가 들어간 간판이 올라간 첫 번째 사례가 된다. 예산만 7억 정도 들어갔는데, 장애인들에게 다양한 교육과 혜택을 주고 있는 중이다.”

- 구체적으로 어떤 교육과 혜택이 돌아가는 것인가. 그 내용을 알고 싶다.

“장애인들이 이발(실), 미용(실), 양복과 양장과 한복, 시계수선과 신발수선과 도장을 파는 인장 들을 하고 있다. 콩우유공장과 빵공장도 바로 뒤에 있다. 남녀 목욕탕도 운영하고 휴게실과 매점도 있다.”

-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복지관 형태로 운영된다고 보면 되는 것인가.

“복지관이라기보다는 지역사회 모든 주민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래서 누구나 보통편의에 옷을 맞추러 가고 목욕도 하러 간다. 단, 장애인들한테는 특혜를 준다. 목욕탕을 이용하고 이발과 미용을 하는 건 한 달에 한 번씩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 그동안 구체적으로 실상을 얘기하는 데가 없었고, 아까 처음에 말씀하셨듯이 북한 측에서도 장애 자체를 부인하는 입장을 견지해왔다는 점에서는, 북한과 이런 사업을 한다는 건 정말 큰 의미를 둘 수 있겠다. 같은 민족으로서 북한 장애인의 실태가 어떠한지, 여기를 통해 처음 알려지는 게 아닌가.

“그건 이렇게 생각하시면 될 것 같다. 예를 들어 6,70년대 남한의 청와대에 근무하던 사람들한테 “남한에는 장애인이 어디 있나?” “장애자 학교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어봤다면, 특수학교나 복지관이 어디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됐었겠나. 외교부에 근무하는 사람한테 “한국에는 장애인 학교가 몇 곳이 있는가?”라고 묻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시면 된다.”

“지금은 사회적 인프라 확대로 정보를 공유하기가 쉽지만, 당시는 자기 가족이나 주변에 장애인이 없었다면, “글쎄, 내가 보기에는 장애인이 없는 것 같은데?”라는 대답이 나왔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남과 북의 일을 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공통점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그냥 똑같은 조선민족, 한민족일 뿐이라는 것이다.”

- 지금 북한의 장애인들이 제일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이라고 보시는가.

“장애인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라면 우선 사람이 먹어야 사니까 먹는 것일 테고, 또 사람이 먹고만 사는 게 아니기에 악기와 운동기구 같은 것을 보내게 됐다. 지금 너무나 서로의 감정들이 어긋나 있고 불신과 미움도 많은 상황인데, 장애인들의 이런 교류를 통해서 그와 같은 불신과 미움 그리고 민족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들이 굉장히 많이 해소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 어쨌든 체제가 완전히 다른 사회주의공화국인데, 접근하기 힘든 점은 없으셨나.

“지금도 가면 안내(자)가 24시간 따라붙어 같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다 형제 같고, 같은 민족이고 같은 말을 한다는 생각만 떠올린다. 이젠 내가 어디를 가고 싶다고 하면 거의 다 수용해 준다. 그런데 내가 모시고 가는 분들이 남쪽 사람들인 경우는 제재가 조금 더 강하게 진행된다. 그 곳의 규율이 따로 있으니까 속이 상하기도 하지만, 형편이 그런 걸 어떡하겠는가. 일단 거기에 갔으면 거기의 규칙을 따라주고, 우리를 맞이하고 동행하는 관계자들한테 해가 가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본다.”

- 얼마나 자주 가시는 건가.

“작년 기준으로 본다면 10회 정도 다녀온 것 같다. 주로 지원사업 때문에 가는데, 우리가 올해 3월에 ‘대동강 장애인문화센터’를 새로 문 열었다. 거기는 장애인의 예술 체육 교육 훈련을 하고 능력개발을 하는 곳이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장애인 사업은 거의 100% 우리 복지회에서 관장하고 있다고 보시면 되겠다.”

   
▲ ⓒ채지민 객원기자
- 주로 기초적인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는 것 같은데, 좀 민감한 질문을 드려야겠다. 그 많은 사업활동을 위한 비용이 적지 않을 것 같은데, 그 지원자금은 어떻게 마련하고 계시는가.

“우리가 통일부 소속 대북지원담당 비영리 민간단체로 등록한 게 2004년이고, 그때부터 사단법인 등대복지회로 공식 출범했다. 그래서 2005년부터 남북협력기금을 받으며 보통강 종합편의부터 북한지원사업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는데, 우리는 11개의 특수학교를 모두 다 지원하겠다고 먼저 제의했다. 왜냐하면 장애인 지원사업은 복지의 가장 기초이기 때문이다.”

“장애인은 한 가족의 일원이다. 그리고 장애인 가족들은 모든 재산을 탕진할 만큼 치료에 몰두하다 보니 가난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건 북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통일이 오기 전에 복지정책이 구축되려면, 남과 북이 같은 복지를 가져야만 통일이 된다고 보고 있다.”

- 아주 중요한 대목을 말씀하시는 것 같다. 서로 이질감 없이 하나가 되려면 같은 복지를 가져야 한다는 대목에 공감한다.

“일본의 복지, 미국의 복지, 유럽의 복지가 잘 되어 있다 해도, 그걸 북한에 그대로 가져가서 정착시킬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우리는 남북통일을 위해서는 그동안 발전된 남한의 복지를 활용해야 한다. 북한의 장애인 복지라는 건 극히 초기단계일 뿐이니까, 그동안 우리가 개발하고 발전시켜온 복지를 북한에 구현시켜주면 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장애인 복지 분야가 정치보다 훨씬 앞서 나가며 통일의 기초를 이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복지에는 이념 같은 게 투영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통일이 천천히 오든 갑자기 오든, 이건 빨리 구축을 해야 나라의 혼란이 없고 우리 민족의 미래가 빠르게 한반도 안정으로 구체화될 것이다.”

- 유용한 정보와 좋은 말씀 감사드린다. 마지막 질문을 드리겠다. 남쪽의 장애계 또는 복지관련단체에서 북쪽의 장애계를 돕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무엇이 있을지 알고 싶다. 기금 마련이나 장비 지원 등의 원론적 표현으로는 도움을 주려는 일에 동참하기가 주저될 것 같다. 가장 간단하고 효과적인 방식은 무엇이 있을까.

“안 쓰는 중고악기를 모아 주시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하모니카, 바이올린, 기타 등 사용가능한 중고악기들을 모아 주시면, 또한 여러 운동기구들을 보내주신다면, 그걸 깨끗하게 수리해서 북쪽에 전달할 수 있다. 이념적으로 막힌 물꼬를 풀고 얼어버린 남북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선, 같은 민족이라는 심정적 동질감으로 풀어가는 것 또한 훌륭한 방안이다.”

“문화예술분야에서 그 실마리를 찾는 게 빠를 수 있다. 교류라는 건 막연한 게 아니다. 물꼬가 트이고 한두 명의 왕래가 단체의 교류로 확대되다 보면, 남쪽의 장애인들이 버스 몇 대에 나눠 타고 육로를 통해 북쪽의 장애인들을 만나러 가는 일 또한 불가능한 게 아니지 않은가. 더 큰 통일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 움직임은 반드시 실현되고 완성되어야 할 일이다.”
작성자이태곤 기자  a352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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