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는 우리 몸에 있는 게 아니라, 주변 환경에 있는 것이다 > 함께 하는 세상


장애는 우리 몸에 있는 게 아니라, 주변 환경에 있는 것이다

[사람사는 이야기] 현직 고등학교 교사 김진철

본문

 

   
▲ ⓒ채지민 객원기자

 

  이번 만남의 주인공은 소아마비 장애를 가진 현직 고등학교 선생님이라 했다. 신체적 장애를 안고 교단에 선다는 건 여전히 그 문턱이 높다는 게 현실이기에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하던 중, 문득 아주 오래된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중학교 시절의 선생님 한 분의 얼굴이 또렷하게 떠오른 것이다. 정말 최근에 뵌 것처럼 그 분의 외모와 성함까지 확실하게 새겨졌고, 먼지 쌓인 옛 졸업앨범을 찾아 펼치면서 그 분의 존재를 최종 확인하게 됐다.
  유신정권이 끝나가던 무렵, 당시 중학교 교과에는 ‘정치경제’라는 과목이 있었다. 그 수업을 담당하셨던 분이 곽OO 선생님이셨는데, 한쪽 다리가 적잖게 불편한 분이셨다. 선생님께서 수업시간에 하셨던 말씀까지도 당시 분위기 그대로 떠올랐다. “어릴 때 위에서 떨어져서 이쪽 다리가 부러졌는데, 집안에서는 병원에 안 가고 무당을 불러서 푸닥거리를 밤낮으로 하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됐지, 뭐.” 항상 자신의 장애를 남 얘기하듯 넘기시던 그 선생님의 음성이 귓가에 선했다. 지금 용어로 말한다면 어린 시절에 중도장애를 갖게 됐다는 의미가 될 텐데, 병의원 자체가 없던 산골의 시골이라서 그랬던 것 같다는 부연설명이 뒤따르곤 했었다.
  30년도 훌쩍 넘어 까맣게 지워져 있던 그 기억이 이렇게 불쑥 투명하게 떠오른다는 건, 그 대상자가 ‘선생님’이기 때문이 아닐까? 같은 반 짝꿍이 누구였는지 따위는 하얗게 지워진 것 같은데, 게다가 당시 자주 오가며 지냈을 게 분명한 학교 주변의 문구점이나 분식점이나 골목길 같은 건 흔적조차 붙잡을 수 없는데, 교단에 선 선생님 모습 하나만 선명히 떠오른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 걸까? 개인적인 그 물음표를 혼자 풀어내려 하지 않고, 그 마음 그대로 간직한 상태에서 경기도 군포시의 한 고등학교로 달려갔다. 교문을 들어서면 옛 은사님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을 가득 품은 채로 말이다. 아마도… 이번 호 만남의 주인공이 가르쳤던 오랜 옛 제자들 역시, 이런 마음으로 자신의 오래 전 스승을 떠올리고 있진 않을까?

 

   
▲ ⓒ채지민 객원기자

울타리가 되어준 나의 가족

 

  모임이나 행사 때문에 가끔씩 모교를 방문할 일이 생기는데, 그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늘 똑같다. 마음이 아주 ‘아득’해진다는 거, 진한 안개 속으로 들어온 듯 모든 게 희미해지는 느낌이 든다는 거. 더불어 ‘아늑’해진다는 거, 꿈에 그리던 고향에 되돌아온 것 같은 포근함이 느껴진다는…. 이런 실감은 나이가 들수록 더 진해질 게 분명한 그런 감정이기도 하다. 이번에 방문한 자리는 물론 모교가 아닌 다른 교정이었지만, 그래도 그 교문을 들어설 때의 느낌 또한 엇비슷했다. 우리 모두의 추억은 동일한 시점에 모이는 법 아닌가. 첫사랑이라는 대상, 사춘기 시절의 교정, 어리던 당시의 특별한 기억, 더불어 지금의 ‘나’를 만들게 했던 누군가와의 인연이나 무언가의 계기 같은 것들 말이다.

  2층 교무실로 들어가 만남의 주인공과 인사를 나눴다. OO공업고등학교 교육연구부장 김진철 선생님. 첫인사의 악수를 나누고 받아든 명함 안에 아주 작게 새겨진 건축사(建築士)와 공학박사(工學博士)라는 활자가, 그 작은 글씨의 무게감을 수백 배 증폭시키는 듯했다. ‘건축사’라는 건 건축계의 최고 자격증이 아닌가. 게다가 공학박사님이라니… 얼마나 치열한 노력이 겸비된 인생을 살았는지가,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이미 훤히 드러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조금 이르긴 했지만 점심식사부터 하자는 제안에 따라, 학교 인근 음식점으로 향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음식을 주문하고 대화를 시작했다. 식사를 하면서도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초면인데도 오랜 구면인 듯이 이렇게 편한 얘기를 자연스레 나눌 수 있다는 거, 이런 여유로운 분위기는 늘 반갑고 즐거운 일이다.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교무실 옆 교실의 문을 열었다. 방학 기간이라 잠겨 있던 교실 문을 열쇠로 열고, 텅 빈 교실에 단둘이 마주앉았다.

  첫 말문은 그가 먼저 열었다. 지금은 키가 좀 작은 편인데 원래는 키가 컸다고, 오른쪽 다리가 소아마비이기 때문에 성장이 되지 않아 상대적으로 길었던 왼쪽 다리의 대퇴를 잘라서 이었다는 것이다. 짧은 쪽에 보조기구를 착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긴 쪽의 뼈를 잘라서 짧은 쪽을 교정했다는 의미인데, 고1 시절에 그 수술을 거친 다음부터는 두 다리의 길이가 엇비슷해지게 됐단다. 물론 키는 확 줄어들었겠지만.

  “그 전까지는 목발을 짚고 다녔었는데, 그 수술 이후부터는 목발 대신 보조기를 하고 다닐 수 있게 됐어요. 그때부터 최근까지 그 수술을 굉장히 고마워하며 살아왔었는데, 얼마 전 일본에 갈 기회가 생겨서 일본의 보조기기 시스템을 살펴보니까 그게 잘못된 치료였다는 게 확인되더라고요. 제 다리를 그냥 놔두고 좋은 보조기를 착용하는 걸로 방법을 바꿨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뭐, 그런 생각이 계속 떠오르긴 하지만, 어쨌든 고등학교 이후로 목발을 안 짚고 살아오게 된 점은 아주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대전 토박이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지속되는 태열 때문에 소아마비 예방접종을 제때에 하지 못했고, 3살이 다 될 때까지 일어서지 않는 아이가 너무 늦다 싶어 병원에 가니까 최종판정이 내려졌단다. 그 이후 서울의 유명하다는 병원에 가서 그 어린 몸에 몇 차례 수술이 진행됐던 모양이다. 덕분에 집의 재산이 거의 날아갔다고 전해 들었다는 대목에선, 그의 짧은 한숨이 뒤따랐다. 그렇다면 당시 창밖에서 들려왔을 동네 친구들의 놀이소리는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물으니까, 목발을 짚고 활동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부러움 같은 건 별로 없었다고 한다.

  1963년생인 그의 어린 시절이라면, 당시의 이 땅에선 장애를 가진 이들의 권익이나 인권 따위는 아예 없던 시절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또래의 아이들 중에 홀로 목발을 짚고 다니는 그에게 어떤 종류의 무책임한 놀림이 전해졌을까? 굳이 추리를 할 필요도 없는 일이 맞을 텐데, 집안 막내였던 그에게는 셋인 형님들과 둘인 누님들의 보호막이 정말 절대적으로 소중한 버팀목이 됐다고 한다. 형님과 누님의 은덕(?)을 입어서 편하게 지냈단다. 물론 혼나기도 많이 했지만 그런 과정 중에 사회성 또한 발달되기도 했기에, 지금도 그는 형제가족들에게 정말 많이 고마움을 간직하며 지낸다고 한다.

  “왜 나는 제대로 못 걸을까? 하는 그런 마음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냥 그렇구나. 내가 소아마비를 앓아서 이렇구나.’ 이런 생각만 주로 했습니다. 사춘기 때가 되니까 여러 가지가 불편하다는 점을 비로소 느끼게 됐죠. 어떤 막막함 같은 거보다는 ‘이젠 어떤 방법을 좀 찾아야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답답한 마음이 있긴 했지만 그마저도 그리 크게 오래 가고 그랬던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에게는 가족의 보호막이 정말 확실하게 펼쳐졌던 모양이다. 24시간 내내 곁에서 방어막이 됐다는 그런 뜻이기보다는, 24시간 내내 그의 마음속에 믿음을 심어주는 존재로 가족이 함께 했다는 표현이 나을 것 같다. 언제나 열외였던 체육시간은 급우들의 짐을 대신 맡아주는 시간이었고,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친구들의 모습에도 그리 큰 부러움이나 자괴감 같은 건 없었단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그 대목이 조금은 이해가 안 된다는 내용의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좋게 말하면 당시 자신의 성격이 좋았을 테고, 나쁘게 말하면 감정이 무딘 입장이었을 것 같단다. 어릴 때부터 살아왔던 틀 안에 적응됐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고 한다.

  “그 이유를 굳이 찾자면 가족이라는 따뜻한 울타리가 중심이 될 텐데, 그런 든든함이 곁에 있었기 때문인지 저는 제 행동이나 말에 위축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사람들 속에 어울리는 방법도 그렇게 깨닫게 됐고, 제 입장과 위치를 정하는 방법도 그렇게 알게 됐죠. 너무 나서는 언행도 제 것이 아닌 것 같았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는 겁니다. 너무 나섰을 때의 불편함과, 너무 뒤처져 있을 때의 어려움 같은 걸 반복학습처럼 몸과 마음으로 익히게 됐다는 얘기가 되겠죠.”


남들과 구별되어선 안 되겠다는 거

 

   
▲ ⓒ채지민 객원기자
  수많은 장래진로가 존재하고 있었을 텐데, 어떻게 건축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고 결정했는지를 말해 달라 했다. “에이, 그 얘기는 길어지는데….” 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래서 ‘핵심정리’로 짧게 해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 핵심정리요!” 하며 귀가 번쩍 뜨이는 표정으로 껄껄 웃었다. ‘핵심정리’라는 말에 저렇게 반응하다니, 누가 뭐래도 학교 선생님이 분명하다는 게 확인된 셈이다. 고교 시절 그림에 소질이 있던 그를 보며 선생님이 제안했단다. ‘너는 설계사무소를 가는 게 낫겠다. 그쪽으로 가서 설계와 제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래서 건축을 전공으로 삼겠다며 생각하긴 했는데, 당시 건축공학과와 건축공학교육학과가 따로 있었다는 걸 담임선생님이 헷갈리며 코드번호를 지원서에 잘못 적으셨던 게 아닌가 싶단다. 그래서 그의 전공은 건축공학교육학과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설계사무소에 얼마간 있었어요. 월급이 굉장히 적었던 시절이었는데, 그때 갑자기 교사수급이 확 늘어난 일이 생겨서 선생으로 오라는 제의를 계속 들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월급도 괜찮은 것 같아서 잠시 해보자 하며 학교로 왔는데…, 잠깐 하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22년을 하게 됐네요. 선생으로 살면서도 이 길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건축사 자격증을 땄죠. 저의 설계사무소를 직접 차려보자 싶었던 건데, 고향에 가서 선배들한테 터놓고 물었습니다. 드디어 건축사 자격증을 땄는데 어떻게 해야겠느냐 물으니까, 다들 그냥 교사를 하래요. ‘건축경기가 완전 불경기라서 문 닫는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다.’라는 당시 경제현실이 결정의 계기가 되긴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선생님으로서의 인생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기에 즐겁게 교사 생활을 하고 있으며, 은퇴 뒤에는 반드시 설계사무소를 열어 오랜 인생의 꿈을 실현시킬 거라는 목표가 분명하게 있단다. 그가 특히 관심을 갖는 분야는 바로 장애인들의 이동권과 직접 관련된 편의시설이란다. 그래서 이왕이면 최고의 전문가가 되어보자 싶어, 박사과정까지 모두 마치게 됐다고 한다.

  “대학 시절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당시에 최초로 갓 결성됐던 장애를 가진 대학생들의 연합체 조직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며 전국을 돌아다니기도 했고, 인간세상이라는 데가 참으로 복잡다양한 곳이구나 하는 걸 직접 깨우치기도 했죠. 더불어 사람 관계가 정말로 중요하구나 하는 점을 정말 진지하게 깨달았던 것 같아요. 글쎄…, 저는 저 자신을 믿었다고나 할까요? 제가 겁이 없는 건지 뭔지는 몰라도,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이런 것보다는 저 자신을 믿게 됐어요. 전공을 열심히 하면 된다는 거, 또한 졸업 후에 설계사무실에 근무하다 보니까 세상의 흐름을 읽게 되기도 했었죠. 그러면서 오기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 ‘아, 내가 남들과 틀려선 안 되겠다. 사람들하고 같이 하려면 나도 많은 걸 해야겠다.’ 그러다 보니까 행사든 술자리든 뭐든 간에 자연스럽게 동참해야 한다고 받아들이게 됐고, 더 잘하려고 노력까지 하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까 배짱이라는 게 더 생겨나더라고요.”

  현직의 선생님으로 계시기에, 그 입장에 맞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교직에 몸을 담으면서 처음에는 어떤 의욕으로 시작했는지, 더불어 지금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교직생활을 하고 있으며 어떤 목표를 가지고 계신지를 물었다. 처음엔 어떤 이상적인 목표를 세워놓고 거기에 도달해야만 되는 줄 알았단다. 그래서 애들을 가르치면서 상담을 하고 부모님 면담도 하면서 의욕이 앞선 입장을 내세우곤 했는데, 직접 자식을 갖고 학부모가 되다 보니까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있는 그대로’인 것 같다고 한다.

  “모든 학생들의 ‘나오지 않는, 보이지 않는, 숨겨져 있는’ 그런 것들이 훨씬 중요함을 알게 됐어요. ‘말로서는 가르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한마디가 요즘엔 유독 가슴에 와 닿더라고요. 학생들을 이해할 수 있는 폭도 훨씬 많이 넓어진 것 같아요. 그 흔한 체벌이 아니더라도, 아이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진정한 교육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수업시간마다 장애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자주 언급하며 진행한단다. 장애가 얼마나 불편한 건지, 그래서 그걸 예방하고 함께 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육관련 자료들을 모아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그게 교육관련 경진대회에 출품되어 수상의 영예를 얻기도 했단다. 그래서 장애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어떤 장애엔 어떤 편의시설이 필요한 건지, 우리들의 학교에는 어떤 시설이 있는지, 학생들이 봉사활동이나 편의시설 조사를 나갈 때는 어떤 부분을 조사해야 하는 건지, 계단이나 경사로가 어떤 모양과 각도이어야 하며 화장실은 어떻게 설치해야 하는지 등의 사항들을 일일이 가르치며 더 많이 보여주려 노력하고 있단다.


도전하고 부딪치는 인생으로 살기

 

   
▲ ⓒ채지민 객원기자
  교육자 입장 이전에 인간적인 선배로서, 요즘의 청소년들한테 전하고픈 마음이 있으면 남겨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건 나이 먹은 사람들이 다 하는 똑같은 얘기가 될 것 같단다. 하지만 실제 교육 현장에 있는 사람의 의견과 일반인들의 생각이 똑같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재차 부탁을 드렸더니, 그는 몇 차례 심호흡을 반복하며 잠시 동안 시선을 창밖으로 고정시켰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이들이 욕심이 없어요. 욕심이 없고 포기가 빨라요. 열정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제가 20년 넘게 학교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저의 관점이 여기에 굳어져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요즘의 애들을 보면 포기가 빠르고 욕심마저 없어서 어르신 연세의 언행을 흉내내는 것 같기도 합니다. 가장 단적인 표현이 이것일 거예요. ‘하면 된다’가 아니라 ‘되면 한다’라는, 요즘 학생들이 인생을 다 산 듯이 행동하는 게 너무 안타깝다는 거죠. 굳이 따진다면 모든 애들이 풍족한 가정환경 그런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열정과 욕심이 사라져 있는지에 대해선 저 역시 답답한 마음인 게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문제점이 현존하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를 물었다. 교직 22년의 경력이라면, 분명 20여 년 전의 청소년들과 지금 청소년들의 세계를 구별하며 평가내릴 입장에 계신 게 분명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제 관점에서 볼 때는 예전보다 어렵지 않다는 거예요. 가정이나 현실적 상황이 예전과 같은 시급함을 절실하게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겠죠. 제가 클 때만 해도 절박한 심정으로 가득했었습니다. 웬만하면 어서 빨리 돈을 꼭 벌어야 한다는 각오라든가, 부모님께 받았던 혜택에 대해 나의 노동으로 도움을 드려야겠다 같은 그런 절박한 심정이 분명히 존재했었는데, 요새는 세상이 좋아졌는지 아니면 살림이 좋아졌는지 그런 절실함이 거의 없어졌어요. 이 대목엔 매스컴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역시 학교 현장에 ‘몸을 담고 계시는’ 선생님의 판단이기에, 본질 자체를 건드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청소년들이 TV 화면의 연예인들에 열광한다는 거, 그렇게 몰입하며 그들을 우상화한다는 거, 그건 기성세대들이 당시에 그랬던 것처럼 ‘너는 그렇더라도 나는…’이란 전제가 상실됐다는 뜻이다. 방송화면 속의 연예인은 ‘너’일 뿐이고, 시청자인 ‘나’는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걸로 끝이었는데 이젠 그게 아니란다.

  게다가 ‘특정 상표’의 옷과 신발을 입고 신어야만 ‘왕따’를 당하지 않는 세상이 됐단다. 거기에 따라가려면 가짜 복제품이라는 이른바 ‘짝퉁’이라도 입고 신어야 할 텐데, 짝퉁을 구입하면 가짜라는 게 너무 단번에 밝혀지기 때문에, 요즘 학생들은 차라리 짝퉁 대신 중고를 거래하며 입고 신는다고 한다. 게다가 교복을 몸에 딱 맞게 고쳐서 입는 일이 보편화되다 보니까, 치마를 무릎 길이까지 길게 입는 여학생의 경우는 오히려 스스로가 어색해지는 반응을 얻게 되는 일 또한 비일비재하단다.

  “그런 분위기에 일방적으로 추종되다 보니까, ‘다른 사람과 다른 건 바로 나’라는 자기주체성을 이해 못하는 것 같아요. 무조건 다른 애들과 동질화되어야 하는 것 같은데…, 인간은 자기 인생의 무게만큼 자기 개성으로 살아야 멋진 건데, 아직 자기 개성이라는 소중한 뜻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선생님 입장에선 놀라운 점이 있단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지내는 아이들 같은데, 졸업에도 관심이 없고 게임하는 데만 몰입하는 애들이 적지 않은데도, ‘요즘 애들’이라고 표현해야 할 그런 학생들이 정말로 아무 생각도 없는 거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너의 미래에 대해서 써봐라.’ 하는 과제를 던지면 너무너무 진지하게 써서 제출한단다. 그건 무엇을 의미할까? 머릿속으로는 확실한 인생의 밑그림이 그려지는데도, 그게 가슴이라든가 행동으로는 표현이 잘 안 된다는 뜻이다.

  현실이 그렇다면, 현재 장애를 가진 청소년들이 공업계 고등학교를 지향하는 건 어떨까? 그걸 추천하며 받아들이는 게 우선인지 여부를, 당사자이기도 한 선생님 입장에서 대답해 달라고 했다. 쉬운 말로 ‘까놓고’ 답해 달라 했는데, 선생님의 대답은 의외로 빠르고 간단하게 전해졌다. 자리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오라는 것이다.

  “장애인들의 장점이 있다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이런 걸 다들 단점이라고 생각하시는데, 저는 이 모든 걸 이점이라고 판단하거든요. 남들이 보면 오래도록 기억을 한다든가, 눈에 빨리 띈다든가, 아니면 자신이 뭔가를 조금만 더 열심히 한다면 부각이 된다든가 하는 장점 또한 분명히 있다는 거예요. 장애를 가진 학생들을 위한 특례입학이 있으니까, 개인적으로 손재주가 있거나 기술적 능력이 보인다면 기술직을 전공하셔도 충분한 가능성을 발견하실 겁니다. 자리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니까 실력을 충분히 쌓고 자격증도 많이 취득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더욱이… 장애인들의 이점은 이직률이 적다는 겁니다. 옮기며 다니기가 불편하니까, 한 군데 있으면 오래 있게 된다는 점이죠. 지금은 기술로 말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면 ‘장애 때문에?’ 이런 건 아니라고 봅니다.”

  그 대신 잊지 말아야 할 대목이 있단다. 이건 장애를 먼저 갖고 살아온 선배의 진솔한 조언인 것 같아서, 김진철 선생님의 언급 그대로를 수정 없이 옮기는 게 나을 것 같다.

  “그 대신 일정한 준비는 어느 정도 해야 되겠죠. ‘나만 따로’라든지 ‘나만 특별대우를 해달라’ 식의 이런 것보다는, 자신이 회사를 위해서 얼마만큼 기여를 할 수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셔야 합니다. 자기 회사에 도움이 된 다음에 자신의 요구를 주장해야 하는 게 순서라고 저는 생각해요. 물론 최소한의 기본적인 사회복지가 갖춰진 회사라면 훨씬 좋겠지만 이 사회의 현실이 그렇지 않다면, 고정된 이 현실의 틀에 일정 부분 자신을 맞출 줄도 알아야 되고 적응을 하는 게 능력이라고 저는 보거든요. 자신의 장애가 너무 심해서 어쩔 수 없다면 대안을 생각해야겠지만, ‘내가 장애 때문에 이런 불편은 감수할 수 없어!’가 아니라, 남들이 도전하는 것만큼은 도전하고 부딪쳐 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비장애가 하나(1)만큼 힘들다고 할 때 장애는 열(10)만큼 힘들 수가 있는 거고, 일단 무조건 부딪친 다음에 깨지면서 판단을 새롭게 하는 훈련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제가 살면서 그걸 정말 많이 느꼈어요. 뭔가를 하려는 사람이라면 자주 깨지는 게 나은 겁니다. 깨진 사람한테는 상처라도 남죠. 아무것도 안 한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남는 게 없잖아요.”

  백 번을 해도 안 될 걸? - 이런 생각을 아예 버리라는 조언이었다. 그는 가장 단순하고 가까운 데서 스스로의 장애를 벗어던지곤 한단다. 선생님들과 사우나를 가고 학생들과 목욕을 같이 하는 일상을 항상 공유한다는 것이다. 철제 보조기구가 착용된 자신의 다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몸 여기저기에 있는 수술자국도 스스럼없이 드러내며 항상 함께 지내는 일상을 실천한다고 한다. 왜냐?

  “그래야만 사람들이 저를 좀 더 편하게 대하지, 제가 거리를 두려 하면 상대방이 먼저 거리를 더 넓게 두려는 것 같았거든요. 실제로도 그랬고요. 저는 지금까지 저의 학생들 입에서 ‘우리 선생님이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라는 말은 한 번도 못 들어봤습니다. 그게 바로 저의 작은 실천이자 인생의 모습이 아닐까요?”


편의시설의 기본을 이해 못하는 이들에게

   모든 대화를 마친 다음에 별도의 질문을 던졌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만났으니까, 그 전문적인 견해도 함께 들어야 할 일 아닌가. 건축 분야의 고수(?) 입장에서 볼 때, 우리나라 건축물 편의시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판단하시는지를 물었다. 바로 ‘수직이동’ 문제란다. 경사로와 계단의 문제가 가장 크단다. 계단이 제대로 된 높이와 너비와 손잡이로 되어 있다면 좀 나을 텐데, 잘못 만들어진 구조물 때문에 정작 고생하는 건 장애인들이라는 것이다. 전반적인 환경은 물론 많이 좋아지고 있다지만, 그건 당장 보이는 부분의 문제일 뿐 전체는 아니란다.

  “제가 다녀보면서 제일 답답한 반응을 들었던 게, ‘장애인들이 필요하다고 할 때 누가 와서 해주면 되지 않느냐?’, ‘누가 부르면 휠체어를 들어 옮겨주면 되는 거 아니냐?’, ‘벨을 누르면 시각장애인을 안내해 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식의 대답인데, 그건 절대 아니거든요. 편의시설의 제1원칙은 혼자서 다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 누구의 도움 없이도 혼자 자유롭게 그때그때마다 이용할 수 있어야 진정한 편의시설인데, 가고 싶은 시간에 가고 싶은 장소를 편하게 갈 수 있는 게 바로 편의시설인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나 환경까지는 아직 한참 멀었잖아요. 편의시설을 만들기 위한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는 매뉴얼로 다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일반 시공업자들한테 설명할 때마다 이해전달이 안 된다는 게 매번 반복되는 일입니다. 매뉴얼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해서 오는 오류들이 바로 편의시설의 오류를 만드는 것 같아요. 차라리 편의시설과 관련된 모든 사항들을 파악하고 실행하는 사회적기업이 탄생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저는 늘 갖고 있습니다. 그게 오히려 시행착오 없는 장애인 편의시설의 확충과 안전성을 확보할 것 같은데, 그 대목이 항상 미진하다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김진철 선생님의 가슴에는 그에게 가장 큰 가르침을 주셨던 어느 교수님의 한마디가 또렷이 새겨져 있단다. ‘장애는 우리 몸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주위 환경에 있는 것이다.’ 수십 번을 반복하며 되새겨도, 덜거나 더할 부분이 없을 정확한 표현이자 정의이다. 그 ‘주위 환경’이란 건 무엇일까? 장애인들의 눈높이를 고려하지 않은 건축물과 각종 시설물, 주위의 시선과 인식 모두가 전부 다 포함되는 게 아닐까. ‘장애는 우리 몸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주위 환경에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 새겨두어야 할 소중한 가르침이 분명하다고 다시 한 번 되짚어본다. 

작성자글·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cjm8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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