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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막 시집와서 애 둘 낳고 살때가 좋았어요"

근이양증 장애우 주재옥

본문

                           "막 시집와서 애 둘 낳고 살 때가 좋았어요"
                          - 근이양증 장애우 주재옥 -

자신이 근이양증 장애를 가지고 있고, 두 아들마저 근이양증 장애를 가지고 있는 주재옥씨 일가는 무척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두 아들이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주재옥씨. 그의 소망은 언제나 이루어질 것인가.

▲주재옥씨와 아들 훈희,충희

 근이양증(筋異養症) 장애를 가지고 있는 주재옥씨가 사는 곳은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 태평리 일백팔십육번지에 있는 전세 삼백만 원짜리 셋방이었다.
 여주 못 미쳐 태평리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상가 밀집지역을 따라 내려오다가 오른쪽으로 난 골목길로 꺾어들어 걸음을 옮기자 얼마 안가 그이가 살고 있는 곳에 다다를 수 있었는데 허름한 단층 기와집, 그 중에서도 구석진 방에 그이가 있었다. 그이는 이곳에서 삼년째 살고 있다고 했다.
 세평 남짓한 좁은 공간, 방문을 밀고 들어서자 역설적이게도 살아있는 것은 저 혼자 떠드는 텔레비전뿐인 것 같았다. 두 소년은 텔레비전을 마주 보고 벽에 기대어 흡사 정물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고, 그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장애상태는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소말리아의 굶주린 아이들이 곧바로 연상될 정도로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 심해 보였다.
 물론 아이들이 굶주림 때문에 다리와 팔이 말라깽이가 된 채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근이양증 장애에 대한 사전 지식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으면 바로 이 장애 증세가 아이들에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아직까지는 치료약이 개발되지 않고 있는 희소한 유전 장애로 근육세포를 형성하는 디스트로핀 영양 결함으로 근육 세포 재생력이 상실되어 근육이 위축되기 시작하면서 지체장애아를 가지게 되고, 더 진행되어 관절이 구축되면 걷지를 못하게 되어 주저앉게 되고, 앉아서 폐쇄된 생활을 하다 보면 어느새 전신이 일그러지고 무력해져 누워버릴 수밖에 없는 장애, 그러다가 몸이 쇠진해질 대로 쇠진해져 결국은 심폐기능에서조차 근육이 빠져나가 사망에 이르는 무서운 장애가 바로 근이양증 장애가 가지고 있는 특성인 것이다.
 주재옥씨의 큰아들 훈희는 올해 열다섯 살이다. 훈희는 초등학교 이학년 과정을 다니다가 장애 때문에 그만두어야 했다. 그 후 훈희는 육년을 방안에서만 지냈는데 최근 들어 장애가 급속도로 진행돼 이제는 혼자 힘으로 움직을 수조차 없어 주재옥씨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고 있다.
 훈희는 일년을 통털어 많아야 두 세 번  바깥외출을 한다. 엄마가 다니는 성당도 침대식 휠체어가 없어 다니지 못하고 있다. 움직이는 것이 힘드니까 나머지 시간을 방안에서 책도 보지 못하고 그냥 텔레비전만 쳐다보고 있다. 그럼에도 훈희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는다. 누구나 언젠가 죽을 텐데 무슨 걱정이냐고, 고통 없이 가면 행복하지 더 무얼 바라느냐고, 비관하면 한도 끝도 없으며 그래서 오늘만 생각하고 살지 내일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훈희는 말한다. 그 표정이 너무나 당당해 혹시나 있을지 모를 그 말 바닥에 깔린 진한 아픔을 헤아리는 것 자체가 훈희에 대한 모독으로 생각될 정도다.
 "그래도 엄마랑 사니까 재미있다"는 훈희. 훈희 앞에서는 누구나 할말을 잊을 것이다. 주재옥씨의 둘째 아들 충희(열두살)는 훈희보다는 장애 상태가 덜한 편이다. 그러나 단순 비교로 그렇다는 것이지 충희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충희 역시 무척 심한 장애를 가지고 있다. 얼마 전까지는 그래도 상태가 괜찮았는데 지금은 근육이 많이 빠져나가 조금씩밖에 걷지 못하고 있다.
 충희는 초등학교 사학년까지는 엄마가 가방을 들어주는 등 뒷바라지를 해줘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오학년에 올라가자 교실이 이층으로 바뀌는 바람에 한동안 계단을 기어서 다니다가 결국 학교 다니는 것을 그만두어야 했다.
 충희 역시 지금 방안에서만 지내면서 전자오락과 컴퓨터를 배우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하나를 키우며 지내고 있다.
 주재옥씨는 이런 아이들과 친구로 지낸다. 그이 역시 장애 때문에 활동반경이 방안으로 제한돼 있으므로 아이들이 유일한 벗일 수밖에 없다. 혹가다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힘이 들고 짜증이 나면 아이들을 향해 "니네들이 왜 태어나 날 괴롭히냐"고 한탄을 쏟아내기도 하지만 그래놓고 주재옥씨는 곧바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어쨌거나 아이들은 그이 뱃속에서 나온 자식이기 때문이다.
 사실 근이양증 장애를 가지고 있는 그이가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그 중에서도 늘 한 곳에 못박혀 앉아 있는 아이들을 수시로 들어서 옮겨줘야 하는 게 그이가 치르는 가장 큰 고욕인데 아이들은 자다가도 자리가 불편하면 깨우기 일쑤여서 잠을 설치는 게 이젠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이는 아이들을 돌보는 어려움 외에도 역시 근육이 빠져나가는 것을 자신이 느낄 정도로 빠르게 장애가 진행되고 있어 막막함을 느끼는 횟수가 늘어가고 있다. 작년까지는 팔이 아프지 않았는데 이젠 팔이 쑤셔오고, 걷는 것도 힘들어져서 동네 사람들과 같이 가던 시장을 걸음을 못 따라가니까 이제는 혼자 간다.
 진작에 희망이라는 단어를 포기했기에, 운명에 맡기고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려고 노력하며 비관은 하지 않지만 옆에 남편이 있어 줬으면 하는 작은 소망 하나는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 자신을 구박하고 떠나간 남편이지만 그래도 남편과 살던 때가 마음이 든든했었다는 회한이 그이 가슴을 시도 때도 없이 치는 것이다.
 도대체 세 식구가 다 근이양증 장애라니 이런 기막힌 현실이 또 어디 있을까? 그이는 장애를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친다.
 주재옥, 그이는 일천구백오십육년 충청북도 제천군 백운면에서 주범주씨(현재 예순두살)와 이옥희씨(현재 예순두살)의 팔남매 중 장녀로 세상에 나왔다.
 그이가 태어난 동네는 화전민촌으로 일백여 가구가 밭농사와 논농사에 의지해 삶을 꾸려갔던 외진 시골 마을이었다. 그이 집은 그곳에서 수대를 살아온 토박이였고 제법 많은 땅덩어리를 경작해서 그이는 밥은 굶지 않고 어떤 때는 부자집 딸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자랐다.
 그러나 살림이 쪼들리지는 않았지만 역시 주업이 농사라서 일손이 달렸기 때문에 그이는 비교적 이른 나이부터 집안일과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그이는 하당 초등학교 덕동분교를 나온 것을 끝으로 학업을 마쳐야 했다. 그이가 중학교 진학을 꿈도 꾸지 못한 것은 "여자는 한글만 깨치면 된다"는 할아버지의 완고함과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삼십리나는 먼 길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마을 전체를 통털어 여자아이가 중학교에 진학한 예는 한 건도 없었고 남자아이 몇 명만이 학교 근처로 나가 하숙하면서 중학교를 다녔을 뿐이었다.
 그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농사일에 매달려야 했다. 마을 풍토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어린아이로 보지 않아 그이는 다른 아이들처럼 옥수수나 콩이나 고추 같은 작물을 심고, 직접 벼도 베었으며 집안에서는 밥도 지었다. 그렇게 힘든 일을 했지만 그때까지 그이 몸은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이 나이 열여섯살 때 추석이 되자 서울로 돈 벌러 갔던 친구가 내려와 은근히 "쉐타 짜는 공장에 취직하지 않겠느냐"고 물어왔다. 그이는 마침 과중한 일에 지쳐있던 참이어서 선뜻 "가겠다"고 대답했다.
 그이는 서울로 올라와 구로공단안에 있는 마산방직이라는 회사에 취직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삼개월이라는 기간을 편물 짜는 기술을 배웠는데 이때부터 장애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는지 때때로 일이 힘들게 느껴졌다. 그러나 장애 때문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고 낯선 곳이라 그러려니 자위했을 뿐이었다.
 그이는 그 회사에 육개월여를 있다가 친구가 조금 나은 곳이 있다고 부추겨서 전자공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적응을 못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전자공장을 그만두고 이모집에 가서 집안을 도와주다가 남의 집에 가서 가정부 생활을 하기도 하다가, 결국 돈도 벌지 못하고 서울 생활 삼 년 만에 다시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그이가 집으로 돌아가자 그이를 기다리는 것은 역시 잡다한 일이었다. 특히 할아버지가 엄해 일을 해야 좋아하고 노는 꼴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이는 새벽에 일어나서 해넘어갈 때까지 죽어라고 바깥일을 하다가 집안에 돌아오면 다시 열네 식구 뒤치다꺼리를 해야 했다. 이 모두는 그이가 장녀였기 때문이다.
 그이는 직접 우물가에 가서 물을 길어다 먹었고 손수 소여물을 버무려 소를 먹였다. 오죽했으면 한번 실컷 자보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집안 일은 하고 또 해도 한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다니러 왔던 강원도에 사는 친척할머니가 그이가 음식을 잘 만들고 일을 잘한다며 "군대 갔다 와서 목수 일을 하는 아주 착실한 사람이 있는데 시집가지 않겠느냐"며 중매 설 뜻을 비쳤다. 그 얘기를 듣자 그이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일도 힘든데 시집이나 가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하루속히 일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갈망이 그만큼 간절했다. 그래서 그이는 조건을 따져보지도 않고 "시집가겠다"고 대답했다.
 그이 나이 스물세살 때, 봄 날 어느 날 그이는 강원도 원주시내 한 다방에서 당시 스물다섯살이던 남편 한차진씨와 선을 봤다. 솔직히 첫인상이 좋지 않았지만 그이는 처음에 만난 사람이 진국이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 한차진씨와의 결혼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차진씨와 시집 쪽에서는 진작부터 그이를 마음에 들어했으므로 두 사람 결혼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그 해 가을 그이는 한차잔씨와 결혼식을 올리고 강원도 원성군에 있는 시집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시집 역시 논 아홉 마지기와 밭 약간을 경작해서 먹고살고 있었다. 남편은 장남이고 농사를 짓다가 일이 있으면 목수 일을 나가곤 했다. 그래서 시집은 왔지만 그이는 일에서 놓여날 수는 없었다. 일 양이 조금 줄었을 뿐이었다.
 그이는 시집간 지 일년만에 첫아들 훈희를 낳았다. 그리고 삼 년 후 둘째아들 충희를 낳았다. 그이가 잇따라 아들을 순산하자 시부모와 남편은 무척이나 좋아했다. 아이들이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 잘 걷지 못하고 뒤뚱거리는 게 조금 걸렸지만 어른들이 "어릴 땐 다 그런 거야. 차차 낳아질 테니 걱정하지 마"라고 안심시켜 줘서 그이는 그 말을 믿고 마냥 행복해 했다. 그렇지만 불행의 그림자는 이미 그이에게 드리우고 있었다.
 훈희가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어느 날 아이 할머니가 신경통 때문에 다니던 읍내 정형외과에 훈희를 데리고 갔다. 그즈음 훈희는 걸음을 제대로 못 걷고 넘어지곤 해서 그이가 가방 수발을 들고 있었다.
  병원을 다녀온 아이 할머니는 사색이 된 채 말했다. "의사가 애를 보더니 한눈에 알아보더라. 얘야, 그뭣이냐 근육병이란다."
 그이는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는 난감해 하면서 "오래 못 살고 죽는 병이며 현재로서는 치료약도 없다"며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그이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을 맛보았다. 다음 순간 그이는 휘청, 그 자리에 주저앉아 정신을 잃었다.
 훈희가 근이양증 장애판정을 받자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장애아 유전에서 비롯된다는 의사 말에 식구들은 원인을 확인하기 위해 줄줄이 피검사를 했고 그 결과는 또 한번의 감당하기 힘든 절망을 그에게 안겨다 주었다. 훈희와 충희, 그리고 그이 피가 똑같았던 것이다. 그이로 인해 아이들이 장애를 가지게 됐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이는 언뜻 남편이 "장가를 잘못 들었구나"라며 실망하는 표정을 목격해야 했다.
 다행히 시부모님은 그이에게 특별한 눈치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이는 시부모님 독려 속에 한동안 혹시나 낫는 길이 없을까 해서 서울 영동세브란스 병원에 다녔다. 그러나 차도가 생기지 않고 무엇보다 거리가 멀어 움직이기가 여의치 않자 얼마 안가 병원에 다니는 것을 그만뒀다.
 그 무렵 남편이 "농사 지어봐야 맨날 빚만 지니 직장생활을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이는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을 따라 일천구백팔십년 전세 이백만원짜리 셋방을 얻어 경기도 여주군으로 나왔다.
 남편은 여주에서 장호원쪽으로 가다 보면 있는 조그만 회사에 목수로 취직했고 그이는 집안에서 아이들을 돌봤다. 장애가 자신 잘못이라고 판단한 그이는 남편에게 죄의식을 가지고 가능하면 남편 비위를 거스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이년 동안은 별일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객지생활이 삼 년째 접어들자 남편이 서서히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 배경에는 둘째 아들 충희는 장애상태가 덜해서 희망을 가졌는데 훈희처럼 장애상태가 눈에 띄게 심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친정에서는 그이 장애가 시집가서 일이 힘들어서 병들었기 때문이라고 얘기해 남편의 분노는 더욱 커져만 갔다.
 남편은 퇴근하면 집에 들어오려 하지 않고 거의 매일을 술을 마시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면 남편은 화를 내며 닥치는 대로 살림을 집어던졌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남편은 그이가 자기네 집안을 망쳐놨다고 동네가 떠나갈 정도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그이는 남편의 거친 행동이 자신의 장애 때문이어서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남편의 행패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어느때인가부터는 손찌검도 예사로 했다. 그이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어느 날 "너 때문에 신세 망쳤다. 너 병을 속이고 시집왔지"라며 손찌검을 해대는 남편에게 "자기네가 부자예요! 잘 살아야 속이고 오지"라며 대들기도 했다. 그이가 남편에게 대든 것은 이 한번 뿐으로 평상시에는 남편 눈치를 보며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구타를 당해야 했다.
 그렇게 지옥 같은 나날들이 흘러가더니 어느 날인가부터 남편은 본격적으로 이혼을 요구해 왔다. "나는 장남이니까 집안 대를 이어야 한다. 그러니 제발 이혼해 달라." 그이는 남편의 거듭된 간청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이혼 할 생각을 꿈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의 술을 먹고 친정에다 전화를 걸어 "새 여자를 구해주지 않으면 칼로 찔러 죽인다"는 등 협박을 하고 한편으로 그이에게 "서류 상으로만 이혼이다. 애만 낳아 가지고 오겠다. 내가 애를 낳아 가지고 오면 네가 키우면 될 거 아니냐, 서류 상 독신이어야지 여자가 오니 제발 이혼해 달라"며 회유를 하자 그 말을 믿고 그이는 설마 남편이 딴 여자와 결혼하랴 싶어 구십일년 봄 어느 날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이는 남편과 헤어지면서 아이양육을 책임지라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 보증금만 빼고 나머지 저금한 돈을 해약해 남편에게 건네줬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칠월 십이일 남편이 그이를 찾아왔다. 남편은 의아해 하는 그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나 결혼해"라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이는 비로소 "이제 남남이구나" 섭섭한 감정을 느꼈다.
 남편 결혼식은 작년 삼월삼십일일 원주에서 있었다. 그이는 참석하지 않았다. 결혼식을 올린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마음이 아팠지만 눈물은 단 한방 울도 흘리지 않았다. 이미 흘릴 눈물이 말라버렸기 때문이다.
 그이는 장애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그토록 힘들진 않았는데, 그리고 이혼을 하고 나서도 몰랐는데 남편이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는 얘기를 듣게 되자 힘이 쭉 빠지고 너무 가슴이 아파 기도를 많이 했다고 말하고 있다.  
 남편은 지금 다니던 직장을 계속 다니며 새 여자와 그이가 사는 곳에서 지척 거리인 여주 시내에 살고 있다 남편은 헤어진 후에도 한 달에 한번 정도 꼴로 아이들을 보러 들르고 있다. 하지만 생활비는 주지 않는다. 남편 월급으로는 새살림을 꾸려가기도 빠듯한 줄 알기에 그이도 굳이 생활비를 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이 친정에서는 그이가 이혼한 후 지금까지 "이제 남남이 됐는데 왜 아이들을 데리고 사느냐, 빨리 아들을 시집에 데려다 주고 와서 네 병을 고쳐라"고 채근하고 있다. 그러나 그이는 아이들을 떼 놓고 친정에 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아이들과 같이 들어가서 신세를 지자니 친정 형편이 너무 어려워 그이는 친정에 가는 것을 포기했다.
 주재옥, 그이는 남편과 헤어진 후 지금까지 영세민으로 책정돼 동사무소에서 주는 쌀과 한 달 사만여 원의 돈으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 특별한 변화가 없는 한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이들과 꾸려 가는 생활이 너무 어려워 그이는 때때로 아무 일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마음뿐 그이는 자신에게 맞는 일이 뭐가 있을지도 모를뿐더러 혹 일이 있어도 장애 때문에 해낼 수 있을지 여전히 자신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제 그의 남은 소망 하나는 아이들이 운동시설이 있는 시설에 들어가서 운동을 마음껏 했으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 장애가 진행되는 것을 막을 수만 있다면 그이는 어떤 대가라도 치를 수 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사실 아이들과 수용시설에 들어갔으면 하는 생각을 그이가 안 했던 건 아니다. 그러나 시설에 간다면 세 명이 같이 가야 하기에 그이는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이도 저도 안 된다면 그나마 장애우들에게 혜택이 많다는 큰 도시에 나가서 살고 싶다는 또 다른 소망을 품어보지만 방 얻을 돈이 없어 역시 그이는 애만 태우고 있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며 "막 시집와서 애 둘을 낳고 애가 잘생겨서 즐거웠었다"는 주재옥씨. 그이가 또 다른 즐거움을 맛보게 될 날은 그 언제일까.

글/이태곤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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