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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지도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주세요

[사람사는 이야기] (사)함께가는 강북성북장애인부모회 부회장 최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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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지민 객원기자
“저…, 이 글의 제목을 ‘꼴지도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주세요’라고 해주시면 안 될까요?”

이번 만남의 모든 대화를 마치고 자리를 정리할 무렵, 곁으로 다가온 엄마의 부탁이 ‘뜻밖의’ 내용으로 전해졌다. 제목을 이렇게 하자? 글쎄…, 대략 3초 내외의 짧은 순간 동안, 그 제목의 타당성 여부를 머릿속으로 헤아려봤다. 3초는 아무것도 아닌 ‘아주 잠시’일 뿐이지만, 취재 중에는 30분만큼의 긴 공간이 되기도 한다. 결론은 ‘오케이!’ 본문 내용을 정리하며 떠올리게 될 그 어떤 제목보다도 훨씬 나은 메시지가 담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함께걸음>을 만들어가는 입장에서 제목 자체를 부탁받는 초유의(?) 사건은 그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결정이 됐다.

‘사람사는 이야기’ 취재를 나가기 전에는, 언제나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하며 출발하곤 한다. 만나게 될 이의 모든 정보를 낱낱이 수집해서, 그의 신상과 이력을 거의 다 외울 만큼 준비하는 것, 또 하나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만남 그 자체를 통해 ‘있는 그대로’의 느낌을 얻는 방법이 사용하곤 한다.

두 가지 다 장단점이 있음을 잘 알고 있기에, 그때그때마다 진지한 마음으로 선택과 도전을 정하게 된다. 미리 준비하느냐, 아니면 사람 그 자체를 만나고 시작하느냐 - 무엇이든 결론은 항상 똑같다.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은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고 있고, 아픔과 기쁨 모두를 아우르며 우리 이웃의 모습으로 살갑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정답은 언제나 그 하나로 남겨지는 것이다.

중증 그리고 중복

이번에는 ‘엄마’를 만나기로 했다. ‘5월은 가정의 달’이라는, 그런 추상적인 명제는 굳이 떠올리지 않았다. 다만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일상처럼 마주대하다 보니, 취재의 시선을 밖으로 던지기보다는 안으로 향하고 싶다는 생각이 짙어졌던 까닭이다.

누구라고 정하지도 않았다. 만나고 싶은 건 단지 엄마와 그 아이. - 그래서 한국장애인부모연대에 문의를 했고, 내부의 추천에 따라 임재인의 어머니 최미경 씨를 만나기로 했다. 우리가 가진 정보는 그게 전부였다. 누구의 어머니 누구, 그리고 전화번호 하나. 그렇다면 이번 취재 방식은 사람 그 자체를 먼저 만나고 시작하는 두 번째 경우가 되는 것이다.

서울 지하철 수유역 인근의 아파트로 들어섰다. 현관문이 열리고 우리를 맞이하는 어머니를 보는 순간, 예상대로 초면은 아닌 것 같았다. ‘사단법인 함께가는 강북성북장애인부모회 부회장’. 건네받은 명함 속 직함은 그동안 크고 작은 각종 집회와 모임을 통해, <함께걸음>과 부지불식(不知不識)간 마주치며 지냈음을 의미하는 증거가 아닐까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몇 마디 나누다 보니 그동안 마주쳤던 장소와 시간이 줄줄이 이어져 나왔다. “재인아, 인사드려야지.” 거실바닥에 앉아서 우리를 맞이한 재인이. 그런데 꼬마(?)아이일 거라 예상하며 왔는데, 막상 마주대한 재인이는 청소년의 외모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재인이가 아니라 재인‘양(孃)’이라고 불러야 하나?

“95년 9월생이니까 15살이죠. 재인이 장애진단명은 뇌병변장애하고 지적장애인데, 두 가지를 다 1급으로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중증 중복장애이죠. 그리고 보시다시피 혼자 독립보행이 아직 안 되고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보조기구를 붙잡으며 계속 운동을 하긴 했는데, 더 진전이 안 되고 독립보행까지는 못 가더라고요. 평행봉을 붙잡고 걷기 연습을 10살 때까지는 했었는데… 거기까지였어요.”

뇌병변장애 1급에 지적장애 1급인 중복장애라…. 편하게 미소 짓는 얼굴에선 중증이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는데, 중증 중복이면 장애가 심한 상태임은 분명한 일이다. 순간 부모회에서 왜 최미경 씨를 추천하며 소개했는지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마도 가장 심한 장애아의 어머니를, 보다 직접적인 상황설명이 가능한 분으로 나름 선정했던 게 아닐까 싶은 추리가 떠올랐던 것이다.

물론 더 심하고 더 열악한 상황을 찾아낸다면, 끝도 없고 그 숫자도 헤아리기 어려울 게 분명한 일이다. 그런 생각에 잠시 잠기다 보니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일단 이번 취재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번은 이번, 다음은 다음일 테니까 말이다.

아빠의 직장인 어느 연구원에서 안식년 휴가를 받게 돼서, 교환연수 형식으로 가족 모두가 미국에 가게 됐던 게 재인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2005년의 일이다. 그런데 뇌병변장애에 일반적으로 찾아오는 척추측만증(脊椎側彎症, scoliosis - 註 : 척추가 옆으로 심하게 굽은 증상. 통증은 없고 서서히 진행되는데, 내장 압박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장애를 일으킴)이 재인이 몸에 나타났다고 한다.

샤워를 시키는데 등 한쪽이 불균형하게 느껴지기에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본 결과 척추가 휘어가는 게 확인됐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찾아든 건 고관절탈구(股關節脫臼, Congenital Dislocation of Hip - 註 : 고관절(엉덩관절)의 윗부분인 관골구와 아랫부분인 대퇴골두가 정상으로 물려 있지 않고 어긋나는 증상).

“척추측만증은 보조기를 입으라고 해서 그걸 입으며 도움 비슷한 걸 받았는데, 고관절탈구는 2008년 초에 발견했어요. 그게 진행 중이라는 진단을 받고선, 그해 여름에 한국으로 다시 들어왔죠. 모든 병원을 다 다니면서 재차 확인을 했는데, 수술을 꼭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이걸 그냥 방치하면 앞으로 걷는 걸 기대 조차 못한다고 하니…, 큰 수술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거죠.”

    ▲ ⓒ채지민 객원기자 초등학교 5학년인 15살 재인이

그럼 재인이의 장애가 선천적인지를 물으니까 그런 것 같단다. 장애를 처음 인식하게 된 건, 모든 발달이 조금씩 더디게 진행되던 아기 시절이었던 모양이다. 눈을 맞추려 해도 눈동자가 조금씩 가운데로 몰리는 증상이 나타났고, 배밀이나 뒤집기 같은 게 보통 아이들 발달기준표에 비해 두 배 정도 뒤처지며 나중에야 진행되더라는 것이다.

결정적이었던 건 아주 심하게 경기(驚氣)를 일으켰던 생후 10개월 때였단다. 아기가 너무 심한 경련을 일으켰는데 병원에 가서 MRI까지 찍어본 결과, 부모가 받을 충격을 완화시키려는 듯한 의사선생님의 설명이 이어졌다고 한다. 물리치료를 시키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는 거. 더 빨리 걷게 될지도 모르니까 물리치료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거. 그리고 경기를 일으킨 데 대한 약은 그리 권하고 싶지 않다는 거.

“사실 뇌병변 강직이 심한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일단 외면적으로도 보이니까, 그때부터 물리치료를 시작하거든요. 그런데 재인이는 외적으로 보기에 그런 쪽은 아니었어요. 지금의 모습으로는 뇌병변 진단이 바로 나오겠지만 그때는 아무도 재인이를 뇌병변, 그러니까 당시 표현으로 뇌성마비라고 말씀을 안 하셨거든요.”

재인이는 3살 때 장애진단을 받았단다. 당시 경기도 부평 근처에 살면서 인근 병원을 다 다니며 물리치료를 받았고, 98년에 서울 우이동 쪽으로 이사를 오게 돼서 국립재활원 뇌성마비복지관을 다니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담당 의사선생님이 재인이는 그 복지관의 재활 대상이 아니라며 받아주지 않아서, 제대로 된 재활치료를 받지 못하게 됐던 모양이다. 지금만 같았어도 붙잡고 싸웠을 텐데, 마음 약했던 엄마 입장에서 그런가 보다 하며 그 의사 의견을 받아들였던 게 지금까지 후회되는 표정이었다.

“물리치료를 받고 장애인복지관의 조기교육실을 2년 넘게 이용하고, 그러는 동안 같이 있던 엄마들과 커피 한 잔 마시면서 듣게 된 정보들이 정말 큰 도움을 줬죠. 미리 알고 이사를 온 건 아닌데, 지금 사는 집 가까이에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장애아 전담 어린이집이 있더라고요. 거기를 다니게 되면서 제가 조금씩 여유를 갖게 됐고, 부모교육도 받으며 다른 선후배 부모님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됐어요.”

대화의 시점을 이전 시간으로 다시 돌려봤다. 재인이의 장애를 인식한 이후 아기가 어린이가 되고, 어린이가 청소년이 되는 과정이 어땠는지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유아기 시절의 어린이집 기간이 길었단다. 어린이집도 사실은 보행이 되는 친구들 위주로 받았는데, 독립보행이 안 되던 재인이가 언제 곧 걷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일단 받아줬던 것 같단다. 아직 어리니까 엄마 입장에서도 당연히 금방 걸을 거라 믿었기에, 98년 3월부터 다니기 시작했던 어린이집 생활은 2004년 2월까지 길게 이어졌다고 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건 그해 3월. 집 인근의 일반 초등학교 특수학급이 재인이의 새로운 자리가 된다.

일반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2학년에 올라갔을 때 미국을 가게 됐고 다시 돌아와 5학년 생활을 했지만, 반 학기밖에 다니지 못한 상태에서 큰 수술을 하게 되어 앞뒤로 공백기가 제법 길게 이어졌던 모양이다. 게다가 깁스를 풀고 난 뒤 재활치료를 집중적으로 해야 했기에 휴학을 하게 됐고, 학교 측과의 논의 끝에 앞뒤의 빈 공간을 채우기보다는 5학년으로 다시 시작하는 게 낫겠다는 결론이 나와서, 지금 재인이는 초등학교 5학년생이라고 한다. 그럼 재인이의 교우관계는 어떤지, 또한 엄마 입장에서 봤을 때 아이의 학교생활은 어떤지가 궁금해졌다.

지금은 사실 연결고리가 많이 끊어진 상태란다. 재인이가 1학년 때 만났던 친구들이 작년에 다 졸업했기 때문인데, 그래도 작년까지는 알아보는 친구들이 그나마 학교 안에 있었단다. 엄마 입장에서도 반가운 얼굴들이 좀 있었는데, 지금은 재인이를 기억하는 친구들이 다 떠난 상태라서 새로운 친구를 만들어야 할 형편이 된 모양이다.

그렇다면 엄마가 볼 때 재인이가 학교생활을 잘 하고 있는지,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 학교를 선택한 게 옳았다고 보시는지 다시 한번 물었다. 이어진 엄마의 짧은 한숨은 엄마 나름의 고민이 많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어졌다.

“재인이가 일반 학교 특수학급에 가 있는 거, 그건 사실 제가 편해서 보낸 거예요. 왜냐하면 중증 중복장애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가 몇 군데 있긴 하지만… 부모님의 손을 많이 바라더라고요. 일단 학교에서 제공할 수 있는 인력이 부족해서 그런가 봐요. 식사지도 같은 부분에서 엄마들을 많이 필요로 했고, 제가 판단하기에도 학교들 위치가 너무 멀었어요. 아무리 학교버스가 데려가고 데려다 준다 해도 제가 중간에 들락날락해야 할 일이 많아진다면, 차라리 가까운 학교를 다니는 게 낫겠다. 그래서 일반 학교를 선택하게 됐다는 게 솔직한 제 입장이겠죠.”

필요한 지원을 다 해주는 나라도 있다는 것

두드리며 찾다 보면 열리고 얻게 된다는 말은, 일상 먼 곳의 이웃들만 경험하는 ‘남들의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 기회가 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게 문제일 텐데, 직접 팔을 걷고 나선 이들 앞에는 그 기회가 빠르게 다가온다는 점 또한 무시 못할 대목이기도 하다. ‘특수교육보조원제도’라는 게 등장했고, 장애전담 어린이집에 무상보육이 실현되지 않았던가.

그래서 각종 공청회 같은 활동을 지속적으로 벌이면서, 일반 초등학교 특수학급에도 보조원제도가 필요하다는 점을 목소리 높이며 요구하게 됐다고 한다. 그 결과 재인이가 초등학교 입학하던 해 특수교육보조원이 서울시 전체에 100명이 배치가 됐고, 중증인 재인이한테 우선적으로 보조원이 함께 하게 됐단다.

학교생활에서 좋아하는 과목이나 취미활동 같은 게 뭐가 있는지 물으니까, 재인이는 음악을 좋아하고 자기 나름의 소리 만들기를 즐기며 산책을 특히 좋아한단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새삼 부러울 수밖에 없는 내용이 뒤따랐다. 미국에 잠시 있을 때의 현지 교육 모습이 등장한 것이다.

미국에서는 ‘역통합’이 진행된단다. 일반 학교 안에 특수학급이 있어서 제각기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일반 학급에 있는 친구들이 특수학급에 와서 같이 놀고 공부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된다는 것이다. 자기 과제가 다 끝난 애들이 와서 놀고, 자원하는 애들이 와서 재인이랑 놀며, 함께 산책하면서 어울리는 게 자연스러운 일상의 모습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저는 부모로서, 엄마로서 재인이를 어떻게든 걷게 만들어야겠다고 욕심을 냈어요. 그 다음에는 말하는 것에 집중하게 되겠죠. 걸으며 말을 할 수 있는 게 최소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하며, 미국에 처음 갔을 때부터 큰 욕심을 갖고 지냈었는데…, 그런데 미국에 있는 동안 저의 그 꿈이 다 깨져버렸잖아요. 척추측만증에 고관절탈구까지 진행되는 걸 보며, 걷는 것 자체도 이젠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하게 되었죠.”
   
▲ ⓒ채지민 객원기자

더 어려워지고 더 좌절하며 더 깊어지는 자괴감에 빠져들 즈음, 엄마의 눈에 보인 새로운 세상이 있었던 모양이다. 더 심한 중증장애우들도 거리를 자연스럽게 오가는 모습들을 보게 됐고, 그렇게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미국인들의 생생한 현장을 목격하면서 뒤늦게 깨닫게 됐단다. ‘아, 이게 아니구나!’

사실 처음에는 미국에 가면서 별의별 기대와 상상을 다 했다고 한다. 미국은 살기 좋다는데 장애우가 많이 있을까? 장애가 있다 해도 다 고쳐주지 않을까? 그런데 가서 직접 봤더니 더 심한 장애우들이 가득 있었고, 더욱 더 세세하게 분류되는 각종 장애의 모습들이 모두 다 눈에 띄었다고 한다.

“중증이면 중증인 대로 거기에 필요한 지원을 나라에서 다 채워주는 거예요. 필요하면 간호사를 2교대로 24시간 붙여주면서, 그 다음 필요한 지원에 최선을 다 하는 모습들을 생생하게 봤죠. 우리 같은 경우엔 부모가 정말 골병이 들거나 모든 재산을 탕진해야 가능할까 말까 한 일인데 거기서는 함께 행복하게…, 그게 여유롭게 살지는 못한다 해도 최소한 행복을 간직할 만큼의 지원을 국가가 해주는구나 하는 걸 몸소 체험하며 봤어요. 그래서 ‘이건 정말 아니구나’라는 실감을 다시 하게 됐죠. 재인이가 시설에 가게 될 상황처럼 언젠가는 떨어져 지내야 될 것 같다는 생각 안에 뭉쳐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 살아갈 수 있는 만큼은 저와 같이 행복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과 결심, 그런 걸 하게 된 거예요.”

누가 누구의 입장을 생각해주고 있나

대화를 나누는 동안 뒤로 미뤄두며, 질문을 할까 말까 하던 부분이 하나 있었다. 엄마의 표현 그대로 ‘최소한 걷고 말할 수 있는 게…’라는 대목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대화가 한참 이어지는 동안에도, 곁에 있던 재인이의 입에서는 기차가 움직이는 ‘의성어’ 같은 발성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재인이가 말을 못하는 건지 알고 싶다고. 그렇단다. 아직 자기의 언어적 표현을 못한단다. 재인이의 인지발달이 8개월에서 10개월 수준에 머무르며, 더 이상 발전을 하지 않은 것 같다고 한다. 운동발달의 경우에도 아기들은 생후 1년 전후로 걷는 게 일반적인데, 그것마저 아직 안 하는 걸 보니 15세의 재인이가 아직까지도 아기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15세 나이인데 인지발달과 운동발달은 8개월에서 10개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재인이 상태에 대한 질문을 뒤늦게 꺼낸 것 같아서, 보다 본질적인 대화를 나눠야 할 것 같았다. 다름 아닌 ‘부모’의 입장이 궁금했던 까닭이다.

장애아, 다시 말해서 장애를 가진 2세와 함께 하는 부모님들은 거의 똑같은 언어를 넋두리로, 그러나 결연하게 맺힌 한(恨)으로 말씀하시곤 한다. ‘내가 죽으면…’이란 전제를 항상 달며 말씀하시곤 하는데, 실제로 그 전제 이상 진지한 표현이 따로 존재하지 않음을 안타까워하던 게 취재를 다니던 내내 느끼던 감정이기도 했다. 재인이 엄마의 심경은 어떤 내용으로 채워져 있을까?

“저도 고민인데요. 어쨌든 그 전에 사회적인 지지망을 확실하게 만들어 놓아야겠죠. 그리고 제가 후견인으로 지정할 수 있는 사람의 도움도 받게 할 거고요. 그리고 제가 죽을 때 즈음이면 재인이도 혹시나 어떤 요양시설 같은 데 갈지도 모르겠지만…, 장애를 가진 사람은 노령화가 비장애에 비해 좀 빨리 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마 같이 요양원에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지금은 그 정도까지만 생각을 하고 있어요.”

질문 자체가 무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엄마의 심정을 듣고 싶어 나름 진지한 마음으로 물었다. 재인이가 성인이 되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느냐고. 예상대로 허탈한 웃음과 짧은 한숨이 뒤따랐다. 구체적인 직업훈련 같은 건 바라지 않는단다. 여가선영이라도 할 수 있고 콧바람이라도 쐴 수 있는, 낮에 가서 시간을 보내다 올 수 있는 그런 장소가 지역사회 안에 많이 생기게 되길 바란다고 한다.

비장애를 위한 교육프로그램은 넘쳐나는데, 같은 교육시설 안에서 다만 5%라도 장애아를 위한 강좌 수를 늘어나게 만들어가자는 거. - 지금 현재 최미경 씨가 부회장직을 맡고 있는 강북성북부모회를 비롯한 서울시 전체 부모회 모두가 함께 고민하며 준비하는 게 바로 그런 부분이란다.

다른 질문을 던졌다. 엄마가 재인이와 단둘이 외출하는 과정을, 집에서 출발하고 되돌아오는 일정 그대로 설명해달라고 했다. 이건 장애우 개개인의 이동권 문제로 많이 토론됐던 대목이지만, 장애아를 데리고 이동해야 하는 부모의 입장은 어떤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엄마 최미경 씨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서울 지하철은 타지 않는다는 게 첫 번째 언급이었다. 집에서 옷을 입히고 유모차(엄마는 대화 내내 재인이의 휠체어를 유모차라고 표현했다)에 앉게 하고,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서 그 다음부터 지하철역까지 15분 내지 20분을 가야 한다는 게 너무 어렵단다. 도착을 해도 지하철에 직접 오르기까지가 어렵고, 환승역에서 환승을 하는 과정 자체도 너무 힘겹기 때문에 지하철은 아예 이용을 안 하게 됐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외출은커녕 사실 일반 식당도 못 가요. 식당에 들어가면 신발부터 벗고 들어오라 하잖아요. 그럼 제가 재인이를 업고서 유모차는 접어서 옆에 두고, 그 다음에 방으로 들어가야 해요. 의자가 있는 식탁 자리 말고요. 그나마 예약을 해야 방에 앉는 것도 가능한데, 사실 앉아서 먹는 식당들은 너무 좁아서 몸을 돌릴 공간도 없는 게 대부분이에요. 그렇게 앉아서 밥을 간신히 먹고 나면, 재인이 얘는 오래 기다리지 못해요. 자기가 밥을 다 먹으면 막 짜증을 내면서 밖으로 나가자고 조르거든요. 그럼 밥을 입으로 먹는지 코로 먹는지 모르게 서둘러야 하고, 간만의 외출 내지는 외식이라는 행사가 그렇게 끝나버리는 게 보통의 일이죠.”

당장 내일, 그러니까 이 대화를 나누던 다음날에 학교 수련회가 있어서 재인이가 부여를 간다고 한다. 엄마 입장에선 처음으로 버스로 보내는 거라서, 보조선생님이 동행하기는 하지만 저상버스는 고사하고 리프트시설이라도 설치된 버스라도 빌릴 수 있으면 좋겠는데 난감한 마음이라고 한다.

그럼 그걸 왜 요구하지 않았냐고 묻던 질문에 성급한 실소가 묻어나왔다. 그 말을 듣던 엄마도 뭔가 대답하려던 입놀림을 멈추며 허탈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 아예 답도 없는 시도라는 걸 이미 서로 잘 알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휠체어를 타는 아이 하나를 위해서 정부와 지자체에 뭔가 요구한다는 게, 여러 가지를 먼저 생각해 보게끔 만든단다. 이어진 엄마의 한숨과 넋두리가 하나의 방점을 찍는다.

“안타깝고 아쉬운 입장의 엄마들이 그런 미진한 점들에 대해 당연히 요구를 해야 하는데, 나 하나의 여건만 생각하는 것 같아서 말을 잘 못 꺼내요. 네, 그런 데 너무 익숙해져 있어요. 익숙해질 수밖에 없어서 안타깝죠. 누가 누구의 입장을 생각해 주고 있는 건지….”

    ▲ ⓒ채지민 객원기자 부모의 요구는 유권자의 권리주장입니다

“정부도 그렇지만 사회적인 분위기 자체가 장애를 부모의 책임으로 몰아가고 있어요. 장애라는 여건을 해결해나가는 걸 부모의 개별적인 노력 아니면, 어떻게 꼼짝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들어가잖아요. 집안의 문제로 치부해버리는 거예요. 개인의 문제라는 거죠. 그게 정말 안타까워요.

단순한 예를 들어볼까요? 정말 좋은 제도가 하나 생겼더라고요. ‘장애아동치료바우처제도’라는 건데, 그것도 정말 한심한 게 18세 넘어가면 장애가 저절로 해결이 되나요? 18세까지만 보장을 하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하라고요? 시설이라도 넉넉하게 있다면, 우리가 골라서 보낼 만한 형편이라도 되면 좋겠는데, 그것마저도 개인적인 문제로 만드는 이 사회 분위기, 게다가 결과적으로 그걸 부모의 부담으로 돌리는 정부의 무책임한 탁상공론은 정말 확 바꿔야 해요.”

도대체 국가정책이라는 걸 누가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겠지만, 정부와 그 관계자들은 부모 당사자의 심정을 정말 하나도 모르는 상태로 일을 진행한단다. 대표적인 예가 장애아동한테 활동보조를 지원하는 시간의 분량 문제인데, 월 60시간이라는 건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책정된 건지 아무도 이해 못하는 부분이라고 한다. 장애아동이 학교에 가 있는 시간을 빼는 건지, 아니면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부모와 같이 산다는 가정 하에 그 시간을 제외한다는 건지, 장애아동에게 60시간이라는 건 정말 점심시간 한끼 식사보조 이외엔 다른 활동에 엄두를 내지 못할 척박한 분량이라는 것이다.

“그것밖에 안 되니까 ‘장애아동을 가진 부모는 모든 경제활동을 포기해라!’ - 우리한테는 그런 메시지로만 들리거든요. 사실… 제가 약사인데요. 재인이를 키우면서 일을 할 엄두를 못냈어요. 비장애였다면 어떻게든 일을 했을 텐데…, 장애를 가진 아이가 있다 보니까 엄마가 아니면 해결 안 되는 부분이 너무 많은 거예요. 주위에서 도움을 받는 작은 부분들도 물론 많이 있지만, 정작 엄마의 노력 없이는 해결이 안 될 사항들이 너무 많은 게 현실이에요. 정말 부모한테 모든 걸 다 요구하는 나라예요. 얘가 나중에 성인이 돼도 마찬가지잖아요. 모든 걸 부모가 책임지지 않으면, 그나마 부모가 살아있거나 약간의 재산이라도 있으면 수급권자가 될 수도 없어요. 결국 부모가 다 알아서 하라는 거 아닙니까.”

엄마의 원래 직업이 약사였다? 이건 곰곰이 되새겨봐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약사라면 선입관처럼 떠오르는 것이 부유층에 넉넉한 살림에 여유로운 인생 같은 모습들인데, 정작 장애아의 엄마 입장에선 한시라도 아이 곁을 떠날 수 없는 제도와 현실적 틀로 인해 직업마저 포기하며 지냈다는 의미 아닌가. 최미경 씨는 자신의 경우를 털어놓으면서도, 다른 엄마들을 위한 배려와 조언 몇 마디도 잊지 않았다.

“일단 장애아의 부모님들, 특히 엄마들은 자녀의 문제를 너무 자기 자신과 정서적으로 연결을 시키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건 함께 고민해야 될 문제잖아요. 이게 ‘나의 짐, 나의 죄’ 이런 부담에서 벗어나시면 좋겠고요. 아이와 살다 보니 아이와 자신을 너무 동일시하시는 것 같은데, 그건 착각이 대부분이에요. 애가 뭘 잘하면 부모가 잘해서, 뭘 못하면 부모 때문에 못하게 됐다는 생각을 버리셔야 합니다. 그건 애가 타고난 그릇이에요. 아이가 걷지 못하는 건 부모가 걷지 못하게 만든 게 아니잖아요. 그 부담을 피해의식으로 가지고, 그걸 또 다른 사람들한테 투영하고 계신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젠 벗어나셔야 해요.”

더불어 엄마들이 생각의 패러다임을 이젠 바꿔주시면 좋겠다는 부탁도 덧붙였다. 장애아를 자식으로 둔 죄, 그런 짐을 더 이상 갖지 말고 살아가시길 바란다고 한다. 예전과 다르게 이젠 장애아의 문제를 개인의 몫이 아닌, 함께 풀어가야 될 숙제이자 이 사회가 같이 나눠야 할 공동의 과제로 인식하게 됐기 때문이란다. 지역사회 안에 노인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과 각종 편의시설이 갖춰지고 있듯이, 이젠 같은 지역사회 안에서 장애아이들이 이용할 수 있는 전문적인 프로그램이 갖춰지도록 부모님들이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님들의 요구는 유권자들의 권리주장이고, 지방자치체제에선 그 요구에 눈을 감지 못하는 세상이 됐다는 걸 인식해야 한다는 의견은 모두가 새겨들을 만한 조언이라 생각된다.

“여태까지는 요구를 안 하셨거든요. 제가 속한 저희 부모회도 구청에 강력하게 요구를 반복하니까, 하나씩 둘씩 편의시설과 프로그램이 늘어나더라고요. 전국의 모든 장애아 부모님들께서 조금씩 시간을 내고 의견을 모아서 요구하고 관철을 시켜나가면, 그런 노력의 시간을 지금 함께 투자해주신다면, 앞으로의 우리 여생을 보다 편하게 만드는 길을 앞당길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어요.”
   
▲ ⓒ채지민 객원기자

‘꼴지도 행복한 세상’ - 이건 학업성적 순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세상을, 자본의 크기와 재산의 규모로 서열을 매기는 사회풍토를 통렬하게 비꼬는 반어법이기도 하다. 장애우가 행복한 세상, 장애를 가진 아이들에게 푸른 미래의 꿈이 존재하는 세상은, 결국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가야 할 커다란 과제이자 목표로 남겨지게 된다. 더 많이 가지려고, 더 빨리 성취하려고, 무조건 이기려고 모두가 다투며 앞으로만 달려가려는 실용만능주의세상 안에서, 천천히 움직이더라도 심정적인 여유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겠다는 인정을 나누는 건 결국 우리 자신의 몫이 아닐까? 물론 확고한 권리요구와 제도수립 및 환경개선을 끊임없이 관철시켜나가는 가운데 말이다.
작성자김라현 기자, 채지민 객원기자  husisarang@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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