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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바로 주인공입니다

[사람사는 이야기]서울시의회 의원 이 상 호

본문


  초면이라 해도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듣다 보면, 그 사람의 절반 이상은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목소리가 굵고 가는 것의 차이는 아니다. 말이 빠르고 느린 것 또한 상관없다. 중요한 건 내용이다. 거창한 한자성어가 없어도, 귀에 거슬리는 외래어의 연속 같은 허세가 없다 해도, 그 사람이 정말 자기 자신의 얘기를 하는가 여부를 살피다 보면 그 사람의 대부분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국민을 현혹하는 화려한 사탕발림은 금방 탄로가 나지 않은가. 그 대신 구수한 인생여정을 풀어내는 시골 어르신의 억센 사투리에선, 남모르는 존경의 마음이 떠오르는 게 우리네 인생 모습이기도 하다.

  말 하나로 모든 걸 다 표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행동은 없고 실천은 보이지 않는데, 지구의 역사를 열두 번은 뒤바꿀 듯 달변을 토하는 이들을 종종 접하게 된다. 일부러 자기 자신을 화려하게 꾸미려고 애쓰는 사람들 또한 자주 마주치는데, 결론은 늘 똑같다. 내용 없는 인생이라는 거, 다음에 다시 만나도 같은 화제로 뒤섞이다가 끝날 게 확실하다는 거. 그렇다면 굳이 그 사람을 다시 만나 똑같은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대학교수의 명강의보다 재래시장 좌판의 어르신들 사연이 더 가슴에 와 닿는 건, 자신의 인생을 직접 털어내는 그 진솔함 때문일 거라고 생각을 재확인하곤 한다.

  그런데 난데없는 말 얘기가 왜 나왔을까? 이번 ‘사람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 내용을 녹음한 음성기록을 며칠 동안 반복하며 듣는 가운데 떠오른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 주인공은 세상을 상당히 깊이 있게 살아온 사람이라는 거, 머릿속에 든 지식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가슴에 담긴 인생의 무게감이 확실하다는 것, 더불어 화려한 외적 가치를 추구하기보다는 내면의 가치를 키울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거…. 크고 작은 공간에서 몇 차례 스치듯 마주쳤겠지만 직접 마주앉아 대화를 나눈 건 처음이었기에, 이런 인상을 남겼다는 건 반가운 일임이 분명했다. 첫인상이 좋은 사람은 두 번째 만남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다섯 살 때의 기억 - 엄마의 눈물

  이상호. 서울시의회 의원이란다. 어디서 봤던 기억이 나는 것 같긴 한데, 꼭 집어서 ‘어디’라고 떠오르는 건 없다. 물론 그동안의 행적을 캐다 보면 일정한 접합점이 분명 등장하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초면인데도, 대화의 시작은 이미 지난 주 어디선가 막걸리라도 나눴던 사이인 듯 홀가분해졌기 때문이다. 만남의 시작부터 이런 기분이 들면, 그 만남은 순도 99.999%의 좋은 시간으로 기억되기 마련이다.

  의원님이라 했으니 의회활동에 관한 질문부터 던졌다. 몇 마디만 가볍게 나누려 했는데, 30분이 훌쩍 넘어 세부적인 사안까지 파고들게 됐다. 시민의 입장에서 보는 것과, 의회 안에서 직접 활동하는 이의 견해는 확실히 달랐다. 무엇보다도 생생했다. 당연한 일 아닌가. 직접 의정현장 한가운데 있는 인물이니, 당사자의 ‘아’와 제3자의 ‘어’는 엄청난 차이를 드러냈다. 대화는 참으로 내용 가득한 분위기로 흘러갔는데… 일부러 딱 중단을 시켰다. 이러다간 만난 이유가 뒤로 밀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간에 우리는 ‘사람사는 이야기’ 대화를 나누러 만난 게 아닌가.

  본론으로 들어가서 질문을 던졌더니 대답이 툭툭 터져 나왔다. 막힘이 없는 화법이 인상적이었다. 소아마비 지체 2급이고 백일 때 걸렸단다. 백일 때? 아직 뒤집기도 하지 않았을 때 소아마비 판정을 받았다고? 그랬더니 자신은 좀 특수한 경우에 해당된다고 한다. 완전히 누워서 늘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아기를 안으면 백일 정도 됐더라도 어느 정도 버티며 몸의 반응을 하는 법인데, 자신은 목 아래로 늘어져 심각한 상태였단다. 게다가 고열이 며칠 지속돼서 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고, 결국 소아마비라는 판정을 백일 때 받게 됐다고 한다.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이 안 믿을 텐데요. 저는 말길을 서너 살 때부터 알아들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한 번도 저의 장애에 대해서 긍정적인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뭐냐 하면 네가 언제 아팠고 너 때문에 가산을 탕진했고 등등, 장애를 가지며 자라는 동안 듣는 그런 얘기들 있잖아요. 당시 장애에 대해서 긍정적인 얘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건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다섯 살 때라고 기억난단다. 밖에 나갔다가 친구들과 싸웠고, 엄청 맞은 다음 집에 왔다고 한다. 다섯 살짜리니까 맞은 게 억울한 나머지 엄마 앞에서 질질 짜고 그랬던 것 같은데, 자신이 운 것보다 세 배는 더 우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단다. 가슴이 아팠던 어머님이 퇴근한 아버님께 이 얘기를 전하니까, 아버님은 그 얘기를 듣자마자 술상을 준비하라고 하셨단다. 그리고 아버님도 술잔을 기울이며 우셨다고 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대화를 나눌 당시엔 듣지 못했던 이상호 씨의 혼잣말이 아주 작게 녹음되어 있었다. “아이고, 눈물이 나려고 그래….”

  그때 다섯 살 소년은 아주 굳게 다짐을 했단다. 장애로 인해 밖에서 생기는 일은 절대로 부모님한테 말씀드려선 안 되겠다고 말이다. 다섯 살 그 어린 마음에 그런 다짐이 정말 가능했느냐 물으니까 진짜로 그랬단다. 무슨 일이든 장애 때문에 생긴 문제는 무조건 자기 혼자 다 알아서 해결했다는 것이다. 순간 궁금증이 떠올랐다. 온 몸이 퍼지듯 늘어지는 증상으로 백일 때 이미 소아마비 판정을 받았다고 했는데, 밖에는 어떻게 나갔고 학교는 어떻게 다녔다는 걸까?

 “제 어머님이 1년 반 정도 말 그대로 전국투어를 하신 거죠. 좋다는 병원 다 가고 보약 먹이고 이렇게 저렇게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침을 맞고 나았대요. 완전히 누워 있던 상태에서 지금 정도의 상태로 말입니다. 지금은 제가 30미터 정도는 걷거든요. 그 정도까지는 된 거죠. 어머님이 엄청나게 고생을 하신 거예요.”

  부모님의 기대심리라는 게 당연히 있지 않은가. 수술을 하면 애가 좀 더 좋아질 것 같고 나아질 것 같아서, 수술하자는 제의를 계속 받으며 지내왔단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하도 많이 병원을 다녀서, 지금도 병원 가는 걸 무척 싫어하게 됐다고 한다. 주사바늘 보는 것도 싫고 병원 알코올 냄새는 딱 질색이라서, 병문안 가는 게 너무 싫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늘 겪게 되는 장례식장 가야 하는 일도 고역이 됐단다.

 “그래서 제 형수님이 조카를 낳았을 때도, 나참, 병원에서 낳으셨는데 거기 가기가 싫어서, 이거 참 그랬었는데… 하하하!”

   

  꿈이 없었던 어린 시절

  그렇다면 어린 시절 자신이 다른 또래들과 다름을 처음 느꼈던 시기는 언제였을까? ‘나는 왜 다른 애들과 다르지?’ ‘내가 왜 열외가 되어야 하지?’ 그 문제에 대해서 이상호 씨는 다르게 반응했단다. 다섯 살 때 어머님의 그 눈물을 본 이후로는 분노하고 싸우기에 바빴다는 것이다.  

 “이게 농담이 될지 진담이 될지 모르겠는데, 절뚝다리라고 놀리고 도망가고 다리병신이라고 놀리고 도망가는 이런 애들이 많았잖아요. 저는 놀린 애랑 싸워서 맞는 건 상관이 없었어요. 그런데 놀리고 도망을 가면 방법이 없잖아요. 그 분노라는 게 진짜 말도 못해요. 화는 끓어오르는데 어떻게 풀 수 있는 방법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잡히지 않고 도망갔던 애가 교실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뒤로 가서 때렸어요. 화장실에 가면 그 문을 열고 들어가서 때렸죠. 장애가 없던 그 친구들은 부모한테 이르면 해결이 됐겠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고 그렇게 할 수가 없었어요. 저보다 몇 배 더 우시는데, 그걸 어떻게 보고 있냐는 거죠. 집안이 완전히 가라앉는데…, 누나들도 몰래 울고 그랬는데… 절대로 집에선 얘기를 안 했어요. 저 혼자 저의 분노를 다 해결하며 지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그런 생각을 했고 그런 다짐을 했으며 그런 행동을 했다는 거, 그런데 자신뿐만 아니라 같은 상황의 다른 아이들 역시도 엄청난 심리적인 고통이 있었을 거라고 짐작된단다. 게다가 초등학교 1,2학년 무렵에 그는 대충 뭔가를 알게 됐다고 한다. 선배나 어른들 입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들로 듣게 되는 것, 바로 장애인은 결혼도 못하고 제대로 살아가지도 못한다는 식의 그런 왜곡과 편견 같은 걸, 그 어린 나이에 가슴속으로 담아두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는 대학에 가려면 학력고사 점수 안에 체력장 점수가 포함됐었잖아요. 그런데 저는 체력장을 못 받으니까 점수도 낮아질 테고, 대학에 간다 해도 장애인이 갈 수 있는 데가 국문학과 같은 한정된 몇 개 학과밖에 없었죠. 의대를 간다거나 하는 건 아예 자격조건 자체가 안 됐고, 고시를 봐도 장애 때문에 떨어지던 시절이었잖아요. 대학 입학 자체가 거부되던 시절이었으니…, 그러니까 저는 초등학교 2,3학년 때부터 심각하게 절망스러웠어요. 친구들은 장군이 되니 의사가 되니 선생님이 되니 이러는데, 저는 그게 다 안 될 거라는 걸 이미 다 알고 있었거든요. 결혼도 못할 거라는 거…. 참으로 꿈이 없었어요. 미래에 대한 꿈…, 그래서 분노하고 싸우기 바빴던 거죠. 그렇게 삭히고 해소해버리고….”

  답답한 그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한 언급이었다. 다섯 살 당시의 어머님 눈물 때문에 단단히 다짐을 했다는 거, 초등학교 저학년 당시에 이미 미래에 대한 모든 꿈을 잃고 지냈다는 건 사실 엄청난 동심의 상처와 상실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소년 이상호가 그랬다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관점을 바꿔서, 그의 인생에 희망으로 등장한 그 무엇은 없었을까? 소년의 가슴에 촛불로 밝혀지고, 등대 같은 불빛이 비춰지는 계기 또한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책이든 우연한 기회의 무엇이든 간에, 인생의 ‘가지 않은 길’과 ‘새로 찾은 길’은 누구한테나 존재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에게는 학교로 교생실습을 나왔던 모 대학의 교생선생님이 그 주인공이라 했다. 아직 대학생이던 여자선생님이셨는데, 애들하고 안 어울리고 혼자 떨어져 지내는 그의 모습을 배려의 관점으로 바라보셨던 것 같단다. 나름 많은 신경을 써주셨던 것 같은데, 그 선생님이 대학의 축제 현장으로 그를 초대했다고 한다. 그래서 둘이서 대학 안에 들어갔고, ‘대학축제 = 투쟁기간’이던 5공화국 당시의 대학문화를 생생하게 목격하게 됐단다. 최루탄 냄새를 직접 맡게 됐고 막걸리의 맛도 경험하게 됐지만, 가장 충격으로 그의 가슴에 새겨졌던 건 바로 ‘광주의 사진’이었다고 한다. 모든 언론이 통제되던 시절, 광주 학살현장의 사진은 대학 캠퍼스 안에서만 볼 기회를 접하곤 했던 게 당시의 현실이었다.

  그 참혹한 사진들 앞에서 떠오른 한마디는 바로 ‘이게 뭐야?’ - 그래서 그의 손에는 누나와 형이 읽던 책들이 쥐어지기 시작했고, 당시 학생들이 집중적으로 파고들던 책들을 직접 구입해서 읽게 됐다고 한다. 그런 과정이 지속되면서 그의 가슴에는 사회변혁과 사회운동에 대한 열망이 구체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단다. 열심히 해야 되겠다는 것, 목숨을 걸더라도 최선의 운동을 해야 되겠다는 것! 그런데 그런 열망이 어떻게 구체화됐다는 것일까?

 ‘장애해방’ 그리고 ‘자립생활’

 “저는 운동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쓰일 데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어요. 가족에게도 부담이고 친구들한테도 부담이고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비극이고 절망이고 분노라는 그런 마인드였는데…, 운동을 만나게 되니까 세상에 대한 기여와 가치와 신념 같은 것들이 있는 거고, 그런 것들이 바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거라는 게 확신으로 다가왔던 거예요. 완전히 스펀지가 물을 단번에 빨아들이듯이 정말로 그랬어요. 그래서 목숨을 걸고 하겠다고 다짐했죠.”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미래를 고민하던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는데, 성인의 나이가 됐을 때 그는 공장에 들어가게 됐단다. 노동력 착취라는 말이 당연시되던 시절에 그는 전자부품을 조립하는 공장에 들어갔고, 선배들과의 교류 속에서 자신만의 운동과 그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상황에 마주쳤단다. 체력적으로 감당이 안 됐다는 것, 체력이 안 돼서 공장 생활과 운동을 할 수 없다는 건 그에게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그 상황을 선배들은 이해를 못하더라고요. ‘네가 신념이 부족해서’ 이런 식으로 평가를 해버리는데…, 그때는 평가들이 다 혹독했잖아요. 그래서 정말로 좌절했습니다. 좌절하고 절망적이었어요. 처음의 현장에서 좌절하고 꺾여버리니까 참혹한 절망감을 느끼게 됐죠.”

  그런 절망감으로 얼마간 방황하고 있을 때, 시민조직에서 활동하던 친구 하나가 같이 하자는 제안을 해왔단다. 장애운동이라는 개념이 막 태동하던 무렵, 정확히는 1989년 전후로 그에게 새로운 삶이 열리게 된 셈이다. 그래서 정말로 열심히 했단다. 1년에 200회나 집회에 참석할 만큼, 비장애도 어려운 집회활동을 그는 신념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참가하게 됐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운동에 대한 모든 이론과 실천이 몸 자체에 체내화되었고, 뒤에서 조용히 있기보다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가는 운동을 직접 실천하게 됐단다.

   

  “그런 과정 중에서 ‘장애해방’이라는 말을 듣게 됐어요. 그 네 글자가 완전한 전율로 다가왔다고나 할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저 자신이 너무나 웃긴 인생을 살아왔다는 게 느껴졌어요. 주체니 아이덴티티니 이런 얘기를 많이 하던 시대에, 저는 정작 장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냥 분노만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그때 선배들은 항상 이런 발언을 쏟아내곤 했잖아요.‘인간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체제에서 기생적 소비계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장애민중이 이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해체할 수밖에 없다’ 등등의 논리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런 논리에 일방적으로 젖어 있던 시기에 듣게 된‘장애해방’이라는 네 글자, 그건 저 자신의 본질을 비로소 쳐다보고 확인하게끔 만들었죠.”

  지금의 관점으로 본다면 단순한 네 글자인지는 몰라도, 당시의 상황에서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충격으로 다가왔단다. 집회 때 외치는 구호 중에 그 네 글자가 있었는데, 듣는 순간 귀에 박히고 온 몸에 전율이 흘러내렸다는 것! 그래서 ‘인간을 상품화하는 어쩌고’의 논리가 아니라 그의 인생에는 ‘장애해방’이라는 최대화두가 등장하게 됐는데, 그는 그 즉시 짐을 싸들고 투쟁의 풍찬노숙(風餐露宿)의 길로 자신을 맡기게 됐단다. 반팔을 입고 투쟁을 시작했는데, 투쟁을 마치고 나니 눈이 내리더라는 전설을 그 스스로가 실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찾아오게 된 건 ‘자립생활’이라는 또 하나의 인생화두이다.

  친구의 몫까지 함께

  “저는 중앙단체에 계속 있었어요. 울림터, 장총, 전장연 등에 계속 있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저한테는 타는 목마름이 있었어요. 뭐냐 하면 ‘장애운동의 현장은 어디냐?’는 것이었어요. 노동자는 공장이 있죠. 농민에겐 토지가 있고 학생한테는 학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장애인은 어디서 장애대중을 만나야 되는 거냐는 거죠. 가장 열악한 환경에 있는 분들은 시설에 계시고, 지역사회에 산다 한들 치료의 대상으로 낙인이 찍혀서 만날 재활재활 하면서 산다는 건데… 게다가 복지관이라는 구조 자체는 권리의 구조로 보기엔 힘든 측면이 있는 거잖아요. 도대체 어디서 장애인들을 만나고 조직화하고 운동을 이끌어야 하나 고민하면서 생활도서관이니 노들야학이니 하는 조직사업을 건설하고 지부조직들도 건설하며 열심히 지냈는데, 그랬는데도 갈증이 풀리지 않는 거예요. 초미의 관심사가 없다는 거였죠.”

  노동운동은 임금이 있고, 농민운동은 추곡수매가가 있다. 학원은 등록금 투쟁과 학원 자주화 같은 이슈가 있어서, 등록금을 올릴수록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이 점점 더 분리되는 악순환을 깨기 위한 투쟁이 있었는데, 장애운동의 현장은 어디에 있고 초미의 관심사라고 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갈증에 목말라 하면서, 그는 장애인청년학교라는 조직을 운영했단다. 이 부분에서 반드시 언급돼야 할 인물이 바로 정태수 열사인데, 이상호 씨에게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뜨거운 가슴을 나눴던 동료이자 친구였단다. 그와 함께 장애운동의 내부모순을 극복하고, 권리를 확보할 수 있는 청년활동가들을 양성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계속 했다고 한다.

  “운동은 필수적으로 조직이 있어야 하고, 조직이 필수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재생산구조가 있어야 하잖아요. 이게 없으면 아무리 멋있는 이슈를 던져도 어느 순간에는 고사되거든요. 괴멸되고 말죠. 그래서 저는 현장하고 재생산에 대해서 고민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러니까 이슈는 언제나 탄탄한 조직만 있으면 언제든 치고 나갈 수 있다고 본 거죠. 그게 연금이든 장차법이든 그건 전략적 판단의 문제인 거고, 그것의 생명을 유지하고 강화하려면 재생산구조가 있어야 되는 거죠. 태수는 계속 조직부 활동을 했었어요. 제겐 환상의 파트너였는데…, 청년학교 때 태수가 과로사로 죽었죠. 아…, 그때 태수가 3월 2일에 죽었는데, 그의 아들이 그해 4월에 태어났어요. 아내가 만삭이었을 때였죠.”

  몸이 부서지는 고통과 함께, 거의 반년 동안 하루 평균 7,8병의 소주를 비워야 했단다. 피를 토하면서도 소주를 들이켜야 할 절망의 나날이었는데, 선배들이 보기에는 저러다가 사람 죽겠다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절대로 가지 않겠다는 일본행(行)을, 태수의 자리를 대신해서 갔다 오라는 제안과 함께 받아들이게 됐단다.‘태수가 죽었으니 네가 대신 가라.’ 떠나간 친구의 몫까지 책임지며, 그는 일본에 가서 연수를 받게 됐다고 한다. 그때 만난 게 무엇이었을까? 바로 ‘자립생활’이다.

  불꽃의 주인공은 바로 당신입니다

 “일본에 가서 자립생활을 배우게 됐는데, 그때 정말 제대로 깨닫게 됐어요. ‘아, 이 생각을 못했구나. 하는, 그러니까 장애인 전달체계의 내부모순을 생각 못하며 지내왔던 거예요. 어쨌든 간에 자본주의만 해체되면 한방에 해결될 것처럼 생각했었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준해서 어떤 내부의 오염들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확인하지 못했던 거죠. 그게 바로 시설이고 재활이었습니다.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재생산구조를 가질 것인가?’ 그게 자립생활센터를 보면서 딱 꽂힌 거예요. ‘아, 재생산의 중심과 공간은 지역사회이겠구나. 그리고 전략적 조직화 목표는 최중증장애인들이겠구나!’ 이게 확신으로 다가왔던 거죠. 그래서 돌아온 다음부터 집에만 있던 1급 중증장애인들을 청년학교를 통해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 양천에서 10년 가까이 활동을 했는데, 휠체어 3대가 들어가면 꽉 차는 공간 안에서 자립생활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단다. 활동보조인이니 자립생활센터니 뭐니 하는 개념도 없던 시절 그는 그 곳에 깃발을 꽂고 시작했는데, 거기서 정말 많은 역사들이 만들어졌다고 자평하곤 한단다. 그런데 그 대목에서 궁금한 점이 생겼다. 아무리 그게 옳다고 해도 그것을 실제 실천하기까지는 난관이 많았을 게 아닌가. 어떻게 확신을 얻게 됐다는 건지, 그 중간지점의 속내가 알고 싶어졌다.

 “저는 좀… 저한테는 그런 게 있어요. 저는 되지 않아도 되게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무조건 돌파해야 한다는 그런 근성이 제겐 있거든요. 집착이 남달리 강하고, 뭔가를 생각했다면 그게 이뤄져야 해요. 될 때까지, 될 때까지 계속 생각하고 계속 끊임없이 밀고 가는 그런 게 제겐 있고 그렇게 살아왔죠. 제 생각은 이래요. 테러든 의거든 간에, 그것이 성공하는 건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 믿습니다. 집념, 집중, 집착이에요. 그 세 가지 화두를 가지고 있다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저는 확신해요. 그리고 그게 저 개인을 위해서, 저 혼자 잘 살기 위해서 하는 거라면 문제가 있겠지만, 전체 공익을 위한 목표라고 한다면 활동가는 거기에 목숨을 걸어야 해요. 자기가 죽든가 그걸 만들던가, 그 둘 중에 하나예요. 그게 바로 활동가의 존재의미입니다.”

  시의회 의원 이상호가 아닌 인간 이상호를 만나기 위한 자리였기에 정치적인 내용은 뒤로 접어놓았지만, 그래도 의정활동에 임하는 자세 정도는 묻고 싶었다. 특히 장애당사자로서 정책입안과 추진은 어떤 기조를 중심으로 삼고 있을지 또한 궁금했다. 그런데 편안했던 그의 얼굴이 일순간 진지하게 굳어지면서, 단호한 손짓과 함께 또박또박 자신의 견해를 드러냈다. 아마도 의회 본회의장 단상에서 발언을 한다면, 이런 표정과 몸짓과 음성으로 다른 의원들 앞에 서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현재도 주류운동을 하는 분들이 장애운동에 대해선 아주 희미한 인식을 가지고 있어요. 아니면 인식 자체가 없거나. 그래서 민중민주운동 어디를 봐도‘장애’라는 문제는 안 나오죠. 그냥 사회적 약자라는 용어 안에 파묻혀 있잖아요. 저는 진보운동을 하시는 분들께 이런 말씀을 종종 드립니다. 진보가 무식하면 죄악이라는 겁니다. 대한민국에서 최소한도로 잡아도 8백만이라는 인구집단이 장애당사자나 그 가족으로 매일 이 문제를 겪고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대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건 말이 안 되죠. 보수도 불쌍한 장애인 도와주자고 하고 진보도 불쌍한 장애인 도와주자고 하는데, 그럼 그것 말고 진보가 그 다음에 덧붙여 주장할 수 있는 게 뭔가. 무엇이 진보이고 진보적인 정책이라는 게 도대체 뭔가를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진보운동을 한다면서 탈시설이 뭔지 모른다면, 장애인자립생활운동이 뭔지 모른다면, 활동보조가 뭔지도 모른다면, 8백만에서 1천만 국민이 매일 고통 받는 그 중차대한 문제를 모른다면, 그건 진보를 표방할 자격이 없는 거죠.”

  위에서도 언급하며 적었지만, 우리가 이 지면을 통해 알고 싶었던 건 의원 이상호가 아닌 인간 이상호였다. 오늘의 그가 그동안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가려진 시간의 기록들을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기대 이상으로 많은 걸 알게 된 것 같았다. 화려한 언변의 수사가 아닌, 인생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정말 치열하게 살아왔다는 것. 그리고 그 누구에게 보여주려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목표를 뚜렷이 갖고 중단 없이 정진하는 실제 모습을 가감 없이 고백했다는 점에선 일면 감사의 마음 또한 떠올랐다.

  자신이 살아온 길이 있다면, 이젠 동료나 후배들을 위해 새로운 촛불과 나침반이 되어야 할 일 아닌가. 작은 불빛이라도 누군가에겐 등대가 될 수 있고, 인간 이상호의 한마디 속에 그 희망을 담아둘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물었다. 인간 이상호의 입장에서 독자 여러분께 전하고픈 한마디를 짧게 정리한다면 무엇을 언급할 수 있겠느냐고. 그는 그런 입장이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그가 방금 했던 고백을 인용하며 다시 물었다. 될 때까지 계속 질문하겠다고. 그랬더니 웃음과 함께 그의 독백이 흘러나왔다. 이 글의 마지막에 담고 싶었던, 꼭 이런 내용으로 듣고 싶었던 발언이 그에게서 전해진 것이다.

 

   
“저는 한 명의 뛰어난 리더는 수천수만의 장애인 당사자들의 가슴에 불꽃을 일으킨다고 생각을 해요. 제도니 정책이니 이런 건 나중의 문제이고, 결국에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건 사람이거든요. 사람. 그렇죠. 장애인 정책, 당신들이 원하는 그 무엇,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변화시키는 건 당신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당신이 뛰어난 리더가 되면, 당신을 통해서 수천수만의 가슴에 열정과 신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해요. 여성이 남성을 보면서 리더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요. 그렇잖아요. 동성(同性)이 뛰어난 여성일 때 ‘나도 저거 한번 해봐야겠다’. ‘나도 저 사람처럼 되어봐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잖아요. 민족이든 그게 계층이든 계급이든 뭐든 간에. 장애인 당사자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당신이 주인공이라는 거예요. 제가 말씀을 드렸잖아요. 당신이 죽든가 아니면 이 목표를 달성하든가 이렇게 치고 나간다면 당신의 그 모습을 보며 수천수만의 장애당사자, 당신의 후배들의 가슴에 불꽃을 일으킨다고요. 저는 그게 운동이라고 봐요.”
작성자글·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cjm8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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