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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잘할 수 있는 ‘그것’이 자신의 인생입니다

[인터뷰]의수(義手)화가 석창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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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예술문화인대상 미술부분 수상(2013), 대한민국 신창조인대상 수상(2012), 2011년을 빛낸 도전한국인상(2012), 자랑스런 한국장애인상(2011),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상(2008)…. 개인전 36회(해외 12회 포함), 그룹전 230여 회(해외 31회 포함), 시연(관객이 보는 앞에서 직접 작품을 만드는 작업) 136회(해외 41회 포함)….
위의 간략한 약력 소개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인물인지가 거의 다 드러나는 것 같다. 혼자 있으면 가장 단순한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게 단 하나도 없다는 사람. 하지만 붓 하나만 잡으면 전 세계를 놀라게 하고 세상 모든 걸 자신만의 필체로 화폭 위에 펼쳐놓는 사람.‘의수(義手)화가’라는 호칭으로 더욱 유명한 석창우 화백이 이번 만남의 주인공이다. 모든 걸 초월한 듯 여유 있고 의연한 그의 언어와 몸짓 안에는 얼마만큼의 힘이 내공으로 담겨 있는지를 들여다봤다. 그 만남의 시간을 여기에 옮긴다.

 

   
 

Q _  정말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해오셨고 지금도 하고 계신다. 선생님께 남겨진 목표가 뭔지 먼저 듣고 싶어진다
작품 작업을 하면서 개인전을 핑계로 세계 여러 나라를 가봤다. 그러다 보니 세계일주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지금까지 일본, 중국, 독일, 프랑스, 영국, 대만, 미국 등지에 다녀왔는데….

Q _  (답변 도중에) 그 정도면 이미 세계일주를 다 하신 게 아닌가
(웃음) 세계 각지에 엄청 많은 나라들이 있더라.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는 적어도 100개국 정도에선 개인전을 하고, 그걸 기회로 삼아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Q _ 미술에는 여러 장르가 있는데, 지금의 화풍을 선택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
처음 그림을 배우려 할 때는 일반적인 색감을 사용하는, 일반인들이 그리는 것과 같은 걸로 배우려 했다. 그런데 여러 화실에 갔더니 양팔이 없어서 다양한 물감을 다루기 힘들다고 하고, 게다가 양팔이 없는 사람을 가르친 적이 없으니 안 되겠다는 대답만 계속 들었다. 그게 반복되다 보니 생각을 달리 하게 됐는데, 문득 서예가 떠오르더라. 문인화 같은 걸 보면 먹 하나만 사용하지 않는가.

Q _ 그럼 사고 이전에는 붓을 잡아본 적이 없었다는 말씀인가
(미술 전공이 아닌 석창우 화백은 전기기술자로 근무하던 1984년 10월 29일 낮, 전기시설 점검 중 차단시킨 차단기 선 하나가 고장 나서 다른 선에 접촉되는 바람에 22,000볼트의 고압전류에 감전되어 일주일 만에 의식을 되찾았지만, 두 팔과 오른쪽 두 발가락을 절단해야 했다.)

그렇다. 사고 이전에는 붓하고는 완전히 거리가 멀었다. 미술은 아예 모르던 공대 전기공학과 출신이다. 다치고 난 이후 어느 날, 4살이던 아들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다. 아들이 원하던 그림을 완성해 준 뒤 그걸 계기로 혼자 그림을 그리게 됐는데, 주위에서 계속 그림을 해보라고 했다. 그래서 사군자를 떠올리게 됐고, 먹 하나로 가능한 서예를 시작하게 됐다. 서예가 어느 정도 진행되던 때 누드 크로키(croquis : 밑그림을 그리듯 빠르게 스케치하는 미술 방식)를 접하게 됐다. 다른 사람들은 다 겉모양만 그리고 있더라. 당시 내 생각으로는 붓으로 일필(一筆 : 붓에 먹을 다시 먹이지 않고 한 번에 내리 쓰거나 그리는 행위)하면 더 좋지 않겠나 싶어 관심을 갖고 시도하게 됐다. 모델의 움직임에서 삼라만상이 다 몸으로 표현되더라. 그걸 계기로 지금의 내 장르인 서예 크로키가 만들어지게 됐다.

Q _  선생님 이전에는 그 장르를 개척한 분이 안 계셨나
자신의 작업 과정에 잠깐씩 이 방식을 응용했던 분들은 몇몇 계셨던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장르 자체로 작업하신 분들은 없었던 것 같다.

      Q _  선생님의 여러 글과 말씀을 정리하다 보니, 하나의 가정(假定)이지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에 당시 4살이었던 아드님이 그때 그림을 그려 달라 하지 않았다면, 그래도 그림의 인생을 사셨을지 여부가 개인적으로는 궁금했다
그랬으면 아마 안 했을 수도 있었을 거다. 지나온 모든 과정을 곰곰이 생각해 봤던 적이 있었다. 어떻게 해서 내가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그런 생각을 길게 하다 보니까, 내가 교회를 다니는데 이 모든 건 하나님의 프로그램이 아닐까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몸이 다치고 나면 다들 어렵고 힘든 기간을 보낸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게 하나도 없었다. 다치고 나서 퇴원하고, 새 삶을 바로 시작하다가 아들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고, 그래서 그림을 그리게 된 모든 과정들이 정해져 있는 순서대로 밟아나가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지나고 나서 보니까 그게 답인 것 같았다.

Q _  질문 드리기가 좀 조심스러운데, 사고 이후에 좌절 같은 게 정말로 없었다는 말씀인가
그렇다. 그게 없었다. 기자 분들이나 저에 대해 궁금증을 가진 분들이 그 질문을 하면 내 대답은 똑같다. 그래서 다들 거짓말 하지 말라고, 지금 괜찮은 상황이 됐으니까 거짓말 하는 게 아니냐고 하는데, 정말로 그런 과정 같은 게 없었다. 물론 아내가 잘해줬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맨바닥에 떨어진 사람은 오르막길 내리막길이 있다는데, 나는 그런 것 없이 서서히 좋아졌던 것 같다. 그림도 그렇고 경제적인 것도 정말 서서히 좋아졌다. 

Q _  당시 4살짜리 아드님께 뭘 처음 그려주셨나
참새를 그려줬다. 아이가 동물도감을 즐겨 봤는데, 거기에 있는 참새를 아주 가는 수성펜 같은 걸로 그렸다. 하루 종일 하다 보니까 정말로 그려지더라. 의수로는 작은 건 표현 못한다. 크고 넓은 건 하기 좋은데, 작고 세밀한 걸 하려면 굉장히 힘들다. 팔꿈치 위까지 없다 보니 세밀한 건 못한다.

Q _  아드님이 정말 기뻐했을 것 같다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그 당시에 애들이 커가면서 ‘너희 아빠는 양팔도 없는데 아무것도 안 하냐?’ 하는 그런 소리를 듣기보다는, 양팔이 없어도 뭔가를 하는 아빠로 비춰지기를 바라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뭔가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아들이 그림을 부탁한 거였다. 모처럼의 부탁이라서 이건 꼭 해줘야겠다 싶어 하루 종일 했는데, 몸이 정말 엄청 힘들었다. 아주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휙 삐져나가지 않나. 손가락이 있는 상태로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런데 그걸 딱 하고 나니까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잘 그리고 못 그리고를 떠나서, 시간이 많이 걸리긴 했지만 아들의 부탁을 내가 해냈다는 거, 그건 엄청난 즐거움을 내게 안겨줬다.

Q _  그 장면이 연상되는 것 같다. 혹시 그 첫 그림을 지금도 보관하고 계신가
있다. 그건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Q _  종교적인 힘도 말씀하셨지만, 사고 이전보다 더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건 사실 쉬운 일이 절대 아니다. 구체적인 어떤 계기 같은 게 따로 있었던 건 아닌가
내 경우는 아들을 계기로 그림을 택하게 됐는데, 단적으로 얘기한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가 내겐 그림이었던 모양이다. 예전에 회사 다닐 때는 먹고 살기 위한 생활 과정이었는데, 그림이라는 건 그 자체가 너무 재미있었다.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게 참 좋았다.

      Q _  그렇다면 ‘이건 내 것이다’ 하는, 다시 말해 그림이 내 인생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되신 건 언제였는가
내가 그리는 그림 방식을 다른 사람들은 못 그리겠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한테 그림의 뭔가가 있는 건가’ 싶었다. ‘이게 나의 새로운 길이다’라는 걸 느끼게 됐다는 거다. 나는 손목과 팔꿈치가 없다 보니까 몸 전체의 움직임으로 해야 한다. 누드 크로키만 해도 다른 이들은 손목과 손가락으로 작은 부분을 세밀하게 묘사하지만, 나는 몸으로 붓을 움직여 표현하다 보니까 선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연필이나 펜이 아니라, 나는 먹으로 하지 않는가. 그러다 보니까 다른 이들이 따라오지 못하고, 흉내를 낸다 해도 그런 선이 안 나오게 됐다. 그런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만의 화풍이 만들어지게 된 것 같다. 초기에는 유명한 화가가 되겠다든지, 아니면 대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단지 양팔이 없지만 뭔가를 하는 아빠로 존재하고 싶다는 그 목적만 있었는데, 그 목적으로만 계속 진행했던 건데 10년이 지나며 작품들이 쌓이다 보니까 개인전을 한번 하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됐고, 그렇게 지내다 보니까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다. 

Q _  참 많은 선생님들께 사사(師事 : 스승으로 섬기며 배움을 얻음)를 받으신 것 같다. 그런데 꼭 필요한 시기에 꼭 필요한 누군가가 선생님 곁에 존재했다는 인연 또한 간과할 순 없을 것 같다
맞다. 그래서 앞에 언급했듯이 하나님의 프로그램이란 걸 떠올리게 됐다는 거다. 꼭 어떤 시기가 되면 그런 좋은 사람이 나타났다. 좋은 선생님들을 만났고 좋은 모델들도 만났다. 좋은 모델들이 꼭 내 눈앞에 있는 이들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내가 스포츠 선수들의 동작을 그리기 시작했던 건, 동계올림픽에서 미셀 콴이라는 중국계 미국인 선수가 등장했을 때였다. 그 선수의 경기 장면을 보는데 정말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하면서 경기에 임하는 걸 보며, 그 역동성을 내 작업에 도입시켜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내 작품 작업에 ‘역동성’이라는 게 대입되고 등장했던 게 그때였다. 정말 훌륭한 모델들은 연이어 내 앞에 나타났다. 지금은 김연아 선수라는, 정말 세계 최고의 절정기를 누리고 있는 모델이 내게 있는 것 아닌가.

Q _  그렇다면 전 세계의 모든 유명 선수들과 인물들은 전부 다 선생님의 모델로 존재한다는 의미 같은데
(웃음) 맞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은 절정기를 맞고 있는 이들인데 그들을 보며 작업을 하고, 그들의 몸동작에 감흥을 받으며 준비하다 보면 내 작업에서도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다.

Q _  김연아 선수의 경우를 예로 들며 질문 드리겠다. 몇 분 동안 진행되는 경기 장면 전체를 보며 작품을 구상하신다는 건가. 아니면 경기 중간마다 정지화면으로 중단시킨 뒤, 주요 장면의 그 역동성을 살펴보신다는 건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실사단이 왔을 때는 동영상을 틀어놓고 시연을 했다. 물론 요즘은 좋은 사진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참고를 하긴 하지만, 대부분은 동영상을 보며 구상을 한다. 계속 틀어놓고 계속 바라보며 관찰을 한다. 어떤 때는 몇 달 동안 같은 동영상만 계속 볼 때도 있다. 그러면 그 동작 자체가 완전하게 파악이 되면서, 그때부턴 표현하는 게 굉장히 쉬워진다. 

Q _  선생님께서 인터넷에 올려놓으신 여러 자료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적이었던 건 선생님께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스스로 직접 밝혀놓으셨다는 점이었다. 그게 어떤 면에서는 참 힘든 고백이 아닐까 싶기도 했는데, 일상생활에서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은 다 활용하고 계신다는 사실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게 굉장히 쉬운 건데 사람들이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다. 지금 현재에서 과거가 있고 미래도 있다. 그런데 과거의 것을 가지고 있으면 절대 안 된다. 내가 손이 있을 때를 생각할 순 있지만, 그건 지금의 내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순간, 그러니까 내게 팔이 없으면 없는 순간에서부터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하며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를 보면 과거에 자신이 잘했던 것들을 찾고 있다. 그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거기에 부딪치다 보니까 스트레스만 받고 힘들어지는 게 아닌가. 내 경우는 뒤
(과거)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미련도 두지 않고 앞으로 부딪쳐서, 내가 할 수 있는 길을 먼저 찾는다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라는 거다.

      Q _  참 좋은 말씀이고 새겨들을 가치가 분명히 있는데, 실제 세상의 현실은 그게 아닌 것 같아 아쉬운 심정이다
아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내 경우로만 말씀드린다면, 지금 당장은 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할 수 있겠다 하는 걸 항상 생각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전각(篆刻)이라고, 서예를 하다 보면 돌에 낙관을 파서 찍는 게 있지 않은가. 나는 다른 작업을 하면서도,  그걸 5년 동안 내내 생각을 했다. 오랜 생각 끝에 얻은 결론은 ‘가능하겠다’는 것이었다. 계속 집중하면서 다른 이들이 하는 걸 보니, 나도 할 수 있겠다는 답을 얻었다. 그래서 전각으로 낙관을 직접 만들었다. 하니까 되더라는 거다. 단지 시간이 많이 걸렸을 뿐이지, 안 된다고 미리 포기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다. 

Q _  참 좋은, 참 진솔한 말씀을 편하게 전해 주셔서 감사드린다. <함께걸음> 독자 여러분께 선생님 마음을 전달하는 의미로 마지막 한 말씀을 남겨주시면 좋겠다
잘 하는 것 하나에 집중하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만약에 두세 가지가 좋다면, 결국 선택을 해야 하지 않겠나. 잘하는 것만 집중적으로 최선을 다해서 나의 것으로 만든 다음에 다른 것을 봐도 늦지 않다. 나는 가야금도 칠 수 있게 됐다. 말이 안 된다고 하던데, 나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까 새로운 방법론이 생긴 거다. 다 가능하다. 대신 좋아한다는 열 가지 스무 가지를 가지치기부터 해야 한다. 내 것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이렇게 같이 앉아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맙고 행복한 일인가. 나는 그림 말고는 숟가락 하나 들지 못한다. 모든 게 고마울 뿐이다. 가장 잘할 수 있는 ‘나의 것’을 먼저 찾으면 답이 온다. 그게 인생이다.  

 

작성자글•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dung7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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