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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 번째 인생을 새롭게 살고 있다

[만난 사람] 오랜 만에 방송활동 재개한 영화배우 이영호

본문

잘 알고 지내던 ‘누군가’가 어느 시점부터 눈에 띄지 않으면, 그의 근황을 알고 싶다는 궁금증이 증폭되는 법이다. 그런데 10년이 넘도록 궁금증만 남겨놓던 그 ‘누군가’가 지난 해 옴니버스영화 ‘마스터클래스의 산책’의 주인공으로 홀연히 나타나더니, FM라디오 진행자 자리에 앉아 예의 그 환한 웃음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가 누구인가? 7,80년대 청춘영화의 대표적 얼굴이었던 영화배우 이영호 씨, 그가 독자 여러분 앞에 다시 인사를 올린다. 그를 만나 오랫동안 밀렸던 반가운 대화를 함께 나누기로 한다. 

 

   
 

월간 <함께걸음>의 필진으로도 함께하시다가 어느 순간 홀연히 잠적하셨는데, 이게 정말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지면(誌面)을 통한 재회를 반가워할 독자님들이 많으실 것 같다

<함께걸음>과 다시 만난다고 하니, 오랜 옛 친구와 재회를 한 느낌이다.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시리라 믿는다. 반갑고 또 반가운 마음이다.

현재 FM라디오에서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시는 걸로 알고 있다

다시 방송 일을 하게 돼서, KBS 제3FM의 ‘우리는 한 가족’ 진행을 맡고 있다. 작년 11월 초부터 시작했으니까, 시간상으로는 얼마 되지 않은 셈이다.

방송 진행이 처음은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1995년부터 2000년까지 EBS 프로그램을 했던 게, 나의 마지막 방송 활동이었다. 당시 프로그램 타이틀이 지금과 엇비슷한 ‘사랑의 한 가족’이었다는 게 나름 인상에 남는다.

당시와 지금의 프로그램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지금 하는 것과 편성은 거의 비슷했다. 둘 다 장애인 대상 종합 프로그램인 건 같은데, 지금 하고 있는 ‘우리는 한 가족’의 성격이 조금 다른 건 시각장애인 대상의 특화된 방송이라는 점이다. 하나의 장애를 중심으로 하다 보니까, 더 구체적인 내용을 담으며 진행된다.

장애의 한 유형을 중점으로 하는 방송 프로그램이 진행된다는 건 새로운 시도인 것 같다. 어떤 내용이 주로 다뤄지는가

각 단체에서 펼치고 있는 행사들을 소개하고, 특정한 정보를 전하는 고정 코너가 몇 개 있다. 지금은 서울맹학교에 오래 계셨던 한 선생님이 나오셔서, 각 계절마다 필요한 안마 방법을 소개해 주고 계신다. 또한 ‘센스리더’라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드는 회사의 팀장이 나와서, 정보화시대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지식을 가르쳐 준다. 스마트폰과 SNS 및 트위터 사용법을 자세히 설명하며 진행한다. 오락적인 내용도 하고 있는데, 지금은 드라마와 영화의 화면 해설을 함께 하고 있다.

      라디오에서 드라마와 영화를 어떻게 설명한다는 건가

화면 해설 중심이니까 기본적으로는 소리로만 나간다. 방송의 드라마, 특히 주말드라마 중심으로 내용을 발췌해서 설명과 함께 진행한다. 그렇게 ‘우리는 한 가족’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 체제로 방송을 하고 있다.

KBS 제3FM이 출범한 건 작년 4월이라고 알고 있다. 청취자들의 반응은 어떤가

3FM 자체가 아직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진 않은 것 같다. 그래도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청취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있어서, 라디오뿐 아니라 인터넷을 통한 청취자들도 늘어나고 있다고 들었다. 그래도 이 코너가 벌써 8년이 된 장수 프로그램이다. 예전엔 나도 자주 출연한 적이 있었다. 새롭게 출범한 제3FM 체제라서 아직은 시작 단계지만, 방송국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니까 앞으로는 더 나은 방송 환경이 만들어질 거라고 기대한다.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시는 게, 1995년부터 2000년까지 EBS 방송을 진행한 이후 최근 KBS에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그 사이 기간에 어떤 생활을 하며 지내셨는가 하는 점이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아무 일도 안 했다. 경남 통영에 가서 낚시와 독서를 하는 일 이외엔, 거의 밖에 나오지 않으며 지냈다.

대단히 조심스러운 질문이 되겠는데, 10년 가까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게 어떤 심경의 변화 같은 걸 의미하시는 건가

그 얘기를 하면 길어지겠지만…, 당시 EBS 방송 5년을 하면서도 의미를 찾지 못했다. 나의 장애가 심해지면서, 개인적으로는 스스로의 의욕을 더 이상 찾지 못했다고 말씀드리는 게 낫겠다.

그렇다면 2000년부터 최근까지 통영에 계속 계셨다는 건가

중간에 간혹 왔다갔다 오가기도 했지만 통영의 미륵도라는, 육지와 아주 가까운 섬이면서도 연륙교로 연결되어 있는 곳의 시골집에서 혼자 지냈다.

거기서 혼자 지내셨다는 건가? 가족과 떨어져서 지냈다면, 일상적인 식사 이런 건 어떻게 하셨다는 건가

내가 혼자서도 밥은 잘 해먹는 거 몰랐나? (웃음) 가족은 가끔씩 오가며 찾아왔다.

그렇다면 민감한 질문이 될 텐데, 통영에서의 일상은 무엇이었나

어선 하나를 구해서 낚시를 했다.

낚시라는 게 먹고 사는 문제, 그러니까 호구지책(糊口之策)은 아니었을 게 아닌가

당연히 호구지책이 될 순 없는 일이고…. 그런데 그것도 힘들어져서 2005년에 잠시 서울에 왔는데, 마침 컴퓨터 교육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걸 열심히 배웠다. 시력을 잃은 이후로 책을 봤다는 게 녹음 도서뿐이었다. 여성 자원봉사자들이 읽고 녹음한 그 책들이 전부였는데, 그것만으로는 너무 큰 한계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2005년에 교육을 받은 이후로는 집에서 매일 두세 권씩 책을 들으며 지냈다.

   
 

책을 들었다는 건 리더기 프로그램을 사용하셨다는 말씀인가

그렇다. 시력을 완전히 잃기 전까지는 확대독서기로 책을 봤었는데, 그건 눈이 너무 아파서 제대로 읽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을 만나게 돼서, 지금 방송도 이 프로그램의 도움을 아주 많이 받고 있다.

그 프로그램에 대해서 잠시 소개해 주시면 좋겠다

‘센스리더’라는 프로그램이다. 전체로는 스크린리더기라고 한다. 스크린을 읽어주니까 스크린리더기인데, 이 회사에서 만든 상품 이름이 센스리더인 것이다. 직접 보면서 설명하는 게 낫겠다. (가방에서 노트북 컴퓨터를 꺼냄) 이걸로 책을 읽고 인터넷도 하고 방송 진행도 한다.

그럼 일반 책들도 다 볼 수 있다는 건가

txt 파일이면 다 된다. hwp와 같이 워드로 된 파일이면 모두 가능하다. (부팅이 끝나고 프로그램이 실행됨) 이제 내가 어떻게 방송을 하는지 설명해드리겠다. 지금 나오는 소리가 바로 오늘 녹음한 방송 내용이다.

소리가 너무 빠르다. 정말 굉장히 빠른데 이걸 듣고 이해할 수 있다는 건가

우리는 이렇게 들어야 한다. 시각장애가 아니라면 무척 빠르다고 느껴지겠지만, 우리는 소리에 집중하며 듣기 때문에 내용이 전해진다. 물론 속도를 느리게 바꿀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눈으로 읽는 대신 소리로 들으면서 말(방송)을 해야 하기 때문에, 짧게 끊으며 음성정보를 듣는 게 편하다.

이 프로그램이 개발되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 같다

당연하다. 이 상품이 2002년에 처음 나왔다는데, 당시엔 엉성한 시스템이었다고 한다. 지금과 같은 성능으로 진작 나왔더라면, 내가 공부고 뭐고 다 포기할 필요가 없었을 게 아닌가. 대학 교수도 됐을 텐데, (웃음) 이게 2005년에야 나왔다는 게 아쉽다. 생각해보면 정말 아쉽다. 하지만 나뿐만 아니라, 이 센스리더의 뒤늦은 등장에 아쉬움을 느끼는 분들이 정말 많을 것이다.

이걸로 어떻게 방송을 하신다는 건지, 그 과정을 소개해 주시면 좋겠다

여기가 스튜디오는 아니지만,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 그 모습만 설명드리겠다. 지금 들리는 이 음성정보가 마이크로 들어가면 안 되지 않은가. 그래서 이 소리를 듣기 위한 작은 이어폰을 먼저 귀에 꽂는다. 그 다음 그 위에 방송용 헤드폰을 쓴다. PD와 대화를 나누기 위한 건데, 그것이 이어폰 소리가 밖으로 새나가는 걸 어느 정도 막아준다. 그 다음에 키보드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키보드를 치는 소리가 마이크로 들어가면 안 되니까, 테이블 밑에 내려놓고 아주 조용히 사용해야 한다.

너무 복잡하다. 이렇게 해야만 시각장애인들이 방송을 할 수 있다는 건가

정말 복잡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물론 점자를 하는 사람들은 좀 편할 것이다. 그냥 읽으면 되니까.

그럼 점자는 전혀 모르시는 건가

나는 거의 모른다. 중도실명자들은 점자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읽기가 어렵다. 쓰는 건 쉬운데, 어렸을 때부터 배우지 않았다면 손끝이 이미 굳어버려 읽는 일이 무척 어렵다. 그래서 처음 방송을 시작했을 때 방송국 측에선 엄청 긴장했었다고 한다. 점자 아닌 컴퓨터로 방송을 진행한다는데,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확신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시행착오 과정을 거치면서, 이렇게 이어폰 소리를 가리는 법과 키보드 소리를 줄이는 방법 등을 찾게 된 셈이기도 하다.

      죄송한 질문인데, 실명한 지가 얼마나 되신 건가

거의 14년 정도 됐다고 봐야 한다. 혼자 다닐 수 없게 된 게 그 정도 됐다. 그 전까지는 혼자 다니는 게 가능했었는데… 이젠 불가능하다. 빛 정도만 느껴진다.

그럼 EBS 방송을 하실 때는 약간이라도 보이는 상태였나

그때는 크게 확대하는 기계를 가지고 했었는데, 그것마저 불가능해져서 방송을 그만두게 됐다고 말하는 게 낫겠다. 확대독서기로도 더 이상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 사정이 그렇게 진행된 것이다.

중도실명인데 점자도 사용하지 못한다면 어려움이 많을 것 같은데

요즘은 컴퓨터로 대신할 수 있으니까, 정보 면에서는 큰 어려움이 없다. 물론 점자를 잘 하면 훨씬 더 편리할 수 있겠지만, 실상 점자책이라는 게 그렇게 많이 만들어져 있지도 않다. 거의 종교 분야밖에 없다고 봐야 한다. 거기에 학교 교재 역시 어느 정도 갖춰져 있지만, 사람이 그것만으로 살 수 있겠나.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했을 때 영화배우로 활동하셨는데, 당시 배우 활동은 어떻게 하셨던 건가

시력이 안 좋다는 건 어렸을 때부터의 일이지만,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던 건 40대가 된 이후였다. 야맹증이 아주 심했지만, 그래도 낮에 활동하는 데는 큰 지장을 받지 않았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를 촬영했을 때가 1981년도인데, 그때만 해도 혼자서 다닐 수 있었다.

영화 일을 중단한 다음에는 어떻게 지내신 건가

미국에 가서 공부를 했다. 나중에 비평도 하고 싶었기에, 대학원에서 석사까지 마쳤다. 내가 <함께걸음>에 기고를 연재하던 시기가 바로 그 즈음일 것이다.

그럼 원하던 학업을 다 마치고 돌아오신 건가

1989년에 돌아온 건 공부를 다 끝내고 온 게 아니라, 불편하고 힘들어서 어쩔 수 없이 돌아오게 된 거다. 책을 못 보니까 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너무 단순한 질문이 되겠는데, 안 보이는 상황에서 제일 힘든 건 무엇인가

혼자 못 다니는 거다. 다른 건 별로 없다. 혼자 못 다닌다는 것. 내 자유의사대로, 내 의지대로 어딜 다닐 수가 없지 않은가.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다닐 수가 없다는 게 가장 힘든 일이다.

그렇다면 요즘 방송국 활동 이외의 일상은 어떻게 보내고 계시는가

개인적인 일상이 없을 만큼 이 방송 준비에 꼼짝을 못하고 있다. 내가 원고를 써서 진행하는 게 있다. 작가를 통하는 게 아니라, 내 생각과 내 얘기를 직접 적어야 하는 내용이다. A4지 1장 분량이지만, 그게 5분 정도의 방송을 차지한다. 이게 방송 앞쪽에 중요한 부분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회분을 적느라고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다.

6회분을 직접 적으신다면, 정말로 일상적인 여유가 없으실 것 같다

게다가 방송국을 매번 나와야 하지 않은가. 여기에 매달려야 하기에, 지금은 거의 월급쟁이로 살아가는 것 같다. (웃음) 하지만 오랜만에 하는 방송이라서 재미있고 보람도 많이 느낀다.

오랜 기간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는데, 방송 진행은 어떻게 맡게 되신 건가. 제의가 먼저 들어온 건가

거의 집에서만 지내고 있을 때 어느 단체에서 연극을 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래서 재작년 4월부터 시작해서 그해 연말에 산울림 무대에 연극을 올렸다. 그런데 이 ‘사랑의 한 가족’에서 인터뷰 제의가 들어온 거다. 그래서 인터뷰를 했는데, PD가 보기에 말을 제법 잘하는 것 같고 예전 경력도 있으니까 프로그램을 같이 하지 않겠냐며 제안을 했다. 그래서 팝송의 가사를 해설하는 코너를 20분 정도 진행했는데, 그러다가 프로그램이 개편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을 맡게 된 거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영화배우 이영호가 실명 때문에 대중 앞에서 사라지게 된 걸, 정말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었다. 어떤 면에선 무기력한 은둔의 10년을 보내신 셈이기도 할 텐데, 방송을 통해 이렇게 다시 뵙게 되니까 <함께걸음> 입장에선 누구보다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인생이 참 재미있는 게, 요즘 내 친구들이 나를 무척 부러워한다. 이 나이에 누가 일을 시키겠나. 친구들 대부분 은퇴한 지 5,6년 됐기 때문에, 일을 다시 시작하는 내가 부럽다고 다들 한마디씩 한다.

실례지만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데 은퇴 얘기가 나오는가

내가 임진 생이니까 올해가 딱 환갑이다. 다들 50대인 줄 아는데, 이젠 지나간 세월을 생각할 나이가 됐다.

      전혀 그렇게 안 보인다. 항상 밝은 표정으로 지내시니까 더더욱 젊게 보이는 것 같다. 비장애의 기간도 있었지만 지금은 장애를 갖고 살고 계신데, 평소 생활하시는 데 남다른 느낌 같은 게 많으실 것 같다

사회 환경과 장애 전반에서 많은 것들이 정말 좋아졌다고는 하는데, 아직도 일상에서는 긍정적인 면이 나타나지 않는다. 무슨 얘기냐 하면, 예를 들어 다른 나라에서 화장실에 가면 상대방은 나의 입장을 단번에 알아차린다. 그러면 소변기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 준다. 이게 일상적인 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런 게 없다. 여기가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이라는 여의도이고, 지식이나 인식적인 면에서나 가장 앞선 이들이 가득하다고 말할 수 있는 방송국 아닌가. 그런데도 일상적인 도움이 없다. 나는 그런 걸 바라는 거다. 자연스럽게 도와주는 거, 그 자연스러운 사회를 원하는 것이다.

함께 어울려 사는 사회를 바라시는데, 우리 또한 그 대목이 가장 아쉽기도 하다

여담이겠지만, 내가 지하철을 못 탄다. 예전에 열차가 들어오는데 정말 떨어질 뻔했다. 죽을 뻔했다는 거다. 그 다음부터는 절대로 못 타게 됐다. 정말 끔찍했다. 그때도 곁에 사람들이 적잖게 있었을 게 아닌가. 그런 면이 여전히 아쉽기만 하다.

마무리 차원의 질문이 되겠는데, 이 땅에서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시는 그 입장을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자.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산다는 게 쉬운 일이겠나. 하지만 나는 뇌병변장애를 가진 분들 앞에선 꼼짝을 못한다. 그 분들 앞에서 내가 어떻게 장애가 있다고 말을 하겠나. 신체적으로 불편해서 이동의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이 계시지만, 어떤 면에서는 시각장애는 오히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때도 있다. 손만 잡으면 다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 같은 중도실명일 경우는 더욱 그렇다. 선천적으로 실명인 게 더 낫지 않겠느냐고 얘기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건 말이 안 되는 얘기이다. 그래도 나는 인생의 절반을 보면서 살지 않았나. 그 나머지 반을 보지 않고 산다고 해서 그렇게 큰 문제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생각하고 받아들이기 나름인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난 인생을 두 번 사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항상 긍정적인 면을 바라보려 노력한다. <함께걸음> 독자 여러분도 긍정의 힘과 함께 생활하고 살아가시길 기대한다.

 

작성자대담 이태곤 기자 정리·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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