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학생의 권리보장, 우리가 앞장선다
본문
혹시 ‘가날지기’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표면적 의미는 ‘나무그늘 밑 잠시 쉬어가는 곳’이지만, 정신없이 바쁜 현대사회에서 ‘장애·비장애 구분없이 모두가 잠시 같이 쉬어가며 힐링할 수 있는 곳’이라는 큰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의미 있는 이름의 ‘가날지기’는 건국대학교 장애인권동아리다. 이름만큼이나 멋진 활동을 하고 있는 ‘가날지기’를 <함께걸음> 지면에도 소개하여, 독자 여러분도 함께 잠시 쉬어가며 힐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생각만 공유할 수 있다면, 누구나 함께한다
취재를 하기 위해 건국대학교를 방문했는데, 약속장소로 가는 길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 했다. 저시력으로 시각장애가 있는 기자가 난생 처음 보는 ‘돌’이 길마다 두 개씩 있었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미처 못 보고 그대로 그 돌에 걸려 넘어질 수 있을 정도로 높이가 너무 낮았기 때문이다. 차가 진입하지 못하게 그 돌(볼라드)을 배치한 게 목적인 것 같은데, 기자가 다른 지역에서 보던 같은 목적의 돌과 비교하면 높이가 너무 낮아서 저시력 시각장애인이 못 알아보고 걸려 넘어질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래서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만난 가날지기 전(前) 회장 김한솔 씨, 현(現) 부회장 김휘경 씨와도 꼭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 김한솔 전 가날지기 회장 (시각장애)
김한솔 “맞아요. 그건 시각장애학생들에게 정말 위험하죠. 그래서 저희도 계속 요구하고 있는데, 학교측에서도 쉽게 변화를 주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흐르면서 저희도 잊고 지나치게 되기도 하고…. 계속 요구를 해서 잘못된 부분에 변화를 줘야 하는데, 그러한 변화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문제가 있다는 걸 인지하면 좋겠어요. 그냥 뒀다가 나중에 사고가 일어난 뒤에야 인지하고 변화를 주면, 그때는 너무 늦으니까 미리미리 예방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죠.”
김한솔 씨가 말한 ‘사고’에 대한 예시는 멀리까지 가지 않아도 금방 사례를 찾을 수 있다. <함께걸음> 2020년 4월호에 소개했던 “죽어야만 생겨나는 이동편의시설”이 그것이다. 이동편의시설 설치를 요구할 때는 예산 부족 등의 이유로 계속 미루다가, 큰 사고로 장애인이 사망하고 나서야 부랴부랴 편의시설을 설치한 ‘서울지하철 신길역 사건’이다. 이곳도 사고가 나지 말란 법은 없다.
가날지기는 이렇게 학교에서 장애학생이 이동뿐만 아니라 학습, 대학생활 등 다양한 영역에서 겪는 어려움들에 대해 생각과 의견을 모으고, 그것을 스스로의 목소리로 내며 활동하는 인권 동아리다.
↑ 김휘경 가날지기 부회장 (지체장애)
김휘경 “1997년경 전국적으로 대학에 장애학생 특별전형이 생기기 시작한 걸로 알고 있는데, 가날지기도 이때쯤 생겨났어요. 그렇게 계속 이어오다가 언젠가부터 활동의 폭이 서서히 줄어들었어요. 제가 10학번인데, 중간에 휴학을 좀 오랫동안 했거든요(웃음). 제가 처음 학교를 다닐 때는 가날지기가 있었는데, 그때는 장애학생의 인권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크진 않았어요. 장애학생의 비율도 비장애학생에 비해 8:2 정도로 정말 적은 수치였고요. 그러다 2017년도에 복학해 보니까 가날지기가 아예 없어져 있더라고요. 자연스럽게 학교에서 장애학생에 대한 인권이 거의 방치되는 수준이었고, 장애학생들의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가날지기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뜻이 있는 장애·비장애학생들이 모여서 가날지기를 다시 만들었고, 지금은 실질적인 중앙동아리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가날지기에 대한 소개와 다양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건, 가날지기를 다시 만드는 것과 활동을 활성화하는 데 있어 장애학생‘끼리’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애학생과 비장애학생 구분없이 생각을 공유하고 뜻을 모을 수 있다면 모두 함께한다. 그렇다면 지금은 과거 8:2의 비율보다, 장애·비장애학생의 균형이 잘 맞춰져 있을까.
김휘경 “네, 예전보다 장애학생의 비율이 높아졌어요. 그리고 장애유형의 경우에도 제 경험으론 예전에는 지체장애가 대부분이었는데, 이젠 다양한 장애유형의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고요. 장애학생도 예전보다 많이 참여해서 활동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올해는 코로나19 감염 사태로 인해, 가날지기에 신입생을 받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워요. 아무래도 신입생에게 홍보를 가장 많이 하는 시기가 입학 시기인 3월이잖아요. 그런데 딱 그때가 대면보다 비대면을, 그리고 거리두기가 강조되던 시기라서, 온라인을 통한 홍보가 대부분이었어요. 그런데 장애학생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장애의 특성과 정도를 다양하게 고려하면,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홍보를 하는 게 훨씬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이메일로 가날지기에 대해 홍보를 해도, 가입하겠다는 내용의 회신은 거의 받지 못했어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학교 수업도 온라인으로 진행이 되었을 텐데, 신입 장애학생의 경우 답답한 부분이 많았을 것이다. 학교생활에 대한 정보도 많이 부족하고, 수업에서 장애학생에 대한 지원에서 가날지기가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장애의 특성을 모두 고려하고 반영하기 어려운 온라인 홍보로 인해, 역시 코로나19 사태에서 장애학생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체감하게 된다.
↑ 건국대학교 인권센터가 주관한 인권강좌 후 기념촬영. 강사로 김원영 변호사의 모습이 한 가운데 보인다.
장애학생에게도 당연히 필요한 인권이 침해당했다
요즘은 너도나도 유튜브를 하는 시대다. 가날지기도 이 시대적 흐름을 따라 다양한 콘텐츠로 유튜브를 제작하고 있다. 시각장애학생이 ‘맛’으로만 어떤 소주인지 맞추는 것처럼 일상 속 장애인의 소소하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학교생활을 하며 어려운 점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며 공감대를 형성하는 내용도 있다. 장애학생들이 직접 이야기하는 학교생활의 어려운 점이나 개선이 필요한 건 어떤 것들이 있을까.
김휘경 “시각장애학생의 경우 지하철역에서 강의실까지의 ‘거리’만 아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실제로는 그 거리를 아는 게 전부가 아니라, 지하철역에서 ‘어떻게’ 강의실까지 가는 게 중요하잖아요. 강의실뿐만 아니라 카페나 휴게실 같은 곳도 이용하기 위해서는 장애학생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런 부분에 대한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장애학생이 학교에 와도 마땅히 갈 곳이 없는 경우가 많았어요.”
김한솔 “저는 전공(경영학) 특성상 중간·기말시험은 수학, 즉 계산하는 문제가 나오는 경우가 있거든요. 또 지시대명사도 많이 쓰기 때문에, 직접 보지 않는 이상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제가 시각장애가 있어서 시험시간 연장이 필요하다고 편의제공을 신청했는데, 교수님은 다른 학생과의 형평성이 어긋난다고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또 어떤 교수님은 장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건지, 전혀 없는 건지 일반 종이로 치르는 시험을 저보고 ‘그냥 보고’ 하라고 하더라고요.”
시각장애가 있어서 일반 종이를 보기 어려운 장애학생에게 그걸 그냥 보고 시험을 치르라니. 문제를 대신 읽어줄 대필 도우미를 지원해 주는 것도 아닌 이 상황은 장애에 대한 차별을 넘어 무지(無知)나 다름없다. 더 놀라운 건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김한솔 “교수님이 어떠한 편의제공도 지원해 주지 않으니까, 장애학생지원센터(아래 센터)에 도우미를 구해달라고 지원을 요청했어요. 그런데 센터에서는 저보고 도우미를 직접 구해오라고 하더라고요. 시각장애학생은 다른 학생들과 직접 교류할 기회도 제한적인데, 어떻게 금방 도우미를 구하겠어요. 그럼에도 센터는 장애학생보고 알아서 구해오라고 했습니다. 이런 문제들로 인해 결국 한 학기 동안 제대로 된 대학생활을 못한 것 같아요.”
장애학생이 대학에서 학습권을 보장받고, 행복한 대학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줘야 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 바로 센터다. 시각장애학생이 강의실을 잘 찾아갈 수 있도록 이동지원, 시험을 원활하게 칠 수 있도록 대필지원 등을 해줄 도우미학생을 구해서 연결해 주는 것도 당연히 센터의 역할이다. 그럼에도 ‘나 몰라라’ 하는 식으로 장애학생에게 도우미를 직접 구해오라고 한다면, 센터의 존재가 무의미하지 않을까.
김휘경 “또 교수님들이 보는 출석부에는 장애학생의 경우 어떤 장애인지에 대한 기재가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너무 애매하게 되어 있어요. 시각장애학생의 경우에는 이름 뒤에 ‘e’(eye), 청각장애학생의 경우에는 이름 뒤에 ‘h’(hear)와 같은 식으로 알파벳이 표기되어 있나 봐요. 이 뜻(장애학생의 장애유형)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교수는 수업시간에 ‘야 누구누구 e는 뭐야?’라는 식으로 학생들에게 물어보기도 해요. 장애학생 중에는 본인의 장애를 밝히고 싶어하지 않는 친구도 분명히 있을 텐데, 그렇게 학생들 다 있는 곳에서 다 들으라고 말하는 것도 정말 잘못된 거죠. 센터와 교수 간의 소통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아서 생긴 문제 같아요.”
다시 일어선 가날지기, 우리의 권리는 우리가 지킨다!
김한솔 “처음엔 대학에 들어와서 즐겁게 생활하고 싶었는데, 그게 제 마음처럼 쉽지가 않더라고요. 장애인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어려워하기도 하고, 공부도 어렵고, 학교를 다니면서도 어려운 점이 많고, 어려움 투성이죠. 그래서 ‘나만 이럴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저와 뜻이 맞는 친구들을 모으게 되었어요. 그래서 같이 모여서 학교에 우리들의 의견을 이야기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김한솔 “그래서 장애·비장애학생들이 모여서 이런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많은 공감을 하게 되었고, 센터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젠 센터가 아니라, 우리들의 목소리를 직접 내고 함께 움직일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어 지금의 가날지기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도, 가장 전달력과 호소력이 있는 것도, 가장 확실한 방법도 관련업무를 담당하는 ‘누군가’가 아닌, ‘당사자’가 직접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이고 어떤 불편함과 어려움이 있는지는 당사자가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사자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다시 시작한 가날지기. 그렇다면 재개된 가날지기의 활동으로 그동안 건국대학교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김한솔 “우선 법학관에 경사로가 생겼어요. 이 건물 안에 장애학생 휴게실이 있는데, 기존 있던 경사로는 전동휠체어는 다닐 수 있어도 수동휠체어는 도움을 받아야만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너무 높았거든요. 휴게실조차도 도움을 받으며 가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저희가 계속 요구해서 지금은 잘 다닐 수 있는 경사로가 생겼어요. 또 처음 얼마동안은 장애학생 휴게실이 정말 지저분하고 마치 창고 같았는데, 지금은 근로학생이 일주일에 몇 번씩 청소도 하면서 장애학생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안락한 공간이 되었어요. 이것 역시 저희들이 요구해서 이루어진 사항입니다. 그리고 가장 큰 성과는 매 학기마다 장애학생 간담회를 개최한다는 거예요. 예전에는 그냥 형식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젠 센터나 학생회 등에서도 장애학생의 목소리를 무시하지 않고 장애학생이 학교생활을 하는 데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등에 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고 있습니다.”
두 청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일부 장애학생에 대한 지원이 잘 되어 있는 학교를 제외한 곳의 대한민국 장애학생이 직면한 교육현장의 모습들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물론 안타까운 모습들이 대부분이다. 가날지기는 이름의 뜻처럼 잠시 쉬어가며 ‘힐링’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장애학생의 어렵고 불편한 학교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교육과 기회균등’이 장애가 이유로 배제되고 차별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하고 보장받기 위해 노력하는 가날지기가 앞으로 더욱 발전하길 기대한다. 그래서 언젠가 장애학생과 비장애학생이 잠시 쉬어가며 ‘진정한 힐링’을 할 수 있는 가날지기가 되길, <함께걸음>도 함께 응원한다.
↑ 높낮이가 다른 볼라드가 예상치 못한 지점에 설치돼 있어, 시각장애학생들의 이동뿐 아니라 비장애학생들의 보행에도 위험을 초래하고 있다. (위)
시각장애인용 점자블록이 계단 중간에 끊어져 있다. (사진 내 점선 표시) 설치된 진행 위치도 달라, 계단을 마주친 시각장애인당사자들은 계단 위에서 당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래)
↑ 대학의 오래된 건물들은 여전히 이동권에 제한이 있는 학생들에게 장벽으로 남아 있다.
경사로 설치가 안 된 이 건물에는 대학의 주요 부서들이 있는데, 전동휠체어 등을 사용하는 학생들은 건물 내로 들어갈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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