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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은 인생길로 나는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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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2년 10월 31일자 주요 일간지 1면에는 한 여성이 격하게 오열하는 모습과, 그를 달래려는 다른 여성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이 커다랗게 새겨져 있었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거행된 영결식에서 추도사를 읽어야 했던, 게다가 2014년 봄에도 또 다른 영결식장에서 새로운 추도사를 다시 읽어야 했던 비운의 운명은 잔인했다. 자신이 책임을 지고 있던 지역 자립생활센터 안에서만 두 건의 화재사고로 인해, 절친했던 동료들을 연이어 잃어버려야 했기 때문이다.

연이어 숨을 거둔 이들의 이름은 故 김주영 씨와 故 송국현 씨, 그리고 그 추도사를 읽어야 했던 인물은 이번 호 주인공이 된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 최진영 씨다. 그가 투쟁의 현장에서 가장 앞장서는 이유도, 센터 구성원인 동료들과 우애를 돈독히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유도, 상주(喪主)의 입장을 겪어야 했던 아픔의 치유책이 아닐까 싶다.

최진영 씨의 삶을 들여다본다. 인터뷰 형식의 긴 대화를 나누기 힘든 현실적 여건 때문에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질문과 답변을 진행했고, 생활 주변에서 마주칠 때마다 부연설명을 직접 들으며 이 글을 정리했다. 힘든 손길로 자판을 일일이 누르는 게 정말 어려웠을 텐데, 참 고맙게도 그는 충분한 분량의 진솔한 의견을 전해주었다. 그가 보내준 모든 문장의 활자들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참 고맙다’는 인사를 이 지면에 직접 남겨놓는다.

나의 고향, 그 바닷가

“저는 배를 타는 게 직업인 아버지, 그러니까 어부의 딸로 태어났어요. 어머니는 시어머니를 잘 모시고 아들 셋을 잘 키우는, 당시 동네에선 효부로 불리던 분이셨대요. 부모님께 소박한 바람이 있었다면, 아들 셋이 있으니 딸 하나 더 낳아서 예쁘게 키우는 것이셨대요. 그래서 딸인 제가 태어났는데, 생후 5개월 만에 장애로 판명이 났대요. 저는 1972년 음력 7월생인데, 주민등록상에는 1978년생으로 되어 있어요. 장애를 가진 딸이 일찍 죽을 것 같아서 출생신고를 하지 않고 있으셨대요. 그러다가 오빠들 교육 문제로 서울로 이사하게 됐는데, 그때까지 나름 잘 성장한 저를 그제야 출생신고하게 됐다고 들었어요.”

‘어부의 딸’이라는 한마디가 긴 여운을 남긴다. 일상생활에선 거의 듣기 힘든, 대신 문학의 범주 안에선 감성적 언어로 자주 등장하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릴 때의 기억은 어디까지 남아 있을까? 살던 집이라든지 주변 동네의 풍경, 또한 마을을 둘러싼 자연환경 같은 건 어땠는지를 기억하고 있을까?

“지금은 칠포해수욕장이라고 부르죠. 경상북도 포항의 넓은 바닷가 가까운 곳에 집이 있었어요. 집 밖으로 나가면 모래가 있고 바다가 있었죠. 아주 어릴 때의 기억이 남아 있는 거라면 대청마루에 있던, 우리가 흔히 누렁이라고 부르던 개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그가 말하는 곳이 어느 지역인지 알 것 같다. 대한민국의 지형을 특정 동물의 모습에 비유할 때, 항상 꼬리 부분이라고 지칭하는 지역이 있다. ‘호미곶 해맞이광장’ 등으로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장소가 그 곳인데, 그 위쪽인 포항 영일만항 바로 위에 칠포해수욕장이 있다. 해발 100미터 내외 정도가 될 낮은 산들 몇몇이 둘러싸고 있는, 대신 바닷가의 풍경은 ‘굉장히 광활하다’고 묘사해야 할 만큼 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는 그 곳이 최진영 씨의 고향이라는 것이다.

“태어난 지 생후 5개월이 지나도, 제가 고개를 가누지 못하며 비실비실했대요. 그러던 와중에 심한 고열로 인해 병원에 갔더니, 그때 장애라는 진단을 처음 받게 됐던 모양이에요. 대도시의 병원이 아니니까, 정확한 장애명칭을 받은 건 아니겠지만…. 보행은 전혀 못했대요. 걸음마 연습을 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하셨다는데, 아이한테 다리 힘이 없으니 주저앉는 게 전부였다는 거예요. 최소한의 언어 사용은 언제부터 했을지, 글쎄요. 그건 자세하게 들은 적은 없어요. 그래도 처음 발음한 단어는 아마도 ‘엄마’였지 않을까요?”

불편함 그 자체인 세상

어린 시절의 ‘나’는 무슨 생각을 주로 하는 어떤 아이였다고 기억하고 있을까? 그는 당시의 생활환경이 많이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좋아했던 것들이 참 많았어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 그 빛줄기가 실내에 펼쳐지는 게 너무 좋았어요. 하늘에 떠 있는 하얀 구름의 모습들도 너무 좋았죠. 라디오를 듣는 게 최고의 취미였어요. 당시 라디오의 음악방송 중에서 ‘제3세계의 음악세계’인가? 그런 이름으로 기억되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요. 그 방송에서 늘 들려주던 샹송을 들으면서, 프랑스라는 나라를 가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꿈으로 간직하며 지냈었죠.”

하지만 안타까운 현실 같은 것들도 똑같이 기억한다고 했다. 호적을 늦게 올린 탓에, 그에게 초등학교 입학통지서가 날아든 건 12살의 나이가 됐을 때란다. 남들은 중학생이 될 연령에 날아든 통지서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당시 가정 상황은 학교 등록 자체가 힘들 만치의 형편이었기에 학교를 들어가진 못했단다.

“마음이 두고두고 참 아팠던 건요. 저도 재잘재잘 떠들며 또래 친구들과 얘기하며 놀고 싶었는데, 그럴 여건 자체가 마련된 적이 전혀 없었다는 거예요. 저의 오빠들이 ‘예쁜 누이’라며 귀여워해 준 건 맞지만, 그래도 저는 매일 오빠들과 어울리고 싶었는데도 오빠들끼리 따로 놀며 저를 배제했던 게…, 글쎄요. 그게 마음 아픈 기억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긴 해요. 저도 늘 함께 있는, 함께 어울리는 생활을 하고 싶었거든요.”

그렇다면 집안 내부가 아닌, 바깥의 세상으로 눈을 뜨게 됐던 건 언제가 처음이었을까?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라고 한다. 정기적으로 밖에 나오게 된 건 임대아파트로 이사를 한 다음부터란다. 서울로 상경한 지 22년 만에 남의 집 셋방이 아닌 ‘우리 집’이 생겼기에, 주인집 눈치도 안 보고 목욕도 자주 할 수 있게 돼서 정말 좋아했던 기억이 떠오른다고 한다. 장애인복지관이라는 곳을 알게 되어 간단한 컴퓨터 교육을 받으면서, 비로소 제대로 된 외출이라는 걸 하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깥세상은 딱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불편함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지하철을 타는 게 일상생활이 됐지만, 처음 지하철이라는 걸 탔을 때의 그 기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날짜도 기억이 나요. 2003년 1월 초에 집에서 나와 장애인복지시설인 정립회관에 가려고, 난생 처음 지하철을 이용하게 됐어요. 그런데 막상 밖으로 나가서 보니, 바깥세상은 모든 게 만만치 않았어요. 당시 제가 살던 지역의 지하철역에는 엘리베이터는 고사하고 리프트도 없었기 때문에, 한 정거장을 거슬러 올라가서 타야 했어요. 그런데 그 역까지 가는 길 중간엔 인도(人道)마저 없는 언덕길이 있었거든요. 부득이 찻길을 이용해야만 했는데, 저처럼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입장에선 그 길을 오고가기가 너무 벅찼어요.”

그렇게 정거장 하나 길이의 거리를 거슬러 올라가도, 역 내부로 들어가는 과정은 난관의 연속이었단다. 모든 게 이동을 막는 턱이었다는 것, 그래서 같이 동행해 주던 이들의 고생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가까스로 아차산역이라는 역에 내리면, 거기부터 목적지인 정립회관까지의 길은 고난의 여행길이다. 그 길을 역순으로 다시 거치며 집까지 돌아가는 과정 또한 고행이긴 마찬가지다. 그게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속 이어졌다 하니, 당시의 상황을 연상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이 답답해진 듯하다. 불과 십여 년 전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상황이 실제 그랬다는 것이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

그렇다면 장애인권운동에 본격적으로 동참하게 된 계기는 언제 생겨났을까? 2002년이었던 것 같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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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10월 31일 거행된 故 김주영 씨의 영결식에서 헌화를 마친 최진영 씨가 오열하고 있다. 이미지 왼쪽으로 언론사 카메라들이 몰려 있는 모습이 보인다.

다. 집에 있다가 이동권투쟁이라는 화면을 방송뉴스로 봤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생각 없이, ‘저 장애인들은 왜 저렇게 싸울까?’ 하며 궁금증만 떠올릴 정도였는데, 그해 가을에 전화 상담을 통해 알게 된 정립회관과, 동료상담 및 자립생활 기술훈련을 배우고 난 뒤부터는 세상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가 지하철이라는, 이동편의시설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을 몸으로 경험했던 그 시기와 일치하게 된다.

“제가 거리투쟁의 현장에 처음 도전했던 건 2003년 420장애인차별철폐의날로 기억해요. 정말 비가 세차게 쏟아진 날이었어요.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면서, 경찰 병력에 둘러싸인 저의 모습이 생소하게 다가왔어요. 물론 당시엔 약간 무섭기도 했지만, 아마도 저도 모르는 운명의 시간이 그때부터 돌아가기 시작한 게 아닌가 싶어요.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제가 있다는 분노 같은 걸 느꼈거든요.”

정립회관의 자조모임에서 열심히 활동하다 보니, 소모임의 리더 역할까지 맡게 되면서 점점 더 세상 속의 현실에 다가가게 됐단다. 대중교통인 지하철을 이용하기 위해 자기 동네가 아닌 다른 동네까지 30분 넘게 이동해야 했던, 눈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그의 표현 그대로) 참 꼴이 말이 아닌 상황을 매번 맞으면서 절감하게 됐던 건 무엇일까? 바로 이동권투쟁의 당위성이었단다.

“그래서 그 투쟁에 동참하게 됐어요. 직접 이용하면서 느꼈던 절절한 불편함뿐만 아니라, 선배님들이 처절하게 싸워서 얻은 성과에 무임승차하기가 싫어서 정말 열심히 활동했어요. 처음 이동권투쟁에 동참했던 건 ‘장애인도 버스를 타자!’라고 외치며,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좁은 버스 출입문으로 휠체어에 앉은 채로 비집고 승차하던 때였죠.”

그리고 지하철의 한 구간을 막아서 휠체어를 탄 동료들이 일렬로 승차하며, 우리가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를 외치며 유인물을 나눠 주는 투쟁도 같이 시작했단다.

“잠시 멈춘 시간이 비장애인들에겐 잠시의 불편함이었겠지만, 장애를 가진 우리들에겐 몇 십 년 동안 정지됐던 시간이고 북받쳐 오르는 설움이라고 외쳤어요. 곱게? 글쎄요. 곱게 봐주는 시민은 없었죠. 무심하게 쳐다보는 시민들은 차라리 괜찮은데, 원색적인 욕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어요. 그런데 그 상황보다 더 기억에 남아 있는 거는요. 휠체어에 앉아 있는 상태에서 경찰들이 저의 휠체어를 들고 그 긴 출입구 계단 위로 옮겨놓을 때였어요. 아, 정말 비참했어요. 수십 개가 넘는 계단을 한 계단씩 경찰들의 손에 들려 옮겨진다는 건, 말 그대로 짐짝 취급을 당하는 느낌 그 자체였거든요.”

이 글을 읽는 많은 독자들은 당시의 상황이 어땠는지를 기억하고 계실 것이다. 정말 그랬다. 지하철을 타러 역까지 가는 길도 물론 험난했지만, 막상 역 출입구 앞에 도착해도 내려갈 방법이 없었다. 동행하는 이가 있어 등에 업고 휠체어를 접어 옮긴다면 모를까, 혼자였다면 그저 꽉 막힌 세상 앞에서 멈춰 있어야 할 뿐이었다. 역무원을 불러도 난감한 표정만 짓고, 역무원 여럿이 와서 이동을 도울 경우에도 ‘왜 나왔느냐’, ‘그냥 집에 있는 게 낫지 않느냐’는 원망 섞인 질문을 듣기 일쑤였다.

“그런 기나긴 투쟁 끝에 각 역마다 엘리베이터 설치가 시작됐잖아요. 우리의 싸움으로 얻어낸 엘리베이터인데, 지금은 어르신들이 서로 먼저 타려고 우리에겐 양보도 하지 않아요. 그런 광경을 대할 때마다, 솔직히 속으로는 쓴웃음이 나오죠.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설치해달라고 그 긴 시간 싸울 때는, 어르신들이 욕하면서 우리들에게 손가락질만 했잖아요. 짐짝처럼 들려서 계단을 오르내리는 참담한 수모를 겪으면서 싸울 때 당신들은 우리한테 뭐라고 했었는지, 그걸 속으로 물어보게 되는 거예요.”

꿈을 향해 나아간다

200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대한민국 장애인권운동에는 중요한 변환점이 등장한다. 자립생활운동의 씨앗이 뿌리내린 것이다. 최진영 씨 또한 정립회관에 자조모임 형식으로 만들어진 ‘한국자립생활네트워크’에서 활동하다가, 함께하던 이들이 각각 자신의 거주지역에 자립생활센터를 설립하고 지역활동을 시작하는 데 동참했다고 한다. 우리 지역에 장애인들이 살고 있음을 알리고 권익옹호활동을 하면서, 동정과 시혜의 대상이 아닌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이라는 인식을 심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단다. 서울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그렇게 탄생하고 크게 성장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장의 역할을 오래 맡고 있는데, 그에게 있어서의 보람은 무엇이 있는지를 물었다.

“센터 소장으로서의 보람이라기보다 활동하면서 느낀 건, 활동보조투쟁을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 투쟁을 하면서 삭발과 단식을 여러 번 해서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밖으로 나온 장애인들이 많아졌고, 특히 장애아이를 둔 부모님들이 조금이나마 숨을 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어서 그게 보람으로 느껴지고 있어요. 물론 아쉬운 점이 더 많죠. 지역활동을 나름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장애인을 보는 시각은 변하지 않아요. ‘언어장애가 있으면 인지능력도 떨어진다’는 식의 편견은 바뀔 줄을 모르죠. 지역 내에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점도 아쉬움이 많아요.”

그에게는 꼭 만들고 싶은 세상이 있단다. 모든 장애인, 특히 중증장애인이 밖에 나와도,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걸 못 느끼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계속할 거란다. 이 대목에서 대화의 방향을 돌려봤다. 장애인권운동과 상관없이 개인적인 한 인간으로서, 한 여성으로서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여성으로서 평범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해서 아이도 키우고, 소소한 행복을 그리면서 가정을 꾸미고 싶었죠. 하지만 적은 나이가 아니라서, 이젠 ‘그렇게 살고 싶었다’는 생각만으로 접어두고요. 앞으로 저의 삶을 위해 더 나이 들기 전에 대학에 갈 준비를 다 마무리하고, 국문학을 전공하며 정식으로 공부하고 싶어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갈 거예요.”

국문학? 최진영 씨의 언어 표현이 많이 다듬어진 형태라는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의 희망 전공이 국문학과라는 건 처음 알게 됐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갈 거라 했는데, 원래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세상에 나온 이후로 장애인권운동에 몸을 담고 있지만, 젊은 시절까지 막연하든 구체적이든 뭐든 간에, ‘무엇’이 되고 싶다는 자신만의 장래희망은 분명히 있었을 것 같았다.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구체적으로는 시인이 되고 싶었죠. 15살 때인가? 오빠가 사준 시집을 읽고 막연하게 시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됐어요. 그때는 제가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고 여겼지만, 그래도 꿈 하나는 갖고 있어야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글 쓰는 작가를 떠올리게 됐죠. 당시엔 감수성이 풍부한 사춘기 때였으니, 나름 글도 잘 써졌다고 할까요? 사회활동을 하면서도 무언가를 계속 적게 될 때가 종종 있어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제 이름으로 된 책 한 권을 내는 게 개인적인 저의 큰 꿈이에요.”

‘최진영 소장’이라는 직함 대신 ‘최진영 시인’이라 부르게 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막연한 희망사항이 아니라 상당히 구체적인 의지를 담고 있기에, 그의 말 표현 그대로 ‘개인적인 저의 큰 꿈’은 몇 해 안에 반드시 실현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고 싶은 자신의 길, 뚜렷한 삶의 길이 존재한다는 건 분명 행복한 일이다. 장애인권운동현장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는 모습만큼, 문인의 길을 걸으며 하나씩의 작품을 세상에 펼쳐놓게 될 그의 내일을 미리 응원한다. 꼭 그렇게 되리라 믿으며, 그의 시 작품 한 편을 올린다. 우리 모두가 ‘최진영 시인’의 작품을 읽는 첫 독자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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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바다

최진영

바다 내음을 맡으며

지금 나는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이제는 희미해

낡은 서랍 속

빛바랜 일기장이 된

갈 수 없는 시간 속에

한 아이가 있다

 

노란 고무신을 갖고 있던 아이

그러나 그 노란 고무신을

한 번도 제대로 신지 못했던 아이

 

한 손은 어디 숨기고

한 손으로만 모래성을 쌓던 아이

그래서 한 번도 제대로 쌓지 못해

그 애 몸처럼

힘없이 금방 쓰러졌던 모래성

 

재잘재잘 말을 하고 싶었던 아이

 

어디를 갈 때는 언제나

어른들 등에 업혀야 했던 아이

 

그 아이가 따뜻한 사람들의 손길로

기억 속

저 편에 있는 삶의 조각을 찾아와

따뜻한 사람들의 눈을 바라보며

그리운 바다의 숨결을 느끼고 있다.

(2002년 9월 어느 날)

글·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작성자채지민 객원기자  gypsy729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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