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쓸 때는 새가 되어 날아다니는 것 같아요 > 세상, 한 걸음


시를 쓸 때는 새가 되어 날아다니는 것 같아요

[사람사는 이야기] 소양강 강변의 친구, 시인 정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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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석 시인 ⓒ채지민 객원기자
가끔씩 난데없는 화두를 던지며 이 글을 시작하곤 했는데, 이번에도 그런 차례(?)가 된 것 같다. 그래서 뜬금없는 질문으로 이번 ‘사람사는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 “혹시 이 땅의 토종 황소 얼굴을 유심히 바라본 적 있으신가요?”

아주 어렸던 시절, 논길을 뛰놀다가 마주친 황소의 모습에 경탄을 한 적이 있었다. 대여섯 살 정도 시절이었을까? 어린 눈으로 올려다봤던 황소의 ‘어마어마한’ 몸집은 둘째 문제였고, 아이의 눈을 내려다보던 그 눈망울의 아득함 같은 게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 기억이 아주 단단하게 자리를 잡았던 모양이다. 그 이후로 어느 길목에서든 마주치는 황소만 보면, 그 황소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버릇을 갖게 된 게 수십 년째 변함없이 이어지는 ‘현재진행형’이다.

지금도 역시 그 습관은 본능처럼 남아 있다. 왜 그러는 걸까? 그 눈동자 안에 우리 민족의 모든 게 다 담겨 있음을 거울처럼 되새기게 되기 때문이다. 그 커다란 눈망울에선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동자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고향 같은 아득한 여운도 되살릴 수 있다. 더불어 그리움 같은 거, 상실감 같은 거, 눈물 비슷한 느낌 같은 거, 반대의 감정으로는 굳은 의지 같은 거, 단호한 도전의 자세 같은 눈빛이 맴돈다는 걸 동시에 읽을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은데도 안 되는 거, 그런데도 한 단어로 ‘확!’ 표현할 만한 단어를 찾고 싶은 게 황소의 눈을 마주대하는 느낌인데, 여기서 왜 난데없는 황소 언급으로 얘기가 길어졌을까?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황소의 그 눈’ 이미지를 가진 누군가를 처음 마주 대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다. 토속적인 고향의 느낌, 부모인 동시에 유아와 같은 인상, 갈망의 눈빛, 상실의 아쉬움, 그리움의 여운, 더불어 내일에 대한 도전, 미지의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 모두가 단 하나의 눈망울에 담겨 있다는 거…. 왜 그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으며, 그는 과연 어떤 삶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 ⓒ채지민 객원기자 가난의 긴 그림자

이번에는 춘천으로 달려갔다. 새로 생겼다는 길로 가기는 갔는데, 만남을 약속한 시간보다 너무 빨리 갔다. 대한민국의 길이 이렇게 난데없이 펑 뚫리면 늘 애매해진다. 고속도로든 국도든 뭐든 간에, 길이 막히는 것까지 예상하면서 약속시간을 미리 정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1시간 20분이나 빨리 도착했다. 덕분에 소양강댐 인근도 잠시 둘러본 뒤, 이번 호 주인공이 살고 있다는 아파트 단지로 향했다. 항상 하던 취재 버릇 그대로, 동네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촬영하기 좋은 자리가 어딘지 살펴보았다. <함께걸음> 표지 촬영이 진행될지도 모를 공간을 탐색하며, 그 작업이 이뤄질 지점을 미리 챙겨두는 것이다.

엘리베이터 15층 문이 열리자마자 방문자를 환영하는 누군가의 얼굴, 얼떨결에 인사를 나누고 보니 어머님이셨다. 반기는 이의 얼굴이 편안하면, 멀리 왔다는 공간적인 거리감은 일순간 사라지곤 한다. 거주지 바로 인근에 온 것 같다는 거, 멀리 취재를 갈 때마다 이런 느낌이 가장 반갑다. 처음 방문하는 집에 들어서도, 남의 집이라는 어색함 같은 게 안 떠오르는 건 즐거운 일이다. 오랜 지인의 집을 찾듯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과 반가운 첫인사를 나누었다.

정상석 - 뇌성마비 1급의 중증장애인, 시인, KBS 제3라디오 ‘내일을 위하여’ 프로그램 로고송 작사, 시집 ‘하늘을 사랑할 수 있다면’ 출간, 보리수 아래 음반에 작사가로 참여, 현재 각종 정보를 제공하는 포털사이트 카페 운영 등, 약력과 활동상만 보더라도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가 분명했다.

그런데 직접 마주대하고 보니, 그의 장애증상은 생각보다 훨씬 심한 중증으로 보였다. 일상적인 거동 자체가 안 되는 상태에서, 누운 채로 손가락 하나만 컴퓨터 키보드에 올려놓은 모습이 한동안 정지된 듯 이어졌다.

그러나 방문자를 반기는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실례되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는데, 어린 아기의 해맑은 미소 그 자체였다고나 할까? 어떻게 저만큼 밝은 표정이 가능할까 싶을 만큼, 그의 얼굴은 공간 전체를 환하게 뒤바꿔놓았다.

분위기가 이렇게 만들어지면, 대화를 어떤 식으로 나눠야 할까 하는 혼자만의 고민도 휙 사라진다.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순서를 정할 필요 없이 떠오르는 생각부터 주고받으면 모든 화제가 술술 풀릴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어머님의 손길에 따라 이불 위로 자리를 옮긴 그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완전히 ‘하나, 둘, 셋…, 김치!’ 할 때의 그 스마일 그 표정이다.

중증인 경우 첫 말문을 열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잠시의 시간이 지나면 모든 대화가 능통하게 이어진다는 건 분명했기에, 일단 어머님과 먼저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1971년생인 정상석 씨는 돌이 지나도 걸음마는커녕 고개마저 못 가눴단다.

정말 방 한 칸 얻어 사는 것조차 힘겹던 시절, 병원에 갈 돈도 없어서 가슴만 태우는데 아기가 밤낮도 없이 울어댄 모양이다. 며칠 동안 잠도 자지 않고 울어대는 아기 때문에 이웃까지 피해가 가게 되자, 안집에서 돈을 꿔주며 병원에 한번 가보라고 권유했단다. 그래서 병원에 갔고 주사 한 대를 맞았는데, 그 이후로 아이의 몸이 축 처지면서 잠만 자기 시작했단다. 그것도 사흘 밤낮을 꼬박 말이다.

“그러니 저는 좋잖아요. 저도 잠을 잘 수가 있고 밀렸던 빨래도 할 수가 있고, 일을 할 수 있게 됐으니 좋잖아요. 그래서 자는 걸 놔뒀는데, 안집 아줌마가 ‘이러지 말고 애를 깨워봐라. 병원에 갔다 와서 애가 왜 이렇게 자냐? 그렇게 울던 아기가 왜 자냐?’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억지로 깨워서 젖을 먹이려니까 그때부터 젖을 안 빨아요. 그래서 얘가 왜 이러지? 왜 이러지? 하며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후부터 다시 또 계속 울기 시작했어요.”

다시 안집에서 꿔준 돈을 받아들고 병원에 달려갔더니, 포대기에 감싼 아기를 열어보던 의사의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진단이 내려졌단다. 아기가 뇌성마비라고, 이건 대한민국에선 못 고치고, 미국이나 가야 어떻게 고치려나? 대답은 그게 전부였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저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집에 왔어요. 와가지고 그냥 눕혀놨어요. 그렇게 해놓고선 그때부터는 모든 걸 다 포기하게 된 거예요. 그렇게 얘가 두 살 세 살이 돼도 사지가 아주 축 늘어지는…. 저는 뇌성마비라는 그 병명 자체도 어떤 건지 몰랐어요. 지금이야 보건소에서도 재활치료를 많이 해주지만, 그때는 보건소도 그런 게 아니었고…. 그런 상태에서 ‘아, 이게 불구가 되는 병이구나.’ 하는 생각이 깊어지고, ‘저러다 낫겠지, 낫지 않으면 죽겠지….’ 두 가지 중 하나가 될 거라는 생각만 갖게 됐어요.”

역시나 문제는 ‘가난’이었다. 당장 먹고 살기 위해 어머님은 나가서 일을 해야 했다는 것, 상석 씨가 열 살이 넘어가면서 날이 갈수록 막막함만 가슴에 남겨졌단다. 이렇게 가난을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 아이의 증상을 감당 못하는 나날만 계속되자, 이럴 바에는 차라리 얘가 가줬으면…, 하늘나라로 가줬으면 하는 생각까지 떠올리게 됐다는 대목에서는 어머님의 눈가가 붉어졌다.

   
▲ ⓒ채지민 객원기자
‘같이 죽자!’는 결심을 하게 된 적도 있었단다. 텔레비전을 보고 싶어 하는 아들을 위해서, 업는 자세도 안 나오는 아이를 힘겹게 등에 업고 한참 걸어서 친척집에 찾아가면 반응은 한 가지뿐, 말 그대로 텔레비전을 ‘딱’ 꺼버리는 게 전부였단다.

그럼 옆집으로, 친구 집으로 다시 찾아갔고, 마찬가지로 텔레비전을 ‘딱’ 꺼버리는 냉대를 반복적으로 받으며 결론이 내려졌다고 한다. “석아, 우리 같이 죽자….” 지금은 고속철도 때문에 사라진 옛 철길 위에 올라가서 죽을 작정을 했는데, 무슨 까닭인지 열차는 1대도 오지 않았단다. “그때 기차가 정말 왔더라면…, 우리 모자(母子)는 정말 죽었을 거예요.”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부모가 모두 자리를 비우는 동안, 상석 씨 곁에는 할아버지가 계셨다고 한다. 하지만 스무 살이 넘어가면서 더 이상 데려나가지 못할 상태가 되자, 그때부터는 바깥구경마저 할 수 없는 골방의 삶이 길게 이어졌던 모양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던 변화가 그때 찾아왔단다. 상석 씨가 뭔가를 필요로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친구들이 전해주는 시어(詩語)들

“골방에서 할아버지와 둘이 지내는데, 어느 날부터 얘가 녹음기에 쓸 공테이프를 사오라 그랬어요. 식구들한테 계속 공테이프를 사달라는 거예요. 뭘 하려고 하는 건지 하루 종일 중얼중얼중얼…. 처음엔 저는 할아버지하고 얘기하는 소리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녹음기에 녹음을 하면서 계속 중얼중얼거리는 거예요. 할아버지도 ‘쟤는 날마다 라디오에 대고 뭐라고 중얼중얼댄단다.’ 하셨죠. 떼를 쓰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차라리 나아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놔두었어요.”

그 ‘중얼중얼’이 무엇이었을까? 바로 구술(口述)로 자신의 시를 녹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녹음한 테이프들이 라면상자로 한 박스, 또 한 박스 채워지는 동안에도 상석 씨의 녹음 작업은 그칠 줄을 몰랐단다. “네…에….” 바로 그때였다. 어머님의 말씀을 듣고만 있던 상석 씨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어머님 말씀 내용이 맞는다고 긍정의 대답을 한 것이다. 그때 기억이 떠오르느냐고 물었다. 상석 씨는 얼굴 가득한 미소로 다시 답했다. “네…에….” 이 대답은 상석 씨와 함께 본격적으로 대화할 시점이 됐음을 의미했다.

어떻게 해서 시를 좋아하게 됐는지 그것부터 알고 싶었다. 그의 첫 발음이 완성되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정확한 문장이 상석 씨의 입에서 한 줄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시를 쓰게 된 동기는 어느 날 KBS 라디오 ‘내일은 푸른 하늘’ 거기에서 입으로 시를 쓰는 시인 분 사연이 나왔는데, 그 분 사연을 듣고 나서 ‘바로 저거다!’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몇 살 때의 일이냐고 물으니까 열여섯 살 때였단다. 그 이후로 노랫말을 만들듯이 짧은 문장을 떠올리게 됐고, 그것이 열매 맺듯 문학적 언어로 형상화되면서 시의 구조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좋아하고 존경하는 시인이 누군지를 물었다. 천상병 선생님이고, 그 분의 작품 ‘귀천(歸天)’에서 전율 같은 시의 느낌을 받게 됐단다. 그럼 평소 좋아하며 암송하는 시가 있는지 알고 싶었다. 김소월 님의 ‘엄마야 누나야’란다. “아, 그래서 상석 씨가 소양강 강변에 살고 계시는 거네요!” 했더니, 방긋 웃던 얼굴에 웃음꽃이 터질 듯 피어올랐다. 어머님의 설명이 뒤를 이었다.

“얘가 본격적으로 시를 하게 된 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99년에 돌아가셨거든요. 그때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 그런데 얘가 컴퓨터를 사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 전부터 가끔씩 그랬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본격적으로 사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성한 사람들도 다루기 힘든 건데, 네가 어디에 쓰려고 그걸 사달라고 하는 거냐니까 꼭 있어야 한대요. 그래서 아쉬운 대로 복지관에 연락했더니, 때마침 중고 컴퓨터를 한 대 갖다 줘서 그걸 쓰게 됐죠. ‘네가 한번 컴퓨터를 직접 해봐라’ 하고 일을 나갔다 들어왔는데, 들어와서 보니까 ‘엄마 사랑해요!’라고 써놓은 거 있죠. 지나가는 말로 했던 건데, 그걸 진짜로 화면에 적어놓은 거예요. 이 손가락 하나를 가지고요.”

그때부터 상석 씨의 작업은 본격적으로 시작이 됐단다. ‘중얼중얼’로 상징되는 그 모든 테이프 기록들을 일일이 모두 다 컴퓨터에 옮겨놓았다는 건데, 밤낮 없이 그 작업에 몰두하다 보니 상석 씨의 몸은 반쪽이 될 만큼 야위었다고 한다. “아주 사생결단을 하는 사람처럼 매달리더라고요.” 어머님은 당시의 상석 씨 생활을 그렇게 표현했다.

   
▲ ⓒ채지민 객원기자
“뭐든지 예사로 보는 게 없어요. 예전에 아주 조그만 화단이 앞에 있었는데, 상석이가 내다보게끔 꽃을 심어야 한다고 해서 아버지 계실 때 야생식물들을 골고루 심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러면 그런 거 하나 예사로 안 보고, 엎드려서 정말 무서울 정도로 거기에 집착을 해요. 게다가 잠자리 하나만 날아와도 그걸 예사로 안 봐요. 자기하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새하고 얘기를 나눈대요. 그렇게 집중하며 매달리더니, 그걸 다 시로 적어서 작업을 해놨더라고요.”

꽃 한 송이를 보거나 잠자리를 보면, 거기서 어떤 생각이 떠올라 그걸 시로 표현하느냐고 물었다. 상석 씨의 표정에 반가움 비슷한 기운이 맴돈다고 느꼈는데, 그 입에서 나온 내용 또한 마찬가지였다. “친구!” 꽃 한 송이도, 잠자리도, 새도, 구름도, 나뭇잎도 다 친구라는 것, 바꿔 말하면 순수의 시심(詩心)이 없다면 불가능한 표현이 그의 입을 통해 전해진 것이다.

그럼 본인의 시 주제는 무엇일까? 모든 사물이 친구라 했지만, 시라는 건 그 내용에 있어서 허무와 절망에 중심이 설 수 있고, 환희와 즐거움이 줄기가 될 수도 있는 법이다. 그 질문의 대답은 상석 씨가 자세하게 설명했다.

“어떤 건 밝고 어떤 건 어둡고…, 그런데 어떤 분들이 저의 시가 너무 슬프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다음에 작품을 쓸 때는 사람들한테 희망을 주는 내용으로 쓰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그게 잘 안 돼요. 제가 살아온 환경에서부터 제가 지금 겪고 있는 걸 써야지, 사람들 생각에 따라 쓰면 가식이에요. 꾸밈이 되는 거예요.”

한 걸음씩 세상 속으로 나아가고 싶다

더 많은 세상을 바라보고 더 많은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외출을 자주 하셔야겠다고 권했더니 그건 좀 힘들단다. 일단 집에 차가 없다는 거, 그리고 춘천에는 아직 장애인콜택시가 도입되지 않아서 복지관 차나 협회 차를 이용해야 하는데, 차량 숫자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한다. 차량이 정말 급하고 정말 필요한 분들이 너무 많아서, 개인적인 나들이를 위해 차를 요청하기는 양심상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휠체어를 타고 거주지 인근이라도 자주 나가시는 게 좋지 않겠냐고 다시 물으니까, 휠체어에 앉는 자세가 갖춰진 건 최근의 일인 모양이었다. 처음엔 눕는 자세로 휠체어를 빌려 탔는데, 조금씩 상체를 올리는 과정을 거친 뒤에야 앉는 자세가 되긴 했지만, 그마저도 몸이 한쪽으로 많이 기울어지기 때문에 밀어주는 사람이 보통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상황이 그렇다 해도, 시를 쓸 때는 새가 돼서 날아다니는 것 같단다. 그럼 방에 하루 종일 있다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자신의 시에서 가장 절실히 나타나는 게 평소의 생각일 텐데 그 내용이 뭔지를 물었다. 잠시의 생각에 잠기던 상석 씨는 아주 천천히, 정말 천천히 대답했다.

“저의 시를 보면… 고독해요. 지금은 인터넷을 보며 많이 나아졌지만, 컴퓨터가 없었을 때는 고독했어요. 고독을 많이 느꼈죠.”

지금은 컴퓨터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걸 많이 접하게 됐단다. 친구도 사귀게 됐고, 장애인들의 현실과 생활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그 대목에서 순서를 바꿔 마지막에 해야 할 질문을 미리 던져보았다. 앞으로의 계획이 무엇인지, 무슨 꿈을 가슴 안에 설계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우선 2003년에 발표한 첫 번째 시집 ‘하늘을 사랑할 수 있다면’에 이어지는 두 번째 시집을 준비하고 있단다.

“먼저 시집을 한 권 더 내고 싶어요. 그게 큰 목표이고, 가능하다면 중증장애인들을 위해서 무슨 일이라도 활동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지금까지는 사이버 상에서만 활동을 했지만, 앞으로는 오프라인에 나가서도 활동을 하고 싶어요.”

지금 활동보조인 서비스를 받고 있으니까, 오프라인에서도 충분히 멋진 활동을 하실 수 있을 거라고 격려의 답을 전했다. 그런데 난데없는 반전이라고 해야 할까? ‘활동보조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자, 대화의 분위기가 완전히 뒤집혀버렸다.

현재의 자립생활과 활동보조인 서비스가 그냥 된 게 아니란다. 5년 동안의 기나긴 투쟁 끝에 얻어낸 결과라는 것이다. 그 제도와 그 서비스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점을, 여기저기 게시판에다 지속적으로 글을 올리면서 일궈낸 성과라는 것!

   
▲ ⓒ채지민 객원기자
그럼 그 이전의 생활은 어땠는지 물으니까, 어머님이 낮에는 함께 계셨고 밤에는 문을 밖으로 잠가놓고서 일을 나가셨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그래야만 생활이 가능했던 상황이었다고 한다.

상석 씨는 활동보조인 서비스가 시행된 2007년 4월부터 춘천 지역에서는 1호로 그 서비스를 받는 입장이 됐단다. 서비스 또한 최초이고 중증으로는 최초로 자립한 뒤 나와서 사는 것이기에, 지방정부 차원에서도 주된 관심대상자로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정부에서 하라는 대로의 원리원칙을 지키는 서비스를, 당사자 입장에서 실제 현장 검증과 같은 형태로 받고 있는 중이란 얘기였다.

활동보조를 이용하는 입장에서, 그 서비스 이전과 이후의 변화점이 무엇인지를 말해달라고 했다. 일단 깨끗해지고 식사를 제때 할 수 있다는 게 좋아진 점이란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도 해맑던 상석 씨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자꾸 마음을 다치는 경우가 있어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어떤 때에 마음을 다친다는 건지 얘기해 달라고 했다. 상석 씨는 호흡이 점점 가빠지며, 해야 할 말이 많다는 눈빛으로 바뀌었다.

그동안 여러 활동보조인들이 단기간씩 돌아가며 상석 씨를 돌봐줬지만, 그 가운데 정말 어처구니없는 경우 또한 적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내용들이 쏟아져 나왔다. 몸을 가누지 못하며 누워 있는 상석 씨를 발로 툭툭 차던 보조인이 있었다는 것, 더욱이 어머님이 바로 옆에 계시는 상황인데도 상석 씨 몸 위를 태연하게 넘어 다니는 보조인마저 있었다는 것이다.

서비스 초기에는 용변 문제가 가장 심각했다고 한다. 아무리 활동보조인 서비스라고 하지만, 그래도 낯익지 않은 여성 보조인이었기에 용변을 본다는 건 너무 어려웠단다. 너무 마려운데도 막상 배설은 되지 않는 일이 반복되면서, 결국 상석 씨는 몸에 병까지 얻게 되기도 했다고 한다.

“활동보조는 ‘봉사’라는 마음자세가 없으면 절대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도 여러 경우를 둘러보면, 아예 돈으로만 보는 사람들도 있어요. 아예 면전에서 ‘난 돈 때문에 해!’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서비스를 하러 왔다가 무단으로 나가서 자기 개인 일을 다 본 뒤에 돌아와서, 시간만 채우는 사람들도 많이 있어요. 그런데 그런 걸 지자체에 다들 말을 못하는 상황이에요. 그걸 지적하면 정작 서비스마저 제대로 받지 못한 장애인을 대놓고 나무라며 발뺌을 하거든요.”

어이가 없었다. 실제 그런 일까지 현장에서 벌어진다는 게 이해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상석 씨를 보조하는 분은 어떤가? 잔뜩 경직됐던 어머님의 표정이 일순간 봄눈 녹듯 풀어졌다. 현재 상석 씨와 함께 하는 보조인은 제대로 된, 올바른, 활동보조인 서비스의 최고 본보기로 삼아야 할 만큼 훌륭한 분이라고 한다. 상석 씨가 덧붙였다. 지금 보조인하고는 음악도 같이 듣고, 인생의 멘토처럼 깊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로 지낸다는 것이다.

“지금 아줌마는 몇 달째 우리와 함께 있는데, 절대로 상석이한테서 눈을 안 떼요. 좀 쉬라고 해도 상석이 곁을 떠나지 않고 돌봐주세요. 그래서 어제는 우리 상석이를 잘 보살펴주기 위해서라도 건강해야 하고, 그러려면 좀 쉬어가면서 하라고 했는데도… 뭐라 그랬는지 아세요? 전 어젯밤에 그 얘기를 들으면서 진짜 고마움의 눈물이 다 나더라고요. ‘아니에요, 어머니. 눈을 떼려면 제 마음이 불안해요. 상석 씨 손이 언제 꺾일지 모르는데, 손이 꺾이면 그걸 혼자 맘대로 못 푸는데 제가 뛰어와서 풀어줘야 하잖아요. 발도 꺾이면 안 되고요.’ 저는 정말 이런 분을 활동보조의 참된 본보기로 내세워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렇게 무게감 있는 대화를 주고받을 때였다. 상석 씨의 표정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지며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들었던 모든 음성 중에서 가장 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기 친구가 왔다, 친구!” 무슨 뜻인지 몰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어머님이 창가를 가리키며 부연설명을 더해주셨다. “창가에 비둘기가 왔네요. 상석이랑 얘기하러 찾아온 거예요.” 자신을 찾아온 친구를 바라보는 상석 씨의 눈망울에는 반가움이 가득했다. 상석 씨 마음을 아는지, 그 비둘기는 방문자가 일어설 때까지도 그 자리를 계속 지켜주었다.

세상 모든 생명체가 자신의 친구로 존재한다는 것, 그건 동심을 잃어버린 이들에겐 영원한 상실로 남겨질 대목이기도 하다. 정상석 씨의 두 번째 시집에는 어떤 친구 이야기로 가득 채워질까? 돌아오는 길 내내 떠올렸던 건, 처음에 언급했던 그대로 상석 씨의 눈빛에서 황소의 눈망울을 겹치듯 연상하는 일이었다. 순수와 고향의 눈빛을 가지고 있다는 것, 상실과 고독을 함께 담고 있다는 것, 그건 미지의 내일을 개척하고 열어가는 열쇠 같은 눈빛이 될 것이다.

정상석 씨는 제도권에서 말하는 ‘등단’의 과정을 아직 거치지 않은 예비시인이다. 하지만 이미 시 자체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게 생생히 증명된 셈이기도 하다. 연말연시를 거치며, 그에게 등단의 영예가 찾아들면 얼마나 좋을까 기대해 본다. ‘시인 정상석’은 여러분 앞에 예의 그 환한 미소로 곧 다가올 테니까 말이다.
작성자채지민 객원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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