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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노력이 세상을 바꾼다"

사람사는 이야기- 정금종 서울시장애인체육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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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항상 두 가지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첫 번째는 흑백TV 시절인 1976년의 일이다. 양정모라는 선수가 금메달을 땄다고 했다. 당시 서울 모처의 공단 지역 안에 살았던 터라, 일순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목이 터져라 함성과 만세를 부르는 장면은 정말 처음 보게 됐다. 사방팔방 골목길 전체에 모든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서, 만세를 부르며 엄청난 환호를 내질렀던 것이다. 그 장면은 지금껏 생생하게 남아 있는 흑백의 동영상 같은 추억이기도 하다.

또 다른 하나는 칼라TV로 바라봤던 대학 시절의 올림픽이다.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떠들었던가. 쿠데타 집권세력의 정권 홍보 일색이었던 1988년의 서울은, 한편으론 최루탄 일색의 캠퍼스와 거리를 떠날 수 없었던 현대사의 실제 현장이기도 했다. 그 시절의 암담하고 암울했던 현실들을 언급할 필요까지는 없기에, 여기서는 정말 처음 경험하게 된 신기한 대목 한 가지만 끄집어내려 한다.

저녁 또는 밤늦은 시간마다 모든 방송을 도배했던 건, ‘하이라이트’라는 이름의 경기 결과 요약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메달을 땄다는 외국 선수들의 직업 소개가 충격 이상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어느 종목의 금메달을 딴 외국 선수 아무개는 본업이 치과의사이고, 다른 종목의 은메달리스트 아무개는 어느 기업의 개발담당자라는, 또 다른 우승자 누구는 중학교 국어교사이고 다른 누구는 변호사로 활동 중이라는, 완전히 상상으로만 가능할 법한 내용들이 실제 현실로 눈앞에 펼쳐졌던 것이다.

국가적인 관제(管制)체육에 익숙했던 80년대 시절, 운동선수는 무조건 운동만 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절대적이었던 게 이 땅의 자화상 아니었던가. 실제로 수업 시간에 안 보이는 건 운동부에 소속된 친구들이었고, 공부와 담을 쌓는 건 운동에 전념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논리가 당시의 일상적 풍경이기도 했다. 그와 같이 대한민국의 운동선수들은 ‘당연히’ 수업시간에 볼 수 없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금·은·동 모두를 포함한 외국인 선수들은 전업이 아닌, 다양한 직업군(群)으로 뒤섞여 있었다는 거…, 그런 사실은 80년대 후반기에 20대 초반의 시선으로 살아가던 입장에선 정말 ‘우물 안 개구리의 크나큰 충격’이었다.

최근의 신문기사 한 대목이 당시와 비슷한 여운을 던져놓기도 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최고 책임자인 자크 로게 위원장은 원래 직업이 외과의사라고 한다. 그런데 요트 선수로 1968년 멕시코올림픽, 1972년 뮌헨올림픽,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 출전했고, 거기에 덧붙여 벨기에 럭비 국가대표선수를 지냈단다.

도대체 이러한 괴리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국가대표 선수가 어떻게 일상적인 직업을 가진 ‘일반 시민’ 출신이란 말인가? 물론 1차적인 해답은 ‘생활체육’이다. 국민 전체가 다양한 운동을 즐기면서, 그 중에 잘하는 누군가를 선별해서 대표선수로 발탁하는 게 그들의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우리처럼 시작부터 끝까지 ‘운동이면 운동, 공부라면 공부’만을 강요하는 사회가 아니라는 반증인 셈이다.

   
▲ (사진제공=서울시장애인체육회)
그렇다면 장애인의 경우는? - 이런 명제 앞에 잠시 멈춰서야 할 경우가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점은 진정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문제점에 대해선 본지(本誌)의 여러 기획연재를 통해 두루 살필 수가 있으니까, 일단 여기서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통해 대화의 물꼬를 트고자 한다. 이번 ‘사람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올림픽과 아주 깊은 인연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아주 깊은 인연’이라는 표현도 사실 참 많이 부족한 설명인 것 같다. 무엇이 부족하다는 걸까? 답은 바로 아래에 적혀 있다.

현존하는 신화와 전설 - 올림픽 7회 연속 메달 획득
1988년 제8회 서울장애인올림픽 금메달
1992년 제9회 바르셀로나장애인올림픽 금메달
1996년 제10회 애틀란타장애인올림픽 금메달
2000년 제11회 시드니장애인올림픽 금메달


위의 성과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동안 우리나라가 참가해서 일궈 낸 장애인올림픽(패럴림픽, Paralympic)의 역대 총 성적일까? 아니다. 각각의 메달 이름 바로 앞에는 ‘역도’라는 종목 설명이 포함되어야 한다. 즉, ‘OOO장애인올림픽 역도 금메달’과 같이, 역도 종목에서 거둔 승전보만을 가리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역도 선수층이 그만큼 두터웠다는 걸까? 그것도 아니다. 위의 모든 내용은 한 개인의 수상경력을 나열했을 뿐이다. 거기에다 ‘아시안게임 5회 연속 금메달’이라는 경력을 덧붙이며 소개한다면 어떻게 될까?

저렇게 많은 상을 혼자서 받았다고? 당연히 농담처럼 들린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그게 사실인 것을. 제3자인 특정인을 언급하는 게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역도의 장미란 선수가 지난 베이징올림픽을 제패했을 때, 전 국민이 열광하며 기쁨을 함께 나눴던 건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그 전후로 세계선수권대회 우승도 몇 차례 있었다고 기억된다. 그런데 장미란 선수가 올림픽에서 거둔 승전보의 몇 배나 들어 올린 이가 이 땅에 있는데, 그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는 국민들은 거의 없다.

올림픽 4연패라는 거…. 단 한 차례의 메달권 진입도 바늘구멍 통과하기인 올림픽에서, 4회 연속 금메달을 일궈낸 이가 대한민국 안에 있다는 것. 게다가 금메달은 4회 연속이고, 은메달과 동메달을 포함해서 7회 연속 메달권 진입을 일궈낸 이가 우리 곁에 있다는데, 이 대목에서 (흔한 말 표현으로) ‘기절할 만한’ 사실 한 가지를 또 덧붙여야겠다. 1981년부터 2005년까지 ‘전국장애인체육대회 25회 연속 금메달 획득’이라는, 정말 믿기지 않는 업적을 일궈낸 이가 바로 이번 ‘사람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게 과연 누구일까?

    ▲ ⓒ채지민 객원기자 정금종 - 서울특별시장애인체육회 사무처장

그를 만났다. 인터뷰 일정을 잡기 힘들 만큼 바쁘다고 했는데, 직접 만나 보니 진짜 분초를 다투는 스케줄로 몸살(?)이 날 만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첫 만남의 느낌은 이랬다. 그렇게 빡빡한 일정에 몸살이 날 사람은 바로 그를 수행하는 직원들일 거라는. 다시 말해 주인공인 ‘그’가 몸살 나는 게 아니라, 그 일정을 함께 소화하며 강행군해야 할 체육회 직원 여러분들이 먼저 앓아누울 것 같았다는 의미이다. 그만큼 강인한 인상의 주인공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아주 단단한 차돌’ - 직접 마주대한 첫 인상을 이렇게 표현하면 큰 결례가 될까? 세상 그 무슨 첨단의 도구로도 이겨낼 방법이 없을 만치의 차돌 같은 이미지, 솔직히 마주치자마자 떠오른 단어 하나는 차돌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그가 ‘얼굴에 미소 가득한 차돌’이었다는 점이다. ‘작은 거인’이라는 이율배반적 용어도 이럴 때 사용해야 제격이다. 거인이 작다니! 그런데 그는 정말 작은 거인의 현존함 그 자체였다. 실제 체구(體軀)는 작지만, ‘드러나 보이는 사람의 의젓함’을 의미하는 풍채(風采)는 서너 배 크게 느껴지는 인물이 바로 눈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첫 대화는 아주 짧은 단답식의 질문과 답변으로 이어졌다. 취재하는 입장에서 서로를 알고 이해하기엔 가장 좋은 대화법이기도 한 빠른 진행이었다. 장애등급은 소아마비 1급이고 3살 때 후천적으로 갖게 됐다는 거, 유아시절에 걸었다는 기억은 아예 없다는 거, 혼자 자라왔기 때문에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 7살이나 8살의 기억까지만 간직되고 있다는 거. 그리고 유아시절의 흔적이 ‘지워진’ 이후의 삶은 재활원의 삶으로 진행됐다는 것.

“부모님은 두 분 다 돌아가시고요. 아니, 아버님은 돌아가시고 어머님은… 지금 안 계시고….”

바로 이러한 대목에서 대화는 ‘급(急)정지’를 해야 한다. 아무리 취재라 해도, 대화의 틀에서 벗어나거나 더 깊게 들어가면 안 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정금종 씨한테는 바로 위의 한 마디에서 해답을 유추할 수 있었다. 얼마든지 편하게 나눌 화제가 넘쳐나는 만큼,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은 개인적 내용이라면 접고 넘어가는 지혜 또한 필요한 법이다. 그에게 들었던 고백은 이런저런 사연으로 많이 있지만, ‘친지 누구의 손에 따라 재활원에 들어가게 됐다.’는 수준에서 내용을 요약하고자 한다. ‘프라이버시’라는 용어는 이럴 때 등장해야 할 단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저는 성격이 굉장히 내성적이고 고집이 세서, 사람들하고 거의 대화를 못하며 지냈어요. 주변에 같이 있던 장애인 친구들은 성격도 좋고, 또 나름대로는 음악활동 같은 걸 무척 많이 하곤 했는데요. 저는 운동하는 걸 좋아하긴 했는데, 함께 대화하고 어울리는 건 거의 못했던 것 같아요. 처음엔 그랬어요. 그런데 어린 나이부터 재활원 안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까 조금씩 거기에 같이 동참하게 되고, 또 그러다 보니까 재활원 이전의 기억들이 점점 없어지게 됐던 것 같아요.”

1988년 무렵까지 그의 삶은 재활원에서 모든 게 진행됐던 모양이다. 그 안에서 학교를 나오고 직업학교를 수료했으며, 거기에서 운동하는 틀 안에 있었다고 한다. 환경 자체가 같은 장애인 친구들끼리 모여 살았기 때문에, 더욱이 300명 이상 되는 인원이 한데 살아가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했던 운동 프로그램들이 특히 많이 간직된다고 했다. 수영과 축구, 야구와 같은 각종 운동 종목들을 정말 즐기며 지냈다는 것이다.

“오히려 밖에 나와선 못할 운동 종목들이 거기엔 많았어요. 그런 몇몇 종목들이 정말 많은 추억을 남겨줬죠. 전문적인 운동이 아니라, 장애를 치료하고 극복할 수 있게 만드는 시스템이었거든요. 목발을 잡고 축구나 야구를 하는 것과 같이 비장애 입장에선 쉽게 이해가 안 될 운동방식이겠지만, 같은 가족들끼리 했던 운동은 정말 저한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춘기 시절은 어땠을까? ‘사춘기’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평생 다 언급하지 못할 만리장성을 쌓아올리는 게 정상일 텐데, 그에게는 어떤 의미로 남겨졌는지가 궁금해졌다. 답변은 간단했다. 그 안에서 집단적으로 자라며 지내다 보니까, 그런 걸 제대로 못 느꼈다는 것이다. 의외로 담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제가 1977년 전후로 준비하긴 했지만, 정식으로는 81년부터 본격적인 운동을 시작했거든요. 그렇게 계속 하다 보니까, 다른 분들보다는 운이 좋게 잘 풀린 편이에요. 운동 쪽으로만 계속 나가다 보니까, 84년 올림픽에 갔다 온 이후로는 매스컴에도 좀 오르내리고…. 개인적으론 무척 잘 풀린 편이죠. 많은 분들한테 사랑을 받고 도움도 받았으니까요.”

주변에서는 항상 울적했던 과거의 삶을 문의하곤 하는데, 개인적으로 아는 분들 또한 그런 부분을 종종 언급하곤 하는데, 실제로 그런 그림자의 나날이 길게 존재했다는 건 사실이긴 하지만, 84년 LA올림픽(동메달 획득) 이후로는 운동만 하느라고 정말 바빴단다. 더불어 운동에 매진하는 과정 중에 운동과 관련되는 비장애 전문가들을 많이 만나게 됐고, 더 넓은 인간관계를 맺게 되는 과정을 계속 갖게 됐다고 한다.

그럼 운동이 개인의 성격을 개조한 것이냐 물으니까, “아, 네. 개조했죠.” 라는 대답이 곧장 이어졌다. ‘개조’라는 단어가 쓰일 만큼 바뀐 거냐고 다시 물었다. 그게 맞다는 한마디가 묵직하게 덧붙었다.

    ▲ ⓒ채지민 객원기자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 건 운동이다

“제가 84년 올림픽을 갔다 오기 전까지는, 인생에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비장애 입장도 마찬가지겠지만, 장애를 가진 몸으로 전문적인 운동을 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시절이었죠. 그런 것 있잖아요. 어디 다니는 것도 못하게 하고, 괜히 다치기라도 하면 피해로 다가오는 부분들이 너무 많으니까 시작도 못하게 하고…. 길에서 휠체어를 보는 것 자체도 힘들던 시절이었잖아요. 그래서 조금만 뭔가를 하려고 해도 ‘이건 안 돼!’ ‘저것도 안 돼!’ 이런 얘기를 너무 많이 들으며 살아왔던 거예요.”

그랬던 그가 84년 LA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하고 나서, 88년부터는 4회 연속 금메달이라는 금자탑을 이루게 된다. 세계적으로도 거의 유래가 없는 쾌거라 했다. 단체종목이라면, 예를 들어 육상계주 같은 종목은 전통적으로 강한 나라가 있어서 몇 차례 연속 우승이 가능했던 경우가 있었지만, 개인종목에서 4회 연속 금메달과 7회 연속 메달권 진입이라는 건 사실 기적과 같은 일이기도 하다. 1965년 2월생인 그가 작년에 마지막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걸며 은퇴를 했다. 우리 나이로 44살에 이룬 위대한 업적인 것이다.

“제가 몸 관리를 아주 잘하는 사람 중의 하나라고, 주변에서 그렇게 많이 말씀을 하시는데요. 저는 10년 넘게 운동에 미쳐서 지냈어요. 어디 여행도 안 다니고 운동에만 전념했죠. 체계적으로 배우며 시작했던 것도 아닌 게, 제가 어렸을 때는 운동기구가 없었어요. 재활원에서 자랄 때 체육관 같은 운동시설이 따로 있었던 게 아니라, 기숙사 뒤에 돌도 아닌 허름한 쇳덩어리 같은 걸 달아놓은 역기 비슷한 게 있었거든요. 그게 어느 선생님의 권유로 해서 우연하게 저한테 다가왔는데, 그걸 하다 보니까 굉장히 좋더라고요.”

그렇다면 ‘내 인생은 역도다!’라는 전환점이 있었는지, 그런 확신을 느낄 만한 계기가 언제였는지를 물었다. 84년 올림픽을 다녀온 이후부터란다. 선수로 직접 참가했는데, 그때까지도 역도가 인생의 종목이 아니었다는 의미인지를 다시 물었다. 그게 아니라 올림픽 참가 이후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180도 바뀌게 된 거란다. 그때까지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한국 안에서만 있었는데, 올림픽 참가 이후로 너무나 많은 걸 보게 됐다는 것이다. 전혀 다른 인생과 세상이 거기에 있었다는 거.

“절단장애와 뇌병변장애처럼, 저보다 훨씬 심한 장애를 가진 선수들이 너무나 많았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의 부모님들은 가리고 감추기에 바빴잖아요. 아무리 돈이 많다 해도 내 자식한테 장애가 있다면, 손님들이 올 때마다 뒤에다 감춰두고 하던 그럴 때였죠. 그런데 바깥세상은 완전히 달랐어요. 뇌병변장애의 선수들이 사격을 하고, 절단장애를 가진 남녀 선수들이 반바지 입고 그냥 미니스커트 입고 돌아다니는데, 그런 걸 보며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죠. 주위에서 계속 도와주시는 분들의 모습과 완벽한 운영시스템을 보면서도 충격을 받았고요.”

한마디로 별천지에 왔다는 느낌뿐이었단다. 운동기구, 운영시스템, 자유분방한 선수들의 모습, 완벽한 편의시설 등, 이 땅에서는 보고 듣지도 못하고 상상마저 떠올리지 못한 세상이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그가 받았다는 충격의 강도는 얼마나 강렬했을까. 여담이지만, 실제로 의족을 착용한 절단장애 외국인 여성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서울 이태원 거리에서 쇼핑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흔히들 ‘금발의 미녀’라고 부를 만한 외모였는데, 그녀의 자연스러움은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들을 오히려 부끄럽게 만들 정도였다. 그때 생생하게 다가왔던 실감 한 가지가 있었다. 이게 바로 ‘인식의 차이’라는 것!

그렇게 외국의 예를 몇 마디 더 나누다가, 기본적인 질문 하나를 그에게 던졌다. 다른 많은 운동종목들이 있는데 왜 역도를 특히 좋아하게 됐고 선택한 것인지, 또한 벤치프레스(역기)를 들 때의 느낌은 어떤지가 궁금했다. 정금종 씨는 역도가 사실은 가장 재미없는 운동 중의 하나라며 웃었다. 주위에서 볼 때도 재미없다고 하고, 처음에는 자신도 흥미가 없는 종목 중 하나일 뿐이었단다.

“그런데 하다가 보니까 장점이 눈에 띄는 거예요. 제가 몸이 많이 불편하고 장애 정도가 심한 편이었는데, 그랬던 제가 역도를 하면서 몸의 밸런스(균형)를 거의 다 잡았어요. 힘도 좋아지고 밸런스를 잡게 됐다는 건 엄청난 강점이 된 거죠. 역도는 어느 한쪽으로만 할 수가 없어요. 똑같은 힘이 좌우로 가해져야만 그걸 들 수 있기 때문에, 역도를 통해 제 몸이 확실하게 교정이 됨을 확인하면서 역도의 매력에 빠지게 된 거죠. 그래서 주변인들을 만나면, 저는 역도를 하라고 자신 있게 직접 권합니다. 역도를 주된 종목으로 하라는 게 아니라, 어떤 종목을 하더라도 자세교정을 위해 역도를 경험하라는 거예요.”

무거운 쇳덩어리가 아닌, 몸에 맞는 가벼운 무게는 누구에게나 도움이 된다고 한다. 남자와 여자, 나이와 증상을 굳이 구분 지을 필요도 없다고 한다. 역기를 드는 동작에서 누구나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그의 얘기는 모두가 귀담아 들을 만한 좋은 정보인 것 같다. 몇 가지 설명을 덧붙이던 그는 끝에다가 이 한마디를 반복했다. “정말로 해보세요. 굉장히 좋아져요!”

    ▲ ⓒ채지민 객원기자 다솜공동체 - 받았던 혜택을 다시 나눈다

‘정금종’이라는 이름이 거명될 때마다 빠지지 않는 사실이 또 한 가지 있다. 바로 자폐아 중심의 ‘다솜공동체’를 운영하는 원장님이라는 점이다. 그 공동체를 어떻게 운영하게 됐는지, 그 공동체의 성격과 생활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소개해 달라고 했다.

최초의 시간은 아주 오래 전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재활원에 선생님으로 계셨던 분이 나와서, 가톨릭 계열의 공동체 비슷한 일을 하시게 됐단다. 그래서 운동이 끝나면 가끔씩 찾아가곤 했고, 마침 조각에도 관심이 있고 나름 실력도 있었기에 아이들과 함께 조각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모양이다.

“재활원에서 같이 자란 식구들하곤 이런 얘기를 자주 하곤 했죠. ‘야, 우리 나중에 같이 살자.’ 그런데 그 선생님이 저한테 ‘네가 이런 쪽의 일을 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엔 저는 못한다고 사양을 했죠. 그런데 선생님이 자꾸 얘기를 하니까, 점점 더 귀가 솔깃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저를 도와주시던 다른 선생님들한테 여쭤봤죠. ‘이런 일을 좀 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그랬더니 저를 아는 분들이 다들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주변 지인들은 다들 ‘너는 그냥 운동에 전념하면서, 결혼하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완곡한 반대의사를 전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금종 씨의 성격상 특징이 거꾸로 가는 편이 많은 거란다. 하지 말라면 하고 반대로 하는 성격이 있었기에, 그런 의견들을 무릅쓰며 그 일을 시작하게 됐단다.

그런데 그 공동체를 크게 운영해서 남들의 눈에 띄게 만들고, 그렇게 해서 후원을 이끌어내는 식의 방식은 처음부터 지양했다고 한다. 아이들한테 가장 필요한 건 운동이라고 판단했고, 운동 프로그램으로 아이들의 건강을 이끌어내는 데 중점을 뒀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쳤다는 소리를 좀 많이 들었어요. 이왕 하는 거 드러내놓고 해야 관심도 얻고 후원도 받게 되는데, 저는 제가 가진 걸 그대로 털어내면서 우리들의 공동체로 운영하거든요. 저는 공동체에서 같이 사는 가족들에게 선언도 했어요. ‘우리가 어려워도 숟가락 하나 놓고 우리가 편하게 지내자’고요. 꼭 이걸 키워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은 아직 없어요. 운동하면서 같이 잘 지내면 되는 거지, 후원을 받기 위해 아이템을 짜며 움직이는 체제로는 가지 않았거든요. 아직까지 제가 해답은 못 찾았어요. 애들한테 미안하기도 하지만…, 제가 받았던 혜택으로 제 인생이 여기까지 왔듯이, 아이들한테 가장 필요한 것을 함께 하면서 공동체로 운영하고 싶습니다. 우리끼리 편하게 가면 되잖아요.”

그렇다면 운동을 하는 후배들 중에 가능성 있는 선수들이 많은지를 물었다. 올림픽 역사에 기록된 선배의 뒤를 이을 만한 꿈나무가 존재하는지, 그 꿈나무들이 성장해서 앞으로의 올림픽에서도 ‘정금종’이라는 이름의 영향력을 10년 20년 이어갈 수 있을 건지가 궁금해졌다.

다들 열심히 하고 있기에, 자신보다 더 훌륭한 선수들이 나올 거라고 기대한단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자신의 체급에선 아직 눈에 띄는 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란다. 또한 예전에는 환경이 열악해도 자신이 진짜 좋아서 스스로 운동하는 체계였는데, 지금은 세대와 세상이 바뀐 만큼 일정한 틀이 갖춰져야 운동을 하는 흐름으로 ‘무언가’의 현실적인 변화가 생긴 모양이다.

“제가 52kg으로 올림픽을 4연패했지만, 이후 56kg과 60kg으로 체급을 올린 것은 제가 있는 체급에선 다른 선수들한테 기회가 안 가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18kg 이상 감량을 해서 출전하거나, 아니면 그 체급을 피해서 다른 체급으로 나가는 상황이 계속됐었죠. 운동을 하다 보면 그런 환경적인 부분들 또한 많이 있어요. 메달을 많이 따기는 했지만 사실 운동이라는 거, 특히 역도가 쉬운 종목은 절대 아니죠. 일반적인 다른 종목들하고는 특성이 많이 다르니까요.”

    ▲ ⓒ채지민 객원기자 참된 노력에는 값진 결과가 분명히 있다

정금종 씨가 바로 앞에서 언급했듯이, 스스로의 열정 하나에 모든 걸 걸며 열악한 환경을 뚫고 이겨냈다던 성공 스토리는 지난 세기의 과거형 유산인지도 모른다. 모든 게 첨단의 영상매체로 펼쳐지고, 무엇이든 실시간으로 움직이는 인터넷 시대에선 개인의 인내와 도전에 모든 걸 내걸어야 하는 역도 같은 종목이 무관심의 대상으로 밀려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20세기와 마찬가지 환경에 머물러 있는 이들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상전벽해(桑田碧海)로 돌변했다 해도, 그늘진 곳의 풍경은 여전히 예전 모습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는 점은 가릴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문을 던졌다. 정금종 씨의 어린 시절과 같은 환경 안에서 무언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후배들이나, 외롭게 머물고 있을 어린 친구들에게 따뜻한 격려의 조언을 전해줄 수 있겠느냐고. 또한 그런 과정을 직접 겪은 뒤 지금의 자리에 이른 입장에서, <함께걸음> 독자 여러분께 한 말씀을 남겨주시면 좋겠다고 부탁을 드렸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어려운 환경으로 살아왔지만, 그렇게 힘들게 살아왔어도 남한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고 최선을 다해서 많은 노력을 했거든요. 정말 많이 노력했어요. 물론 지금도 하고 있고요. 왜 그랬냐 하면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장애가 없는 사람들하고는 격차가 너무 크게 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장애가 없는 사람이 뭔가 하나를 하며 움직일 때, 저 같은 경우는 열 번 정도 움직여야 같은 행동과 결과를 얻게 됐거든요. 그랬기에 나 자신의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하며 정말 열심히 노력했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얻어지는 게 있더라고요. 그 기간이 정말 많이 걸렸지만, 제가 원하던 걸 진짜로 얻고 이루게 됐다는 겁니다.”

예전에는 자신이 운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장애를 가진 이들한테 운동하라는 얘기를 감히 꺼내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단다. 운동할 환경도 안 됐고, 운동이 너무 힘든 과정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 있게 추천하게 됐다고 한다. 비장애 선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했던 메달 연금도 이젠 동등하게 현실화가 됐고, 운동할 수 있는 환경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에 충분히 도전할 만한 여건이 마련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모두 선수가 되고 좋은 기록을 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운동은 장애를 가진 모든 이들에게 평생 함께 해야 할 길라잡이로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단다.

“비장애인 운동선수들은 스무 살 후반이 되면, 아무리 좋은 기록을 가졌다 해도 은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죠. 비장애의 경우는 사실상 상업성에 대부분 목표가 맞춰져 있지만, 우리는 상업성이 아니잖아요. 그렇기에 저는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어요. 내 몸을 위해서 하는 거지, 어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어디 광고에 나와 수익을 얻기 위해 하는 건 아니거든요. 평생을 해야 하는 게 운동이기에, 저는 후배들한테도 늘 강조를 해요. 어떤 돈이나 명예보다도 더 중요한 게 운동이라고요. 그 대신 이왕 하는 거라면 최선을 다해서 제대로 해달라고 당부를 하죠. 굳이 선수로 뛰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 하는 만큼 자기 자신에게 값진 결과가 분명히 주어진다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장애를 가졌어도 동등하게 즐길 수 있도록, 장애 특성에 맞게 개발된 각종 운동기구들이 최근 들어 자주 소개되고 있다. 정금종 씨는 그런 운동기구들 때문에 욕(?)을 많이 먹는다고 한다. 그런 제품들이 도입되면 미칠 정도로 그 운동에 직접 참여한다는 것이다. 겨울이 되면 스키를 타고 여름이 되면 수상스키를 하는 등, 장애의 몸으로도 할 수 있다는 점을 제일 먼저 경험하고 나서, 선두에 서서 그 운동기구의 가치를 증명해낸다고 한다.

“역도 아닌 다른 운동에 왜 그렇게 뛰어드는가 하면,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장애가 있으니까 뭐가 안 돼.’ ‘뭐는 할 수가 없어.’ 이런 말을 너무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말 한마디라도 제대로 듣고 싶었어요. 장애의 몸으로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실제 증거를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니까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저를 도와주었고, 이제는 저와 같은 입장인 모든 이들한테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제가 자신 있게 말씀드립니다. 운동이 최고예요.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운동만큼은 평생 하며 지내시면 좋겠습니다."

나의 노력이 세상을 바꾼다

정금종 씨가 11월호의 인물로 결정된 직후부터, 주위의 여러 사람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져봤다. ‘장미란을 아느냐?’ 100%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정금종을 아느냐?’ 100% 고개가 15도에서 30도 정도 갸우뚱 기울어졌다. 올림픽 우승은 모두가 아주 잘 아는데, 올림픽 4회 연속 우승은 아무도 모른다. 이 사회의 시스템은 같은 메달인데도, 하나는 보이고 하나는 안 보이게 만들어져 있다는 뜻이 된다. 보이는 쪽의 금메달은 모든 플래시가 번쩍거리며 화제의 중심으로 몰고 가는데, 또 다른 금메달은 사회적인 무관심으로 신문기사마저 단발성으로 짧게 처리된다.

당사자 입장에서 이런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비판적 의견이든 대안적 의견이든 생각하던 속내를 얘기해 달라고 했다. 무언가 격한 반응 비슷한 게 나올 줄 알았는데, 예상을 깨고 정금종 씨는 아주 덤덤한 표정과 손짓으로 또박또박 차분하게 풀어냈다.

처음에는 그런 부분들이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그런 의견들이 분출될 때마다 앞장서며 체육인들과 함께 데모도 많이 했던 바 있었단다. 그런 분노의 대화도 많이 나누며 지내왔지만, 이제는 그 생각 자체가 달라졌다고 한다.

“근본적으로 생각이 달라졌어요. 이제는 제가 스스로 바꿔가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는 것이죠. 제가 열심히 하고 좀 더 큰 노력을 하면 세상은 분명히 바뀝니다. 불평등이니 뭐니 하는 의견들은 결국 말장난으로 끝나게 돼요. 저는 그런 식의 말장난으로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직접 보여주고 노력하면 분명히 바뀐다는 확신을 갖게 됐고, 그게 실제로 실현된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운동을 기준으로 본다면, 저는 밖에 나가서 당당하게 다니는 편이에요. 우리가 다 아는 비장애 운동선수들은 정말 훌륭한 실력을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운동 수명이 짧잖아요. 장애든 비장애든 간에 올림픽에 일곱 번 나가서 메달을 딴 선수는 따로 없죠. 해답은 바로 그겁니다. 그렇게 스스로 이뤄나가면, 저를 대하는 세상의 눈이 바뀐다는 거예요.”

   
▲ ⓒ채지민 객원기자
장애를 가지고 있다 해서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있을 필요는 없다고 한다. 그 자신이 지금의 자리에 와서 그러는 게 아니라, 스스로도 몸소 그런 부분을 실천하는 편이라서 비장애 선수들과 같이 운동을 많이 하는 편이라고 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다면서, 자신이 생전 처음으로 헬스클럽에 발을 딛었던 시절을 떠올렸다. 인터뷰 시간이 다 됐고 다음 일정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 대목을 떠올린 게 중요한 화두라는 듯 그는 대화의 장을 조금 더 길게 늘여놓았다. 그리고 처음 헬스클럽에 갔던 당시의 상황이 세세하게 묘사되기 시작했다.

“저는 운동을 일반 헬스클럽에서 시작했어요. 아주 예전의 일인데, 주변에 있던 분이 저를 헬스클럽에 소개시켜줘서 처음 가봤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목발을 짚고 혼자 차를 탄 것도 처음이었고, 재활원에서 운동할 곳까지 이동한 경우도 처음이었어요. 버스를 타려고 재활원 문을 나와 정류장까지 1km 이상 목발로 이동을 했죠. 그렇게 정류장에 도착한 다음 버스를 탔는데, 제가 버스 안에서 무지하게 많이 넘어졌습니다. 버스 경험이 처음이었고, 버스의 높이가 지금보다 훨씬 높을 때였거든요. 또 내려오다가 넘어지기 일쑤였고, 그러면 버스 승객 절반 이상이 내려와서 길바닥의 저를 부축하며 쳐다보고… 그랬던 시절이었어요.”

그런 치열한 노력과 도전에 경의를 표해야 함이 마땅한데도, 왜 그렇게까지 운동을 하러 이동해야 했는지에 대한 질문이 먼저 던져졌다. 정금종 씨는 스스로가 더 고집을 앞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그 헬스클럽이 OO대학교 앞에 있는 건물 4층에 있었는데, 더욱이 그 곳은 바로 앞 대학교수들이 많이 다니는 공간이었는데, 자신이 처음 갔을 때 이런 얘기를 듣게 됐단다. ‘앞으로 한 2,3일 빠지면 나올 생각을 하지 말라.’ 2,3일이라…. 정말 자존심이 크게 상하기도 했지만, 한 번 하겠다면 끝까지 하는 성격인 탓에 일주일을 연속으로 가고 나니까 사람들 시선이 좀 변하기 시작했단다.

“거의 한 달을 가고 나니까 저를 대하는 게 달라지더라고요. 더욱이 제가 워낙 많은 무게를 드는 편이라서, 저를 대하는 시선의 변화가 확실하게 느껴지기도 했죠. 당시 어지간한 헬스클럽에서 120kg 넘게 드는 사람이 없었는데, 저는 처음부터 140kg 이상을 들었으니 시선이 바뀔 만하기도 했죠. 그런데 그때 제가 거기 안에서 느꼈던 게 무엇이었나 하면, 제가 이 안에 들어와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었어요. ‘내가 더 열심히 하면 그 사람들도 변화가 오겠지.’ 그런 생각으로 최선을 다하다 보니까 정말 변화가 오더라고요. 그래서 장애친구들을 한 명 두 명씩 데리고 가며, 같이 운동하는 분위기로 조금씩 바꿔갔습니다.”

그 곳에서 2년 동안 운동하면서, 정금종 씨는 비장애 중심인 세상의 생리를 깨닫게 됐다고 한다. 장애를 대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무뎌지게 되더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치고 두세 달 가는 생각이 없다던, 자조 섞인 그 속설이 실제로 증명이 된 셈이기도 하다.

두세 달 열심히 다니다 보니까, 그 헬스클럽에서 운동하던 이들이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바뀌었다는 점은 나름 의미하는 바가 큰 대목인 것 같다. 쉽게 잊어버리는 국민적 근성을 특정 단어로 비하하는 경향이 많지만, 그걸 역으로 뒤집어 활용하면 긍정의 시선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 - 그건 그의 선택과 도전이 옳았음을 의미하는 반증이 된다.

“그렇게 주변의 틀을 다 바꿨고, 저의 성격도 그러는 과정에서 다 바꾸게 된 거예요. 헬스클럽의 얘기는 제가 운동을 처음 시작하던 시점의 기억이지만, 지금 역시도 무너뜨릴 건 무너뜨리고 바꿀 건 바꾸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우리가 더 노력하고 바꿔 나가면 그 이상도 이뤄낼 수가 있거든요. 제가 현재의 직책에서 강조하는 대목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장애를 가졌다고 장애 위주로 따로 모여서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지더라도 비장애와 함께 경기를 하며 같이 가야 발전이 됩니다. 비장애가 장애 입장을 도와줘야 할 부분들이 사실 더 많잖아요. 우리가 소극적으로 있다면, 그들이 우리를 도울 방법마저도 없어지게 돼요. 그래서 제가 있는 이 체육회는 장애 비장애 구분 없이 모두가 함께 가고 있습니다. 이런 노력과 시도가 이 사회 안에서 초석으로 남겨지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는 걸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수십 년만의 난데없는 가을 황사라고 했던가? 10월 중순의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은 디자인 관련 축제가 있다 해서, 모든 시설물에 펼침막과 홍보물들이 가득 내걸려 있었다. 얼마나 많은 홍보물로 뒤덮여 있었던지, 이번 촬영이 가능할 만한 공간이 남아 있을까 싶어 하루 전날 주경기장 전체를 사전답사하며 나름 빈 공간(?)을 찾아 헤맸던 바 있다. 정금종 씨가 사무처장으로 근무하는 서울특별시장애인체육회가 바로 주경기장 외부의 사무시설 안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책만 읽으면 인생을 성공한다’는 식의 수많은 자기개발서의 홍수 속에서도, ‘사람사는 이야기’ 주인공이 전하는 한마디가 소박하면서도 치열하게 가슴으로 와 닿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생의 좌절을 몸과 영혼으로 직접 겪고 체험했으며, 그 체험을 발판으로 인식의 전환과 실제적 노력을 겸비한 결과를 가감 없이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은 우리 마음속 벤치프레스(역기)를 한번 힘껏 들어 보는 게 어떨까? 그러면 불현듯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다. 꿈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우리 바로 옆에 존재하는데도 다만 방치하고 있었던 것뿐이라는 사실 말이다.
작성자채지민 객원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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