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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일이 가치 있는 인생을 만든다

[사람사는 이야기] 前 옥천신문 편집국장 조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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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신문을 아시나요?’

첫 문장을 이런 질문 형식으로 적으면, ‘그때 그 시절을 아시나요?’의 느낌으로 전달될지도 모르겠다. 내침 김에 두 번째 질문도 같이 드린다.
‘옥천신문이라 하면 독자 여러분은 무엇을 떠올리시나요?’
이 대목에서는 ‘아, 바로 그 옥천신문!’이라는 반응이 하나, 또 한편으로는 ‘그게 뭔데?’라는 의견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재미있는 특징 한 가지가 발견된다. 바로 위의 느낌표 하나와 물음표 하나의 차이가, 일정한 연령대를 나눌 만한 구분점이 된다는 점이다. ‘옥천신문’을 아는지 모르는지의 차이가 20대 이하와 30대 이상, 그게 아니면 30대 이하와 40대 이상 같은 식으로 부지불식간에 구별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20세기가 끝나갈 무렵에 태동했던 지역신문의 정의는 무엇이었던가. 말 그대로 풀뿌리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다. 최근의 관료적 지역신문들이야 거의 다 해당 지역 단체장의 개인 홍보수단으로 전락했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각 지역신문들은 지역의 끈끈한 연대를 가족 분위기로 느끼기에 충분한 내용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OO이네 집에서 새끼 강아지가 세 마리나 태어났대요!” 내지는, “OO마을 OO이가 이번에 어느 대학에 합격했대요!”라는 식이다. 신문 기사가 이런 문구로 채워지며 진행된다면, 얼마나 즐겁고 살갑게 전해지는 언론인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치 않는 진실이 몇 가지 있다. ‘내 가족이 우선이다’ 같은 내용도 물론 중요하지만, ‘자신이 원했던 삶의 도전이 결국은 후회 없는 인생의 결론을 이끌어낸다는 것’만큼 성취감을 이끌어내는 화두가 또 있을까?

이번 ‘사람사는 이야기’는 그러한 인생의 진리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이미 실증적으로 증명해낸 인물 하나를 만나기 위해 떠났다. 취재를 위해 몸을 실은 고속열차 KTX는 대전을 향해 달렸고, 겨울비 내리던 대전시청 인근에서 그 주인공을 만났다.

    ▲ 前 옥천신문 편집국장 조주현 씨 ⓒ채지민 객원기자 독자의 눈높이를 모르는 기자는 ‘잘못된 기자’

그칠 듯 이어지는 빗줄기를 뒤로 하며, 이번 만남은 독특하게 점심식사를 함께 하는 걸로 시작이 됐다. 그리고 그동안 진행됐던 모든 만남과는 다르게, 대화의 순서가 현재로부터 과거로 연결되는 역순서로 이어졌다.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걸로 시작했던 기존의 방식은 접어두고, 지금 현재의 직장 업무와 인생을 먼저 듣는 걸로 물꼬를 텄다는 뜻이 된다.

옥천신문의 2005년 4월 8일자 기사 중엔 이런 한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지난 1일 편집국 직원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조주현 편집부장이 편집국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 별다른 특징 없이 항상 봐오던 인사발령 기사인 것 같지만, 그 한 줄의 내용 안에는 그동안 다른 언론에선 볼 수 없었던 한 대목이 밑줄을 긋듯 눈에 띈다.

‘편집국 직원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바로 ‘직접선거에 의해’라는 한마디가 묵직한 가치를 지닌다는 점이다. 위로부터 지시가 떨어지는 인사발령이 아닌, 아래로부터 올라가는 인사고과가 존재한다는 것! 이 세상은 그렇게 몇 걸음 앞서며 먼저 가는 이들 때문에, 반석과 같은 발전의 계기가 마련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조주현’이라는 이름이 거론되면, 그의 존재를 알고 있던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비슷하게 일치가 된다.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라는 대답이 대부분이다. 더불어 그를 얘기하며 주고받는 평가는 거의 다 긍정적인 내용으로 결론이 내려지곤 했다.

왜 그럴까? 그게 몹시도 궁금해서 식사를 위해 마주앉자마자 질문을 던졌더니, 그의 대답은 천연덕스럽게 맞받아치기로 되돌아왔다. “에이, 그건 제가 밥을 자주 사주니까,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는 거죠.” 하며 껄껄 웃는 소리가 한참 이어졌다.

기자 생활 15년 가까이 지낸 뒤, 그가 지금 맡은 업무와 직위는 전국 각지의 수많은 지역 언론 및 단체들의 인터넷신문을 제작하고 편집하는 전문회사의 지면편집국 국장님이다. 현재 제작을 담당하고 있는 언론사, 기업, 단체만 해도 500곳이 훨씬 넘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번쯤 봤을 법한 ‘대한OO협회’나 ‘전국OO협회(연합회)’, 또는 옥천신문과 같은 전국 각지의 ‘OO신문’의 인터넷판 제작에는 그의 관리감독과 제작 지시가 늘 함께 했다는 의미가 된다.

“취재기자들도 사실은 정기적인, 장기적인 교육을 받아야 되거든요. 그런데 그게 요즘은 잘 안 되니까, 그 역할을 제가 일정 부분 대신해주고 있는 셈이죠. 개별 기업이나 지역 언론의 편집장들은 각자 자신들의 현장에서 직접 느꼈던 걸 생생하게 적어 기사로 보내주고, 저는 그 지역(기업)을 전혀 모르는 독자의 입장에서 신문을 편집하며 만들어주니까, 사실은 이게 훨씬 더 좋은 거예요. 제가 독자의 눈으로 봤을 때, ‘나는 그 지역을 몰라. 나는 전혀 모르는데 그 기자는 잘 알아. 그렇다면 이 내용은 도대체 무슨 뜻이지?’ 이렇게 반론을 떠올리게 된다면, 그건 정말 잘못된 기사 작성이라는 거죠.”

역시 언론 출신의 관점은 매서웠다. 죽비를 꺼내들듯 따끔한 지적도 뒤따랐다. 현직 기자들은 심한 착각 속에 쉽게 빠져 지낸단다. 자신들이 아는 건 독자들도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지레짐작한다는 것. 예를 들어 기사 내용 중에 ‘지난 호의 OO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해놓는 게 대표적인 예라 한다. 독자 그 누가 지난 호를 기억하고 있겠는가. 그걸 쓴 기자 혼자 기억하고 있는 건데, 그건 독자가 아닌 같은 회사 옆 부서 직원들도 모르고 있을 내용이 분명하단다. 그렇게 타성에 젖어 적는 기사는 불친절의 극치이며 게으름의 극치라는 그의 표현이 오히려 속 시원하게 들려온다.

인터넷신문이 전과 다르게 양질의 구성으로 바뀐 걸 기뻐하고 고마워하는 고객층을 대할 때는 같이 즐거워지지만, 의욕만 가지고 신문을 만들겠다며 문의하는 이들(기업, 단체, 지역 언론 등)은 단번에 그 수명이 길지 않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인터넷신문을 만들겠다고 해서 계속 연락이 오고, 그래서 그쪽 사무실을 방문해서 전체 분위기를 둘러보면 즉각 답이 나온다는 것이다. 시작해봤자 짧으면 한두 달, 길어야 5개월을 넘기지 못할 신문이란다. 안타깝지만 자신의 직감이 거의 100% 맞아떨어진단다. 담당자 두 명 정도의 눈빛만 보면 결론이 내려진다는 것이다.

“진짜로 눈을 보면 딱 알아요. 신문을 왜 만들겠다는 건지, 그 의도가 훤히 보이거든요. 뚜렷한 목적의식이 없다면 모든 게 금방 무너집니다. 언론은 의욕만 가지고 만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 ⓒ채지민 객원기자 학습효과와 잠재력의 힘

점심식사를 겸한 대화였기에 주변은 상당히 어수선했지만, 그게 오히려 대화를 자연스럽게 풀어낼 만한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언론생활 15년이면 베테랑 아니냐고 물으니까, 손사래를 치며 어디 가면 명함도 못 내밀며 지낸단다. 그래도 풀뿌리 지향의 언론과 단체들 사이에선 전국적인 지명도가 높지 않느냐고 다시 물으니까, 그런 유명세 때문에 사람 여러 번 잡았다며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정작 본인인 저는 입을 굳게 닫고 있지만… 제가 신문사를 사직한 것도 결국은 촛불집회 정국 이후 외부의 압력 때문이었고, 그래서 거의 1년 동안 칩거를 했어요. 계속 해오던 강의나 개인적인 외출을 거의 다 안 하며 지냈죠. 그러는 동안 저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을 좀 많이 넓히게 된 것 같아요. 오랜 기간 신문사라는 틀 안에만 있었기 때문에, 일정한 제약 같은 게 있었던 건 사실이죠.”

그가 담당하는 인터넷신문이 대략 530군데 정도 되다 보니까, 사실 전국의 거의 모든 정보가 그의 눈앞에 머물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내실 있고 의미 깊은 좋은 신문들도 많지만, 솔직한 생각으로 말한다면 정말 희한한 별의별 신문들도 다 있단다.

그렇다면 사업적인 관점에서 제일 상대하기 싫은 대상이 누구냐고 물으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업계에서 이구동성으로 하는 얘기가 있다고 한다. 그는 대략 세 군데의 특정 협회를 거명했는데, 까다롭고 목소리만 높으며 요구하는 것만 많아서 그런 고객들은 기피대상 1호란다.

“그 대신 정말 수익도 안 되는 곳인데도, 힘껏 도와주고 싶은 심정으로 대신 해드리는 고객도 있어요. 예를 들면 소외계층들이죠. 지금 계속 그런 일을 하고 있거든요. 청소년들의 신문이라든지 장애인들이나 복지관 신문 같은 거죠. 외국인이나 이주노동자들의 신문도 있는데, 맞춤법이 잘 안 맞는 것도 꼼꼼하게 교정을 봐주며 도움을 전하고 있어요.”

이렇게 직접 만났으니까, 대화의 중심을 조금 더 옥천신문에 맞추고 싶었다. 대한민국에서 ‘안티조선’이라는 용어와 그 운동을 처음 전개했던 걸로 알려지기 시작했던 옥천신문은, 90년대 중반 이후로 뜻 있는 사람들 사이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적지 않은 신드롬 비슷한 움직임을 만들어낸 바 있다.

그건 혼자만의 힘으로 이룬 게 아닌, 신문사 구성원들과 지역주민들의 적극적 참여와 정성이 함께 했던 결과임은 분명할 것이다.

그 중심부에서 기자 생활과 편집국장을 역임했던 조주현 씨의 입장과 평가는 또 다를 것 같아 질문을 던졌다. 그 당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언론운동이 옥천에서 성공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 ⓒ채지민 객원기자
“그건 사실 일정부분은 반사이익도 있었다고 봐요. 다른 지역 언론사들도 많았는데, 상대적으로 대부분 부실한 상태였으니까요. 워낙 걸출한 인물 한 분이 계셔서 신문사를 이끌었고, 그 분을 받쳐주는 몇 사람들이 있었는데 우리 나름의 특유한 감각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뭔가를 이슈화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게 목소리 큰 한두 사람의 의견이라면 여느 집단처럼 똑같은 결과만 낳았을 텐데, 우리는 팀워크가 아주 잘 맞았어요. 호흡이 맞는 사람들끼리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도 사실 엄청 큰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궁금증 하나가 더 남는다. 옥천은 농촌지역이고 상대적으로 보수적 성향이 강했다고 알려졌는데, 그런 지역에서 진보적인 신문이 살아남았다는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 지역 나름의 풀뿌리 운동 가능성이 존재했던 건지 알 순 없었지만, 전후 상황을 헤아린다면 진보적 운동의 탄생지로선 다소 의외라는 생각이 앞서곤 했던 것이다.

그의 의견은 달랐다. 이 대목에서 ‘학습효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단다. 당시의 옥천 지역이 보수적 색채를 지니고 있었음은 분명하지만, 사실 어느 지역이라서 어떤 성격의 신문이어야 한다는 공식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대구에 가서 진보적인 신문을 낸다고 바로 문을 닫을까요? 저는 그건 아니라고 보거든요. 반대의 예로 진보적인 지역에 가서 보수적인 신문을 내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은 아니죠. 왜냐하면 모든 주민들이 똑같은 생각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니잖아요. 누구를 위한 신문을 만드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신문을 내면서 점점 더 세력을 갖게 되다 보면, 예를 들어 진보의 색깔을 가지고 있는 신문이 보수의 일부 세력을 흡수해가는 역할을 담당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옥천신문도 초기에는 그랬을 거라고 저는 봅니다. 일부를 위한 신문이었는데, 이게 점점 학습효과를 낳게 된 것이죠. 20년 동안 지역에서 같은 목소리를 내면서 자연스럽게 진행됐을 테고, 거기에는 선배들의 많은 땀과 희생이 함께 했던 겁니다.”

조주현 씨는 적당한 시기에 신문사를 그만둔 것 같다는 말을 꺼냈다. 그러면서 화제를 스스로 돌렸다. 자신은 요즘 블로그를 열심히 한단다. 블로그에서 배우는 게 굉장히 많다며, <함께걸음> 독자 여러분한테도 블로그를 배우라고 말씀드리고 싶단다.

외국 같은 경우에는 90살을 넘긴 사람도 기사를 계속 쓰고 신문 사설 같은 걸 올린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정서가 존재하지 않는 우리나라의 문제점이 아주 크다고 지적했다. 좀 잘나간다 하는 사람들은 일제히 정치판에 끼어들려 기웃거리고, 청렴결백하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해 생계 걱정에 연연해야 하는 현실이 개탄스럽다는 것이다.

자신의 나이쯤 돼서 임원이 되지 못하면 알아서 사표를 내야 하는 사회라는 거. 사실 우리나라 기업문화가 전부 그렇지 않은가. 나이 50이 되기 전에 임원이 못되면, 조용히 짐을 싸고 나와야 예의라고 공공연히 얘기하는 사회라는 거. 언론인의 경우는 아직 좀 덜한 것 같지만, 그렇다 해도 우리나라의 정서상 나이 90을 기자로 인정하느냐 여부는 우리의 한계를 드러내는 증거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외국의 어느 사진 1장 얘기를 꺼냈다.

외국 회사의 총무 담당으로 일을 하는 어느 여성이 자기 아이를 데리고 와서, 아이를 곁에서 돌보며 자신의 업무를 함께 하는 내용의 사진이라고 한다. 우리의 경우라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당연하고도 직설적인 대답이 이어질 것이다. 직장과 가정도 구분 못하는 정신 상태라는 거, 그런 정신으로 어떻게 직장생활을 하느냐는 지적과 비난이 쏟아질 게 아닌가.

“저는 그런 정서와 전통이 정말 무서운 힘을 가진 거라고 봅니다. 미국이 아무리 욕을 먹는다 해도, 아무리 역사가 짧다고 해도, 매일 길거리에서 총을 쏴대는 나라라고 빈정대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미국의 잠재력이라는 게 그 사진 한 장 안에 담겨 있다고 봐요.”

어렵지 않게, 더 가볍게 다가설 수 있게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신문의 발전은 계단식인 것 같아요. 그냥 계속 가는 게 아니라, 몇 번의 기회가 있을 때 그걸 얼마나 정확하게 기회라고 생각하며 붙잡느냐에 따라서 그 신문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줍니다. 기회가 왔는데도 이게 기회인지 뭔지도 모르면서 미적대는 신문사가 있고, 기회가 왔을 때 빠르게 판단하면서 재치와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아, 이거구나!’ 하며 그걸 자기 것으로 잡아내는 신문사가 있다는 것이죠. 그건 언론뿐만 아니라 모든 사업에 해당된다고 봐요. 하나의 대상에 대해 얼마나 그럴싸하게 이야기 즉, 상품을 만드느냐에 따라 결론이 전혀 달라진다는 것이죠. 남다른 관점이 있고 뿌리가 있으며, 역시 그들은 뭔가가 다르다는 반응을 독자와 사회로부터 이끌어내야 합니다.”

이런저런 화제가 계속 이어졌는데도, 대화를 나누다 보면 중심주제가 옥천신문으로 다시 되돌아가 있기를 반복했다. 옥천에는 한겨레신문의 초대 발행인인 송건호라는 걸출한 인물이 배경으로 있었고, 전국적인 화제를 낳았던 언론문화제가 계속 거행되는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함께 작용하면서 옥천신문을 세상의 한복판으로 불러들이게 된 것 같다고 한다.

“당시 소위 ‘안티조선’ 운동을 하던 여러 논객들을 불러놓고 언론문화제에서 토론회를 개최했어요. ‘안티조선’이라는 용어가 공식화됐던 게 바로 옥천신문의 언론문화제였죠. 당시에 저는 여름휴가까지 반납하고 밤을 새워가면서 그 사이트를 만들었습니다. 그런 동력이 무엇이었냐고 질문을 종종 받는데, 사실 그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어요. 그 당시 ‘안티조선’이라는 게 아주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은 아니었고, 누구나 공유하던 생각이었잖아요. 그런데 그걸 공식적으로 사이트를 만들고 ‘독립군’이라는 용어를 만들었고, 신문을 못 쓰게 만드는 건 물총 하나면 충분하며 ‘물총닷컴’을 연이어 만드는 등, 이 모든 것들이 순차적으로 이어지게끔 모두가 노력한 결과인 것 같습니다.”

당시 ‘안티조선’은 사회 각층에서 각각의 운동으로 시작된 바 있었다. 그런데 왜 옥천신문의 것만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겨진 걸까? ‘안티조선’ 사이트는 여럿이 동시에 개설하면서 제각기 운영됐다고 한다. 그런데 대부분 말로만 떠들다가 아무런 실천적 사례 하나도 없이 흐지부지 끝나버린 게 대부분이란다.

거기에 비해서 옥천신문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나름의 감각이 있었다고 자부한단다. 무언가를 추진할 때 너무 무겁게 시도하지 않고, 일면 촌스럽다 해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가볍게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오랜 궁금증 하나가 떠올랐다. 조선일보에서는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텐데, 무슨 반응 같은 게 있었는지를 물었다. 현지 지국장이 와서 어쩌고저쩌고 떠들며 갔던 게 전부였단다. 아니, 그렇다면 본사 차원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는 건가? 사실 옥천신문 차원에서도 본사의 시비(?)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쉽게 다가오지 못한다는 게 눈에 띄었단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는 오히려 옥천신문을 더 키워주는 결과만 낳게 될 게 뻔히 보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상식적인 질문이 등장해야 한다. 옥천신문의 활동을 방해하고 폄훼하기 위한, 맞불 성격의 신문이 지역에 생겨나거나 존재하진 않았는지 알고 싶었다. 당연히 있었단다. 그런데 얼마 가지도 못하고 망해버렸다고 한다. 어디서 나온 무슨 돈인지는 모르지만 엄청난 자본력으로 시작했었는데, 이 사람들이 무슨 목적으로 그런 신문사를 만들었는지가 한눈에 다 보였단다. 아까 처음에 인터넷신문을 만들려는 회사와 담당자를 보면, 그 내용과 수명을 단번에 알 수 있다는 발언과 일맥상통하는 사항이 된다.

“그쪽 사람들은 오로지 ‘안티옥천신문’을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뜻이 이뤄지지 않으면 전부 다 뿔뿔이 헤어질 사람들로 조직되어 있었어요. 배터리가 방전되면 미련 없이 버리듯이, 그런 식으로 두어 곳에서 창간했다가 이내 사라지고 말았죠. 그러고 나니까 결과적으로는 옥천신문이 더 단단해지고 힘을 갖게 되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그런 게 역효과로 나타나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 경쟁지가 없기 때문이죠. 저는 지금이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는 역효과의 기간이라고 봐요. 더욱이 요즘의 젊은 기자들 시각이 예전하고 많이 다를 수가 있으니까, 일정한 차이점은 존재할 거라 생각합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언론에 대한 다양한 토론이 난데없이 이어졌다. 현재의 모든 언론들은 한정된 지면 안에 무엇을 넣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것. 무조건적인 공격과 비판은 일시적인 반사이익을 얻게 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독자들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는 것. 언론은 앞에서 이끄는 길라잡이 역할도 당연히 수행해야 하지만, 고객인 독자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줄 수 있는 도우미 역할도 함께 담당해야 한다는 것. 너무 많은 걸 내용 안에 넣으려는 건, 읽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증거라는 것 등등,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조언과 지적이 한참동안 계속됐다.

듣는 동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하나의 실감이 떠올랐다. 대한민국 그 누구와도, 그게 대통령이든 정치논객이든 간에 어떤 인물과 만나도 끝장토론이 가능하다던 옥천신문 출신이 맞구나… 하는 실감 말이다.

    ▲ ⓒ채지민 객원기자 “네 인생은 누구 꺼?” - “내 꺼!”

질문의 초점을 ‘인간 조주현’ 하나로 맞췄다. 분위기는 단번에 뒤바뀌며 한 편의 인간극장이 생생하게 묘사되기 시작했다. 언론계가 아니었다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 됐을 것 같은지 물으니까, 아마도 자신은 어디 조그만 동네의 금은방 주인이 되어 있었을 것 같다고 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장애를 가진 몸으로 안정된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이 금은방 운영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삼육재활원 시절의 회고 역시 현장감 있는 그의 설명과 함께 이어졌다. 부모님이 계시는데도 재활원에서 맺어줬던 양아버지가 인심 좋은 캐나다인(人)이었기에, 각종 학용품을 국제소포로 선물 받는 재미가 제법 컸다는 얘기. 영부인의 재활원 방문을 준비하기 위해, ‘예쁜 모습과 귀여운 표정’ 연습을 한 달 내내 반복해야 했다는 얘기. 중고교 시절과 대학 시절의 회고에 이어진, 결혼을 반대하던 예비 장인장모님 때문에 아내와 전국 여기저기로 도피하며 생활했던 얘기. 면장님이셨던 아버지와 농사짓던 어린 시절의 집안 풍경에 얽힌 얘기와, 몸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고민이라는 현재의 자신 얘기까지 폭포수 쏟아지듯 이어졌다.

아득한 흑백TV 화면에서 생생한 칼라TV로 변환되는 시대상이, 그의 회고 여기저기에서 묻어나는 느낌이었다.

빈 그릇만 남겨진 식사의 자리를 벗어나서, 우리의 대화는 그의 회사 휴게실 공간으로 옮겨졌다. 실제현장에서 기자와 편집국장으로 오래 활동했던, 더불어 다양한 인터넷신문 제작을 총괄하는 입장에서 요즘 젊은 세대들의 언론관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물었다. 언론계의 선배로서 어린 후배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며 어떤 조언을 전달할까 기대했는데, 예상대로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따끔한 일침으로 그는 답을 시작했다.

“저는 일단 언론, 특히 주류가 아닌 지역 차원의 언론매체에 들어가는 친구들은 일단 부귀와 영달을 포기해야 한다고 봐요. 자기책임의식 내지는 사명감이라는 거, 그런 걸 지금 얘기하면 굉장히 고루한 내용 같지만 지금도 역시 가장 유효한 정답은 그것입니다. 언론에 뛰어들면서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생각을 앞세우면 안 됩니다. 지금 미국도 그렇습니다. 잘 나간다는 미국 역시도 지역신문은 똑같다는 거예요. 비록 부족함 있는 자기의 글이지만, 이것 하나로 지역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겠다는 자부심과 자긍심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전국의 변화를 가져오고 끌어당기기는 쉽지 않겠지만, 지역은 바로바로 변화가 오거든요. 그런 분명한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시대적인 감각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기에, 블로그를 하라고 항상 권유하며 지낸단다. 대신 자기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는 절대로 흔들리거나 놓쳐서는 안 된다. 시대적인 감각이 자신의 가치에 보탬이 되어야지, 시대에 편승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방관하면 안 된다. 새로운 가치가 보이면 그걸 끊임없이 지역 언론에 투영시키되, 지역 공동체적인 기본가치는 꾸준히 유지시켜야 한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조주현 씨는 대학 강단에 서서 자주 강의를 한다고 했다. 그 증거가 눈앞에 드러나는 듯한 조언이었다.

취재를 위해 다니다 보면, 어려운 이들과 함께 하는 젊은이들이 아직도 많다는 점에 늘 뿌듯함을 느끼곤 한다. 화려하다는 한쪽 방향만 바라보는 게 아닌, 그늘진 주변을 둘러보며 함께 걷고 함께 머무르겠다는 이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이들이 많아 보인다고 해도, 결론적으로는 갈수록 소수의 입장으로 내몰리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남들처럼, 남들만큼, 누구처럼, 최소한 나도 그렇게 돼야 한다든지, 눈높이에 맞는 직장이 아니라면 취업도 하지 않겠다는 말들이 자연스럽게 오가는 걸 보면, 세상의 흐름은 이미 또 다른 세계로 옷을 갈아입었다고 봐야 할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다.

“저는 이제 중학교에 들어가는 아들한테 매일 똑같은 소리를 합니다. 공부도 제법 하는 아이인데, ‘아들아, 네 인생은 누구 꺼?’ 하면 아들은 ‘내 꺼!’라고 대답합니다. 가진 게 없고 물려줄 것도 별로 없는 아빠 입장이지만, 아들한테는 한결 같은 얘기를 전합니다. 개인적으로 제 가슴에 확 와닿는 말 중에 하나가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을 노력하는 자가 따라올 수 없다.’라는 문장입니다. 그래서 아들한테 그 말을 늘 전하곤 하죠. ‘네가 좋아하는 걸 해라. 좋아하는 걸 택해라.’ 그런데 이 사회는 좋아하는 걸 하면 가난해집니다. 애니메이션이든 영화든 뭐든 간에, 좋아하는 걸 선택한다는 건 가난을 선택하는 것과 같잖아요. 그렇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는 그게 너를 행복하게 해줄 거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게 네가 행복한 거다. 연봉이 억대든 뭐든 하는 건 잠시의 순간일 뿐이다.’ 제가 왜 이걸 강조하느냐 하면, 얼마 전에 뉴스에도 나왔지만 대기업에 입사한 젊은이들이 얼마 다니지도 않고 그 좋은 회사를 그만둔다고 하죠. 들어가 보니까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의 평생 목표가 여기였는데, 들어와 보니까 이건 현실과 너무 다른 거예요. 그러니 ‘내가 기계의 일부냐? 내가 고작 나사 하나일 뿐이냐!’ 하며 좌절과 충격을 받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젊은이들과 만나게 될 때는, 현실을 항상 직시하라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고 한다. 대학에 나가서 언론학과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할 때마다 똑같은 느낌을 받는단다. 그래서 그의 따끔한 일침은 그 자리에서도 반복이 되는 모양이다.

“너희들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뭐냐? 너희들은 한손에 대본을 들고 뒤에 부하직원이나 후배들 여러 명 데리고서, 이래저래 지시하며 사는 게 너희들 소원 아니냐? 그런데 현실을 잘 봐라.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너희들 중 몇 명이나 되겠냐. 정확히 인식을 해서 자기가 그렇게 못할 미래는 일정부분 ‘포기가 아닌 양보’를 하는 게 옳은 거다.”

그는 이런 생각을 진심으로 전하고자 노력한단다. 나를 필요로 하는 그 어떤 곳이 있다면, 그게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정말 그 한 명이 나한테 굉장한 가치를 느낀다고 한다면, 다수의 만 명보다는 절대적인 그 한 명을 위해 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용감한 젊은이들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조주현 씨는 진지했던 표정을 풀며 편하게 웃었다. 지금의 일보다는 늙은 다음의 준비를 미리 생각한다고 한다. 재미있게 살고 싶단다. 원래 전공이 그림이었기에 그림도 그리면서, 해보고 싶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하는 삶을 설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만남을 통해 그의 얘기를 듣는 동안, 개인적으로는 이런 생각이 내내 떠올랐다. 고난이든 어려움이든 갈등이든 뭐든 간에, 자기 자신을 극복하면서 자신의 삶을 개척한 사람만이 갖는 여유라고 할까? 조주현 씨한테는 그런 인상이 강하게 전해져 왔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그는 자신이 꼭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게 될 거라는 믿음 같은 게 들었다.

진정으로 그렇게 되리라는 확신도 떠올랐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며 마무리를 짓고자 한다.

“눈빛만 보면 결론이 내려져요. 눈을 보면 딱 알게 되거든요.”
작성자채지민 객원기자  a352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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