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 위에서 아이를 품어낸 엄마 > 사람 사는 이야기


휠체어 위에서 아이를 품어낸 엄마

사람 사는 이야기

본문

 
“휠체어를 탄 제 무릎 위에 앉아 있는 딸을 보고 마트 직원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엄마 그만 힘들게 해라.’ 그런데 아이는 대답했죠. ‘난 엄마 무릎이 제일 좋아요.’”
 
척수장애가 있는 이겨라(50) 씨의 아이들에게 휠체어는 유아차보다 더 친근하다. 엄마의 무릎은 언제나 가장 안락한 자리였고, 아이들은 여덟 살이 될 때까지도 늘 엄마 무릎을 고집했다.
 
장애가 있는 부모는 아이를 어떻게 키울까? 비장애인 부모도 아이를 낳기 전 수없이 망설이는데, 장애 부모는 그 고민이 더 깊지 않을까. 출산과 양육의 과정은 크게 다를까, 아니면 비슷할까.
 
그 질문들 앞에서 이겨라 씨는 주저하지 않았다. 두 아이의 엄마로서 그는 씩씩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엄마가 되는 건 장애와 상관없다고 생각
그러나 주변에선 철없다고 여겨
 
19살, 사고로 목 아래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게 된 이겨라 씨에게 엄마가 되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같은 척수장애를 가진 남편과 10년 연애 끝에 결혼한 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임신을 준비했다.
 
“저는 결혼을 하면 아이를 가지는 건 당연한 순서라고 생각했어요. 옛날 어른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곤 했잖아요. 저는 특히 어릴 때부터 아이를 너무 좋아했어서 큰 고민 없이 임신을 준비했는데 오히려 주변에서 엄청 말리더라고요.”
 
세상은 장애인이 부모가 되는 일을 ‘무모한 도전’으로 바라보곤 했다. ‘휠체어 탄 사람이 어떻게 애까지 키우냐’, ‘애가 나중에 커서 엄마 창피해하면 어떻게 할 거냐’,‘심지어 남편도 장애인인데 더 힘들지 않겠냐’며 가족들을 비롯해 가까운 사람들마저 걱정을 쏟아냈다.
 
그러나 이 씨의 생각은 달랐다.
 
‘내가 왜 못 키워? 엄마가 되는 건 장애와 상관없어. 사랑으로 충분히 해낼 수 있어.’ 그는 스스로에게 이 말을 여러 번 반복하며 주변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자 굳게 다짐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마음과 달리
비장애 중심의 정보와 환경으로 인한 제약과 마주해
 
그러나 막상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라는 현실의 벽은 예상보다 훨씬 높았다. 시험관 시술을 통해 아이를 갖게 된 이 씨는 임신 기간 동안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어려움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다.
 
“제일 힘든 게 배변 문제였어요. 척수장애인은 배에 힘을 못 주니까 변비와 치질을 기본으로 달고 살거든요. 임신 전에는 배를 막 쥐어짜거나 때리고, 약으로 해결하기도 했는데 아이가 뱃 속에 있으니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일부러 아침부터 우유를 엄청 마셔서 배탈 나게끔 하고 그랬어요”
 
이처럼 생각지도 못했던 몸의 변화와 사투를 벌이고 있던 중 마주한 더 큰 어려움은 어디에서도 장애인 엄마를 위한 조언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작은 정보라도 얻기 위해 컴퓨터 앞에서 종일 시간을 보냈지만, 대부분의 출산과 육아 정보는 비장애인에게 맞춰져 있어 이 씨가 참고할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산부인과에 가면 있는 그 검진 의자 자체도 사실 저한테는 엄청 불편해요. 임신 기간에 아이한테 좋다고 많이 알려진 호흡법이라든지 운동 방법도 다 비장애인에게 맞춰져 있어서 제가 참고할 게 없었어요. 그래서 그냥 저는 많이 안 움직이고, 덜 먹는 방법을 택하기도 했어요. 아기 낳고 나서도 산후조리원에서는 위생 문제 때문에 휠체어가 수유실에 못 들어가서 모유수유도 못하고, 아기 침대나 유모차도 저한테 맞는 걸 찾기가 정말 어려웠어요.”
 
그러면서 이 씨는 자신의 출산은 이제 끝났지만 다른 장애 여성들을 위해서라도 임신 준비 단계부터 양육 과정까지 체계적으로 상담 등을 지원해 주는 제도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친정엄마 도움 없이 불가능했던 육아
자책과 무력감이 찾아왔던 시간들
 
아이가 신생아일 때는 사실상 이 씨의 친정엄마가 육아를 전담했다. 목욕이나 기저귀 갈이는 손의 움직임이 자유로운 친정엄마와 남편이 전적으로 맡을 수밖에 없었다.
 
“저희 엄마가 정말 많이 도와주셨어요. 친정엄마가 도와주신 덕분에 그나마 제가 일도 나가고 그랬는데 한편으로는 가장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시기에 엄마인 제가 아기한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죠.”
 
누군가는 친정엄마의 도움이 편했을 거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아이의 손톱을 깎는 일, 바닥을 기어 다니는 아이와 함께 앉아서 노는 일은 손에 마비가 있는 휠체어 탄 엄마에게 꿈 같은 일이었다. 이 씨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아이가 잠들었을 때 침대 옆에 다가가 눈을 마주치고, 침대를 흔들어주는 게 전부였다.
 
“제가 다치기 전에는 사촌 동생을 제가 거의 다 키웠거든요. 그 정도로 육아에 자신 있었고 아기를 참 좋아했는데 제 생각만큼 자식들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내가 다치지만 않았더라면, 사고만 안 났더라면.. ’ 이런 스스로를 탓하는 생각들을 하면서 많이 미안해하고 종일 울기도 하고 그랬었어요.”
 
자신의 장애를 탓하며 무력감이 깊어진 까닭에 이 씨는 둘째를 낳는 데도 긴 시간이 걸렸다. 또 다시 그때의 좌절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아이를 세상에 혼자 남길 수 없다’는 불안이 결국 둘째를 낳게 만들었다.
 
“둘째 낳으면 친정엄마가 또 돌봐주셔야 하니까 정말 고민을 많이 했었어요. 엄마도 그 사이에 연세도 많이 드시고 해서.. 그래도 혼자 보다는 둘이 낫겠다는 얘기를 엄마도 하셔서 낳았는데 첫째 때 겪었던 그 무력감을 더 심하게 겪게 되더라고요. 제가 못한다는 걸 두 번째로 깨달으니까 내가 왜 그랬을까 싶고...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면 둘째 낳은 건 너무 잘한 것 같아요. 아들은 딸이랑 또 다른 매력이 있더라고요(웃음).”
 
아이에게 엄마의 장애가 특별하지 않도록
아이 곁에서 나답게 살아내는 삶을 보여줘
 
△ 이겨라 씨와 두 자녀들의 사진
 
아이들이 세 살쯤 되자, 육아의 주도권은 온전히 이 씨의 몫이 되었다. 아이들은 휠체어 바퀴를 잡고 엄마 무릎에 오르는 법을 터득했고, 엄마의 품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놀이터가 되었다.
 
“죄책감 때문에 힘들었던 시간이 지나니까 이제 제가 아이들을 위해서 무언가 해줄 수 있는 시간들이 찾아 온 거예요. 정말 기뻤어요. 무엇이든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이 씨는 아이들의 학교 행사, 학부모 모임을 모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대부분의 어린이집에 엘리베이터가 없었지만, 이 씨는 선생님들께 부탁해서 어떻게든 행사장에 가고자 최선을 다했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선생님들께서 저를 들어 올려주셨던 기억이 나요. 엘리베이터가 없어 죄송하다면서 매번 올려주셨는데 감사하죠. 근데 사실 저도 그 경험이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거든요. 우리 아이도 엄마가 들려서 오는 게 속상할까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아이 입장에선 엄마가 들려오든 걸어오든 어떻게 오든 그 행사에 오는 게 중요한 거였어요. 제가 갈 때마다 좋아하는 아이 얼굴을 보면서 어떻게든 안 빠지고 가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 씨는 같은 동네의 학부모들을 집으로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자 노력했다. 또한 그는 아이 곁에서 엄마로 살아내는 동시에 자신의 삶도 포기하지 않고 탁구선수로서의 생활과 대학 공부도 놓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특별히 무언가를 더 잘해주려 하기보다 자신의 삶을 자신감 있게 살아내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이겨라 씨의 탁구선수로서의 활동 모습
 
“제가 애 낳기 전에 주변에서 걱정했던 것처럼 제 아이들이 부모의 장애를 부끄러워하거나 숨기고 싶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저는 그게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걸 계속 생각하는 대신 아이들에게 부모가 자기 삶을 멋지게 잘 살아내고 점점 더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어차피 세상에 완벽한 부모는 없다
장애유무를 떠나 아이들에게 부모는 우주
 
이 씨는 자신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용기’로만 비치지 않기를 바란다.
 
“저는 특별히 대단한 걸 한 게 아니에요. 그냥 다른 부모처럼 아이 낳고 키운 거예요. 다만 제 몸이 조금 불편하다 보니 방식이 달랐을 뿐이죠.“
 
그는 부모라면 누구나 아이 앞에서 부족함을 느끼고, 미안한 순간을 겪는다고 말한다. 다만 그 모습 속에서도 아이는 부모를 전부로 받아들인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보다 아이들은 훨씬 강하게 잘 자라요. 아이는 엄마의 장애를 먼저 보는 게 아니라, 그냥 ‘엄마’라는 존재 자체를 바라본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 씨는 언젠가 자신의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엄마의 삶을 되돌아볼 때, “엄마는 자기 삶을 끝까지 꿋꿋하게 살아냈다”는 기억이 남기를 바란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완벽하지 않아도, 부모는 언제나 아이들의 우주이자 삶을 지탱하는 근원적인 힘이니까. 
 
작성자글. 김영연 기자 / 사진제공. 이겨라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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