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각장애인도 완전한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길
밀알복지재단 헬렌켈러센터
본문
2019년 9월 헬렌켈러센터 관계자와 시청각장애인 당사자들이 국회 정문 앞에서 헬렌켈러 법 촉구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헬렌켈러(Helen Keller, 1880~1968)가 시각과 청각에 동시에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런데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은 헬렌켈러와 같은 사람(시각과 청각에 장애를 가진 사람)이 우리 대한민국에도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대한민국에 시청각장애인이 몇 명이나 있는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다. 그래서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시청각장애인은 대한민국에서 제대로 된 관심과 지원을 받지 못해 소외되어 있다. 이렇게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대한민국 시청각장애인의 권익을 옹호하고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분주히 활동하고 있는 곳을 소개하려고 한다. 밀알복지재단 헬렌켈러센터를 방문했다.
해외와 비교되는 대한민국의 현실
미국에서는 시각과 청각에 동시에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경우, ‘Deaf-Blind’라고 한다. 1967년 시청각장애인을 지원하기 위해 「헬렌켈러법」을 제정했고, 1970년에는 헬렌켈러국립센터를 설립하여 시청각장애인에게 다양한 사회지원을 하고 있다. 이 외에도 시청각장애인 협회(Deaf-Blind Association) 등 시청각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기관과 단체에서 시청각장애의 특성에 맞춰진 다양한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시청각장애인을 ‘맹농인’으로 지칭하고 있으며, 정부에서 직접 맹농인 지원정책을 마련하고 전문 통역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매뉴얼을 두고 있다. 또한 1991년 전국맹농인협회(동경도맹농인친우회) 설립을 통해 시청각장애인의 의사소통을 지원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매년 시청각장애인이 중심이 되는 전국대회를 꾸준히 개최하며, 시청각장애인들의 교류를 활성화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반면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앞서 미국과 일본의 역사와 실태에 비교해 본다면, 냉정히 대한민국의 시청각장애인에 대한 현실은 70~80여년 뒤쳐진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국내 시청각장애인의 현황에 대해 밀알복지재단 헬렌켈러센터(아래 헬렌켈러센터) 홍유미 팀장이 설명했다.
“우선 ‘시청각장애인’이라는 용어도 아직 국내에서 통일된 명칭은 아니라고 봅니다. 미국의 Deaf-Blind나 일본의 맹농인처럼 오래 전부터 하나의 장애유형으로 인정받은 게 아니기 때문에, 분명히 존재함에도 우리 「장애인복지법」에 규정되어 있는 15가지의 장애유형에 시청각장애는 없습니다. 그래서 보건복지부에서 하는 장애인 실태조사에서 제외되고 있으니까 시청각장애인이 우리나라에는 몇 명이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운 거죠. 저희 헬렌켈러센터 홍보지에는 국내에 약 5,000~1만 명의 시청각장애인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나와 있거든요. 어디까지나 추정이지만, 앞으로 시각장애만 가지고 있다가 청각장애를 추가로 가지게 되거나, 반대로 청각장애만 가지고 있다가 시각장애를 추가로 가지게 되는 경우처럼 시청각장애는 앞으로 얼마든지 증가할 수 있는 장애유형입니다.”
헬렌켈러센터에서 정의하고 있는 시청각장애란, ‘시력 및 청력의 기능을 동시에 상실하여 시각, 청각 감각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장애’다. 홍 팀장의 말처럼 시각장애나 청각장애만을 가지고 있다가 나머지 장애를 추가로 가지게 되어 시청각장애인이 될 수도 있고, 헬렌켈러처럼 시각과 청각에 한꺼번에 장애를 가질 수도 있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당장 내일 시청각장애를 가질 수도 있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하나의 장애로 인정하고 있는 장애를 왜 대한민국에서는 아직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걸까?
“지금 시청각장애인에 대한 지원을 규정하고 있는 법률은 얼마 전에 개정·시행되고 있는 「장애인복지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개정안에서 정한 내용은 시각장애인을 지원하고 있는 조항의 말미에 시청각장애인 지원에 관한 내용을 추가하는 데 그치고 있습니다. 시청각장애인만을 위한 단독조항이 아닌 거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 시청각장애인을 시각장애인의 연장선상으로 보는, 그러니까 시각장애인과 비슷한 장애유형으로 간주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거든요. 그 외에 많은 사람들은 시청각장애가 있으면 시각장애인에 대한 규정 또는 청각장애인에 대한 규정을 적용받아서 지원받으면 되지 않냐고 하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두 가지 장애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장애인에게 한 가지 장애에 대한 지원을 하고 있는 규정만으로는 결코 원활한 지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헬렌켈러센터는 시청각장애인만을 지원하기 위한 단독법인 「시청각장애인 지원에 관한 법률(일명 헬렌켈러법)」 제정을 위한 활동도 하고 있다. 시청각장애인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법안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시민들에게 법안 제정에 대한 동의 서명을 받아 국회에 전달하기도 했고,지난해에는 법안에 시청각장애인 당사자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고자 당사자들이 중심이 된 ‘법안 제정을 위한 토론회’를 다섯 차례에 걸쳐 운영하기도 했다.
함께 해봐야 시청각장애를 알 수 있다
헬렌켈러센터는 시청각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점자교실, 촉각치료교실 등을 통해 시청각장애인의 교육을 받을 권리는 물론 일상생활을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도 시청각장애를 알리고 그에 대한 인식개선을 위한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시청각장애인과 함께하는 프로보노 캠프’다.
“이 캠프는 2019년 7월에 2박3일동안 시청각장애인들과 서울대학교 로스쿨 학생들이 함께 했던 자리였어요. 사실 준비하면서 걱정이 많았어요. 학생들은 수어를 전혀 모르니까, 시청각장애인들과 의사소통부터 원활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캠프 자체가 제대로 될 수 있을지 걱정이었죠. 원래 시청각장애인과 함께 모임이나 행사를 하게 되면 통역해줄 사람(통역사)을 꼭 시청각장애인 옆에 있게 하는데, 캠프에서는 시청각장애인과 촉수어통역사, 학생끼리 한 조를 짜긴 했어요. 하지만 촉수어통역을 최대한 줄이고 시청각장애인과 학생이 직접 소통하며 교류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졌어요. 첫날엔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까 우왕좌왕하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참여자 한 분이 그냥 시청각장애인들이 평소 모임할 때처럼 통역사를 통해 의사소통을 지원하게 하고, 학생들은 그걸 참관하면서 시청각장애를 이해하는 쪽으로 캠프를 진행하자고 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처음 준비했던 대로 진행했어요.”
통역사를 통한다면 의사소통에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그렇게 한다면 학생 입장에서는 시청각장애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학생들이 캠프에 ‘참관’을 위해 온 것도 아니었을 테니까. 그래서 홍 팀장이 애초 계획대로 캠프를 진행한 건 결과적으로 학생들이 직접 시청각장애인과 ‘몸으로 부딪히며’ 시청각장애를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학생들이 수어를 하지 못하더라도 하고싶은 말을 시청각장애인의 손바닥에 글로 적어서 의사를 전달하고, 시청각장애인도 학생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시간은 걸리더라도 천천히 새로운 인연을 알아갈 수 있게 된다.
2019년 7월 밀알복지재단과 서울대 로스쿨이 주최한 '시청각장애인 복지입법 프로보노 캠프'에서의 단체사진, 카누 체험, 세미나 모습(위부터 순서대로)
“캠프를 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학생들도 조금씩 시청각장애에 대해 알아갔어요. 특히 캠프
마지막 날 정말 뜻깊은 모습이 있었어요. 캠프 오리엔테이션에서 시청각장애인과 인사하는 방법을 알려줬었거든요. 마지막 날 다같이 캠프장소에서 서울로 오는 길에 중간에서 시청각장애인 한 명이 먼저 내리게 되었는데, 버스에서 자고 있던 학생들이 모두 내리더라고요. 그래서 헤어지게 된 시청각장애인 앞에 학생들이 일렬로 쭉 서서 한명씩 인사를 했어요. 그 시청각장애인의 손바닥에 본인의 이름을 적어서 누구인지 알려주고 포옹을 하면서 작별인사를 했어요. 한명한명 인사하는 모습이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시청각장애에 대한 이해가 있기에 가능한 모습이거든요. 저는 이렇게 무엇이든 함께 해보면 결국에는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프로보노 캠프에는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법안이 왜 필요한지 관련 분야 변호사의 강연도 있고 시청각장애에 대한 이론적 교육도 있었지만, 결국 가장 알차고 의미 있는 시간은 시청각장애인과 학생이 ‘직접’ 함께 무언가를 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이론적인 교육을 통해 지식을 습득한다고 해도, 실전에서 직접 해보는 것보다 더 좋은 경험은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사태로 이런 캠프가 최근에는 열리기 힘들지만, 이렇게 시청각장애인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이 자주 추진되어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시청각장애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주어지면 좋을 것 같다.
시청각장애인에게도 비밀이 보장돼야 한다
헬렌켈러센터에서 최근에 했던 사업 중 또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것은 시청각장애인의 ‘투표할 권리’ 실현을 위해 통역지원을 한 것이다. 시각과 청각에 동시에 장애를 가지고 있는 시청각장애인은 분명히 투표권을 가진 국민이지만, 투표를 할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는지, 집에서 그곳까지는 어떻게 가는지, 투표에 참여하는 절차는 어떻게 되는지 등의 과정을 혼자서 하기엔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비밀투표가 보장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투표용지가 보이지 않고 전달해주는 말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옆에서 누군가가 투표하는 것을 지원해줘야 한다. 결국 시청각장애인이 누구에게 소중한 한 표를 던졌는지는 옆에서 지원해주는 사람이 보게 될 수밖에 없다.
2020년 4월 제21대 총선에서 시청각장애인(오른쪽)이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촉수어 통역지원을 받고 있다.
“시청각장애인이 혼자 투표소를 찾아서 들어가기가 쉽지 않으니까, 선거관리위원회 등 현장 관계자도 촉수어통역사 등 누군가 시청각장애인과 동행하여 투표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줬어요. 다양한 보조기기같은 것을 사용하더라도, 결국에는 시청각장애로 인해 누군가의 지원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인 것 같았어요. 그래서 시청각장애인에게는 비밀투표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럼 시청각장애인에게도 어떻게 하면 비밀투표가 보장될 수 있을지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게 돼요. 다양한 방법으로 고민도 하고 연구하고 있는데,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에서는 우리 시청각장애인들도 국민으로서 보장되는 비밀투표로 소중한 권리를 당당히 행사할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비록 비밀투표가 보장되지 않는 아쉬움은 있지만, 시청각장애인에 대한 투표권 행사에서 헬렌켈러센터가 통역지원을 제공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국민으로서 당연히 투표권을 행사하고 싶어도 시청각장애로 인해 정보접근에 어려움이 많았던 현실을 감안한다면, 옆에서 누군가가 통역을 지원해준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남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처음부터 완벽하게 모든 것을 지원해 줄 수는 없다. 헬렌켈러센터의 이번 첫 시도를 통해 개선방안을 모색하여 앞으로 시청각장애인이 가진 국민으로서의 권리가 완전히 실현될 수 있도록 하면 될 것이다.
완전한 사회통합을 희망합니다
시청각장애인 중에서도 최중증인 경우, 즉 전혀 보지도 못하고 전혀 듣지도 못하는 ‘전맹전농’ 시청각장애인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교육을 받을 권리는 고사하고 일상생활조차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에 많고 많은 장애인 거주시설조차도, 시청각장애인의 장애특성을 반영하여 생활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그야말로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사람이 바로 시청각장애인인 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위한 관심과 인식개선, 그리고 제도적 지원의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헬렌켈러센터를 통해 촉각치료를 받고 있는 시청각장애아동의 모습
“그동안 헬렌켈러센터에서 일하면서 우리나라의 시청각장애에 대한 인식이 너무 부족하다는 걸 절실히 느끼곤 해요. 시청각장애는 정도가 심한 장애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심한 장애라고 느끼지 않는 것 같기도 하거든요. 안 보이는 것과 안 들린다는 것이 함께 있다는 게 얼마나 힘든 건데…. 사업을 하면서 속상할 때가 많았어요. 아무래도 시청각장애와 관련한 대부분의 사업이 헬렌켈러센터에서 처음으로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다양한 연구원들로부터 자문도 받고 각종 기관들과 협업도 많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하는 분들도 시청각장애에 대한 인식이 정말 부족하다는 걸 느낀 적이 많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시청각장애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활동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시청각장애’라고 하면 아직 잘 모르는 분위기지만, ‘헬렌켈러’하면 어떤 장애인지 금방 이해할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센터의 이름도 ‘헬렌켈러센터’로 지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외국의 특정인물의 이름을 가져와서 기관의 이름을 짓기보다 우리 고유의 특성을 살린 이름이 훨씬 더 좋지 않을까? 헬렌켈러센터의 활발한 활동을 통해 대한민국에도 시청각장애인협회나 센터, 연합회 등의 기관이나 단체가 설립되길 염원한다. 그래서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으며 우리 주변에도 언제든지 존재하고 있음에도 외면받고 있는 대한민국 시청각장애인들이 집 밖으로 나와서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길 기대한다.
“장애인의 생애주기별로 맞춤형 서비스 제공을 통해서 완전한 사회통합을 이루는 게 우리 밀알복지재단의 목표거든요. 그래서 헬렌켈러센터도 시청각장애인의 생애주기별로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해서 완전한 사회통합을 이뤄나갈 겁니다. 처음 영유아기 때부터 촉각치료, 음악치료 등의 치료사업을 확대하고, 성인기에는 교육이나 문화체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획을 갖고 있거나 추진 중에 있습니다.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서 우리 주변에 있는 시청각장애인들을 발굴하는 노력을 지속할 거구요. 시청각장애인이 직업재활 등 자립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에 맞는 연구도 꾸준히 진행할 예정입니다. <함께걸음> 독자 여러분도 저희 헬렌켈러센터의 활동과 시청각장애에 대해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작성자글. 박관찬 기자 ⊙ 사진제공. 밀알복지재단 헬렌켈러센터 cowalk1004@daum.net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