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 소리, 웃음소리, 환호성⋯, 이곳은 장애인아카데미
함께 사는 세상
본문
한 공간에서는 조용한 분위기 속 종이에 펜 잉크가 묻는 소리만이 작게 들려오고, 또 다른 공간에서는 ‘영차영차’ 뭉친 몸을 늘리느라 곡소리가 들려온다. 또 한쪽에서는 살아있는 개구리의 점프에 ‘오!’하고 일체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학교일까, 학원일까, 아니면.. 놀이터일까? 영등포의 회색 건물들 사이의 눈에 띄는 파란 대문 건물로 들어가면 장애인 당사자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있는 공간인 장애인아카데미가 있다.
장애인들이 웃고 떠들 수 있는 공간
비장애 시민들과 함께하기 위한 시도
<함께걸음>을 꾸준히 봐 온 독자라면 장애인아카데미는 이미 익숙한 곳일지도 모른다. 지난 399호부터 404호까지 코너 ‘내맘대로 크레파스’에 실렸던 그림을 그린 작가들의 활동 공간이 바로 이곳 장애인아카데미이기 때문이다.
장애인아카데미는 인근 교회에서 열리는 바자회에 참여해 발달장애 당사자들이 직접 음식과 물건을 판매하며 지역 사회와 교류해 오고 있다. 또 당사자들이 준비한 공연을 직접 무대에 올리기도 한다. 지난해 11월에는 영등포 타임스퀘어 전시장에서 발달장애인들이 직접 그린 그림으로 <그림으로 하는 소통> 전시회를 열어 시민들과 접점을 더욱 넓혀가고 있다.
△ 전시회 <그림으로 하는 소통>에 찾아온 시민들
처음부터 이러했던 것은 아니다. 2016년 설립 당시에는 장애인들의 자립생활과 학업 보완을 위한 교육 활동을 주력했다. 그러다 영등포 내 발달장애인들이 서로 교류하며 다양한 활동을 통해 자신감을 키우고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당사자와 부모의 요청이 있었다. 이에 따라 댄스, 뷰티, 스트레칭 등 당사자들이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사회적 소통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수업을 신설하였으며, 수학, 과학, 한국사 등 교과목 수업도 병행하고 있다.
복지 이해도 보다 장애인을 즐겁게 하는 강사 우선
수업을 통해 개개인의 특성을 이해하며 교사도 성장
“지선 님 오늘은 왜 이렇게 집중을 잘하세요? 소리도 안 내고! 기자님이 사진 찍고 있어서 그런가? (웃음)”
“아 아니, 원래 그러잖아요!”
체육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장애인아카데미의 교실에서 따뜻하고도 재밌는 대화가 오간다. 오늘따라 유난히 수업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홍지선 씨의 낯선 모습은 강사와 다른 수강생들의 얼굴에 웃음을 자아낸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 서로 간단한 안부를 묻고 지난주와 달라진 상대방의 용모를 눈치채고 먼저 말을 거는 모습도 있다. 장애인아카데미에서는 평균적으로 몇 년씩 강의를 이어오는 강사가 많다. 오랜 시간 함께하다 보니 서로를 더 잘 이해하는 관계로 발전해 왔다.
장애인아카데미는 외부에서 강사를 초청하고 있다. 보통 강사를 섭외하는 기준이라면 높은 학력, 강의 경력 등을 따지기도 하는데 장애인아카데미는 남달랐다.
이진 상임이사는 “강사를 섭외할 때 사회복지를 전공했는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냥 그 수업이 진행되는 한 시간 동안 당사자들을 재밌게 해줄 사람이 가장 좋다고 생각해요. 살갑게 대하고요.”라고 설명했다.
아카데미에서 생물과학 과목을 맡아 진행하는 서해덕 강사도 설명을 보탰다.
△ 생물과학 과목에서 개구리를 관찰하고 있는 장면. 서해덕 강사(오른쪽)가 설명을 돕고 있다.
서 강사는 “저는 발달장애인 분들 대상으로 진행하는 수업은 장애인아카데미에 와서 처음인데, 장애인이라서 그 사람을 이해한다기보다는 그냥 그분만이 가지는 특징과 성격을 이해했던 게 저의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이 당사자분은 무슨 역할이 주어졌을 때 흥미를 느끼고, 어떤 것들에 관심이 있는지 알게 되니 강사로서 수업을 진행하는 데 더 열정을 다하게 되지요.”라며 말했다.
그러면서 “발달장애인 분들과 소통하면서 다른 곳에서 강의할 때 자신감도 얻어요. 어떻게 수강자한테 집중력을 이끌어 내면 좋은지도 배우고요.”라고 자신도 수업을 통해 성장한다고 설명했다.
의사소통 어려운 자폐성 장애 ‘아카데미 가는 날’은 정확히 발음
단순 그림 그리기가 아닌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내용 추가해 교육
미술 수업을 듣는 박경민 씨는 옆에서 다른 사람이 “경민아 뭐 그리니?”하고 물어봐도 그림에만 몰두한다. 그림 그리는 게 질리지도 않은지 수업이 끝난 후 어머니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가만히 그림만 그렸다. 경민 씨의 어머니 최선희 씨는 “경민이는 자폐성 장애가 있어서 평소에도 짧은 단어로만 말할 수 있어요. 대화는 거의 어렵다고 봐야죠. 근데 경민이가 아카데미 수업 전날만 되면 ‘내일은 아카데미 가는 날!’하고 신나서 이야기해요. 아카데미를 진짜 좋아해요.”라며 경민 씨의 장애인아카데미에 대한 애정을 대신 설명했다.
△ 그림에 집중하고 있는 박경민 씨
자폐성 장애 당사자가 대부분인 미술 과목은 다른 과목과는 사뭇 다르게 조용한 분위기로 수업이 이루어졌다. 장애인아카데미 직원들은 전시회도 열고, 시끌벅적한 다른 과목의 수업반들에 비해 차분하게 수업을 진행하는 그들에게 ‘아카데미의 자랑’이라고도 부를 정도다.
해당 미술 과목을 맡은 지 올해로 6년이 된 김미라 강사는 “학생(당사자)들이 한 시간 남짓 시간 동안 그냥 그림만 그리고 가는 게 아니라 아주 작은 거라도 배우고 갔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3월 첫 번째 수업에는 왜 우리가 3·1절을 기억하는지 질문하고 태극기를 그려보기도 했고, 자신이 가고 싶은 여행지가 있다면 서로 이야기해 보는 등 다양한 것들을 시도하고 있어요.”
그러나 가끔은 이런 시도들이 당사자들에게는 실제로 어떤 의미로 전달되는지 파악하기 어려울 때도 있어 허무할 때도 있다고 전한다. “저 나름대로 노력은 하는데 저만의 노력은 아닌지...”하고. 그럼에도 김미라 강사는 마음을 다잡는다.
“(미술 수업을 하는) 호재 님이 다른 복지관에서 가고 싶은 곳이 있는지 질문을 받았대요. 근데 거기서 우리 수업에서 다루었던 외국의 국기랑 그 나라의 특징들을 그분들께 말하고 그렸다는 거예요. (…) 그냥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그리는 게 아니라 이해하고 그린다는 거잖아요. 강사로서 힘이 됐던 일이었죠.”
△ 김미라 강사가 자폐성 장애 당사자와 그림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다.
처음에는 펜도 잡지 않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바빴던 이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차분해지고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그림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면서 김미라 강사는 그들도 그림을 좋아하게 된 것 같아 뿌듯하다고 설명했다.
장애인이라는 말에 대한 차가운 주위 시선, 속앓이
사회와의 거리를 좁혀가며 ‘함께 하는 기회’ 제공
발달장애인들이 장애인아카데미 안에서 다양한 활동을 통해 자신감을 얻고 사회로 나아가길 바라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다른 기관에서 “왜 굳이 기관 이름에 장애인이라는 말을 넣냐”는 말을 듣기도 하고, 발표회 같은 행사에서는 “다칠 수 있으니 저기 구석에서 있으라”는 말을 듣기 일쑤였다.
이진 상임이사는 “아카데미 안에서는 누구보다 활발하게 활동하는 분이 바깥에서는 주눅 들어 있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어요. 그런 걸 보면 마음이 아프죠.”라며 아쉬움을 전했다. 하지만 그는 덧붙였다. “그렇다고 우리가 움츠러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편견이 있으면 바꾸면 되는 거고, 결국은 우리가 계속해서 사회에 나아가고, 보여주는 수밖에 없어요.”
장애인아카데미는 이러한 편견을 깨기 위해 다양한 기회를 만들고 있다. 외부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지역사회와 협력해 당사자들이 사회 속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비장애인들은 살면서 칭찬받을 기회도 많고, 자기 효능감을 느낄 순간이 있지만, 발달장애인들은 그런 경험이 부족한 경우가 많아요. 뭘 배우더라도 혼나고 지적당하는 게 익숙해져 있죠. 그래서 처음 아카데미에 왔을 때는 위축된 모습이 많아요.” 이진 상임이사는 말했다.
“하지만 수업을 하면서 작은 거라도 칭찬받고, 자신이 그린 그림이 전시되고, 그곳에 사람들이 찾아오는 경험을 하면 조금씩 변해요. 아카데미가 그런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장애인아카데미는 지역사회와 접점을 넓히고 당사자들이 더 많은 경험을 쌓고 사회 속에서 당당히 살아갈 수 있도록 오늘도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 장애인아카데미 현판. 주변에는 아카데미에 오는 당사자들의 얼굴 그림이 그려져 있다.
작성자글과 사진. 동기욱 기자 cowalk1004@daum.net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