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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웃으며 살 권리가 있어요" 박은경 작가

사람 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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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권 동화책 『보라 초록,』 글·그림 작가로 참여
마음이 답답했던 시기의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풀어내보고자
 
박은경 작가는 인터뷰 내내 자주 웃었다. 말끝이 가벼워질 대도 있었고, 대답을 고르느라 잠시 시선이 멈추는 순간도 있었다. ‘뽀글뽀글’한 파마머리 아래로 표정은 계속해서 바뀌었다.
 
박은경 작가는 2025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장애인권 동화책『보라 초록,』에 글·그림 작가로 참여했다. 동화책 속 등장하는 미미와 도도의 이야기는 그가 마음이 답답했던 시기에 겪었던 감정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주인공 ‘미미’와 그의 곁을 지키는 식물 ‘도도’. 미미는 소파에 누워 오랫동안 잠들기도 하고, 때로는 글과 그림에 몰두하며 혼잣말을 쏟아낸다. 그 곁에서 도도는 ‘미미가 아플 때도 있지만, 좋을 때도 있어. 나도 초록색일 때가 있고, 보라색일 때도 있어. 모든 식물이 그렇고 모든 사람도 그래.’라며 미미의 혼란을 슬며시 어루만진다.
 
책 속의 미미처럼, 박은경 작가 역시 정신장애 당사자로서 다양한 감정의 변화를 안고 살아왔다. 지금 그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작가이자, 정신장애 당사자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보라 초록,≫ 中, 그림의 왼쪽이 ‘미미’, 오른쪽 식물이 ‘도도’ ⓒ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어렸을 때부터 항상 그림과 함께
내게서 떨어뜨려 놓을 수 없는 존재 ‘그림’
 
박 작가는 5남매 중 막내로, 늦둥이다. 첫째와는 18살, 가장 가까운 남매와도 9살 차이가 난다. 가족들은 대부분 바빴고, 어린 박 작가를 돌볼 손은 늘 부족했다. 부모는 다섯 살 무렵부터 유치원이 끝나면 그를 미술학원으로 보냈다. 그렇게 그림은 일찍부터 그의 일상에 들어왔다. 박 작가에게 그림은 특별한 선택이라기보다 오래된 습관에 가까웠다.
 
박 작가가 그림을 그릴 때면 곧잘 칭찬이 따라왔다. 칭찬을 받으니 즐겁기도 했고, 덕분에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다. 그림에 대한 기억은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그러다 중학생이 되면서 박 작가는 미술학원을 그만두게 됐다. 부모는 그가 의사가 되기를 바랐고, 그림은 접어둔 채 수학과 영어 등 다른 교과에 집중하며 고등학교도 이과로 진학했다.
 
△ 어릴 적 박은경 작가. 박 작가는 유치원 시절부터 그림 을 그렸다(사진제공. 박은경)
 
그러던 고등학교 2학년 무렵, ‘지금의 삶이 과연 내가 원한 방향이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됐다. 질문의 답을 찾아가다 보니 삶의 여러 순간에 늘 그림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고,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한순간에 목표가 바뀌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2학년부터 미대 입시를 치열하게 준비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기에 실력을 따라잡기 위해 더욱 부단히 노력했다. 그는 당대 미술 분야의 최고로 손꼽히던 홍익대학교 진학을 목표로 삼고 삼수 끝에 도예과에 합격했다. 박은경 작가의 미술 인생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  334x242, 2024, 캔버스에 아크릴, 박은경
 
박 작가는 대학 시절의 기억을 “그림만 보면서 살았던 시간”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림을 계속 그릴 수만 있다면 삶도 자연스럽게 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 믿었다. 대학원 진학을 생각했고, 유학을 거쳐 교수가 되는 삶도 그려보았다.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한 번 쯤 상상해 보는, 비교적 정돈된 경로였다.
 
그가 떠올렸던 미래는 지금의 삶과는 다르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크게 어긋난 상상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림을 계속 그리며 살아간다는 전제만 지켜진다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라 생각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주변에서 나를 욕하는 소리가 들려
그렇게 찾아온 정신질환
 
삶이 목표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믿던 시기에, 박 작가의 일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가 대학 선배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던 때였는데, 어린 마음에 ‘내 친구들은 작품 활동하면서 다 잘 사는데 왜 나는 아직도 이 모양이지’하면서 남들과 비교하고 자책을 심하게 했어요. 비관도 많이 했고요. (…) 그즈음 처음으로 누군가 저를 욕하는 소리가 막 들렸던 것 같아요. 환청이 시작된 거죠..”
 
어디선가 나를 욕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지만, 신경쓰지 않으려 노력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읽게 된 심리학책의 말미에 실린 ‘조현병 테스트’를 해보게 됐다. ‘어디선가 당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나요’, ‘당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나요’와 같은 질문에 하나씩 체크를 해나갔다. 질문을 따라가다 보니, 책에서 제시한 기준을 넘어섰다.
 
△ 대학생 당시 박은경 작가(사진제공. 박은경)
 
박 작가는 그날로 병원을 찾아가 조현병 진단을 받았고 병원을 나오며 속으로 “아, 나 정신질환 맞구나..”라며 되뇌었다. 그림을 계속 그리며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도 쉽게 유지되지 않았다. 일상의 리듬이 어긋났고, 계획해 왔던 경로도 틀어졌다.
 
불어난 체중과 우울증에 심한 무력감 느껴
어느 날 우연히 알게 된 동료상담가
정신장애계에 발들이며 다시 활력을 되찾다
 
박 작가는 미술을 비롯해, 하던 일을 모두 멈췄다. 약의 부작용으로 급격하게 무기력해졌고, 40kg대였던 체중은 90kg으로 늘었다. 갑자기 변해버린 자신의 생활에 비관하다 우울증도 찾아왔다.
 
그래도 생활에 필요한 돈은 스스로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닥치는 대로 마트 종업원과 식당 일을 했다. 하루하루를 버티는 데 집중해야 했던 시간이었다. 퇴근하고 나면 몸이 지치고 힘들어 매일매일을 해오던 미술 일은 물론, 펜을 잡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시기였다.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 ‘너는 미대 나왔다며? 왜 그림 안 그리고 여기서 이런 일을 하고 있
는 거야?’라고 물어보아도 선뜻 그 이유를 말하기가 어려웠어요. 내 질환에 대해 설명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니까요. 그러니까 속으로 더 괴롭고, 혼자 삭히기를 반복해야만 했었죠.”라고 회상했다.
 
“우울증이 있을 때도 항상 밖에서는 웃으려고 했어요. 아마 항상 웃고 있었으니까 제게 정신질환이 있다는 걸 모르던 사람들도 있었을 거예요. 밖에서는 그렇게 웃으며 지내고 집에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력하게 지내고, 제 자신을 비관하고, 안 좋은 생각들만 하면서 지냈죠. 그 기간이 자그마치 8년이에요.”
 
그렇게 자신을 비관하던 삶에서 전환점은 거창하지 않았다. 그는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송파정신장애동료지원센터가 올린 정신장애 동료지원가 모집 홍보 게시물을 보게 되었다. 홍보글에 적힌 ‘정신질환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들어주면 된다’는 문구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질환과 어려움에 대해 말하지 못해 답답했던 박 작가에게 더할 나위 없이 흥미로운 일이었다.
 
동료지원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그는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작은 변화라고 생각했지만, 그 무렵부터 접어두었던 글과 그림도 다시 손에 잡히기 시작했다. 센터 사람들은 그가 예전에 미술을 전공했다는 이야기에 연말에 서로에게 나눌 크리스마스 카드를 직접 그려보지 않겠냐고 제안해 왔다.
 
“너무 오랜만에 그림을 다시 그리게 된 거예요. 몇년만이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실력도 예전 같지 않고(웃음). (…) 그래도 그림을 그리니 좋더라고요. 옛날 행복했던 기억들도 되살아나고 설레기도 하고요. 그렇게 제 인생에 끊겼던 작품 활동이 다시 시작하게 된 거죠.”
 
곁에서 묵묵히 변화를 지켜봐 주는 ‘도도’
“모두가 공감하는 이야기로 기억에 남기를”
 
장애인권 동화책 《보라 초록,》은 그런 흐름 속에서 탄생했다. 외로웠던 시기를 지나 자신과 지지하고 응원하는 사람을 만나며 다시 활기를 되찾는 이야기는 《보라 초록,》 속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책의 후반부에는 미미가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 음식을 나누고, 함께 웃는 장면이 나온다. 동화책의 페이지를 넘기며 박은경 작가는 이 장면에 대해 “저도 집에만 있고 제 세계에만 있을 때보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 또 나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때 상황이 더 나아진다고 느꼈어요. 이 책을 보고 있을 당사자들에게도 ‘집에만 있지 말고, 같이 한 번 놀아보자’는 말을 전하고 싶었어요.”라며 자신의 경험을 덧붙였다.
 
“누구나 보라색일 때도 있고, 초록색일 때도 있잖아요. 항상 같은 상태일 수는 없고요.”
 
삶은 여전히 단순하지 않고, 언제나 같은 색으로 유지되지도 않는다. 다만 그는 말한다. 우리 모두는, 웃으며 살 권리가 있다고. 《보라 초록,》의 그림만큼이나 따스한 미소를 품고 박 작가는 오늘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 박은경 작가가 강사로 활동한 정신장애인 문화예술 자조모임에서 그림 전시회를 개최했다(사진출처. 박은경)
작성자글과 사진. 동기욱 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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