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할 때 포기하더라도, 일단 도전해 보고 결정하세요 > 사람 사는 이야기


포기할 때 포기하더라도, 일단 도전해 보고 결정하세요

문화예술가 조우리

본문

 
 
편집자 주 : 신체적·정신적 장애를 가진 대한민국 국민의 권익과 인권의 재정립을 위해 설립된 사단법인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첫 번째 사업으로 추진했던 게 바로 월간 <함께걸음>의 창간이었다. 그 <함께걸음>의 창간 초기부터 월간지의 구심점을 담당했고, 가장 가독성 높게 평가받았던 지면이 ‘사람 사는 이야기’였음을 기억하는 독자들이 지금도 적지 않다. 2019년 7월을 끝으로 잠시 중단됐던 그 만남의 연재를 다시 부활한다. 인권과 권익의 모든 핵심은 ‘사람’이 중심임을 되새기며, 사람 중심의 ‘사람 사는 이야기’ 문을 다시 열어놓는다.
 
 
당당하다. 대화 내내 머뭇거림이 없다. 아니면 아니라고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대안과 결론을 또렷하게 제시한다. 이런 대화의 문답 앞에서 ‘장애’라는 두 글자는 불필요한 수식어가 될 뿐이다. 이렇게 자신의 인생길을 올곧게 나아가는 이를 만나면, 언제나 배울 점이 몇 가지씩 생겨난다. 펼쳐놓고 읽는 책문장 여기저기에 밑줄을 긋게 되듯이 말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하고자 했던 일은 거의 다 이루었다는 이를 만났다. 그걸 더 열심히 다지며 완성해야 하고, 남은 게 있다면 외국 어딘가를 전동휠체어와 함께 종주하고 싶다는 꿈을 구체화시키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실현될까? 반드시 실현될 것 같다. 그리고 그 꿈의 현실화 이후의 세상은 완전히 새로운 창작으로 펼쳐질 것 같다. 이번 <함께걸음>은 문화예술가 조우리 씨와 함께한다.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
웃자고 시작한 첫 질문은 ‘주량’이었다. 난데없는 물음에 한참 동안 웃음 짓던 그는 소주 한 병이라고 털어놨다. 좋아하는 안주는 회 종류란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오면 그 내용 그대로 술자리를 가져보자 했더니, 0.5초 만에 돌아온 대답은 ‘오케이!’였다.
고향은 충북 제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는 충주에 있던 시설에서 지내면서 시설 안에 있던 학교를 다녔단다. 시설생활은 모두 12년. 그렇다면 ‘탈시설’이라는 개념으로 나오게 된 걸까? 그건 아니란다. 고등학교 3학년까지 마친 뒤엔, 다른 곳 어디로 연결할 건지를 결정할 선택이 주어졌다고 한다. 집으로 갈 건지, 다른 시설로 옮길 건지, 일단 그 시설에서는 나와야 하는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집을 결정했단다. 당시까지는 대학에 갈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재택근무로 1년을 일하게 됐는데, 1년의 개인생활 끝에 얻게 된 결론은 대학진학이었다고 한다. 전공은 국어국문학, 복수전공으로 사회복지학을 선택했단다.
“사람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분명하게 나누어져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원래 하고 싶었던 건 미술 쪽이나 디자인 쪽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직접 실기작업은 할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게 된 뒤, 머리로만 할 수 있는 분야를 찾다 보니 국어국문학과를 가게 됐죠. 솔직히 정말 하기 싫었던 것 중의 하나가 사회복지학이었어요. 제가 그 현장에 직접 있었으니까요.”
12년의 시설생활이 존재한다는 것, 이론이 얼마나 공허한지, 이론은 정말 이론뿐이라는 걸 그는 몸소 체험한 입장이다. 그런데 왜 복수전공으로 받아들였을까?
“아…, 거기에서 정말 당해선 안 될 수모들,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정말 하기 싫었어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제가 가장 잘 아는 게 그 곳의 일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학문의 영역으로 ‘할 수 있는’ 게 사회복지학이겠다는 결론이 났던 거죠.”
그런데 원래의 끼는 감추거나 묻어둘 순 없었던 모양이다. 조우리 씨는 다시 편입을 해서 문화예술경영학과를 지금 전공하고 있다고 한다.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휴학 중이라는데,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분야이고 실제 하고 있는 일이기에 꼭 그 전공을 공부하고 싶었단다.
“제가 6,7년 전부터 충북 청주에서 운영해 오던 단체가있어요. ‘장애인문화나눔놀이터’라는 단체인데, 연극 위주이고요. 영화도 찍고 밴드 활동도 하는 문화예술 단체예요. 운영을 하다 보니 모르는 부분들이 계속 생겨나서,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거든요. 이번에는 정말 제가 하고 싶은 일, 제가 하고 싶은 전공을 하고 있는 거예요.”
시설에서 초중고를 마쳤다면, 대학은 ‘비장애’ 중심인 처음 만나는 새로운 세상이 된다. 그는 좋았단다. 아무도 모르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런지, 사람 사는 맛을 느낄 수 있었던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마주 앉아 듣다 보니, 그가 다녔고 그가 했다는 모든 일들이 전부 그의 ‘선택’으로 결정되고 시작된 것 같았다. 시설에서 집으로, 집에서 대학으로, 두 가지의 전공 공부도, 문화예술단체 운영도, 청주에서 서울로 올라온 것도, 다시 편입해서 정말 하고 싶은 전공에 다시 도전한 것도 모두 그의 선택이 맞았다. 이건 살아가는 그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암시 같았다. 답은 곧장 이어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잖아요. 저는 확신해요. 후회를 하더라도 해보고 나서 후회를 하는 것과, 안 하고 후회를 하는 거는 전혀 다른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후회를 하더라도 직접 나와서 하고 싶었던 거를 해보고 직접 경험하고, 그러고 나서 후회를 하는 게 어떻겠는가 말씀드리는 거예요.”
 
 
↑ 장애인문화나눔놀이터의 두드림밴드 음악회 현장 모습 ⊙사진제공. 조우리
 
 
후회를 하더라도 할 것을 하고 나서
그는 선천성 뇌병변장애라고 했다. 부모님은 백일 때가 돼서야 알게 되셨다고 한다. 쌍둥이 중 언니였는데, 쌍둥이인 만큼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비교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는 아주 나중에야 듣게 됐단다. 자신에게 신경을 써야 한다고, 부모님은 그 밑으로 더 이상 동생을 낳지 않으셨다는 것…. 이 말과 함께 그의 입술은 잠시 다문 채로 머물러 있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데, 여덟 살 정도 됐을 때 제가 가장 바라던 점이 있었어요. 나이는 더 먹어도 몸은 안 컸으면 좋겠다는 거. 제 몸이 커지면 커질수록 도와주는 부모님이 힘들어지시잖아요. 어릴 때는 되게 조그맣고 말랐다는데, 그런데도 그때부터 그런 생각을 꾹꾹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것 같아요.”
또 생각나는 게 있단다. 여덟 살 때 동생한테는 입학통지서가 왔는데, 그걸 받지 못한 그는 부모님께 계속 강하게 말씀드렸다고 한다. 학교에 가고 싶다고, 나도 공부를 하고 싶다고, 동생만 받아보는 학습지를 나도 받아서 공부하고 싶다고, 왜 안 해주냐고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은 그도 학교를 갈 수 있게 됐다면서 자동차를 아주 오래 타고 간 적이 있었단다. 그런데 자신을 혼자 두고 한참을 누구랑 얘기 나누시더니, 엄마 아빠는 집에 갔다가 일주일 뒤에 오신다고 하셨단다. 그 순간 느꼈던 두려움과 무서움이 얼마나 컸는지를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한다.
“그냥 얘기해 주시면 되잖아요. ‘네가 공부를 하기 위해서 있어야 하는 곳이다’라고요. 그때 그 말씀을 해주셨다면, 저에게도 어쨌든 선택이라는 걸 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을 거 아니에요. 좋게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지 모르는 일인데…. 지금까지도 부모님 하면 생각나는 제일 아픈 기억이 그것인 것 같아요.”
물론 남아 있는 기억이라서, 부모님과의 관계가 지금 불편한 건 아니란다. 대신 ‘공부’라는 이름의 시설생활은 정말 적응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과정 2, 3학년때까지가 가장 힘들었는데, 역으로 그 시기가 스스로의 장애를 받아들이는 기간으로도 작용했단다. 너무 어린 나이에 장애를 받아들인 것 같지만, 사실 그래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방법론을 터득한 결과가 그것이라는 설명 뒤에는 말 그대로 아픈 기억들이 뒤를 이었다.
“그때 정말 맞기도 많이 맞고 굶기도 많이 굶었어요. 지내다 보면 용변을 실수할 수도 있잖아요. 그것도 참고 참고 또 참다가 마렵다고 얘기하는 건데, 관리하는 봉사자들은 그걸 용납하지 않았어요. 저한테는 찾아오는 부모님이 계시니까 티가 안 나게 때려야 하잖아요. 발바닥을 몇 백 대씩 맞았어요. 심하게는 한겨울 욕조에 찬물을 받아놓고 아이를 담갔다가 뺐다가 하는, 그런 차별과 모멸을 겪으면서 절실히 깨달았던 게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을 위한 방법론을 정말 절실하게 찾게 됐다는 거죠.”
당시의 꿈은 의사였단다. 몸이 불편하니까 치료를 하고 싶다는 거, 그 꿈은 중학교 때까지 이어지다가 고등학교 때는 꿈이 없었다는 게 문득 떠오른다며 그는 잠시 시선을 돌렸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는 공무원 시험도 보면서 세상의 문을 두드렸지만, 결과적으로 공무원의 업무는 자신의 체질이 아님을 진지하게 깨닫게 됐다고 한다.
“이후로 참 많은 일을 했어요.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 싶어서, 자립생활센터를 만들어 잘 운영하자는 꿈도 생겼죠. 살짝 정치 쪽에 발을 담그기도 했고, 지역의 뇌병변협회 대표를 맡기도 했고, 문화놀이터 운영도 했고, 작가로 글을 쓰고 배우로 무대에 몇 년 간 오르기도 했고, 그렇게 세상 한가운데서 제 삶을 펼쳐나가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일을 하다 보니까 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생하는 게 굉장히 많더라고요. 금전상으로도, 행정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든 일들이 계속 생겨났고, 집단 내부의 불화도 끊이지 않고….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겠죠. 장애계라는 데가 모이기는 되게 힘든데, 나눠지고 갈라지기는 또 엄청 쉽잖아요. 물론 다른 세계도 다 마찬가지겠지만요. 그래서 문화예술 분야에 몰두했던 것 같아요. 가장 좋아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장애의 이해나 인식개선의 과정으로 봤을 땐 가장 효과가 크다고 판단했거든요. 이 문화예술로 세상을 바꿔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지금도 가장 크게 간직되고 있어요.”
 
 
↑ 연극무대에 오른 배우 조우리 씨의 모습 ⊙사진 제공. 조우리
 
 
이젠 먼 곳 어딘가를 종주하고 싶다
‘살짝 정치 쪽에 발을 담그기도 했다’던 그의 말이 생각의 꼬리처럼 밟히고 있었다. 무슨 정치를 얘기하는 걸까? 젊은 시절 진보진영의 후보로 시의원 선거에 나갔던 적이 있었는데, 정말 솔직하게 말한다면 그 의지는 지금도 그대로 간직되고 있단다. 문화예술로 세상을 바꾸는 것만큼이나, 정치의 영역에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욕망이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짧게는 3,4년? 늦게는 10년이 걸리더라도 다시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거창하고 복잡한 구호 같은 게 아닌, 정말로 중증장애인이 정치의 현장에 들어가야 그 절실함을 말할 수 있고 실제 고쳐나가는 게 가능할 것 같다는 거죠. 크나큰 법 제도부터 시작해서 일상의 작은 부분들의 개선책까지, 그 실천을 위해 장애인권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이 정치의 영역에 진출하는 게 시급한 과제라고 봐요. 제게도 그 도전이 준비되고 있다는 거죠.”
‘자신의 인생에서 하고자 했던 일을 거의 다 이루었다’는 말은 쉽게 꺼낼, 쉽게 듣게 될 표현이 아니다. 그런데 그는 그 말을 대화 중에 몇 차례나 반복했다. 다 듣지 못한 사적인 성취들도 물론 여럿 있었을 테니, 이제 들어야 할 건 ‘그래도 아직 남아있는 도전과 목표’의 대상이 아닐까 싶었다. 질문을 들은 그의 두 눈동자가 그날 봤던 모습 중 가장 커지고 있었다.
“휠체어 네 바퀴로 국토대장정을 하고 싶어요. 되게 의미 있는 일일 것 같거든요. 저 자신을 깊게 되돌아볼 시간이 될 것 같고, 또 기술적으로 본다면 휠체어의 성능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도시에선 잘 몰랐는데 야외에서 불편한 점이 뭐가 있는지도 알게 될테고, 사용자의 몸 상태를 더 편하게 할 세세한 보완이 무엇인지, 추가로 어떤 게 더 필요한지도 실제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그는 지역에 있을 때 이미 몇 차례 도전을 해봤단다. 청주에서 대청호를 지나 속리산까지 거리상으로는 2박3일 코스였지만, 정말 얻는 게 많은 경험이었다면서 잠시 당시를 회상했다. 장애당사자들이 열다섯 명 정도, 함께한 도우미들을 모두 포함하면 서른 명 정도였는데, 숙식이 미리 준비됐고 후원도 받은 여정이라서 ‘대장정’이라는 의미 자체에 몰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도착지가 ‘저기 보이는 저 곳’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때 밀려든 성취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어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죠. 제가 건강하게 걷는다면 이박삼일을 걸어서 간 거잖아요. 저는 휠체어가 제 다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제가 직접 걸어서 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무엇보다도 이동하는 순간순간, 눈앞에 보이는 풍경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했어요. ‘정말 뜻깊었다’는 표현 그 자체였다는 거죠. 그때의 그 감동, 그 경험, 그 기억을 이젠 국토대장정으로 완성하고 싶다는 거예요.”
그런데 조우리 씨는 잠시 말을 잇지 않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게 외국이면 더 좋을 것 같다는 것이다. 벌써부터 완성된 영상처럼 그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종주하는 대한민국의 전동휠체어 사용자의 현지여행기’ 같은 다큐멘터리도 제작될 것 같은 느낌 또한 확 다가온다. 낭만과 여유, 삶의 열정, 살아있는 대자연, 마주치는 문화유산과 이국의 정열, 거기에다가 모든 게 새로운 첫 만남일 하루하루 순간순간의 모든 감정들…. 단순한 희망사항이 아닌, 반드시 실현될 일정이 이미 생겨났음은 분명한 것 같다. 남은 건 일정 조율 정도라고 할까?
“제일 가고 싶은 데는 해변가, 해안도로예요. 넓게 탁 트인 느낌, 그런 걸 직접 체험하고 싶다는 거죠. 지명은 기억나지 않는데, 일본에서 그런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어요. 조금 높은 절벽 같은 데서 바다의 모든 걸 아래로 내려다봤던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의 그 벅찬 인상이 지금도 그대로 간직되고 있어요. 이번에도 어딘가를 종주하게 된다면, 저는 그 도착지가 해변으로 정해지면 좋겠어요.”
긴 대화의 자리를 정리하며 ‘자기 자신’한테, 또한 ‘누군가’한테 꼭 전하고 싶은 한마디가 있으면 남겨 달라 했다. 사소한 내용이라도 괜찮겠냐는 질문이 되돌아왔다. 다 좋다고 했더니 조우리 씨는 늘 생각하던, 지인들에게 강조하던 자신의 의견으로 마무리를 하고 싶다 했다.
“솔직함이라는 거, 보여지기 위한 솔직함이 아니고 정말 솔직함이면 좋겠어요. 일반 사람들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장애를 가진 모든 분들도 마찬가지예요. 다들 똑같거든요. 저 같은 경우는 도움을 받는 게 참 익숙한 사람 중 한 명이에요. 손 다리 양쪽 다 못 쓰니까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런 저를 남들이 볼 때, ‘뭘 저렇게 당당하게 도움을 받아?’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이왕 도움 받을 거 그리고 받는 거, 그러니까 받는 사람도 좋고 도와주는 사람도 좋고 뿌듯해지는, 그런 솔직함으로 연결되면 좋겠거든요. 그래야만 세상으로 나오는 게 자연스러워지고, 뭔가에 도전하는 데도 부담이 없어지는 거죠. 그래야 저의 좌우명이 모두에게 실천되는 거예요. ‘포기할 때 포기하더라도, 도전해 보고 포기하라!’ 저는 그런 인생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어요.”
 
 
 
 
작성자채지민 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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