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할머니들의 희망을 꽃피우는 ‘희움’ > 함께 사는 세상


위안부 할머니들의 희망을 꽃피우는 ‘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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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oming their hopes with you(그들의 희망을 당신과 함께 꽃 피움)’라는 문구가 팔찌에 새겨져 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선명한 색감의 이 팔찌는 단순한 악세서리가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활동과 위안부 역사관 건립 기금 마련을 위해 탄생한 일종의 기부 아이템이다. 아기자기한 아이디어로 대중들의 일상에 인권 문제를 스며들게 한 장본인, ‘희움’을 만나봤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의 상징 ‘의식팔찌’

2013년, 황금시간대에 방영되는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남자 아이돌의 손목에 걸려있던 보라색 실리콘 팔찌가 화제가 됐다. 연예인이 착용한 옷이나 악세서리 등에 대한 관심은 일상적인 일이었지만 해당 연예인의 이미지에 도움이 된 경우는 드물었다. 당시 화제를 모은 팔찌는 바로 희움의 ‘의식팔찌’였다. 덕분에 희움과 해당 연예인인 비스트 양요섭은 윈윈 효과를 체감했다. 의식팔찌를 판매하는 희움 사이트는 방문자 폭주로 마비 상태에 이르렀고 양요섭은 개념 있는 아이돌 이미지를 얻었다. 위안부를 지원하는 단체에서 판매하는 팔찌를 착용하는 것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는 평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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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움 팔찌

이후에도 희움의 의식팔찌를 구매했거나 착용한 것을 인증하는 이들이 종종 나타났다. 연예인부터 민간인까지 퍼져나간 의식팔찌 구매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을 표시하는 일종의 상징이 됐다.

인권 문제에 집중해 운동을 추진하고 피해자를 지원하는 시민단체들은 많지만, 상품을 통해 상징성을 만들어내는 것은 흔하지 않다. 유명 포털 사이트에서 ‘위안부’를 검색하면 그 아래로 곧장 ‘위안부 팔찌’가 뜨는 것만으로도 그 상징성과 대중의 관심을 짐작할 수 있다.

팔찌를 기획하고 제작한 시작점에는 희움과 고려대 블루밍 프로젝트(이하 블루밍)의 만남이 있었다. 고려대 블루밍 프로젝트 팀이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을 발견하고 위안부 문제 해결 방법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안정적인 수입원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다. 블루밍과 시민모임은 위안부 문제 해결이라는 주제 범위 내에서 재정적 자립 방법을 모색했다. 블루밍은 청년사업 프로젝트 공모전에서 받은 상금 오백만원으로 제작할 수 있으며 위안부 문제 관련 문구 삽입이 가능하고 홍보 효과가 큰 아이템으로 팔찌를 선택했다.

팔찌로 시작한 희움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압화 작품을 이용한 다양한 상품을 제작해 사랑받고 있다. 유성 희움 사업국장은 “운영상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우연히 블루밍을 만나 여기까지 왔다. 의식팔찌에서 시작한 사업이 이제는 브랜드 런칭까지 하고, 많은 관심을 받아 시민모임에서 건립하고자 했던 위안부 역사관의 밑거름이 됐다”며 희움을 찾는 발걸음들에 감사를 표했다.

 

용돈 쪼갠 청소년들이 세운 역사관

희움의 판매수익금은 1차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건립기금으로 사용된다. 희움 사무실 인근에 위치한 역사관은 현재 외관을 완성하고 내부 전시물 마련이 막바지에 이르러 있다. 희움의 성장이 역사관 건립 추진의 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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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움의 성과 중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역사관 건립이다. 역사관 건립 사업은 초반 부지 매입 등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희움이 성장하면서 속력이 붙었다. 희움의 상품들을 가장 많이 구매하는 연령층인 청소년들이 역사관을 건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팔찌 구매에 앞장선 것은 용돈을 쪼갠 청소년들이었다. 게시판에 글을 올리거나 희움 사무실로 걸려오는 문의 전화도 대부분 청소년들이다. 고등학교 내 역사 동아리 등을 통해 위안부 문제를 접하거나 뉴스 등 이슈화 된 위안부 문제를 보고 희움을 찾는다. 의식팔찌는 개별 구매 외에도 공동 구매 방식으로 퍼져나갔는데 공동 구매를 처음 시작한 것도 청소년들이었다.

위안부 문제를 인식한 한 고등학교 동아리 학생들이 교사들에게 희움 팔찌 공동구매를 제안했고 학교 측의 동의 하에 각 반마다 찾아가 팔찌의 의미를 설명하고 공동구매 신청을 받았다. 동아리 학생들의 노력은 전교 1,100명의 학생들이 총 1,200개가 넘는 팔찌를 구매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시민모임 이인순 사무국장은 그 이후로 공동구매건이 줄을 이엇다고 말했다.

“당시 그 학생들이 너무 기특해 평소 알고 지내던 기자분께 스토리를 들려줬더니 기사화가 됐다. 기사가 나간 후로 학교 축제 등 특별한 행사때 위안부 문제 홍보 캠페인과 함께 팔찌를 판매하는 방식이 트렌드처럼 확산됐다. 현재도 같은 방식으로 공동구매를 진행하는 학교들이 많다. 덕분에 역사관 건립이 잘 추진된 만큼 개관이 되면 많은 청소년들이 우리 역사관을 찾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희움은 팔찌 등 희움의 물건들이 위안부 문제를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이자, 위안부 문제에서 더 나아가 여성인권과 평화에 대한 인식의 확장을 가능케 하는 씨앗이라고 여긴다. 때문에 역사관 건립 후에도 희움의 수익금은 온전히 위안부 문제 해결과 위안부 문제 교육 등의 활동에 거름이 될 예정이다.

 

순결한 소녀만이 위안부 피해자 아냐

위안부 문제는 2007년 위안부 결의안이 채택된 후로 보편적인 여성인권의 문제로 확장됐으며 2011년 헌법소원 판결 이후에는 정부의 태도도 조금씩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2011년 헌법소원에서 헌법재판소는 ‘국가의 부작위는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고 이는 국가의 책임을 지적하는 결과다.

시민모임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위안부 문제를 안고 가는 요즘, 긍정적인 한편 일부 우려되는 부분에 대해 고민을 안고 있다. 위안부 역사관의 개관이 늦어진다는 언론 보도에도 서두르지 않고 전시 내용에 신중을 기하는 것도 그와 연관이 있다. 시민모임 이인순 사무국장은 획일화된 위안부의 이미지를 벗어나 다양한 위안부를 드러내는 내용까지 전시 내용에 포함시키고자 한다고 밝혔다.

“역사관을 세우는 과정에서 고민한 측면 중 하나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위안부의 이미지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이냐는 문제다. 위안부 문제가 이슈화 되면서 단 하나의 이미지가 위안부를 아우르고 있다. 잔인한 일본에게 끌려가 장기간 위안부로 희생 당한, 어리고 순결한 단발머리 소녀인 우리의 누이. 이 이미지가 계속해서 생산되고 유통되는 것이 걱정스러운 이유는 그 범주에 속하지 않은 피해 여성들이 모두 소외되기 때문이다. 위안부 피해자는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자면 기혼자였던 여성, 소녀의 나잇대를 벗어난 여성, 일회적으로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 등이 있다. 우리는 다양한 위안부 피해 여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전시라는 형식 안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하나하나 풀어내진 못하겠지만 최대한 획일적인 이미지를 피해야 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인권 문제는 당사자의 목소리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위안부 문제는 한시가 급하다. 시민모임은 지리적 조건상 대구경북 지역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지원하고 있는데 2015년 현재 살아있는 인원은 고작 5명이다. 5명 중 위안부 운동 활동을 지속할 정도로 정정한 할머니는 한 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고령으로 인한 건강악화와 치매 등 당사자로서 목소리를 높이기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시민모임은 교육을 중요하게 다룬다. 위안부 문제의 진실과 현재, 다양한 피해자들의 이야기와 역사적 사건이 피해자 개개인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린다. 위안부 문제를 과거사로 치부하지 않고 현재의 것으로 여길 수 있도록 노력하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희망을 계속해서 전달하고 있다.

 

<희움 압화 작가 소개>

김순악 (1928~2010)

1928년 경북 경산군 남천면, 가난한 소작농의 삼남매 중 첫째 딸로 태어났다. 16살, 동네 할아버지가 대구 실푸는 공장에 가면 돈도 많이 벌고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집을 찾아왔다. 아버지도 자꾸 동네 여자아이들이 잡혀가니 대구로 나가 취직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 경산을 떠났지만, 이후 중국 장가구 시골마을 위안소에서 생활했다. 해방 후 광복군의 도움을 받아 탄 기차가 중국 땅 어디선가 멈췄고 한 달을 걸어 평양에 도착했다.

1950년 고향 경산에 돌아와 첫째 아이를 낳았고 그 해 여름 한국 전쟁이 일어났다. 동생들의 학비와 아이들을 키울 생활비를 벌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일흔이 다 되가는 나이에도 먹고 살려면 내 몸을 움직여 일을 해야 했다. 추운 골방에서 홀로 품앗이 일이나 취로사업으로 일당을 받으며 생활했고 일거리가 없을 때면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2000년 일본군위안부피해자로 등록했다.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이 생겼다. 한국과 일본에서 내 경험을 말하는 자리가 이어졌다.

2005년 심리치료프로그램 원예수업을 통해 꽃 선생님을 만났고 꽃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만났다. 2009년 12월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 입술이 부풀고 양발에 부기가 빠지지 않았지만 회복 후 병실에서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2010년 1월 2일 아무도 없는 밤, 홀로 잠들었다.

 

심달연 (1927~2010)

1927년 경북 칠곡군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열두살 무렵 언니와 함께 산나물을 뜯으러 갔다가 일본군에게 잡혀 대만의 위안소로 끌려갔고 그곳에서의 폭행과 정신적 충격으로 오랫동안 기억을 잃었다. 해방 후 모르는 사람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절에 버려졌고, 우연히 절을 찾은 여동생이 말도 제대로 못하던 나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가 지극정성 간호하여 호전이 되었지만 여동생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 뒤 혼자서 조카손주를 키우며 평생 살아왔다. 1993년 8월 일본군위안부피해자로 등록을 했고 피해 후유증으로 자궁경부암 수술을 했다. 일본과 한국에서 수차례 증언 활동을 했다. 2003년부터 시작한 심리치료프로그램 원예수업 이후 ‘꽃을 사랑하는 심달연’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플로리스트로 활약했다.

2007년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LA세계대회 기간 중에는 미국 UCLA 대학의 전시회에서 내 작품을 보여주게 되어 기뻤다. 2010년에는 한중일 공동기획 평화그림책 시리즈인 나의 이야기를 담은 ‘꽃할머니’를 출판해 책 헌정식을 갖기도 했다.

2010년 6월 간암으로 입원했고 12월 5일 조카와 시민모임 회원이 함께한 자리에서 눈 감았다.

작성자조은지 기자  simhye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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