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홉 살! 세상 속에 다시 태어났다 > 세상, 한 걸음


나는 아홉 살! 세상 속에 다시 태어났다

[사람사는 이야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 박명애

본문

지난해 가을에 있었던 일이다. 정말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꼼짝도 못하며, 50km 남짓의 거리를 이동하느라 5시간 가까이 허비한 적이 있었다. 정말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대한민국 육지 교통의 중심이 이만큼 먹통인데, 난데없는 ‘강물에 유람선’은 웬 말인가.

이렇게 막힌 길에서 내버려지는 모든 이들의 기름 값과 시간대비 기회비용을 전부 다 합친다면, 하루 반나절에 수십억 이상의 손실이 발생하고 있다는 게 아닌가. ‘제한속도 100km’라는 경고 표지판은 정말 허망한 코미디에 불과했다.

별의별 생각의 끝자락은 토건만능주의에 빼앗긴 복지정책, 그 중에서도 장애인의 현실로 옮겨갔다. 비장애라면 십여 분 정도 걸릴 만한 이동을 위해, ‘갈아타고’ ‘참아내고’ ‘주저앉으며’ 견뎌야 하는 시간은 도대체 얼마라는 건가. 모든 움직임의 전제조건은 ‘기다림’이다. 차량의 도착을, 활동보조인의 방문을, 리프트의 작동을,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만 장애인의 손과 발이 되는 ‘그 무엇’이 비로소 등장하게 된다.
멀쩡한 대자연을 뒤집으려 천문학적인 국민의 혈세를 들이붓겠다는데, 그만큼 줄어들고 깎이며 폐기되어버린 복지예산의 참담한 현실을 떠올리다 보니… 모두의 기다림은 더 많은, 더 긴 시간이 필요하게 될 모양이다. 언제까지라고 정해진 기약도 없이 말이다.

   
▲ ⓒ채지민 객원기자
문을 닫고 혼자 지내기

1월호 ‘사람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을 만나기 위해 고속철도(KTX)에 몸을 실었다. 시속 300km라는 속도가 이질감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정말 시원하게 달렸다. 서울과 대구가 1시간 50분 이내의 거리로 단축됐다는 건 사실 대단한 일이기도 하다. 직접 차를 몰고 달렸다면 100% 불가능한 시간이고, 갖가지 소요비용으로 따진다면 승차요금이 꼭 비싸다고는 할 수 없을 듯했다.

물론 아쉬움은 그 안에서도 커다랗게 남았다. 이만큼이나 길게 연결한 열차이고 탑승객 좌석이 맨 앞부터 마지막 칸까지 가득한데도, 전동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자리 잡을 공간은 전체를 통틀어서 두세 개뿐이란다. 접이식 수동휠체어라면 일반 좌석이용도 가능하겠지만, 전동휠체어를 위한 배려가 첨단의 KTX 안에 두세 자리뿐이라는 것. 우리 사회의 자화상은 이곳에서도 확인이 된다.

동대구역에 내려 지하철로 갈아탄 뒤 약속장소인 반월당역으로 향했다. 목적지 바로 전 역의 이름 네 글자가 가슴을 짓눌렀다. ‘중앙로역.’ 2003년 2월의 참사가 눈앞으로 선명하게 투영됐다. 7년 가까이 지난 지금, 지하철 탑승객들의 표정은 일상생활의 한 조각인 양 무덤덤했지만, 오랜만에 이곳을 찾은 외지인의 눈에는 그 느낌 자체가 전혀 다른 법이다. 깔끔한 플랫폼 전경인데도 시커먼 그을음투성이의 영상으로 비춰지는 건 무슨 까닭일까. 그날의 그 매캐한 연기가 어디선가 뿜어져 나올 것 같은 실감에 잠시 고개를 돌리는 동안, 반월당역에 도착한 열차는 문을 활짝 열었다. 이제 다시 현실로 되돌아오라는 듯.

처음 방문한 지역은 어디든 낯설기 마련이지만, 약속장소였던 반월당역은 정말 초행자 입장에선 헤매기 딱 좋은 구조였다. 커다란 원형의 지하공간이 넓게 펼쳐져 있는데, 이 환경에 익숙하지 않은 채로 한번 길을 잘못 들면 뱅뱅 돌며 미로에 빠져버리기 십상일 것 같았다.

하지만 해결책은 가장 간단한 법, ‘모르면 묻는다’는 단순법칙이 최선의 예방책임을 잊으면 안 된다. 휴대전화로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고, 지나가는 이들에게 물어서 찾아간 곳에 낯익은 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각종 집회와 투쟁의 현장에서 늘 바라볼 수 있었던 은발의 머리카락, 하지만 오늘은 투쟁의 외침이 아닌 ‘사람사는 이야기’의 문법으로 편하게 웃는 얼굴을 마주하게 된 날이다.

박명애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 사단법인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이사장. 그 직함만 보더라도 이 분의 활동범위는 당연히 전국 방방곡곡일 게 분명했다.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나서, 같은 지하 공간 안에 있던 한 카페로 들어섰다. 그런데 테이블을 사이에 두며 마주앉고 나니, 무언가가 영 이상하다는 생각부터 떠올랐다. 투쟁 현장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날카로운 외침을 내지르던, 겹겹이 둘러싼 전경들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던 그 투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수줍음 가득한 소녀 같은 사람이 연신 입을 가리며 바로 앞에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실례되는 표현이 아니라면, 이 사람은 사춘기를 막 시작한 소녀가 맞았다. 어떻게 현장의 모습과 이렇게도 다르단 말인가.

“저는 두 살 때 소아마비 장애를 갖게 됐다고 부모님이 말씀하셨어요. 그때 어머니가 저를 데리고 친정아버지 제사를 지내려 시골에 가셨다는데, 시집 생활이 얼마나 힘들겠냐 하시며 친정어머니가 하룻밤만 더 자고 가라며 잡으셨대요. 그래서 하루 더 자게 됐는데 그날 밤에 제가 갑자기 열이 나면서 혼수상태에 빠져가지고…, 54년 전의 일이니까 그 시골에 병원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의원이라는 데는 다 다녀봤는데, 그냥 경기(驚氣)가 나서 그렇다는 진단만 나왔대요. 그런데 저는 사흘 동안이나 깨어나지 못한 채 절반은 죽은 상태였고, 그 상태로 저의 고향집인 진주로 돌아오게 됐다고 해요.”

그렇다면 걸었다는 기억은 전혀 없는 거냐고 물으니까, 어머니 말씀은 집 내부의 사물을 잡고 일어서곤 했다는데 자신의 기억으로는 전혀 떠오르지 않는단다. 그래서 꿈을 꿔도 걸어 다니는 꿈은 꾸지 못하고, 그냥 순간이동을 하는 상황이 일상처럼 연출된다고 한다. 여기에서 저기로 순식간에 가 있는 순간이동 말이다. 4형제 중 첫째였는데 동생들이 이래저래 엄마를 성가시게 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마저 엄마를 성가시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돼서 학교도 못 가게 됐단다. 집에서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엄마를 위하고 편하게 해드리는 거라는, 그런 결론을 그 어린 나이에 묵묵히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소아마비 아닌 다른 장애는 없었지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몸살을 꼬박꼬박 앓곤 했단다. 방 안에만 있으면서 워낙 나약한 몸으로 운동마저 못하는 상황이었기에, 몸살은 환절기마다 그를 찾아와 괴롭혔던 모양이다. 그런데 신기한 건 전동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니며 사회 활동을 하게 된 이후는, 그에게서 몸살이라는 존재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가 전동휠체어를 만나게 된 건 불과 몇 해 전의 일이었기에, 거의 평생을 병약한 몸으로 지냈다는 의미가 된다. 그 대목에서 질문을 던졌다. 아주 어릴 때 장애를 겪게 됐다면 장애가 아닌 비장애의 상황을 생각해 보거나 연상하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라 하는데, 스스로의 어린 시절을 어떻게 회고하는지가 궁금해졌다.

“어린 시절에는 제 나이 또래의 친구가 없었죠. 바로 아래 동생이 두 살 적은데, 그 동생의 친구들이 제 친구였어요. 그래서 그 친구들이 저를 업고 다니면서 바깥 구경을 시켜줬죠. 저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좀 낙천적이었거든요. 친구들이 저를 업고 다니는 게 좋아서 친구 집에도 가곤 했는데, 저는 정말 그게 좋았는데, 아버지는 그런 걸 보시는 게 마음이 많이 아프셨던가 봐요. 엄마는 안 그러셨는데, 아버지는 제가 그렇게 하는 걸 참 싫어하시더라고요. ‘업혀 다니다가 괜히 그 애도 다치고 너도 다칠 수 있는데 그냥 집에 있어라.’ 그런데도 제가 말을 안 듣고 나가서 돌아다니면 엄마를 막 야단치셨어요. 그래서 생각하게 됐죠. ‘내가 밖에 나가면 안 되는구나. 나는 그냥 집에만 있어야 되는 모양이다….’ 엄마가 아버지한테 야단맞는 게 싫어서, 그때부터는 안 나가며 지내게 됐어요.”

그렇다면 집 내부라는 폐쇄된 공간에 있으면서도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통해 바깥세상이 있다는 걸 알았을 텐데, 그때 생각하며 꿈꾸었던 자신의 미래 같은 건 무엇이었는지를 물었다. 박명애 씨는 짧으면서도 긴 한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래’라는 게 정말 없었던 것 같단다. 벽에 걸린 스피커 하나가 어디로부턴가 연결된 유선으로 소리를 보내주는데, 연속극과 음악을 듣는 게 정말 유일한 낙이었다고 한다. 엄마가 동생들의 숙제를 도와주시는 걸 어깨너머로 보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되었기에,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가사를 적는 일이 하루 생활의 전부였단다.

“열세 살 때까지 저의 할머니가 살아계셨는데, 할머니는 저를 업고 밖을 많이 다니셨어요. 엄마는 동생들 때문에 저를 데리고 나갈 시간이 없으셨고, 할머니가 정말 저의 발이 되어 여기저기 다 데리고 다니셨던 거예요. 그런데 할머니 등에 업혀 다니다 보면, 동네 애들이 병신이니 앉은뱅이니 뭐니 하며 따라오면서 놀려댔어요. 요즘 아이들은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보더라도, 그런가 보다 하며 그냥 넘어가잖아요. 그런데 그때는 제가 발을 절며 가는 것도 아니고 업혀서 가는데도, 다 큰 게 업혀서 간다며 놀려대는데… 아, 그 말이 정말 듣기 싫더라고요. 그래서 그 표현, 그런 용어를 정말로 싫어하게 됐어요.”

    ▲ ⓒ채지민 객원기자 책 속의 주인공으로 살다

할머니 등에 업힌 손녀의 모습이 어느 동화책 안의 그림 내용처럼 연상이 됐다. 계절이 바뀌는 것도 할머니 등을 통해서 알게 됐단다. 길을 가다가 담에 피어 있는 빨간 장미를 보면 ‘아, 봄인가?’ 생각하게 되고, 할머니 등에서 바라본 달이 계속 따라오는 걸 보며 어떻게 달이 사람을 따라오는지 정말 신기하며 궁금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발로 설 수 있다면 한번 힘차게 뛰어서, 달이 따라온다는 걸 직접 느껴보고 싶기도 했단다. 하지만 이어지던 그의 한마디 독백은 묵직한 여운을 남겼다. “저는 제 발로 걸어야 된다는 것도, 그런 자체마저도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걸 어릴 때부터 스스로한테 주문을 걸었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누군가의 등을 통해 세상을 바라봤던 건 언제까지였는지를 물었다. 친구들의 등은 열 살 때까지였고, 할머니의 등은 열세 살까지였다고 한다. 당시 동네 어르신들은 지나가는 말처럼 항상 이렇게 묻곤 했단다. “너는 나중에 할머니 돌아가시면 어떻게 살겠노?” 그런데 정말 할머니가 돌아가시게 됐고, 그 소식을 최초로 듣는 순간 ‘아,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건가.’ 하는 갑갑한 생각이 가슴 가득 맴돌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이후 외출이라는 게 얼마에 한 번씩 이뤄졌는지를 물으니까 대답은 뜻밖의 내용이었다. 아예 한 번도 못 나가는 생활이 길게 이어졌다는 것이다. 열일곱 살 때인가 고모를 따라 극장에 한번 갔던 일이 굳이 기억날 정도로, 그의 삶은 철저하게 외부와 격리된 틀을 유지하게 됐던 모양이다.

“이사를 갔던 집에 길 방향으로 통하는 창문이 하나 있었어요. 방바닥에 앉아 사용하던 낮은 책상 하나가 그 밑에 있었는데, 그 책상을 기어 올라가서 창 너머를 내다봤던 게 기억이 나요. 사촌이 왔다 가면 그 애가 가는 걸 보려고 애를 쓰곤 했죠. 그냥 방바닥에서 창문틀을 붙잡고 1분도 채 안 되던 시간을 서려고 매달리던 적이 있었는데, 그게 제가 유일하게 손을 써서 서 있었던 기억이라고 떠오르네요.”

당시 살던 집은 한 집에 여러 가구가 세를 같이 두고 지내던 구조였단다. 집 한 채에 여섯 가구가 함께 살았는데,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친구가 생겼지만 나이는 다들 어렸다고 한다. 나이 어린 친구들이 학교를 가고 나면 그 애들이 올 때까지 방 안에서 혼자 머물러야 했는데, 다행히도 친구들은 그에게 숨통이 트이는 계기를 제공했던 모양이다. “우리 학교에 가면 도서관에 책이 많이 있는데 책을 빌려줄까?” 친구들은 책을 빌려와서 그에게 전해줬고, 그때부터 책에 빠져 사는 인생이 시작됐다고 한다.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의 작품들을 탐독하는 생활이 시작됐는데, 청소년기 당시의 그는 모든 책 속의 주인공으로 살게 됐단다. 로맨틱 소설을 읽으면 소설 속의 연애를 자신이 하는 것처럼 생각하며 빠져들었다는 것.

“그런데… 저는 엄마가 왜 나를 좀 더 적극적으로 키우지 못하셨을까. 왜 나는 혼자 이렇게 장애를 갖게 됐을까, 이런 원망을 안 하며 지냈었어요. 그런데 그 자체가 저의 발전에는 안 좋게 결론 났던 것 같아요. 그런 원망을 하면서 심각하게 갈등했던 사람들은 저보다 훨씬 더 많이 바뀐 인생을 살게 됐던데, 저는 그런 것 없이 그냥 주어지는 대로 그냥 받으며 안아버렸거든요. 엄마가 힘들게 사시는데, 또한 동생들이 매일 학교에 간다는 건 돈의 전쟁이고 시간의 전쟁이고 그랬잖아요. 그런 걸 보면서 저는 그냥 착하게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걸로만 받아버렸던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그때 제 성격이 좀 모가 났었다면 정말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조금 더 과한 쓴소리도 하며 살아올 수 있었을 텐데 하는, 그런 아쉬움이 정말 크거든요.”

투쟁 현장에서 과격한 표현이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정말 마음을 모질게 먹고 하게 된 것이지, 사실은 심성이 약하고 눈물이 ‘무지’ 많은 사람이란다. 누가 어렵다 하면 자신이 가진 게 없어도 다른 사람들 것을 구해서라도 그 사람을 도와줘야 하는, 그런 인생을 살아왔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처음 마주보며 자리에 앉았을 때의 느낌, 전혀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 같다던 그 생각이 맞았던 모양이다. 농성 현장에서는 전경버스 몇 대라도 내리치며 내동댕이칠 것만 같고, 실제 그런 투쟁을 실천하는 건 맞지만, 박명애 씨는 지금도 길을 가다가 단풍잎 같은 것만 봐도 멈춰 서서 한참 쳐다보게 되는 그런 감성 하나로 살고 있단다.

책을 그렇게 많이 읽었다면, 더욱이 책 속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만큼 감정이입이 확실하다면, 이 세상의 현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해보고 싶다’ 하는 갈망 같은 건 없었을까? 당연히 있었단다. 그런데 의도했던 질문과는 약간 다르게, 어린 시절의 상황으로 다시 시간대가 옮겨졌다. 어릴 때 젊은 여성들이 높은 구두를 신고 다니는 게 참 보기 좋았단다. ‘나도 저렇게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봤으면 좋겠다!’

그랬더니 남동생과 친구들이 길거리 아스팔트 공사장에서 끈적거리는 무언가를 신발 밑에 발라왔고, 거기에 돌을 박아서 장난을 치며 신고 다녔다고 한다. 물론 박명애 씨는 ‘또각또각’의 그 느낌을 누운 상태에서 손에 신발을 끼워 걷는 시늉을 하며, 그 ‘소리의 느낌’을 반복하는 걸로 대리만족을 얻곤 했단다.

뭐라고 해야 할까. 어린 한 소녀가 구석진 방바닥에서 혼자 구두 굽 소리를 내며 누워 있는 모습이 실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연상된다면…, 그건 혼자만의 상상력일 뿐이라고 그냥 치부해야 할 일일까?

지금도 잊지 못하는 친구 하나

“친구가 있었어요. 나보다는 다섯 살 적은 여자아이였는데, 그 애는 지금으로 말하면 천질(天疾)이라는 병을 앓고 있던 아이였어요. 갑작스레 쓰러져서 몇 분 동안 정신을 잃다가 다시 깨어나는 병을 앓던 아이였죠. 병 때문에 학교도 못 다니던 아이였는데, 십대 후반 당시에 종교 모임을 통해서 그 애를 알게 됐어요. 종교야 뭐, 저는 혼자 집에서 신앙을 가지려 하던 시절이었는데, 그 친구가 저한테 오더니 같이 가자는 거예요. 그래서 ‘네가 나를 업고 어떻게 하려고 하냐?’ 물었죠. 종교 모임 장소까지는 삼십 분이 넘는 거리였거든요. 그랬더니 이 친구가 ‘언니, 나 힘세요. 괜찮아요.’ 하며 저를 업고 다니는 게 아니겠어요.”

그렇게 몇 달을 그 친구 등을 통해 외출하는 동안, 주변의 어르신들은 똑같은 우려의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네가 언니를 업고 가다가 길에서 쓰러지게 되면, 언니도 큰일이고 너도 큰일이다. 정말 조심해라.’ 그런데 그건 조심할 수 없는 게, 예고도 없이 갑자기 쓰러져 버리는 병이 아닌가. 종교 모임 당시에 갑자기 뒤로 넘어지면서 쓰러지는 걸 실제로 본 적이 있었기에 우려가 크긴 했지만, 자신을 업고 다니는 동안 단 한 번도 쓰러지는 일 없이 도랑을 건너다니던 나날을 계속했다고 한다. 당시 그가 가장 나가고 싶었던 건 달밤의 길가에 핀 코스모스를 보고 싶었기 때문인데, 친구는 그를 업고 그의 발이 되어 코스모스 핀 길을 함께 걸어주었단다. 언제나 편안하게.

   
▲ ⓒ채지민 객원기자

“그런데 우리 집이 아버지 사업 때문에 갑자기 대구로 이사를 하게 됐어요. 대구로 오면서 그 친구와의 소통이 끊어지게 됐죠. 그래서 일 년 정도 지난 후 아는 언니한테 편지를 보내서 그 친구한테 연락해 달라고 하며 애타게 찾았는데…, 제가 진주를 떠난 다음에 그 친구가 죽었다는 거예요. 목욕탕에 갔다가 물에서 쓰러져서… 지병 때문에…. 아마도 제가 세상을 살면서 절망이라는 걸 처음으로 진지하게 느꼈을 때가, 그 친구 죽음을 전해 듣던 그 당시였을 거예요. 그 애는 제가 세상에 나올 수 있는 유일한 소통이었고, 제 인생에서 너무너무 고마운 사람이었는데…. 그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한 게 지금까지 가슴 깊게 남아 있습니다.”

듣는 입장에서도 안타까운 한숨이 흘러나올 만큼, 참으로 마음 아픈 사연이었다. 눈가를 잠시 매만지던 박명애 씨는 그 친구로 인해 바뀌게 된 자신의 삶을 얘기했다. 장애영역의 싸움을 하면서도, 자신과 같은 지체 쪽으로만 생각하지 않게 된 게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된 거란다. 장애운동은 영역을 구분할 필요 없이 전체를 다 바라보며 해야 할 과업이라는 것, 다시 말해서 발달장애의 경우 마음은 있어도 그걸 표현하지 못하기에, 그 표현 자체를 옆에서 대신 함께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무슨 투쟁이든 싸움이든 간에, 그 모두가 자신의 일이라 생각하며 임하게 됐단다. 신세지던 그 친구한테 고마움을 전하지 못했던 거, 작은 선물 하나도 못해줬던 아쉬움 때문에 모든 장애를 폭넓게 포용하게 됐고, 지금도 생활 속 한 순간마다 그 친구의 이름 석 자를 가슴에 새긴다고 한다.

야학, 인생의 등불로 켜지다

분위기 전환 겸 사진 촬영을 위해 자리를 잠시 정리하는 동안, 박명애 씨는 대구로 이사를 갔던 오래 전 그 당시가 다시 떠올랐던 모양이다. 여러 가구가 한 집 안에 함께 지내던 틀에서 벗어난다는 것, 전혀 다른 환경으로 옮겨간다는 사실에 나름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됐다고 한다. 그곳에선 과연 어떤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버지가 마련해놓은 집에 들어가니까, 그 대문을 닫고 들어서니까 완전한 폐쇄인 거예요. 우리 가족 말고는 아무도 없었어요. 거기서 다시 방 안에 있는 생활을 계속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까 어느 집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하루 종일 오고가는 거예요. 도대체 얼마나 큰 집이기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는지 정말 궁금했는데…, 몇 년 후에 나가보니까 그게 골목길이더라고요. 그게 골목길이라는 것도 몰랐어요. 달성공원으로 향하던 뒷골목이었는데, 그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왕래를 했던 건데, 저는 그만큼이나 밖을 모르며 지냈다는 것이죠.”

그 즈음부터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들어오시는 날이면, ‘네 엄마와 내가 죽을 때 같이 죽을 테니까, 너도 같이 이 세상을 끝내야 한다.’ 이런 말씀을 반복하셨단다. 그런데 그 말이 정말 듣기 싫었고, 왜 자신이 그래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그의 가슴에 회색 먹구름이 밀려들기 시작했고,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 인생에 대한 회의가 몰려오게 됐단다. 지금껏 살아온 걸 보니 앞으로도 더 나은 생활은 안 될 것 같고, 이게 끝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스스로의 가슴에 ‘그냥 이게 끝이다. 끝인 것 같다. 끝일 것이다.’라는 그림자가 뒤덮게 됐다는 것이다. 자신의 다리를 막 잡아 뜯으면서 울부짖었던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게 자신의 한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고 한다.

“제가 스물다섯이 됐을 때, 정말 심한 몸살을 앓았던 적이 있었어요. 그 몸살을 길게 앓으면서 ‘아, 나는 이렇게 평생 살아야 하는 건가?’ 그런 생각에 심한 절망이 밀려들더라고요. 인생의 이름으로 다가온 정말 심한 절망을 그때 느꼈어요. 그러한 절망들이 인생의 중간마다 있었을 텐데, 제가 그걸 다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렇다면 그런 절망까지 느끼게 됐는데, 세상과의 소통이 이루어진 계기는 언제 다가왔는지, 또한 아무리 완전하게 폐쇄공간에 갇혀 있었다 해도 세상으로 나오게 된 통로가 분명 존재했을 텐데 그건 무엇이었는지가 궁금해졌다.

해답은 바로 ‘야학’이란다. 마흔일곱의 나이에 만나게 된 야학이 ‘인간 박명애’의 삶을 뿌리부터 뒤바꿔놓았다는 것이다. 대학생들이 01학번이나 02학번이라고 스스로를 말하는 게 너무 듣기 좋고 부러웠던 시절, 그에게는 우연한 제안 하나가 들어오게 됐단다. 알고 지내던 후배친구 하나가 대구에 장애인들을 위한 야학이 생겨서 다니고 있는데, 같이 다니자는 얘기를 꺼냈다는 것이다. 이 나이에 어떻게 다니겠냐고 부정적인 대답을 하긴 했지만, 그날 이후로 그의 가슴은 학교를 다니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채워지게 됐단다.

몇 개월 동안 생각으로만 들끓고 있다가, ‘단 하루만 가고 못 다니더라도 한번 가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콜택시를 타고 찾아갔는데, 야학은 건물 2층에 있었고 수동휠체어를 접어들고 누군가에게 업혀 올라가야 하는 문제가 걸림돌로 등장했단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고민을 반복하다가, 심장병 어린이 돕기를 하는 ‘사랑 실은 교통봉사대’라는 조직을 알게 돼서 어렵게 문의를 하게 됐단다. 이러이러한 상황이고 개인적인 신상까지 언급하며 정중히 요청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딱 한마디 “걱정 마이소!” 그래서 차를 몰고 오신 분의 도움을 받아 2층 야학 교실에 올라가, 학습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를 테스트 받고 돌아오게 됐단다.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사흘 정도 연락을 기다리는데, 한편으로는 학교 오지 마라는 답변을 듣게 될까봐 마음이 너무 조마조마했다고 한다.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전화를 걸어 자기는 안 되겠냐고 물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오늘 전화를 드리려고 했다는 말과 함께 야학에 와서 등록하라는 대답이 이어졌단다. 매주 월수금 사흘을 공부하러 다니게 되니까 주변 사람들은 ‘그 나이에 뭘 하려고 학교에 다니느냐. 차라리 돈 되는 다른 걸 배우지.’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모양이다.

   
▲ ⓒ채지민 객원기자


하지만 어릴 때부터 학교 근처에도 가지 못한 삶을 살아왔던 박명애 씨한테는 그런 얘기가 들릴 리 만무한 일이다. 너무 즐거운 인생의 반전 속에 몇 개월 뒤 초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내친 김에 중학교 검정고시까지 합격을 이뤄냈다. 영어와 수학 때문에 고교 과정을 마치지 못했는데, 통과가 된다면 방송대에 자신의 이름을 걸어놓을 예정이란다.

“저는 야학을 다니겠다는 결심을 정말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확고하게 잘했다고 생각을 해요. 저한테는 열여섯 살이 없었고, 스물 몇 살도 없었고 서른 몇 살도 없었어요. 이렇게 살았던 게 너무 억울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정말 그렇게 안 살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저한테는 그걸 얘기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잖아요. 가만히 조용히 사는 저한테 착하다고 얘기해 주는 사람 하나 없었고, 그리 살았으니까 이젠 좀 바꿔서 살아야 되지 않겠냐고 저를 위해 한마디 전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지금 장애운동을 하면서도, 저 자신의 얘기를 부끄럼 없이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요. 그렇게 바보 같은 인생을 살지 말라고, 갇혀 있고 주저앉은 그런 생활은 절대 하지 말라고 강조를 하는 거예요.”

길은 이미 거기에 있고 반드시 보인다

장애라는 이유로 인해 인생을 수동적으로만 받아들였던 과거와, 장애가 있으면서도 인생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며 자기 선택권을 갖게 되는 건 정말 종이 한 장 차이인지도 모를 일이다. 박명애 씨의 경우만 봐도 야학을 알게 됐는가 아직도 모르는가, 등록을 했는가 안 했는가, 스스로 움직이며 세상으로 나갔는가 아니면 방 안에서 계속 움츠렸는가의 차이로 인생의 길이 완전하게 뒤바뀐 게 아닌가. 야학에 다니면서 ‘사랑의 리퀘스트’ 프로그램에 신청을 했고, 거기에 선정되어 받게 됐다는 전동휠체어는 오히려 작은 보너스일 뿐이다.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의 삶을 자신의 선택으로 살게 됐다는 것, 바로 그 점이니까 말이다.

“진짜로 제가 배워야 할 게 훨씬 더 많은 곳이 세상이더라고요. 옛날 사람들 말처럼 그냥 팔자려니 하며 살아왔다는 게 저는 너무 후회스러워요. 그렇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라도 노력할 수 있는 거라면 노력을 더 많이 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철이 없을 때 하는 실수는 좀 봐줄 수 있는데, 제 나이 되어서 실수를 하면 그건 정말 부끄러운 일이겠죠. 그러니까 자기 장애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장애를 가진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한다는 것, 그게 정말 지나고 나면 후회 없는 삶을 사는 게 아니겠나 생각합니다. 부끄럽다고 가만히 있으면 정말 부끄러워지는 겁니다. 장애를 가진 누구에게든 저는 정말 과감하게 도전하는 삶을 사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나이가 들었다고 늦었다 생각할 필요도 없단다. 박명애 씨는 인생이 60부터라고 믿고 있고, 자신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70의 나이가 될 때까지 투쟁의 현장에서 확고한 목소리를 내겠다고 다짐한단다. 그래서 자신은 항상 육체적인 나이가 아니라, 이 사회로 나오게 된 기간을 가지고 나이를 말하게 됐다고 한다. 야학에 나온 지 9년, 그건 ‘박명애’라는 인간이 세상과 소통하며 자연인으로 살아온 기간과 일치하기도 한다. 그래서 누구에게든 자기 자신을 아홉 살이라고 소개하면서,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며 믿는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장애인들이 50% 감면을 받는 분야가 여럿 있기에, 자신의 나이도 50% 감면시켜서 스물여덟 살이라고 속 편하게 말하기도 한단다.

“늦게 시작한 만큼 더 열심히 하면 뭐든 안 되겠습니까. 저는 용기가 없었다는 것 때문에 못하면서 지내왔던 것 같아요. 그런데 하려고 하니까 길이 보이더라는 거예요. 길은 이미 거기에 있었다는 것이죠. 저는 앞으로 장애를 가진 여러 분들과의 삶에 항상 함께 머무를 겁니다. 혹시라도 용기와 힘이 부족하다고 생각되시면 저한테 연락주세요. 제가 함께 해드리겠습니다.”

카페에 마주앉아 나눈 대화는 67분 분량이고, 그 내용을 녹취로 옮겨 적은 건 A4지 17장 분량이다. ‘사람사는 이야기’가 12면 아닌 20면 정도로 편집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바로 이런 순간이다. 더 많은 내용을 모두와 함께 나누고 싶은데, 한정된 지면에 정리하다 보니까 여러 이야기들을 애써 나누며 분류하게끔 만들곤 한다. 아주 유쾌하게 웃었던 대화도 여러 번 있었고 눈가를 매만져야 했던 내용도 몇 차례 더 있었지만, 인간 박명애의 삶은 이제부터 시작이라 믿어지기에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에게 있어서 앞으로의 삶은 어쩌면 지금 현재의 삶과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앞으로 살아갈 모습을 오늘 현재 ‘있는 그대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제가 제일 처음 현장에 섰던 건, 활동보조 제도화를 위해 대구시청 앞에 나왔던 2006년이었어요. 오후 두 시에 기자회견을 하고 그 자리를 바로 깔고 앉는다, 우리는 그렇게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전날이 되니까 정말 무슨 큰 독립운동을 하는 것처럼 마음이 설렜어요. 처음 하는 운동이었기에 잘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솔직히 겁도 났었죠. 그래서 집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나왔어요. 혹시 다치거나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기 때문인데, 어쨌든 저는 그렇게 해서 운동판에 나왔습니다. 이 사회 속에서 우리가 왜 차별 받고 있는 건지, 그건 방 안에 있을 땐 전혀 몰랐던 걸 야학을 통해 알게 된 거죠. 그렇게 43일간의 시청 앞 농성투쟁을 계속했고, 그 뒤에는 활동보조 최대시간 보장하라고 23일간 단식투쟁을 했어요. 삭발도 했었고요.”

현장에 직접 뛰어들고 나니까, 비로소 진짜 현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단다. 농성을 하든 말든 장애인들을 아예 무시해버리는 공무원들의 반응, 그건 정말 모멸적인 대응이었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어린 시절부터 들어왔던 부모님의 한마디가 떠올랐단다. ‘나중에 얼마만큼 해줄 테니까 기다려라….’ 바로 그것이었다. 나중에 세월이 가고 어느 때가 되면 스스로의 세상이 오겠지 - 했던 게 그냥 머리에 박혀 있었다는 것이다.

그제야 깨닫게 됐단다. 그게 바로 세뇌라는 것! 항상 사회적 약자들에게 기다리라고, 나중에 주겠다고, 때가 되면 해줄 테니까 기다리라고. 이 사회와 국가가 어려운 국민들에게 했던 그 말들이 결국 세뇌였다는 사실을 통감하게 됐다는 것. 결국 박명애 씨가 철야농성과 단식과 삭발을 마다하지 않게 됐던 건, 또한 모질고 악착스럽게 싸우게 됐던 것은 그만큼 악착스럽게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걸 53년 동안 체험했기에 가능해진 일이었다고 한다.

   
▲ ⓒ채지민 객원기자
“이 나이에 굶고 삭발까지 해가면서 싸우고 있는데, 정부는 오히려 혜택을 줄이고 시간과 돈을 깎기만 하는 거예요. 활동보조 시간이 무슨 시간입니까. 장애인들이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이에요. 화장실 문제 때문에 서울이라도 한번 가려면 사흘 전부터 밥 적게 먹고 물 적게 마시면서 몸을 길들여야 하는데, 우리 장애인들이 외출 한번 하려면 다 그렇게 대비하며 살고 있는데, 이 사회의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무슨 잣대로 그걸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시간을 줄이고 돈마저 깎는 짓을 하느냐는 거예요. 왜 그런 걸 생각 못해주는지, 저는 이게 너무너무 괘씸합니다. 그래서 이젠 더 못 기다리겠다, 나는 내가 살아서 정말 좋은 세상에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겁니다. 정말 이 정부는 정신을 차려야 해요. 활동보조 예산과 연금은 우리의 가장 기초적인 생존권의 문제라는 걸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도둑이 들어도, 불이 나도 활동보조가 없으면 돌아눕지도 못하는 이들이 전국에 얼마나 많은가. 그들에게 기초적 생존을 도와주는 제도 마련이 그렇게도 어렵다는 말인가. 정말 급할 때 해야 하는 게 전화인데, 전화기를 옆에 두고도 버튼 하나 누를 수 없는 이들이 지금 어떤 현실 안에 방치되고 있는가. 박명애 씨는 필요하다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장애해방을 반드시 이뤄내겠단다. 이건 보통의 비장함이 아니다. 그의 한마디가 흔한 립싱크의 언어가 아님은 우리가 더 잘 알게 될지도 모른다.

대화를 마치고 잠시의 사진 촬영을 진행한 뒤, 재회를 기약하며 돌아오던 길 내내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수줍은 사춘기 소녀를 결사투쟁의 투사로 만든 건 누구인가. 도대체 누가 그를 거리로 나서게 만들었는가. 이 사회가, 이 정부가, 이 제도가, 이 국가적 시스템이 결국 장애인들의 삶과 사회적 약자들의 인생을 볼모잡고 있는 게 아닌가. 복지정책 확대가 최선의 사회기반 확충과 일자리 확대라는 사실을, 선진국들이 이미 다 실천적으로 증명했던 그 단순한 진리를 왜 우리 정부와 이 사회만 모르고 있다는 걸까?

더 나은 세상 아니, 조금이라도 제대로 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박명애 씨한테 응원과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현장에서 활동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같은 마음을 전한다. 격한 구호라도 새겨놓는 게 나을 것 같지만… 오늘은 반대로 짧은 시 한 구절을 마무리로 올린다. ‘잠들기 전에 몇 마일을 더 가야 한다’던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시 원문의 마지막 부분이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는 노래 선율의 느낌과도 같이, 오늘은 이 시 구절을 음미하며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가 무엇인지를 떠올리고 싶다.

The woods are lovely, dark, and deep.
숲은 아름답고 어둡게 우거졌지만
But I have promises to keep,
나에겐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다.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다.
작성자채지민 객원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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