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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그를 좀 더 닮고 싶은 음악인들, 허클베리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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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성장규(기타), 이소영(보컬, 건반), 이기용(기타, 보컬)

첫 음반 발매가 1998년이었으니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한다. 2011년 5집 발표 후 긴 여백을 거쳐 이번 가을에 6집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음반작업에만 전념했던 탓에 올해는 언론과 인터뷰 한 번 없이 지냈다고 하니, 이번 대화는 6집 발표 전에 그들의 귀향(歸鄕)을 알리는 첫 공개만남이 되는 셈이다. 음반 홍보를 위한 지면이 아님은 본문 시작과 함께 독자 여러분이 직접 확인하실 수 있다. 왜 그들을 선택해서 만났는지를 미리 밝혀놓았기 때문이다. 낮은 곳에 있는 이웃들과 늘 함께하고자 노력하는 음악인들의 음악인생을 들어본다. 이런 마음속 얘기까지는 처음 해본다는 그들, 허클베리핀이 이번 만남의 주인공이다.

 

‘그들’과 함께하는 이유

공연현장에서 무대는 출연자들 중심이다. 초대가수나 초청연사는 대기실에서 준비하다가 무대에 올라, 그들이 해야 할 임무를 마치고 다시 대기실로 돌아간다.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객석에 앉은 관객들은 무대에 그들이 존재하는 시간만큼만 그들과 함께한다. 그건 공연이나 일반 집회현장에서 늘 마주하는 풍경이다. 그런데 출연자가 처음부터 객석에 앉아 있다면? 같이 손뼉치고 같이 환호하며 같이 구호나 함성을 외치다가, 정해진 순서에 맞춰 무대에 올라 자신들의 공연을 한 뒤 다시 객석의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면? 그리고 공연과 집회가 끝날 때까지 모두와 함께 호흡하며 행사 자체에 동참한다면, 객석의 모든 이들은 그들한테 어떤 느낌이 들까? 노래 부르는걸 듣고, 말하는 걸 듣고, 사회자의 진행에 반응하는 무대와 객석 사이의 이분법이 아니라, 객석 자체가 무대가 되고 무대가 관객들의 자리가 되는 공감대를 얻게 될 것이다.

허클베리핀을 섭외하기로 결정했던 건, 그들이 ‘왜’ 객석에서 모두와 함께하는지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6집이 곧 나온다는 건 만나고 나서야 알았다.) 출연자가 아니라 행사의 참가자이고, 모두와 함께 동화되어 같이 호응하는 모습이 늘 인상적이었다. 투쟁가를 부르는 민중가수가 아니라, 일반 대중가수들이기에 의미가 남달랐던 것이다. 더욱이 멤버 세 명이 항상 동참한다. 특정 1인의 성향이 다르다면 어려운 일이다. 사사로운 의견 차이는 팀의 결속력 균열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서로 의견이 일치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건 관객(팬)들 앞에서 일부러 내보이는 쇼맨십이 아니라 진정성으로 읽힌다. 그들의 작업실에 마주앉아 얼마간 덕담을 나눈 뒤, 첫 질문을 그 대목부터 던졌다. 왜 동참하는가? (멤버 3인의 이름은 호칭 없이 표기한다. 그게 훨씬 그들과 가깝게 존재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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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클베리핀 이기용

이기용(기타, 보컬)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어느 수위로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일단 제가 늘 간직하는 심정 그대로 말씀드린다면, 우리나라가 88올림픽을 유치하고 나서 소위 말하는 ‘상계올림픽’이라는 만행이 있었잖아요. 서울 안의 판잣집과 달동네들을 공권력으로 강제 철거했던 아주 큰 사건이었는데, 저는 눈앞에서 그런 충격적인 사건들을 자주 접했어요. 저의 개인 주변에서 그런 일들이 실제 발생했다는 거죠. 그래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제 시선은 어릴 때부터 그쪽으로 향하게 됐어요. 사춘기 무렵에는 ‘왜?’라는 질문을 많이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왜?’라고 질문을 하다 보면, 답이 안 나오고 화가 나는 경우가 정말 많았어요. 불합리한 것들이 너무 많다는 거죠. 그런 경험들이 쌓이다 보니까, 어릴 때부터 사회문제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됐던 것 같아요.

이후 음악인의 삶을 살게 됐지만, 지금도 불합리한 것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을 생활 그 자체로 살아가고 있단다. ‘왜?’라는 질문에 대해 납득이 안 되는 부분들에 눈을 감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기용 그래서 음악생활을 하면서 아무리 급박한 작업을 하고 있더라도, 사회적으로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공연에서 연락이 오면, 아직까지도 거절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아요. 그게 무료공연이든, 출연료가 있든, 사람이 몇 명이 있든, 외진 데서 하든 상관없이, 저희를 필요로 하는 공연에는 꼭 참여했거든요. 이유는 간단해요. 그런 사람들, 사회적으로 약자로 존재하는 이들한테 필요한 건 시선이거든요. 그들의 얘기에 귀기울여주고 바라봐 주는 사람들이 있기만 하다면, 좀 더 덜 고통스럽게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겠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런 역할을 맡고 싶어요. ‘왜?’에 대한 저의 대답인 거죠.

이소영(보컬, 건반) 저도 정말 오랜만에 이런 생각을 헤아려보게 되는데, 고등학교 때 부모님과 떨어져서 춘천의 외삼촌 집에서 3년간 지낸 기간이 있었어요. 외삼촌은 춘천의 한 대학교 교문 바로 옆에서 조그만 사회과학서점을 하셨는데, 어릴 때 6·25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불발탄 지뢰를 밟아서 두 다리를 잃고 사셨죠. 같은 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선 장애를 가진 분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접하며 지냈던 것 같아요. 서점에 자주 놀러갔는데, 갈 때마다 다양한 책들과 자료들을 펼쳐보며 지냈죠. 어떤 의식 이런 것보다는 ‘아, 이런 일들이 있었구나’ 하는 호기심으로, 스펀지처럼 빠르게 그런 시선을 가지게 됐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소영은 대학 시절엔 직접 행동하겠다는 참여의식 같은 건 생각지 않고 지냈는데,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게 잘못됐다는 자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사회적 약자들, 노동자들, 서민들의 삶이 막연한 남들의 얘기가 아니라, 누구나 해당될 수 있는 문제라는 걸 어느 순간 깊이 깨닫게 됐다는 것이다. 남의 얘기가 아니라 내 문제가 될 수 있고, 가장 친한 친구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을 하는 순간부터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단다.

이소영 저희는 저희들끼리 대화를 굉장히 많이 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이런 공연이 있어’ 하면 ‘거기 가선 무슨 노래를 부를까?’가 아니라, 그 공연이 어떤 공연이고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그런 대화를 나누며 준비를 하고 공연을 마친 뒤에도 공연 중에 느꼈던 심정을 서로 얘기해요.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같은 지점으로 인식하고 있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공감하고 동화가 되는 부분들이 많아지는 팀이 된 것 같아요.

성장규(기타) 저는 약간 다른 관점의 얘기가 될 것 같은데요. 솔직히 저는 장애를 가진 분들이나 사회적 약자, 또한 정치적인 문제 같은 것들에 대해 그동안 너무 모르고 살았어요. 너무 무관심하게 살아왔다는 반성이 지난 보수정권 기간 동안 확 들더라고요. 그래서 단순 호기심을 넘어서, ‘이젠 나도 알아야겠다’는 마음다짐을 하게 됐죠. 전보다 조금 더 고민하게 되고, 제가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항상 떠올리게 됐어요. 또한 형(이기용)과 누나(이소영)가 항상 그런 관점에 대해 유의미한 얘기를 해주니까, 제 가치관을 뒤늦게나마 정립하는데 큰 도움을 얻게 됐죠.

그런데 그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사고 같은 일들이, 어느 한순간 자신의 문제로 여겨지게 됐다고 한다.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들이 결코 남들의 얘기가 아니라는 실감으로 그의 가슴에 ‘쿵’ 소리가 나듯 박혔다는 것이다.

성장규 누나가 방금 한 얘기와 같은 맥락인데, 세상엔 남의 일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잖아요. 구의역 사고처럼 불합리한 업무상의 참사도 있지만,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교통사고로 허망하게 숨지는 경우도 너무 많죠. 고속도로를 이용해 즐겁게 휴가지로 향하고 있는데, 뒤에서 버스가 들이박아서 정말 짧은 비명조차 못 지르고 숨지는 사고 같은 건 뉴스에 매번 등장하잖아요. 그 어떤 것도 남의 일이 아닌 거예요. 저만 예외일 리가 없는 세상이라는 거죠. 그게 가장 핵심인 것 같아요. 무엇이든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 예외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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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진정한 ‘하나’를 지향합니다

허클베리핀은 촛불집회 때도 함께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 이전과 이후의 무대 모두 올랐는데, 그 경험은 평생의 무게감으로 간직하게 됐다고 한다.

이소영 탄핵이 되기 전에는 굉장히 긴장을 많이 했어요. 어떻게 보면 탄핵이 결정된 게 기적 같은 일이잖아요. 안 될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우려가 확산되던 시기였는데, 무대 올라가기 전에 그렇게 긴장했던 적은 그 이전엔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요. 특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할 말을 미리 통째로 외우고 올라갔는데도, 올라가서 서는 순간 하얗게 아무 생각도 안 나더라고요. 그런데 광장에 모인 수십만 수백만의 모두가 한마음으로 모였다는 건 확실했잖아요. 그 추운 저녁에 모두가 촛불을 들고 모여 있는데, 그 분들이 하나하나가 아니라 아주 거대한 한 덩어리로 보이는 거예요. ‘저 많은 분들이 한 덩어리구나. 우리도 그 안에서 한 덩어리로 함께하는구나!’ 이런 실감이 떠오르는 순간, 마음이 너무나 평화로워졌어요. ‘그래, 이 촛불시민들과 함께 가는 거야!’ 그 벅찬 감동으로 정말 마음 편하게 노래를 불렀죠. 거대한 한 덩어리의 촛불이 물결치는 모습, 그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거예요.

이기용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연주하고 불렀던 순간을 떠올렸다. 민중가요 중에선 애국가와 같은 무게감을 지닌 그 곡을 허클베리핀 나름의 감성으로 편곡했는데, 완전히 다른 분위기임에도 함께 부르던 촛불시민들의 모습이 너무 큰 감동으로 다가왔단다. 그리고 하나의 다짐이 밀려왔다고 한다. ‘앞으로 이 노래를 다시 부를 일이 없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는 강한 기대를 품게 됐다는 것이다. 이소영이 한마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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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클베리핀 이소영

이소영 그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때마침 촛불시민들 맨 앞자리에 백기완 선생님이 딱 한가운데 앉아 계시는 거예요. 그때의 느낌이 참…. (참고: ‘임을 위한 행진곡’은 백기완의 미발표 장시 <묏비나리>(1980)의 한 부분을 차용해서 노랫말을 만들었음)

데뷔 이래 20년의 시간이 흘렀다면, 정말 많은 자리에서 공연을 하며 팬들과 함께했을 게 분명하다. ‘거대한 한 덩어리’의 촛불은 일단 제외해놓고, 허클베리핀 차원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은 언제 어디에서 펼쳐졌을까? 그게 궁금해진 이유는 현란한 조명과 화려한 율동 중심으로 가득 채워지는 ‘한류’나 ‘케이팝’과는 다른, 허클베리핀만의 색다른 무대현장이 존재했으리란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멤버 세 명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하나의 공연을 지목했다. 지난 6월초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후원의 밤 행사 때 했던 미니콘서트라는 대답이었다. 정식 공연도 아니었고 완전한 음향시설을 갖춘 무대도 아니었는데, 왜 그 자리가 그들에게 첫 번째로 호출되는 걸까?

이소영 그 공연은 그쪽에서 ‘저희를 초청하고 싶습니다’ 했던 게 아니라, 저희가 먼저 ‘어떻게 하면 함께할 수 있을까요?’ 하고 제안했던 건데요. 공연할 생각은 없던 상태에서, 그들과 무엇이든 함께할 방법을 찾아 문의했던 거예요. 처음엔 당황하시더라고요.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하며 쉽게 답을 못 주셨던 게 기억나네요.

이기용 저희가 먼저 전화를 했어요. 저희의 의도는 단발성의 행사 같은 게 아니라, 장애인권과 관련해서 계속 같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뭔지를 알고 싶었던 거예요. 전장연이나 장애계 내부의 세세한 움직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니까, 저희는 뭐든 시켜만 주시면 열심히 하겠다는 마음으로 연락을 드렸던 거죠.

성장규 정말로 뭐든 같이 하고 싶었어요. 음식 나르는 일도 좋고, 물건을 옮기는 노동도 반갑고, 말 그대로 ‘몸으로 때우는’ 건 뭐든지 하겠다는 일념으로 문의 드렸던 건데…, 글쎄요. 저희가 별로 재능이 없어 보였나 봐요.

세 사람의 박장대소가 터졌다. 힘이 없어 보였는지 일을 시키진 않더라고, 그냥 하던 거나 하라는 의미 같았다고, 재능 하나 있는 걸로 해결하라는 것 같았다면서 한참 동안 웃음꽃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들에게 그 미니콘서트가 왜 가장 큰 의미를 갖게 된 걸까?

이소영 같이 하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 몰라서 문의 드렸던 건데, ‘공연을 해주시면 좋겠다’는 답이 전해졌어요. 그 마음이 전해진 거죠. 음악이 그들에게 휴식과 위안이 된다면, 저희는 얼마든지 준비하고 동참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기용 아무런 음향설비가 없는 자리라고 해서, 저희 작업실에 있는 장비를 다 짊어지고 갔습니다. 행사 전에 미리 세팅을 다 해놓고,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후원의 밤 행사를 함께했거든요.

성장규 형과 누나가 그런 쪽으로 생각이 많고 깊다는 거, 저는 오히려 그게 훨씬 더 좋은 것 같아요. 모든 게 남의 일이 아닌 세상에서, 형과 누나는 관심만 갖는 게 아니라 항상 실천을 하잖아요. 새로운 도움을 시도하려고 노력도 하고요. 저는 허클베리핀의 멤버가 된 다음,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게 그 점인 것 같아요. 그런 도움과 참여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거, 그건 다른 음악인들과는 쉽게 나누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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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함을 거부하고 자유로움을 지향한다

이기용은 창단멤버, 이소영은 2집부터 참여, 성장규는 함께한 지 3년차가 된 허클베리핀의 세 사람이다.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모던록 음반상’과 ‘올해의 앨범상’을 받았고,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특별상’도 수상한 바 있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극단의 편곡과 가사내용으로 치닫는 최근의 음악계에서, 섬처럼 외면당하며 떠돌 것 같은 이들의 음악이 묵직한 수상경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결코 가볍게 바라볼 일이 아니다. 실력 자체를 인정받고 있다는 뚜렷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기용 팀 이름이 왜 허클베리핀인가? 음…, 오랜만에 당시를 떠올리게 되네요. 저희 팀의 첫 클럽공연이 주말로 다가왔던 때였어요. 그때까지는 팀명을 ‘18일의 수요일’이라고 정해놓고, 이미 홍보가 나갔던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좀처럼 마음에 와 닿지 않는 이름인 거예요. 무대 데뷔를 하고 나면 그 이름으로 계속 가야 하는데, 영 아니다 싶어서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문득 떠오른 게 ‘허클베리핀’이라는 단어였어요. 마크 트웨인의 소설 주인공인데, 배운 건 없지만 몸으로 다 익혀 나가고, 굉장히 생각이 열려 있고, 약자에 대해서 배려심이 많은 그런 이미지들이 떠올랐죠. ‘바로 이거다!’ 하는 확신이 들었어요.

음악을 하겠다면 가족을 포함한 주변 모두가 뜯어말리던 시절, 게다가 그냥 음악이 아니라 ‘록(rock)’을 하겠다고 하면 ‘제발 그것만은 안 돼!’라며 결사(?)반대하던 당시의 상황이었다. 음악 안에서도 소외되고 구석으로 내몰린 게 록음악이라면, 그 자체가 소설작품 속 허클베리핀의 입장과 비슷한 게 아닌가 확신했던 게 당시 이기용의 판단이었단다.

이소영 사실 저희가 5집 앨범을 내고 나서 7년 정도 공백이 있었던 건 현실적인 문제도 물론 있었지만, 새로운 좌표를 정하기 위한 멈춤의 기간이었다고도 생각을 하게 돼요. 어렸을 때는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잖아요. 책상과 의자까지도 모든 게 부모님의 선택이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하나씩 하나씩 스스로 선택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저를 둘러싼 모든 게 저의 선택의 결과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주어진 게 아니라 제가 선택한 것들 속에 제가 존재하고 있다는 거, 그 책임감을 느끼면서 재확인하게 된 건 ‘음악이 얼마나 내게 소중한 존재인가’였어요. 뭔가 다른 선택을 하고 싶은 시점에 다다랐을 때, 정말 제 인생에서 놓치기 싫은 게 바로 음악이었다는 거죠. 허클베리핀을 아껴주시던 분들께는 의외의 답이 될 것 같은데, 기존과 다른 방식의 음악이 6집에 담길 거예요. 하지만 그건 저희가 전해드리고 싶은 방법을 선택한 거라고 생각해요. 저희의 본질 자체가 바뀌는 건 아니니까요.

이기용 음악을 더 이상 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의 상황에 다다랐을 때, ‘그래, 이제 여기서 그만 멈춰도 괜찮다. 여한이 없을 만큼 우리는 참 많이 열심히 했다’는 저의 자문자답을 주변을 통해서도 들을 때였죠. 모든 걸 털어내고 내버리며 아무도 안 만나고, 하루 종일 누구와도 통화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아무 말도 안 하는 시간을 길게 가져 봤습니다. 막힌 것 없는 대자연의 공간 속에서 하늘과 함께, 바람과 노을과 함께 지내다 보니, 모든 걸 털어 내버린 빈 공간에 찾아드는 게 바로 음악이더라고요. 그러면서 고층빌딩과 네온사인 가득한 일상에 파묻혀 있을 때, 그때는 전혀 보이지 않던 ‘자아’가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내버림으로써 얻게 되는 커다란 무언가가 있다는 거, 아마도 재시작과 같은 6집의 내용은 그런 열린 공간의 소중한 의미들로 가득 채워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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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클베리핀 성장규

성장규 허클베리핀의 멤버가 된 이후로는 저의 첫 앨범이 되는 거죠. 허클베리핀을 처음 알게 된 건제가 고3 때였던 것 같아요. 어느 잡지의 인터뷰를 봤던 걸로 기억나는데요. 인연과 인연을 거치면서 여기까지 오게 됐는데, 제가 허클베리핀의 구성원이 되어 음반작업을 한다는 건 전혀 예상할 수 없던 일이었죠. 저는 행복합니다. 요즘엔 여한 없이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어떠한 칭찬과 따끔한 지적도 저는 영광이라고 받아들일 겁니다. 그만큼 열심히 할 테니까 많은 격려를 부탁드릴게요.

마지막 질문으로 ‘허클베리핀’을 소개할 짧은 한 줄의 문장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함께걸음>의 ‘함께 사는 세상’ 꼭지에서 만난 이들이 단순한 명칭 하나로 기록되는 것보단, ‘어떠어떠한 지향점을 간직한 허클베리핀’이라고 소개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에 따른 제안이었다. 오늘 봤던 모습 중에서 가장 진지한 표정으로 서로가 곰곰이 문답을 나누더니, 리더인 이기용이 방점을 찍었다.

이기용 짧은 그 한 줄이 허클베리핀 20년의 정체성을 정리하는, 어떤 면에서는 가장 중요한 핵심을 결정하는 거잖아요. 몇 해 전 오랜만에 작품 <허클베리핀>을 정독하며 다시 읽었던 적이 있었어요. 저희 팀 이름을 정말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한마디로 자유롭고 가식 없고, 모든 이념의 언어들이 그 이름 앞에서는 다 무너지게 되는 가치가 느껴지더라고요. 그 소설 속 주인공과 같이, 저희들도 비겁함을 거부하고 자유로움을 지향하는 것 같아요. 단 한마디로 저희 팀을 규정한다면, 저희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소설 속 허클베리핀을 좀 더 닮고 싶은 음악인들, 허클베리핀’이라고요. 그게 여러분과 가장 공감대를 갖게 될 저희들의 지향점인 것 같습니다.

작성자글과 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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