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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을 함께 나누면, 해답의 문이 열립니다

[사람사는 이야기] 국립춘천병원 행정주무관 이종국

본문

인생은 우연의 연속이고, 연이어지는 그 우연 속에서 하나씩의 인연이 탄생하기도 한다. 사람 간의 만남이 특히 그러하다. 만나리라고 예상한 적도 없던 ‘누군가’였는데, 더욱이 전혀 모르는 채 서로의 삶을 살아갈 인생임이 분명했을 텐데, 어느 순간 ‘우연’이 ‘인연’이 되는 ‘필연’을 거쳐 한 자리에 마주앉게 되기도 한다. 이번 ‘사람 사는 이야기’가 바로 그런 예가 되지 않을까 싶다.

어느 날 하나의 글이 <함께걸음> 편집부 기자의 눈에 ‘확’ 들어왔다고 한다. 어느 단체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지면에 담겨져 있던 한 기고자의 글이었는데, 유독 마음에 와 닿는 진솔한 내용이라서 몇 번이나 반복하며 읽게 됐던 모양이다. 긴 분량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삶을 이렇게 긍정의 시각으로 적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동으로 다가와서, 결국 그 주인공을 찾는 통화를 시도하게 됐다고 한다.

뇌병변장애 1급이라 했지만, 전화기 속 음성은 주의 깊게 들으면 다 이해가 될 만치의 발음이었다고 했다. 약속은 곧장 정해졌고, <함께걸음>의 발걸음은 그 며칠 후 강원도 춘천으로 향하게 됐다. 국립춘천병원에서 행정주무관으로 근무하는 이종국 씨가 이번 만남의 주인공이 된다. 편안한 마음으로 그의 삶에 귀를 기울여 보면, 독자 여러분 가슴에도 또렷한 ‘무언가’가 남겨질 거라 기대한다. <함께걸음>의 한 기자 마음을 붙잡았던 것처럼 말이다.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아마도

‘사람 사는 이야기’ 취재는 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눈다. 보다 더 자연스러운 환경을 만들수록 대화 내용이 진솔해진다는 오랜 경험에 따라 일부러 그런 분위기를 정착시킨 셈인데, 이종국 씨 역시 그런 방식이 훨씬 좋다며 즐겁게 반겼다. 격식 없이 편안하게, 목마르면 물 마시러 가고 전화가 오면 받고, 담배가 떠오르면 나갔다 와도 되고, 잠시의 개인적 시간이 필요하면 그것 먼저 해결하는 게 훨씬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끈다는 것 - 이번 만남은 그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이종국 씨는 대화의 시간이 좀 길어질 것 같은지 여부를 먼저 물었다.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하니까, 그렇다면 자신의 직속상관인 과장님께 인사를 함께 드리고 오는 게 나을 것 같단다. 조직사회 안에 있는 입장이라, 게다가 이제 4개월 된 ‘신참’의 티를 벗지 못한 터라 양해를 구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 건 얼마든지 ‘OK!’ 아닌가. 인사를 마치고 대화의 자리로 다시 돌아온 종국 씨의 얼굴은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바뀐 듯했고, ‘이젠 마음껏 얘기하자!’라는 기운이 맴도는 인상이었다.

“저의 부모님은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너무나 가난한 가정으로 사셔야 했다고 해요. 그만큼 형편이 많이 어려웠기에, 제대로 된 병원에서 저를 출산하지 못하고 조산원에 가서 낳게 됐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출산은 안 되고 시간이 너무 지체되다 보니까 둘 다 위험하다고, 산모와 아기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산파(조산사, 助産師)가 아버지께 한쪽을 포기하라며 말씀드렸던 모양이에요.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산모를 택하셨다는데, 그래서 산파가 저를 좀 강제적으로 시술하는 과정에서 뇌를 다치게 된 것 같아요.”

태어나는 아기의 머리는 말랑말랑하다. 그 머리를 인위적인 힘으로 잡아당겼다는 의미인 것 같은데…, 가난 때문에 병원조차 가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주위의 여러 얘기를 듣고 조산원을 택해야 했다는 대목은 정말 가슴 아프게 들어야 할 내용이었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사회적 인프라가 전혀 없었다는 의미 아닌가. 그게 머나먼 옛 과거의 얘기가 아니라,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며 정권 차원의 노래를 부르던 1980년대 초반의 현실이었다는 게 더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제가 사회복지를 공부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는 거지만, 일반적으로 장애아 부모님들이 죄책감을 스스로 많이 겪으시잖아요. 저의 어머니는 특히나 더 심하셨던 것 같아요. 가정형편 때문에 제대로 아기를 낳지 못하게 됐다는 거…. 그래서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의 인생을 정말 저 하나를 위해서 치열하게 사셨어요. 저는 형제도 없어요. 첫째인 제가 이렇게 장애를 가지고 있으니까, ‘이 아이 하나만 잘 키우자’고 결정하셨던 것 같거든요.”

‘죄책감’이라는 모정(母情)

   
 
정말 어려운 집안 형편이었던 모양이다. 단칸방에 할머니부터 부모님과 아버지 동생들, 그러니까 삼촌들까지 일곱 식구가 함께 살아야 했다니까, 옛 고전의 ‘흥부네 집’을 떠올리게끔 만드는 풍경인 것 같았다. 그런 집안 상황을 어머니께서 다 책임지고 이끌어 가셨다는데, 그 어려운 형편에서도 아들의 장애를 치료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으셨다고 한다.

“장애는 그 상태가 유지되니까 장애라고 규정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저의 부모님은 그런 걸 잘 모르시다 보니까, 고치겠다는 신념 하나로 저를 업고 몸으로 뛰며 많이 다니셨던 것 같아요.”

종국 씨 어머니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집안 정리와 가족들의 출근 준비까지 모두 마치신 후, 모두가 집을 나선 다음에 천호동의 어느 복지관까지 그를 업고 가셨단다. 1980년대 중반에 서울 창동에서 천호동까지 왕복하는 거리라면, 시내 위쪽 끝에서 아래쪽 끝에 해당될 일이다. 물리치료다 언어치료다 하는, 그런 걸 서민 입장에서 받을 수 있는 공간이 극히 드문 시절이었기에, 어머니께서는 그 먼 길을 힘겨움 무릅쓰면서 반복하며 오가셨던 것 같다. 그 ‘죄책감’이라는 모정(母情) 하나로 말이다. 게다가 그의 증상이 처음 밝혀진 이후 같이 살던 할머니께서 중풍에 걸리셨다는데, 글을 정리하면서도 마음이 참 아파지는 이런 경우는 드문 일 같다. 녹취된 그의 음성을 반복적으로 들으면서 쌓이듯 느껴야 했던 감정 때문이라 해야 할까?

“부모님, 특히 저의 어머니는 대화를 참 많이 해주셨어요. 부모님 모두 저를 귀하게 키우셨지만, 그러면서도 제가 자립할 수 있도록 지도를 많이 해주셨거든요. 제가 8살까지는 못 걸었대요. 그래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학교 가는 일 같은 모든 걸 다 도와주셨지만, 고학년이 된 다음부턴 모든 걸 저 혼자 하도록 일부러 이끌어 갔다고 하셨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같이 고생하며 동행해 주셨다는 거죠.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어요. ‘너는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너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다. 엄마 아빠가 너를 사랑하고 너를 위해서 언제까지든 이렇게 책임을 지며 함께할 테고, 네가 그 안에서 열심히 공부하며 노력하다 보면 너는 얼마든지 이 사회 안에서 정말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걸 위해서 엄마 아빠가 정말 많이 노력할 테니까, 너도 열심히 해라.’라고 늘 말씀해 주신 게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고 있어요.”

참으로 가슴에 와 박히는, 참으로 절절한, 참으로 뜨겁고 진솔한 부모 심장의 언어가 전해진 것 같았다. 사실 어느 부모가 안 그러겠는가. 그런 부모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간직하게 된 까닭일까? 종국 씨는 특수학교에 보내려던 부모의 의견을 완강히 거절했단다. 취학통지서가 나왔지만 일부러 2년을 늦추면서까지 아들을 태권도장에 보내는 등, 몸 상태가 더 좋아지기를 기대했던 부모님의 결정이 특수학교라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어린 나이에 그런 고집을 부렸다는 게, 지금의 심정으로는 일정 부분 믿기지 않는다는 그의 부연설명이 뒤따랐다.

“제가 그걸 정말 싫어했대요. 저도 동네 애들과 같이 학교에 다니면서 뛰어놀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일반학교로 가게 됐는데, 자율경쟁 속으로 제가 스스로 찾아들어간 거잖아요. 저학년 때는 놀림도 많이 받고 그랬지만, 의기소침 안 하고 싸움도 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친구들과 친해졌어요. 학년이 올라가면서 학급 반장도 하게 됐거든요.”

   
 

스스로 선택한 제2의 인생

‘신(神)이라는 존재가 정말 있다는 걸까?’ - 싶은 인생의 순간순간들이 누구에게나 매번 닥쳐온다. ‘절대자’가 진짜로 존재한다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황당하게 벌어지고, 그 상처의 하소연을 내질러도 대답 없는 상황과 사연들이 너무 많지 않은가. 힘겹지만 열심히 적응해 나가려 노력하던 초등학생 이종국 학생에게 닥친 건 어머니의 심장마비 운명이었단다. 너무 많은 고생을 하시다가 심장병을 얻으셔서 어떻게든 수술 날짜를 잡아놓았는데…, 제대로 된 치료도 못 받으시고 갑자기 아주 멀리 떠나셨다는 것이다.

“저는 언제나 이렇게 얘기를 해요. ‘저에게 있어서 장애라는 건 정말 별다른 큰 어려움이나 아픔이나 슬픔이라 생각해 보진 않았다’고요. 그런데 제 인생의 가장 큰 슬픔은 저의 부모님을 너무 일찍 잃게 됐다는 거예요.”

부모님이라고? 그럼 어머니 다음에 아버지까지…? 그렇단다. 어머니께서 멀리 떠나신 6개월이 지난 시점에, 운전을 하시던 아버지께서 어느 공사장 콘크리트 벽에 추돌을 해 어머니 뒤를 따라가셨다는 것이다. 너무 어린 시절이라 정확한 사고경위 같은 건 기억에 남겨져 있지 않다고 한다.

“그때 거의… 제가 거의 모든 희망을 잃어버렸어요. 정신도 없었지만, 인생의 암흑에 빠진 그런 기분이었죠. 그렇게 부모님을 잃게 됐다는 게, 저한테는 가장 큰 어려움과 힘든 일이었거든요.”

그 이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같이 살던 삼촌들도 독립해서 단 세 식구가 도란도란 살아가고 있었는데, 6개월 시차를 두고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종국 씨 곁을 영영 떠나갔다는 건 어떻게 풀어내야 할까. 친척들이 그를 감당할 수 없다고 해서, 그는 결국 경기도 포천에 있던 한 장애인 생활시설로 들어가게 됐단다. 본인의 선택과 의견이 들어간 걸까? 그렇단다. 스스로 결정했단다. 그게 어느 시점의 일인가? 열세 살 때라고 한다.

아버지 바로 밑의 동생인 삼촌 내외께서 먼저 가신 형님에 대한 도리라며, 나름 괜찮은 시설을 찾기 위해 많은 곳을 알아보셨던 모양이다. 하지만 전제조건을 종국 씨가 달았다고 한다. 특수학교는 싫다고, 일반학교에 다닐 거라고. 그 조건을 충족시킬 시설을 찾기가 무척 어려웠는데, 다니던 교회의 한 선생님이 알고 계시던 포천의 한 시설을 소개 받게 됐단다. 찾아가 보니 정말 너무나 심하게, 정말 초라하고 열악한 그런 시설이었던가 보다. 당연히 고개 돌리며 돌아서야 했을 텐데, 그 곳에 들어가겠다고 결심한 것은 바로 종국 씨 자신이었단다.

“제가 거기를 택한 이유는, 거기에서 제 인생의 가장 큰 은인이 된 제2의 부모님을 만났기 때문이에요. 그 시설의 원장님이신 목사님께서 첫인상이 너무나 좋으셨어요. 그리고 시설에 들어가도 일반학교를 다닐 거라는 제 의견에 많이 놀라셨대요. 이렇게 아픈 몸인데도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면서, 당신이 책임지고 맡아 키우면서 일반학교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셨대요. 그래서 그 곳 생활이 시작된 거죠. 일반학교만 다닐 수 있다면, 이 열악한 환경은 감수할 수 있겠다 싶었거든요.”

믿음으로 기댈 수 있었던 기둥

   
 
인생에서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행운과 행복인가. 종국 씨는 정말 천사와 같은 목사님을 만나게 됐고, 지금까지 그 뜨거운 인연이 이어질 만큼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했다. 시설에서 일반학교를 다니는 건 혼자뿐이었는데, 목사님은 시골 외각의 시설에서 시내 중심의 학교까지 손수 차를 몰며 통학을 시켜주셨단다. 그리고 그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고 한다.

“마침 제가 기초수급대상자가 됐는데, 제게 용돈도 주시면서 모든 지원을 다해 주셨던 목사님께서 대학 진학을 앞둔 저한테 통장 하나를 건네주시는 거예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고3 때까지의 수급비 전체를 정기예금으로 모아, 1천5백만 원이라는 목돈을 만들어주신 거예요. ‘내가 그것을 모은 것은 네가 대학교에 꼭 가고 싶어 했으니까, 대학 갈 때 등록금이 될 수 있게 해주려고 그렇게 모아왔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요.”

이 대목을 들으면서 아주 작은 탄성을 내질러야만 했다. ‘정말 천사 같은 사람이 있구나!’ 하면서 말이다. ‘시설’이라는 용어에는 항상 ‘횡령·착취·학대·인권유린’과 같은 단어들이 동의어처럼 따라붙지 않았던가. 실존하는 이런 천사들이 분명 있는데도, 먹구름 가득한 세상은 모든 걸 회색으로만 보게끔 만들었던 모양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그때마다 힘든 과정이 수없이 많았지만, 종국 씨에겐 어려울 때마다 기댈 수 있는 커다란 기둥으로 목사님이 존재하셨다고 한다.

“만약 그 어릴 때 목사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해보곤 했어요. 제가 저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모범생으로 살아온 건 아니었거든요. 저도 청소년기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었고, 대학생활과 사회를 접하면서도 이 사회의 한계를 많이 느꼈으니까요. 종교적 신념으로 사사로운 유혹에는 빠지지 않았지만…, 공무원 시험을 3년 연속으로 떨어질 때는 정말 큰 좌절을 겪어야 했어요. ‘정말 내게는 희망이 없는가 보다, 막 살아볼까?’ 그런 자포자기의 순간들도 여러 번 있었죠. 그때마다 목사님이 저를 잡아주셨어요. 청소년 때도 그렇고 대학교 이후에도 그런 목사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도 저는 지금 제 자리에 있진 않았을 것 같아요.”

야간자율학습을 하면 같은 반 40명 중 30명이 도망가던 시절, 그는 수능시험 바로 전날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꾸준히 야간자율학습을 했던 극소수의 멤버 중 하나였단다. 항상 미래를 생각하면서 남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만 자신의 역할을 찾아 할 수 있겠다 싶어, 그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강의가 끝나면 곧장 도서관으로 향하는 4년을 보냈다고 한다. 그 결과는? 8학기 중 절반 넘게 ‘과톱(학과 내 1등)’을 이어갔단다.

또 한 명의 천사

“우애곡절을 겪으며 공부를 해서 공무원 시험을 보는데요. 운전면허나 수능이나 토익, 이런 시험들은 모두 다 마킹, 그러니까 답안지 작성의 도움을 받았어요. 그런데 공무원 시험은 그런 기본적 편의제공을 안 하는 거예요. 엄청 황당했죠. 그래서 제가 그것의 근거를 만들고 자료를 준비해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했어요. 편의제공을 해주라는 권고가 나올 때까지 3년이 걸렸죠. 그런데 그 권고안을 지자체마다 지키는 곳이 있고 안 지키는 곳이 있는 거예요. 이건 명백한 차별이었기에, 인권위에 다시 진정을 넣었죠.”

공무원이 되겠다는 강렬한 꿈이 있었기 때문에 정말 독하게 공부했다는 종국 씨한테, 세상은 그리 쉽게 문을 열어주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모든 과목의 인터넷 강의 전체를 완전히 외울 만큼, 심지어 강사가 강의 중간에 했던 농담까지 다 외웠을 만큼 열심히 공부했지만 결과는 좌절의 연속뿐이었단다. 너무 상심이 커서 생전 처음 술을 입에 댔는데, 소주 1병을 마신 그날 이후로 그는 집 안의 불을 다 끄고 한 달 동안 밖에 나가지 않은 채 웅크려 있었다고 했다. 이 절망과 상처는 누가 어떻게 어루만져 주었을까? 이번에도 목사님이셨다. 그의 잠긴 문을 두드린 게 아니라, 이번에는 ‘문을 따고’ 들어오셨단다.

“세상을 등지고 돌아앉은 제가 말씀하셨어요. ‘내가 네 마음은 알겠는데, 그런 너의 생각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우리의 핵심 아니냐. 지금 내가 너에게 바라는 건 공무원이 되건 일반 사회복지사가 되든 어떤 직업을 하건 간에, 그걸 택해서 그걸 통해 어려운 사람들한테 도움을 주라는 거다. 그게 핵심이다. 그 일을 할 수가 있다면, 공무원이 되건 공무원이 아니든 똑같지 않은가. 그러니까 생각을 바꿔 보자.’ 그렇게 마지막까지 저의 손을 잡아주신 거죠.”

다시 일어서서 세상을 향해 일어선 종국 씨는 공무원 시험 이외에도, 일반 공사(公社) 같은 데도 많은 이력서를 넣어봤단다. 허나 장애인을 뽑는다고 했던 곳에서도 대답이 없었고, 심지어 시청의 1년 계약직 같은 자리도 그에겐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열정이 어느 정도였는지가 전해진 걸까? 그의 면접 심사를 봤던 어느 분이 당시 시행 중이던 ‘희망근로’를 추천하면서, 포천종합사회복지관의 인턴 자리를 만들어주셨다고 한다. 그는 정말 열심히 일했단다. 3개월 뒤에 계약직으로 변경되고, 또 3개월 뒤에 정규직으로 바뀌는 결과를 얻어냈다면, 어느 정도 열심히 업무에 임했는지가 증명될 것 같다.

어둠이 길었다면 새벽 이후의 햇살은 보다 더 강렬해야 할 일 아닌가. 비록 오래 전부터 ‘독하게’ 꿈을 꾸었던 공무원의 삶은 아니었지만, 신(神)은 한쪽 문을 닫은 뒤엔 한쪽 문을 열어주신다고 했다. 이 즈음 ‘인간 이종국’에게 등장한 건 누구였을까? 종국 씨는 앉은 자리에서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스스로 환하게 바꾼 얼굴 표정으로 싱글벙글 한마디를 이었다.

“또 한 명의 천사가 제게 나타났죠. 하하하!”

 

   
 

함께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

그때까지 평생 연애 한 번 못해 봤다는 남자, 어린 시절부터 청소년기와 대학생 시절을 지내는 동안 ‘이성교제’라는 용어 자체는 완전히 남 얘기였다는 사람, 그에게 나타난 ‘천사’는 누구이고 어떻게 만나게 된 걸까? 그가 복지관에서 인턴으로 지내던 즈음, 잘 알고 지내던 어느 시설의 원장님이 계셨다고 한다. 그래서 친하게 놀러가기도 하고 봉사활동도 하곤 했는데, 그 곳에서 역시 희망근로로 근무하던 누군가가 눈에 확 들어왔던 모양이다.

이종국 씨는 들뜬 분위기 속에, 자신의 연애담을 에피소드 중심으로 길고 즐겁게 얘기해줬다. 글로 적으면 참 재미있는 내용이 되겠는데, 그런 흥미를 위해 세세하게 옮겨 적기에는 한 가정의 사적인 부분까지 너무 밝혀질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덩달아 즐겁게 적는다는 게, 단적으로 말한다면 ‘프라이버시 침해’가 될 소지가 많겠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기에 여기서는 ‘첫 만남에서 결혼까지 딱 6개월 걸렸다.’는 이 한마디 요약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제가 연애 한 번 못하며 살았다고 했잖아요. 제 아내가 모든 게 처음이에요. 참 신기해요. 나이가 저보다 조금 많은 연상이거든요. 키도 저보다 훨씬 커요. 저는 대학 시절부터 이런 기도를 했었어요. 그 어떤 조건이 아니라, ‘저’라는 존재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여자를 만나게 해달라고요. 진행되는 일 하나 없이 똑같은 기도만 반복하며 지내왔었는데, 제 아내가 정말 딱 그런 사람인 거예요. 정말 신기해요. 저의 그 어떤 게 아니라, 저 자체를 좋아해요. 오히려 제가 감사하면서 생활하고 살아야 하는데, 제 아내는 매일 저를 만나는 게 자기 인생의 최후의 복이래요.”

결혼한 이후에도 아내는 하루 종일 장애인들을 보살펴야 하는 시설 일을 해오고 있단다. 피곤하면 아내가 더 피곤할 텐데, 그런데도 집에서 종국 씨가 식사 준비나 청소 같은 걸 하려고 하면 절대 못하게 한다고 한다. 하루 종일 밖에서 고생하고 왔는데 집안의 일을 왜 하느냐고, 한마디로 집에서는 남편이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게’ 알아서 다 해준다는 의미가 된다. 이 대목을 지면(誌面)에 적으면 전국에서 부부싸움 많이 나겠다며 농담을 던지니까, 자신은 가부장적인 게 제일 싫은 사람인데도 그렇게 보일까 봐 걱정이란다.

아내가 ‘천사’이기 때문일까? 그 오랜 기다림과 도전은 종국 씨의 삶에 새로운 길을 활짝 여는 결실을 맺게 만들었다. 이 글 서문에서 이종국 씨의 직업을 ‘국립춘천병원 행정주무관’이라고 밝혀놓은 바 있다. 그렇다면 현재 공무원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짧게 요약한다면 이렇다. 계속되는 공무원 도전 실패 와중에 ‘특채제도’가 생긴다는 소식을 듣게 됐단다. 그래서 기회가 다가오는가 싶어 더 열심히 준비하며 빨리 시행되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2009년에 발표되기를 ‘시험을 안 보는 대신 경력 3년이 있어야 된다’는 내용이 중심이었다고 한다.

‘무시험에 경력 3년’이라는 조건은 사실 엄청난 매력을 느낄 만한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경쟁률은 수백 대 일이 보통이었고, 종국 씨가 작년 서울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면접을 볼 때도 1백 대 일의 경쟁을 치러야 했다고 한다. 결과는? 합격! - 그래서 현재의 자리에서 공무원으로 살아가기 시작한 게 작년 12월 초라고 하니까, 이 인터뷰 직전에 고참(?)인 과장님께 먼저 인사를 올려야 할 새내기인 것은 분명한 일 같다.

그에게 남겨진 건 이제 무엇일까? 원하던 삶을 뒤늦게나마 제대로 얻게 됐으니, 그의 천사(아내)와 그의 든든한 기둥(목사님)을 비롯한 모든 이들에게 행복을 전하는 일이 가장 큰 목표가 아닐까 싶다. 그의 삶을 여기까지 이끈 확실한 원동력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그 느낌’, 제3자 입장에서 느꼈던 ‘그 느낌’을 오른쪽 면에 세 가지 발언 내용으로 옮겨 적고자 한다. 첫 번째 발언은 그의 삶을 이끌게 만든, 두 번째 발언은 그 스스로 자신의 삶을 증명한, 세 번째 발언은 앞으로의 삶과 목표를 또렷이 밝힌 내용이 아닐까 싶다.

각각 ‘1·2·3’의 숫자로 표시한다. ‘1’은 어린 시절 시설에서 생활할 때 목사님께서 늘 하셨던 말씀이고, ‘2’는 그가 작년 말 특채시험 최종 면접 때 면접관 앞에서 한 다짐의 발언이다. ‘3’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후배들과 모든 독자 여러분께 남기는 이종국 씨의 진솔한 조언이 되겠다.

1.  “나는 너한테 해줄 수 있는, 네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해주겠다. 내가 너한테 바라는 것은 내가 너한테 해주는 것처럼, 너도 네가 원하는 꿈을 이뤘을 때 그 도움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그 영향을 끼쳐서, 그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되라는 거다. 나는 너 또한 장애인들의 대변자가 되면 좋겠다.”

2.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저는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제가 이렇게 열심히 살아왔는데, 저는 저의 어머님께 너무나도 큰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가 공무원이 돼서, 어머님 산소에 공무원 임용장을 갖다드리는 게 크나큰 효도인 것 같습니다. 저한테 그 효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더 많은 장애인들과 어려운 사람들한테 노력하는 공무원이 되겠습니다.”

3.  “제가 장애를 가진 후배들이나 친구들을 만나면 하는 말인데요. 저의 장점인지 단점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어려움이 있으면 혼자 고민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 고민과 그 문제에 대해서 본인이 최선을 다해서 치열하게 노력해야 하는 부분은 분명히 있지만, 그 고민을 혼자 하지 말아야 돼요. 저는 그런 고민들을 누군가에게, 저의 멘토에게, 저의 이웃에게 얘기해서 같이 고민했거든요. 고민하면서도 스스로 노력을 계속했고, 그러면 제 고민을 들었던 분들이 그 어떤 기회를 제게 준다는 거예요. 저 혼자 노력하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게 누군가와 서로 맞아야만 일이 풀리는 것 같았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우선 본인의 과제에 대해서 열심히 노력해야 되는 부분이 있고, 그걸 이웃과 함께 고민하고 공유하며 함께 길을 찾아가는 게 훨씬 더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작성자대담 이승현 기자 | 정리·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walktour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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