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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닌 모두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람사는 이야기] 탈시설 성공담의 주인공 조 수 양

본문

 

   
▲ ⓒ채지민 객원기자

 

  2011년 <함께걸음> 1월호의 ‘사람사는 이야기’ 주인공은 장희영 씨였다. 작년 11월에야 비로소 오랜 시설생활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되찾았고, ‘저의 집 주소를 말씀드릴까요?’라고 새겨두었던 당시의 글 제목은 독자 여러분들이 탈시설의 의미를 공유하는 데 적잖은 반향을 이끌었다고 전해 들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면서도 즐거운 일은, 그 희영 씨를 서울시 한복판에서 두 차례나 마주쳤다는 사실이다. ‘어?’ 하면서 놀라다가 ‘이 사람을 정말 이렇게 마주칠 수 있구나!’ 하는 실감을 갖게 됐다는 거, 그건 무감각했던 일상의 타성을 깨버릴 만한 획기적인 인연이자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1천만 넘는 인구가 바글바글 살아간다는 서울‘특별시’ 안 어딘가에서 우연히 마주친다는 것, 그건 ‘어느 무슨 복권’의 당첨확률만큼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선약도 없이 두 차례나 마주쳤다는 데는, 커다란 희망사항을 간직하게끔 만든다. 만남의 가능성이 앞으로도 수십 번 수백 번으로 남겨져 있으리라 믿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 만남의 주인공 경우는 어떻게 될까? 장희영 씨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탈시설을 실천했고, 현재 시민 1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이 이번 ‘사람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의 가슴속에는 어떤 사연과 남다른 이야기들이 끓어오르고 있을까? 그를 만나러 떠났고, 그와 마주 앉으며 긴 대화를 나눴다. 조수양 씨, 그가 이번 호 ‘사람사는 이야기’의 인물이고, 우리의 이웃으로 새롭게 전입신고하게 됐음을 여기에 새겨놓고자 한다.


사랑 이별 저 자신

  서울시 노원구 OO동의 한 아파트로 향했다. 오전 11시 약속시간에 맞춰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거실에 있던 주인공과 마주친 순간…, 초면이 아니라 아주 낯익은 얼굴이라는 생각부터 뇌리를 스쳤다. 오죽하면 “자주 뵙고 지냈던 것 같은데, 우리가 어디서 만났었죠?”라는, 정말 실없는 질문 아닌 질문이 먼저 튀어나왔을까. 상대방은 나를 기억 못해도 나는 분명히 상대방을 알고 있다는 이 미묘한 느낌, 이건 대화의 시간 내내 일정한 긴장감을 만들어놓기에 충분했다. 상대방은 여전히 ‘나’를 기억 못했기 때문이다.

  늘 그랬듯이 혼자서 대화와 녹음과 촬영을 전담해야 했기에 취재준비부터 서둘렀다. 그리고 곁에 함께한 활동보조도우미와 함께 이야기를 시작했다. 수양 씨는 뇌병변 1급이고, 목 아래부터 전신을 움직일 수 없는 중증의 장애를 가지고 있단다. 앉지도 서지도 않는 아이가 늦는 줄만 알고 계시던 부모님은, 3살이 될 때야 비로소 장애를 확인하게 되셨다고 한다.
 
  대구가 고향인데, 작은 읍내와 같았던 어린 시절의 동네 풍경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럼 어릴 때의 본인은 어떤 아이였다고 기억하는지를 물었다.

  “제가 4살 때부터 말을 했다는데요. 8살 무렵 아파트로 이사 가기 전까지는 제가 태어났던 동네에서 그냥 남자애들처럼 활발하고, 장난감 칼 좋아하고 개구리 잡으러 다니는 거 좋아하던 아이였대요.”

  아침식사 하기 전에 할머니 등에 업혀서 동네 한 바퀴를 돌던 기억은 또렷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오빠와 언니가 있고, 늦게 태어난 막내는 12살이 돼서야 초등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당시 서울을 제외하곤 유일했던 특수학교가 대구에 있었는데, 그 학교를 1년 정도 다니다가 어머니가 너무 힘드셔서 중단하게 됐다는 대목에선 아쉬움 비슷한 게 전해졌다. 16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7살에 시설로 들어가게 된 뒤, 다시 공부를 시작할 수 있게 된 건 오랜 시간이 흘러간 2002년. 그런데 검정고시 같은 과정이 아니라, 수양 씨는 초중고 모두를 정규수업으로 받으며 학교생활을 했단다.

  “고등학교가 시설에 없었어요. 그래서 고등학교에 갈 나이가 된 친구들이나, 고등학교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을 모아 외부의 학교로 보내줬어요. 시설의 버스를 타고 읍에 있는 고등학교로 18명이 함께 다녔죠.”

  그럼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되면서 스스로가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 어떤 모습으로 자신의 삶을 설계하며 지냈는지를 말해달라고 했다.

  “제가 저의 장애를 완전히 받아들이게 된 건 이십 대 말이 다 되었을 때였어요. 지금도 하고 싶은 게 많지만, 그때는 정말 하고 싶은 게 많았어요. 책도 써보고 싶고, 그림도 그려보고 싶었고….”

  책? 무슨 책이냐고 물으니까 맨 처음에는 시를 적었고, 지금은 소설이나 영화 시나리오 같은 걸 적어보고 싶다고 한다. 시를 처음 적게 됐던 건 18살 때였는데, 시설에 같이 지내던 선생님이 권해서 문학동아리 같은 활동을 했단다. 거기서 시 쓰는 법을 어느 정도 배웠고, 그 다음부터는 자기 나름의 내용과 방식으로 적으며 지냈다고 한다. 시의 내용은 쓰는 이마다 조금씩 다른 법이다. 종교적인 시를 선호하는 이가 있고 허무와 고독에 집중하는 이들도 있는데, 수양 씨의 경우는 어떤지를 물었다. 딱 세 개의 단어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사랑, 이별, 저 자신.”

   
▲ ⓒ채지민 객원기자
뭔가 다르다는 점을 느꼈다는 거

  “마음에 뭉쳐 있던 걸 적어요. 영감이라고 해야 하나요? 그런 게 떠오르면 써놓고, 잊어버리고 있다가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읽고 새롭게 고쳐 쓰곤 하죠.”

  자신의 시는 대부분 짧은 내용이란다. 아직 책 한 권 분량도 되지 않는다 했지만, 언젠가는 그의 이름이 새겨진 시집 한 권이 탄생할지도 모르겠다는 기대 비슷한 게 떠올랐다. 손을 사용할 수 없기에 글은 마우스스틱을 이용해 컴퓨터로 적는단다. 고등학교 때도 마우스스틱을 이용해서 모든 숙제를 작성하곤 했다는데… 고등학교 때라고? 마우스스틱이 그때도 있었나? 그 대목이 궁금해서 되물으니까, 수양 씨는 고등학교를 2008년에 뒤늦게 들어가서 올해 2월에 졸업했다고 한다. 아하, 혼자의 생각 속에서 계산이 되지 않던 시간대가 그제야 정리된 셈이 됐다.

  그럼 대학 진학도 생각하고 있느냐 물으니까, 수양 씨는 활짝 웃는 얼굴로 이미 입학을 했다고 했다. 방송대학교 청소년교육학과 11학번이란다. 수많은 미래 중에서 그 전공을 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직접 고등학교 생활을 해보니까, 우리 교육정책의 문제점 비슷한 걸 발견하게 됐단다. 요즘 십대 애들이 너무 입시 위주로 내몰리고 있고,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들게 됐다고 한다. 물론 2000년대 초 초등학교를 다시 다니게 된 이후부터,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게 된 십여 년의 기간 동안 직접 학교 현장에 있던 스스로의 체험도 그 안에 포함됐다는 부연설명이 뒤따랐다.

  “청소년교육학과를 졸업한 다음엔 청소년 상담을 전문적으로 하고 싶어요. 여러 상담 분야가 있는데, 저는 청소년 상담을 계획하고 있거든요. 상담하는 학생들에게 장애가 있는지 여부 같은 건 상관이 없어요. 학업이든 이성 문제든 가족 관련 상담이든 뭐든, 개인적인 상담도 다 담당해보고 싶어요.”

  뭔가 구체적인 계획이 그의 가슴 안에 담겨 있는 모습이었다. 늦은 만큼 좋은 결과가 많이 있을 거라고 답을 전했다. 계획을 위한 계획은 악순환만 낳지만, 그 계획이 구체적일수록 실천될 확률이 훨씬 높아지기 때문이다. 책 얘기가 갑자기 등장해서 잠시 시간대를 건너뛰었던 걸, 다시 10대 20대 시점으로 되돌려 보았다. 20대 후반이 돼서야 비로소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였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10대 시절에는 남모를 혼란 비슷한 게 많았었는지, 그걸 얘기할 수 있는 만큼의 수위로 말해달라고 했다.

  “굉장히 많았었죠. 죽으려고 다섯 번이나 시도했었어요. 그런데… 매번 좌절되고 나니까 그런 시도에도 지치더라고요.”

  그렇다면 자신에게 장애가 있다는 걸 처음 인식하게 된 시기는 언제였을까? 8살 때란다. 구체적으로 8살이라는 시점을 기억하는 이유가 있는지를 다시 물었다.

  “제 기억에… 제가 장애라는 걸 알게 됐던 건… 그때 언니가 옷을 사줬어요. 그 옷을 입혀서 어머니 화장대 거울 앞에 저를 세웠는데… 그때 처음 느꼈어요. 뭔가 다르다는 것을, 그 이전까지는 장애라는 그 말 자체를 몰랐었는데, 그 옷을 입고 선 저의 모습을 보는 순간 다른 애들하고 제가 다르다는 걸 느끼게 됐죠.”

  그때부터 다른 친구들은 다 학교에 다니는데 왜 나는 안 가는 건지, 그런 의문점 비슷한 걸 떠올리게 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12살의 나이가 돼서야 초등학교를 가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당시 방송 화면에 장애어린이들을 특수학교에서 모집한다는 내용이 나왔고, 우연히 보게 된 그 방송으로 인해 학교의 문을 두드리게 됐단다. 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말조차 꺼낸 적 없이 살았고 부모님 역시 학교를 권한 일 없이 지내기만 했는데, 나이와 상관없이 입학이 가능하다던 그 화면 속 내용과의 만남이 수양 씨의 삶을 새로운 길로 인도하게 된 모양이었다.

   
▲ ⓒ채지민 객원기자

내가 살아가게 된 집 

  열일곱의 나이에 들어간 시설생활은 막막함뿐이었단다. 거부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개인이 운영하는 단체였기에 비리도 많았던 그 자리를 벗어날 순 없었다고 한다. 개신교 계열임을 내세우며 운영되던 시설이 가톨릭으로 운영 주체가 바뀐 이후에도, 수양 씨는 계속 같은 시설에서 생활을 이어갔다고 한다. 그렇다면 탈시설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언제였고 무엇 때문이었을까?

  “항상 생각은 있었죠. 있었는데… 철이 들고 스무 살을 넘기면서부터는 항상 생각이 있긴 있었죠. 그런데 아버지 반대도 있었고, 언니와 오빠가 걱정하는 것도 있었고… 그래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계속 있게 된 거예요.”

  시설이라고 해서 모든 걸 어둡고 그늘진 이미지로 떠올릴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 나름의 긍정적인 부분이었다고 간직할 면들 또한 분명 존재하지 않을까? 시설의 운영주체가 가톨릭으로 바뀌게 된 2000년대 초 이후로는 시설의 분위기가 상당히 좋아졌다고 한다. 원장 신부님이 올바른 생각을 가진 분이셨기에, 시설 생활인들을 대하는 선생님들의 인식도 크게 변하게 됐단다.

  사람간의 만남이라는 게 얼굴을 마주치면 인연이 되고 정으로 남는 것인데, 지금까지 인연의 끈을 잡고 있는 이들이 있는지 물었다. 좋았던 분들은 지금도 연락을 계속하며 지낸단다. 그렇다면 시설 안에서 탈시설에 관한 욕망을 대화로 나눈 사람은 없었을까? 있었단다. 그렇다면 ‘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했을 때, 듣던 이들의 반응은 어땠을지 궁금해졌다.

  “반반이었어요. 저를 잘 알고 이해하던 분들은 ‘걱정은 되지만 해보라’고 하셨고, 저를 잘 모르면서 이해 못하던 분들은 무조건 반대를 많이 하셨죠.”

  그렇다면 탈시설을 결심한 뒤, 어떤 마음가짐으로 계획 세우고 준비를 했을까? 어떻게 살고 어떤 인생을 설계하겠다는 구체적인 내용이 있어야 했을 텐데, 수양 씨의 경우는 어땠는지를 물어보았다.

  “저는 이랬어요. 일단 나오면… 어차피 모든 게 현실이고 바깥의 생활이 직접 와 닿는 건 분명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아주 굳게 다짐을 했었어요. ‘정말 어렵다면, 정말 어려워서 빌어먹는 한이 있어도 시설에는 절대 다시 들어오고 싶지 않다’고요. 그만큼 심적인 염증이랄까, 답답함 같은 게 많이 쌓여 있었거든요.”

  그 답답함이 폭발한 적도 있었을까? 나오기 6개월 전 즈음에 실제 있었단다. 장애인들의 권익운동을 하는 활동가들과 시설의 국장 간에 의견충돌이 자주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시설에서 나올 의사가 분명히 있는데 왜 막는 것이냐 하면, 시설 측에선 당신들을 어떻게 믿겠느냐, 못 믿는다 하며 지루한 줄다리기가 1년 가까이 이어졌던 모양이다. 그럼 활동가들과의 연계는 처음 어떻게 이어졌는지가 궁금해졌다.

  “나와야 한다고, 시설에서 나와야 한다고 끊임없이 강조하며 얘기해줬던 친구가 있었어요. 나이는 두 살 어린데 시설에서 근무했던, 저와 같은 방에서 지냈던 친구가 계속 저를 ‘찔렀죠’. 나가기 전에도 찔렀고 나간 후에도 계속 찔렀어요. 시설 근무를 그만둔 그 친구는 1년에 한두 번씩 저를 서울에 오게끔 불러서, 끊임없이 강조를 해줬어요.”

  죽어도 다신 되돌아가지 않겠다던 그 시설 문을 열고 나섰을 때, 그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안과 바깥의 공기가 물론 달랐을 테고, 심장이 터질 만큼 좋으면서도 터질 만큼 겁나기도 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울었어요. 왜냐하면… 저 개인적으로만 봤을 때는 저한테는 참 좋은 일이 맞겠죠. 그런데 두고 나오는…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친구들이 참 많았는데, 그 친구들을 두고 나온다는 데 참 마음이 그렇더라고요.”

  나오는 과정에도 ‘바깥 공기’가 안으로 침투하지 못하게 막는 시설 측의 시도는 집요하게 이어졌던 것 같다. 보이지 않는 방해와 이간질 같은 게 지속됐다는데… 하긴, 나간다고 해서 그냥 잘 가라며 배웅하는 시설을 기대하기 어려운 건 사실 아닌가. 수양 씨가 ‘주거복지사업’에 선정이 된 건 나오기 4개월 전, 경북 모처에 있던 시설의 문을 일찍 나서서 서울의 보금자리에 도착한 건 오후 4시쯤이었단다. 누가 수양 씨를 반겨줬냐고 물으니까, 계속 ‘찔렀던’ 그 친구였다고 한다.

  자기의 집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의 심정이 어땠느냐고 물었다. 그냥… 내가 살아야 될 집이구나 하는 생각, 활동가 친구 두 명이 미리 와서 집안 정리를 깔끔하게 마무리해 놓았단다. 짐을 들여놓고 중화요리를 시켜서 저녁식사를 함께하고, ‘그 친구’와 함께 나가 시장을 보고 같이 잠을 잤다고 한다. 활동가 친구들이 일주일 정도 같이 다니며, 수양 씨의 새로운 인생 시작을 도와줬단다. 은행에 가서 통장 개설하는 거, 동네 지리 익히는 거, 가까운 곳 이동하는 방법 등등. 그렇다면 정식으로 동네주민이 됐는데, 단골집 같은 건 생겼는지를 물었다.

  “저요? 이 동네에서 이젠 안 가본 데가 없는데요?”

   
▲ ⓒ채지민 객원기자
남한테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

  탈시설의 꿈을 이루고 나서 짧은 기간이나마 새로운 삶을 살아왔는데, 안에서 생각만 해보던 바깥생활과 실제의 삶을 비교한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언급하고 싶은지 물었다.

  “제가 제일 힘들었던 게, 시설에서만 계속 생활을 했고 시설 밖에 잠시 나오더라도 선생들이 계속 따라다녔잖아요. 그래서 길을 잘 몰랐던 것 같아요. 길눈이 없다는 거, 그게 정말 무지하게 힘들었어요. 그래서 처음엔 집에만 있어 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저 혼자 조금씩 돌아다녀봤거든요.”

  전동휠체어라서 태워주기만 하면 외출이 가능하단다. 그래서 좀 멀리 있는 인근 성당까지 혼자서 갔다가 오는 걸 도전했고, 그걸 성공한 다음부터는 자신감이 조금씩 생겨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서울에서 가장 멀리 혼자 다녀온 곳은 어디일까? 마로니에공원 옆의 노들야학이 최고기록이란다. 오는 길 설명을 자세히 듣고 나서 도전했는데, 그 이후론 혼자서 언제나 다녀올 수 있는 자리가 됐다고 한다.

  꼭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탈시설을 결정하고 실천한 뒤 자신만의 공간을 갖게 됐는데, 그렇게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됐는데, 전국 각지의 어딘가에서 여전히 탈시설을 꿈꾸기만 하는 이들에게 어떤 한마디를 남기고 싶은지 얘기해 달라고 했다.

  “저는 늘 하던 말이 ‘두려워하지 마라’였어요. 방금 언급했었지만, 제가 길눈이 어두워서 길을 나서는 데 무척 두려웠거든요. 그런데 그걸 딱 깨고 나니까 아무것도 아니던데요. 가는 방향을 물으면 정말 웬만한 사람들은 다 가르쳐주니까요.”

  보다 직접적인 대답을 듣고 싶어서, 하나의 상황을 가정하며 예로 들었다. 시설 문을 나설 때 수양 씨를 눈물짓게 만들었던, 그 친구들이 지금 바로 앞에 다 앉아 있다면 무슨 말을 전하고 싶을까?

  “뜬구름 가지고 나오지 말라고 할 거예요. 제가 나오기 전에 동생 한 명한테 얘기를 했었지만 거품을 빼라고, 모든 게 실생활이고 그건 현실이니까 쓸데없는 거품은 전부 다 빼라고요. 기대도 갖지 말라고.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거고, 부모님이 살아주는 것도 아니고 형제가 살아주는 것도 아니고, 나감과 동시에 나에 대한 내 모든 걸 내가 책임져야 된다는 거. 죽든 살든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거. 어떠한 결정을 하던 간에 그 결정은 내가 짊어져야 할 거니까, 쓸데없는 기대 같은 건 하지 말라고 얘기를 했었고 지금도 그렇게 얘기를 해줄 것 같아요.”

  수양 씨의 말을 계속 듣고 있는 동안, 수양 씨 곁에 있었던 이들이 참으로 꼭 필요한 조언들을 그에게 전해주며 준비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피부에 와 닿는 조언들을 꼭 필요한 만큼 간직하고 있다는 거, 그건 사실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설 밖의 세상을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확고한 마음다짐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는 건, 어쩌면 그 모든 이들이 수양 씨가 받은 인생의 선물인지도 모를 일 같다.

  “남한테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 - 저는 그 생각을 늘 해요. 마음으로, 생각으로.”

  좋아하는 문장이나 생활신조가 있냐고 물으니까, 수양 씨의 대답은 딱 한마디였다. ‘남한테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건 이제부터의 인생에서 수양 씨가 두고두고 실천해야 할 숙제가 되리란 생각이 들었다. 청소년 상담으로 꼭 필요한 사람, 동료나 친구들에게 꼭 필요한 사람, 지역 안에서 꼭 필요한 사람으로 그의 삶이 이어져야 할 테니까 말이다. 9년이란 기간 동안 입시의 연속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일단 대학 1학기를 마치고 나면 휴학을 할 예정이란다. 그리고 해야 할 게, 하고 싶은 것들이 여럿 있단다.

  “잠시 쉬면서 제가 하고 싶었던 거, 미뤄두던 거, 그런 것들을 해보고 싶어요. 계절이 가는 것도 느껴보고 싶고, 사람들하고 얘기도 나누고 싶고… 그래서 저 나름대로 나중에 상담할 때 뭔가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시간을 경험으로 하나씩 하나씩 쌓아두고 싶어요. 호기심이 참 많아서 해보고 싶은 건 꼭 해봐야 하거든요. 하하!”

P.S.) 글 시작 부분에 언급했던, 거실에서 처음 마주친 수양 씨가 너무 낯익은 얼굴이었다는 느낌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됐다. 작년 말에 있었던 어느 행사장에서 눈에 띄는 이미지로 행사에 적극 참여하던 그의 모습이 뒤늦게 떠올랐던 것이다. 

  프로그램 진행에 능동적인 관심을 보이며 함께하던 '누군가'의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그의 동선을 따르며 중간마다 여러 장의 사진을 기록해둔 바 있었다. 돌고 돌다가 마주치는 인연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걸까? 당시 담아두었던 여러 이미지들 중에서 2장을 골라 이 자리에 펼쳐놓는다. (본문에서 아래쪽 두 장) 

작성자글·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cjm8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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